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구겨진 시간들 - 김 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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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이지 댓글 0건 조회 4,044회 작성일 11-08-1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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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가을은 유난히 변덕스러워 여인들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매섭게 춥던 날씨가 한낮이 되면 언제 그랬었나 싶게 덥고 저녁이면 다시 추워져서 사람들은 엄살쟁이들 같이 아예 겨울코드를 입고 다녔다.
오늘 아침은 봄이 올 듯 따스한 햇살이 약국 창문으로 고즈넉히 들어오며 여인의 속살같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아주어 나도 모르게 스스르 눈을 감았다. 이런 날은 감옥 같은 약방에서 나가 거리로 활보하고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커피 한잔 마실 틈도 없이 이그러진 두상들이 아침부터 밀려오고 있기에 그만 포기하고 멀 건히 창 밖을 내다 봤다. 그러자 머리가 허연, 중년은 훨씬 넘었을 웬 동양 남자가 아까부터 힐끔힐끔 약방 안을 들여다 보다가 그냥 지나 간다 싶더니 다시 발길을 돌려 멀 건히 바같을 내다보는 나를 자세히 보다가 결심을 한 듯 약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 이게 누구요 허약사가 아니오?"
나는 커피를 마시다말고 그 남자를 멀 건히 쳐다봤다.
" 저 모르겠어요? 나 요, 그린 아일랜드에서 살았던 오박사요 ."
나는 순간 영혼의 필림이 빠르게 돌아가며 기억을 되살렸다.
" 아니, 그럼 오박사, 아이구 죄송해요 오 선생님 아니세요?"
" 세월이 물같이 흘러간다지만 이게 얼마만인가요우리가 헤어진지 한 십년됐지요."
"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아시고... 그동안 궁금했는데 통 알 길이 있어야지요."
" 그러지않아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약사만은 뵙고싶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
오박사는 십년 전 보다 많이 얼굴이 상해 세월이 그렇다치지만 그동안 그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듯 알아볼수가 없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오박사라는 말에 기억이 되살아나며 뭉득한 코에 넓적한 얼굴에 두툼한 이목구비가 그대로 노출 되며 지나간 과거가 환영처럼 지나쳤다. 어찌 그때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나는 등골이 오싹 한기를 느껴야 했다.
“ 허약사는 늙지도 않고 여전하네요 애들도 많이 컷겠군요.”
“ 그러는 오선생님의 자제들도 많이 컷겠지요? 내 정신 좀 봐 이젠 얼싸한 대학생에 결혼까지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 그야 그렇게 됐지요. 어차피 다 된 인생 이렁저렁 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오박사는 땅이 꺼질것같은 한숨을 쉬더니 내가 권하는대로 의자에 앉았다. 오박사라하면 누구나 공학박사나 의학박사로 착각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 자동차 정비사로 교포들의 자동차를 잘 고쳐주어 오박사라고 별명을 지어진 것이 아예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도 자신의 별명이 나쁘지 않은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린 십 년 전, 별로 좋지않은 사건들을 새삼 떠올기도 끔직스러워 말꼬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해도 우리 기억은 그때가 전부 였기에 어쩔수 없이 그 때로 돌아갔고 그 때의 실마리도 들락날락하는 손님들 때문에 더는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제안을 하니 오박사도 그러기를 원하는지 승낙을 했다. 오박사가 나가자 손님들도 뜸해지니 갑자기 그 때 오박사 사건이 한 거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1978년 2월 뉴욕은 십 년 만에 오는 대 폭설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백색의 나라가 된 듯 거리고 집이고 자동차 까지 어디로 간 듯 눈으로 덮였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맨한탄 약방에 가야하기 때문에 눈을 치우기로 작정하고 차고 문을 여니 문앞에 놓아든 내 파란 자동차가 보이지를 안았다. 그래도 사람 다니는 길은 터놓아야 하기에 무작정 부샆을 들고 차고 앞줄부터 눈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뒤에서아내가 소리쳤다.
