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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야기: 장영수, 정호승, 정문석, 김수영, 이원수, 오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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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744회 작성일 10-09-2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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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줏으려고
아이들은 밀려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르던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을 메이비.

       장영수 (1947 - )「메이비」전문

  이 시는 전쟁 혼혈아 친구에 대한 기억들을 사실적으로 기술한다. 짧은 에피소드들이 연결된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 친구는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는 바람에 메이비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얻게된 메이비라는 이름처럼 툭 던져진 자신의 앞날이 결코 평탄치 않으리라는 불안감을 갖기에는 메이비도 화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화자는 모두가 고아였다는 인식 속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을 메이비에 대해 동질감과 연민을 갖게 된다. 화자는 메이비를 더 이상 메이비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해 결국 메이비라고 그를 지칭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들의 인생이 곧잘 그렇듯, 슬픈 아이러니다. 


*** 16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1950 - )「이별노래」전문

떠나지 말아달라는 게 아니다. 단지 조금만 더 늦게 떠나달라고 한다. 그러면 참으로 멋있는 이별장면이 연출될 참이다. 떠나는 그대의 배경으로 노을이 깔리고 별이 부르는 노래가 주제가로 연주되는 기막힌 영화의 한 장면이 되겠다. 그래서 조금만 더 그대가 늦게 떠나준다면 떠난 뒤에도 사랑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려주는 이별을 보았는가. 야속한 이별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치곤 해서 늘 사랑하기에 늦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늦게 떠나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 17

너희들만은 당당한 군인이 되거라 
최루탄에 맞선 청년일지가 
적탄에 맞선 아빠의 진중일기보다 빛나는 나라에서 
얻은 것은 가난뿐이지만 
얻은 것은 군복을 입고 전철도 못타는 
알 수 없는 창피함뿐이지만 
슬픔도 힘이 되니까 

쑥을 캐다 아내가 손가락을 베었다 
청춘을 바친 남편의 조국에 아내마저 
피를 바친다 푸른 쑥이 붉게 물든다 

      정문석 (1958 - )「쑥을 캐며(2)」부분

   정문석 시인은 현재 영관급 국군 장교이다. 군사독재에 대한 시를 발표해 징계를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시인으로 활동하기에 쉽지 않은 직업을 그는 갖고 있다.
   그는 청춘을 조국에 바치고 그의 아내는 "지긋지긋한 이사를 열두 번이나 견딘 채 / 박봉을 쪼개어 삶을 아프게 나누어 산 채 / 바퀴벌레도 살다가 도망친다는 상암동 단칸방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누구보다 당당해야 할 그가 군복을 입고 전철도 못타는 창피함을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있었다니 가슴 아프다.
   앞으로는 공공장소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정 시인과 그의 아내가 떠오를 것 같다. 이제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고 그 들을 바라보아야겠다. 요즘 유행하는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편견을 버리리라.

*** 18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1921 - 1968)「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분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김수영 유고시집의 초판을 구입하러 친구와 함께 종로 2가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던 민음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기 어린 짓거리였지만, 그 당시 문학을 꿈꾸던 우리들에게 김수영은 교과서이자 참고서로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한국 참여시의 전형으로 꼽히는 김 시인의 시가 당시의 어린 우리들로부터 군사독재 정권들이 사라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 시에서처럼 그의 통렬한 비판의 화살은 자기 자신을 예외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늘 깨어있는 시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19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지내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이원수 (1911 - 1981)「겨울 나무」전문

  이민초기에는 '고향의 봄'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고이곤 했다. 반면에 같은 이원수 님의 동시인 '겨울 나무'는 떠올릴 때마다 힘이 생기곤 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응달에, 불평 없이 한자리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겨울 나무는 언제나 속이 깊고 강인해 보인다. 
  혹독한 겨울바람의 매서움도 넓은 세상 얘기로 듣고 있는 나무도 나무지만, 꽃피는 계절을 기다리면서 겨울 나무가 불고 있는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평생 어린이의 관점에서세상을 보고 살았던 분의 맑은 귀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 20

빙판길 미끄러워
연탄재 생각난다

함부로
차본 적 있다
철없었던 옛 적에

    오정방 (1941 - )「연탄재」전문

  이 시는 양장시조다. 이은상 시인이 개발한 이 형식은 전통적인 시조의 3장 중에서 초장과 중장을 하나로 묶고 종장은 그대로 두어 두 개의 장으로 압축한 것이다. 생략과 여백은 시조의 장점이자 모든 시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다. 언어가 남발되고 있는 이 시대에, 말을 아끼는 오 시인의 시들이 돋보인다.
  안도현 시인은 짧은 시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전문)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오정방 시인의 위 시는 그 대답처럼 보인다. 철이 든 사람은 연탄재를 함부로 차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남을 위해 온 몸을 뜨겁게 태운다는 의미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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