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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방정환, 최석봉, 도종환, 문무학, 오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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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610회 작성일 10-09-26 21:09

본문

*** 91

어저께 띄워논 나뭇잎 배는
궂은 비가 오는데 어디로 갔나
물가의 비젖은 풀숲 새에는
종이쪽 흰돛이 있을 뿐일세

어저께 벌레손님 태워 건네던
새파란 나뭇잎 작은 나룻배
돛대와 뱃몸은 어디로 가고
연못에는 빗방울 소리 뿐일세

         방정환 (1899 - 1931) 「나뭇잎배」전문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한국 최초의 어린
이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는 등 어린이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한 때 어
린이였던 모든 이의 마음에 영원한 친구이자 스승으로 남은 소파 선생을 
그리며 오래 전 그가 남긴 글을 다시 읽어본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어린 사람을 늘 갓가이 하시고 자조 리야기하여 주십시오
   -어린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어린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리발이나 목욕가튼 것을 때맛처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낫분 구경을 식히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조 보내주십시오
   -장가와 시집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 92

어머니, 
열 번도 더 들려주시던 
그 이무기를 
Bad Water Borax에서 
낚았어요 

눈이 일곱 개 
수염이 석자에 발이 세 개 
초록빛 이무기였어요 

"엄마는 또 거짓말한다" 
하면서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졸라대던 
그 이무기가 삼 억 살이래요 

삼 억 살이면 
한 살 더 살아라고 놓아줬더니 
덜 여문 초록빛 여의주 하나를 주고 갔어요 

만나 뵙는 날 
드릴게요 
어머니. 

최석봉 ( 1937 - ) 「이무기 이야기」전문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듣던 이야기보다 더 재미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이야기가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우연히 미국의 한 낚시터에서 잡았다 놓아준 이무기 이야기를 노 시인은 오래 전에 세상 떠난 어머니에게 신나게 들려주고 싶다. 물론, 어머니도 아들도 거짓말이다. 그러나 서로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누가 탓하랴. 때로는 거짓말이 참말보다 더 참말인 것을. 어버이날, 눈물을 흘리며 거짓말을읽는다. 

*** 93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 1954 -  ) 「담쟁이」전문

쉬임 없이 벽을 만나고 그 벽을 넘어서는 일이 세상의 살아가는 방식
이다. 교과서에서는 '도전과 극복'이라고 했던가. 
저것은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는 희망의 허리띠를 졸라맬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며 이렇
게 말할 것 같다. 이제야 사는 맛이 나는구만. 
담쟁이는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94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네 가는 울음소리는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울고 말거다 비비추 비비추

그러나 너는 울 수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라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번 떨고 싶은 게다 비비추

그래 네가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떨면서
눈물 나게 연한 보랏빛 그 종을 흔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다가선다

   문무학 (1951 -  ) 「비비추에 관한 연상」전문 

이름 모를 들꽃이라고 싸잡아  부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
을 모르고 지나칠 뻔하지 않았는가. 비비추. 새 이름 같기도 하고 그 새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꽃이 연보라빛 종을 비비추 비비추 흔들
면 잊었던 얼굴 하나 떠오른다. 그 얼굴은 작은 바람에도 수줍게 웃던 첫
사랑의 소녀가 아닐까.
대구 팔공산 자락에 자리잡은 문 시인의 집 뜰 한구석에는 야생초를 
기르는 온실이 있다. 그리고 마루에는 이 시가 표구돼 걸려 있다. 문 시인 
부부가 야생초를 가꾸고 시를 쓰면서 비비추 비비추 살고 있는 모습을 보
면 '비비추에 관한 연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 95

저 먼저 돌아갑니다.
고향은 천국이지만
지옥에 한번 
둘렀다 갈랍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가능한 한 선한 일은 
절약해서 하고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죄도 짓고
지구구경도 구석구석  
꽤 잘 했습니다!

       오영근 (1934 -  ) 「유서 연습」부분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에 나오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세
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란 구절을 생각나게 
만드는 시다. 선한 일을 절약해서 했다는 대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무거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마치 잠깐 산책이나 나왔다 가는 것처럼 가볍게 그려
졌다. 그러나 이 시는 바쁜 세상의 시계를 멈추게 만들어 독자에게 평안
을 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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