“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이런 날에 약방을 간다니 누가 상장이라도 준데요.?”
아내가 화가 날만도 했다. 허구한날 하루도 빠지지않고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것도 미웠지만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됀다는 어떤 결벽증에 있는 자신을 미워 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낮 설은 이국땅에 누군가 만날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그나마 일거리가 있고 비록 약장사라고 해도 나를 필요로하는 병약자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수 있다는 보람으로 산다는 것을 아내는 너무도 몰랐다. 아무튼 결혼한 지 7년 아내도 나도 권태기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내가 뭐라고 하든 비록 눈을 치워도 시내를 갈 수 없드래도 내 할 일은 해여야 하기에 열심히 눈을 치우는데 누군가 넘어지고 쓸어지면서 소리를 치면서 오는데 알고 보니 오박사였다.
“ 허약사 우리 집 사람이 행방불명이에요.”
“ 뭐라구요 행방불명이라니요?”
“ 글쎄 어젯밤에 병원에 나간 사람이 아직도 집에 오지않았어요.”
“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눈사태에 혹시 발이 묶여서...?”
“ 아니에요, 어제 분명 병원에 연락 했더니 집으로 갔데요.”
“ 그렇지만 이 날씨에 혹시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잠시 친구 집에 간 것은 아닐까요.”
“ 우리 그 사람 자동차를 안타고 다녀요.” “ 예 그럼 걸어서 병원에 다녔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소리를 치다가 언젠가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 오박사 처 말이에요 아무리 지독한 노랭이래도 그럴 수가 있어요? 하루에 8시간 근무가 뭐가 부족해 더불 근무에 자동차도 없이 병원에 다니는 것도 문제지만 자동차 정비에 도가 튼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잘난 고물 자동차 하나 만들어 주지않은 오박사가 더 문제라구요 저러다가 밤길에 무슨 일 나면은 어쩔라구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는 아내는 왠지 그 집 일이라면 쌍지팡이를 집고 신경을 곤두 세웠다. 하긴 아내뿐 만 아니라 몇 안되는 교포들 간에도 화재의 인물이 된 것은 교포들 중에 제일 먼저 집을 샀고 미국 정비공장에서 몇 년간 정비공으로 일하다가 어엿한 자기 주유소에 정비공장을 차린다고 하니 선망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 된듯싶었다.
사실 아내가 오박사 부인에게 더욱 열등감을 가진 것은 같은 병원에서 일을 하지만 그녀는 지방대학 간호학과를 나와 운 좋게 선배 간호사 누군가 미국간호사 시험문제 답안지를 용케도 입수했는 소문과 함께 자격증을 땃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같이 일을 해도 당당히 RN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간호원들과 주급이나 혜택 등이 엄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차도 없이 병원을 다녔다니 아무리 지독한 구두쇠라도 내가 생각해도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고 비록 병원 가까이 산다해도 으슥한 길에 그것도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걷는 다는 것은 위험 천만이었다. 더욱이 오박사는 인류 정비사로 새차도 아닌 그깐 고물차 한 대 사서 고쳐쓰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그러나 오박사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억척을 떠는 여자들의 문제도 있었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처음 이민 온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웠던 과거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이깐 고생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낫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기 위해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사명감에 단 몇푼이라도 아껴야 했듯이 아내 때문에 이주한 남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업 간호원들같이 보장된 직업도 없거니와 막상 노동 일을 하려고 해도 언어문제에 어느 길을 가야 할 찌 망막했다. 그나마 때론 병원에서 잡일로 페인팅 청소 등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 일도 한계가 있어 아내가 벌어다 주는 주급으로 유지 할 수 밖에 없기에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했다. 아니 돈 벌기위해 체면이고 위신이고 다 버리고 이역만리 까지 왔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하는 오기로 눈에 불을 키고 산 것은 사실이다.그래서 아내들은 8시간 이외에 파타임 일을 했고 오박사처는 아예 두배로 일하기를 밥먹듯 한 것이다.
