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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조오현, 문정희, 임보, 정일근,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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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3,501회 작성일 10-09-2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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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운명하실 때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날 부둥켜안고 "시님들 말슴 잘 듣거라이. 배고프면 송기 벗겨 머그면 배부르다이."하고 갔니더. 시체를 가마니 뙈기에 돌돌 말아 다비장의 장작더미 속에 넣고 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지핀 주지시님이 "업아, 네 집에 불났다! 업아, 네 집에 불났다! 업아, 네 집에 불났다! 어서 나오너라."하고 고래고래 소리쳤을 때 불덩어리가 된 장작더미가 몇 번이나 꿈틀거렸니더. 암 꿈틀거리고 말고, 울아부지 울할아버지 닮아 힘이 천하장사였거든요. 밥 열 그릇으로도 배가 차지 않앗지만 행여 시님들이 밥 많이 먹는다고 쫓아낼까 싶어 언제나 물로 배를 채웠니더.

    조오현 (1932 -  ) 「절간 이야기 1」 부분

스님들은 좋겠다. 늘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면서 얻어지는 것들을 이야기하듯이 술술 적어놓으면 시가 될 테니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조오현 시인의 시에는 원숙한 불자의 세계관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물론 자기 성찰과 부정, 그리고 득도를 위한 각고의 수행 기간이 그런 경지로 이끌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위의 「절간 이야기」연작시의 일부만 보아도 금방 느껴지듯이 그의 시들은 풍부한 이야기와 깊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107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문정희 (1947 -   ) 「돌아가는 길」 전문

앞으로만 가느라 돌아가는 길엔 신경을 못 썼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누구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돌부처는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한 덩이 돌이었을 때 돌은 부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돌로 돌아가려 한다. 완성이란 말을 저 멀리 밀쳐두었을 때 비로소 한송이 돌로 다시 완성되고 있다.

*** 108

나로 하여금 이 망망한 세상의 짐을 지게 하고
내 생애의 일거수일투족에 평생 매달려 감시타가
이승을 떠나서도 내 멱살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나를 망친 한 여자, 아,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여
    
* 작취미성의 몇 시인들이 이른 아침 우이동 골짝의 한 해장국집에서 
해장을 한다. 따끈한 술국으로 장을 달랜 다음 다시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누군가 중얼거린다.‘한 잔 술이 하루를 망치고, 한 여인이 일생을 망친
다’고…. 그 여인이 누구일까 각자 생각다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떠나간 
어머니들에 목이 매인다.
 
    임보 (1940 -   ) 「나를 망친 여자」 전문

작가 스스로 붙힌 해설(*표 이하 부분)이 재미있어 그대로 옮겨 보았다.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자식들의 일생을 놓아주지 않고 망치게 만들어 이른 아침부터 눈시울을 붉히게 할까. 나이든 시인들께서도 어리광 섞인 술주정을 부리고 싶을 때는 한 여자, 어머니가 생각나나 보다.

*** 109

꽃은 허공 가지에서 지고
슬픔은 땅속 뿌리로 맺혔느니
여름날 자주색 감자를 캐면서
뿌리에 맺힌 자주색 슬픔을 본다
로에게 답장을 쓸 것인가에 대해
여름 내내 생각했다, 그 사이
자주색 감자꽃은 피었다 지고
자주색 감자는 굵어졌다
감자를 캐느라 종일 웅크린
늑간이 아프다, 웅크린 채 누군가를
기다렸던 나도 한 알의 아픈 감자였다
사람의 사랑도 자주색 감자 같아
누가 나의 뿌리를 쑥 뽑아 올리면
크고 작은 슬픔 자주색 감자알로
송알송알 맺혀 있을 것 같으니 

       정일근 (1958 -   ) 「자주색 감자를 캐면서」 전문

이 시를 읽다보니 늑간이 아프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마저 내 몸의 일부인 양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림이 클수록, 웅크리고 앉아있는 시간이 길수록 감자는 알이 굵어지고 송알송알 맺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 슬픔의 열매를 제 살 잘라먹듯 캐먹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110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닷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김남조 (1927 -   ) 「6월의 시」 전문

내 고향은 농촌 마을이어서 보리가 익으면 초등학생들도 일손이 딸린 농가에 보리베기 봉사를 나가곤 했다. 그러면 꼭 한, 두 명쯤 뙤약볕 아래 창백해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그런 아이들을 부축해서 일찍 귀가시키는 일을 의사 아들이라고 나에게 맡기곤 하셨다. 환자 친구를 데리고 가는 길에 길섶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먼 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 어린 나이에도 서럽게 들리던 그 뻐꾸기 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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