이민 온지 7 .8년 되니 언어도 웬만큼 소통되고 돈도 어느정도 모이자 사람들은 오박사같이 정비소를 낸다던가 세탁소,그로서리 잡화 가개를 차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팔마시 약사 자격증을 따기까지 주유소에서 파타임 일을 했고 아내는 병원에서 일을 하느라 첫애를 유산을 할 정도로 강행군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약사 자격증을 따고 맨하탄에 한국인이 하는 선물가개 약방에 약사로 일을 하면서부터 가정에 안정을 찾으며 아내 또한 지금에 훈이를 낳은 것이다.
“ 너무 염려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혹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잠시 친구네 들렀다가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니깐요.”
“ 아닙니다. 아내는 분명 행방불명입니다. 왜냐하면 병원 가까히 친구도 없을 뿐더라 병원에 전화를 하니 어제 밤 10시경 쯤에 병원에서 나갔다고 합니다. 다만 어제 밤에 누군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을려고 하니 그만 끊어져서 그게 의문입니다.”
“ 그것보세요, 전화를 하고싶어도 눈사태로 전화가 불통이 됐으니 왜 안그러겠어요 그러니깐 조금 만 기다려 보시면 알게 될거에요.”
“ 글쎄요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 그러나 저러나 어쩌자구 자동차 한 대 뽑아주지않고 그 지경까지 갔어요?”
나는 하도 답답해서 나도모르게 심한 말을 하고나니 그도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도 화가나는지
“ 그러니깐 저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무슨 놈의 여펜네가 고집이 센지 왠만한 말에 코방귀도 안꾸니 이 지경이 됐지요.”
오박사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니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쳤다. 하긴 내 아내도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속수무책이라 어떤 때는 돈 좀 번다고 콧대가 쎄져서 남편 알기를 개똥으로 여기나싶어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아내들은 이왕 돈 벌기로 나선 것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었지만 나중에 제 살 깍아먹을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어떻하면 좋을 것같습니까?”
“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허약사가 영어를 하니 좀 도와주십사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나는 오박사가 간절히 부탁하는 것에 어떤 이유도 부칠수도 거절도 못하고 무조건 오박사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내 이런 날씨에 왠일인가싶어 멀건히 처다만 봤다. 아내가 차를 대접하기의해 부엌으로 들어가자 나는 경찰서에 전화부터 걸기로 작정하고 전화부 책부터 찾아 집가까히 있는 경찰소를 찾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나는 간단히 그동안 상황을 설명앴다.
“ 세상에 이럴 수가 ... 내 이럴 줄 알았어요 어쩌자구 차 한대 뽑아주지않아 이경까지 갔어요?”
나는 그만 기겁으로 아내의 말을 막았다.
“ 훈이 엄마 말씀도 맞습니다. 낸들 압니까 워낙 고집이 세서... 하긴 제가 더 고집을 부려야 하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뉴욕은 유난히 범죄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 각정이되었다. 나는 수시로 가까운 경찰서에 전화를 하니 계속 통화중이다가 연결이 됐다. 담당 경찰관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내 수사실로 연결을 해주었다. 목소리가 굵직한 형사인지 싶은 사람이 1시간 후에 오박사네 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주소와 여러 가지 상황을 대충 알려주었다.
오박사가 집으로 떠나자 나는 맨하탄 선물 센타로 약방에 갈 수 없음을 알리고 치우다 만 눈을 대충 치우고 오박사네 집으로 갔다. 오박사네 집은 한 부 락 거리의 지척에 있어 다행이지 조금 만 멀었어도 눈 때문에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눈을 밟으면 무릎까지 들어가 걸을 수가 없었다.
3년 전 새로 샀다는 오박사네 집은 그 당시 몇몇 친구와 이웃에 사는 한인들을 불러 잔치를 할 때나 별반 변한 것이 없이 이민 초기에 중고로 샀다는앉으면 푹들어가는 소파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세월은 어쩔 수없다고 겨우 초등학교 다니던 딸 아들이 부쩍 커서 누군지 알아볼수 없게 성장했다.
빌리라는 형사는 큰길을 대충 치워났기에 용케도 칲프를 타고 왔지만 오박사네 집까지는 어림도 없는지 걸어서 오는 바람에 바지가 억망으로 눈으로 범벅이 돼서 왔다. 그는 형사치고는 동네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생겨 우선은 거부심이 안생겨 다행이었다. 그가 내미는 명함을 들여다보니 그린 아일랜드 지역의 담당 형사였다.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서류부터 꺼내 무언가 적기 시작부터 했다.
성명: 이금순
나이: 43세
성별: 여자
학력: 간호전문대학 졸업
국적 : 한국, 수원 출생
이민 : 1970년 2월6일
직업 : 북스병원 간호사
현주소: 43 리취몬드 에브뉴 그린아일랜드 뉴욕 11693
관계: 남편 -오상철 딸 - 오성혜 아들 -오성현
성명: 오상철
나이: 50세
성별: 남자
학력: 고등공업학교
국적: 한국 함경도
이민: 1971년 5월3일
직업: 자동차 정비공
빌리는 기재된 사항을 자세히 보더니 나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오박사를 잠간 자리를 피해줄 것을 부탁했다.
“ 미스터 오는 언제부터 알게됐습니까?”
“ 제가 아내와 함께 취업이민으로 와서 뉴져지에 살다가 4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아내가 북스병원에 보조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
“ 당신이 보기에 그들 부부가 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문제가 있어보입니까.”
“ 제가 보기에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나 보통 한국인 부부들같이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봅니다.”
“ 요 근래에 혹시 그들에게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요 예를 들어서 부부 싸움이 잦다든지 아내에게 폭행을 한다든지 뭐 그런거죠?”
나는 순간 형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느꼈고, 빌리는 흔히 미국 가정에서 생기는 부부 싸움이 나중에는 살인으로 치닿는 경우를 말한다는 것을 알고 왠지 심장이 두배로 뛰면서 어떤 굴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한국인들은 도덕적이고 너희들 같이 야만적인 행위는 안 한다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튀어나갈려고 해서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차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빌리는 역시 오랜 세월 노련한 수사의 경험에 의한 질문이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오박사의 신상조사를 컴프터로 조회해 본 결과 오박사는 얼마전에 생명보험을 10만불씩이나 들은 것에 의문을 품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우리같이 이민자들은 보험에 익숙치도 않았고 더욱이 생명보험까지는 웬만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면 관심도 없지만 오히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몇 만불도 아닌 십만불이라니 그 당시로는 십 만불이 엄청난 것으로 왠만한 집한채 값이었다. 그런데 그는 서슴없이 그런 보험을 들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도 없지만 의심이 날정도였다. 아무튼 그들 부부는 아내 말대로 돈에 관한 것은 굉장한 집착을 보였던 것은 사실인 것같았다.
사실 그렇다해도 우리네 생각처럼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만 어디까지 우리네 생각이고 미국에선 세금은 쥐꼬리같이 내면서 어디서 돈이 나와 집을 사고 사업체 차리고 게다가 엄청난 보험금을 문다니 누가 보아도 납득이 안갔다.
“ 전 미스터 오와 가깝지도 않지만 사생활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들은 근면하고 저축심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일단 오박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지만 얼마 전 이곳에 산다는 한 여인이 보험회사에 취직했다고 보험을 들으라고 아내에게 말해서 왠놈의 보험까지나 하며 일축해 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오박사 부부가 타인에 의해 충동적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까지야 알 수 없기에 일단 함구하기로 했고, 설사 그것이 입증되어도 오박사는 탈세 법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쥐꼬리만한 정비사 주급에 부인이 번다해도 집 모게지에 각종 세금 자동차 보험금 등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증가되면 우선은 탈세가 아니면 법에 어긋난 수입처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므로 빼도 박지도 못하게 된다. 그만큼 미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면서도 안으로는 보이지않은 공산국가로 빈부차이를 있는자에서 각종세금으로 알뜰히 챙겨서 없자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하긴 오박사가 그럴만하 여유가 있는 것은 알고보면 가까이 사는 교포들의 자동차를 고쳐주므로 쏠쏠하게 과외 수입을 챙길 수 있다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런 것 까지야 어찌 보고를 하겠는가 미국인들 또한 그렇다해도 그건 어디까지 개인 사생활이고 요령 것 사는 것이 이민생활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빌리는 대충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갔고 오박사는 나에게 와서 무슨 말을 했는가 물어봤다.
“ 그거야 이것저것 오선생님 신상에 관한을 물었지요 그런데 어쩌자구 그렇게 많은 보험을 들었어요 그런 것이 다 의문이 갔나봅니다.”
“ 아! 그거야... 왜 있잖아요 우리교회 약사 부인이 보험회사에 취직했다면서 하나 들어달라고 해서 들었지요 그런데 그게 뭐 무슨 문제가 된답디까?”
“ 그거야 그들이 으레적으로 묻는 질문아님니까 그런데 너무 신경 안쓰셔도 됍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 잠시래도 오박사를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는 집으로 향해 걸어 가면서도 왠지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리지못한 것은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도 부부가 살면서 아무리 원수지간이 됐다해도 그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할까하는 삭막함이었다.
거리는 이제 눈 치우는 자동차로 거리는 숨통이 트일 정도로 거리를 말끔했지만 길 양편으로 밀어 놓은 눈은 마치 장막을 친 것같았다. 그런 속에서도 개구쟁이 등쌀에 끌려온 부모들은 눈을 치우다말고 눈싸움에 합세하느라 거리는 온통 눈 축제같았다. 훈이도 엄마와 같이 눈사람을 만들다가 나를 보자 쫓아와 안겼다. 아이의 빰은 홍조를 띤 복숭아같이 빨갛게 익어서 할딱이는데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하며 힘껏 훈이를 안아주었다. 아내는 집으로 들어가자말자 한바탕 떠들어됐다.
“ 아무리 돈이 최고라지만 그럴 수가 있어요? 성현엄마가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말렸어야지요 자동차 보험금을 얼마나 낸다고 하여튼 오박사 그분 알아준다니깐요?”
다른 때 같으면 남의 일에 왠 챙견이냐고 한마디했지만 오늘은 나도할 말이 없어 그만두었다.
오박사 처 행방불명은 현실로 나타내는지 삼일이 지나고 닷세가 지나도 소식커녕 어떤 실마리도 잡지못했다. 그 사실은 차츰 데일리 미국신문은 물론 그린아일랜드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 파문으로 남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교민들 사이에 별 희안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처를 만나기 전에 오박사에게 동거한 여인이 있었다느니 이금순씨 또한 오박사를 만나기 전 남자가 있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느니 만약 그게 사실이래도 이번 실종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설사 그렇다해도 어디까지 지나간 과거고 이역만리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소문은 그들 부부로 끝나지않앗고 12살짜리 성혜 에게까지 불통이 떨어졌는데 노랑머리 서양남자애 하고 놀아 났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설마하고 부정을 했지만 때아닌 오박사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한동안 이웃집에 살았다는 간호원 친구의 남편의 말에 의하면
“ 오상철 그 사람 내 친구의 친구가 그러는데 여자 관계가 복잡했고 한동안 다방레지와 동거했다는 소문인데 또 아나 그놈의 속을...”
하며 일축했다.
실종사건이 나고 얼마동안은 사람들은 오박사 체면을 생각해서 또는 남의 눈치 때문에 쉬쉬 하더니 이제는 노글적으로 말들을 내밷었다. 이제 가갑게 지내던 이웃도 발길을 끊으며 피하려고 했다. 아내 역시 곧잘 오박사 딸인 성현이를 불러 베비시타를 시키더니 다른 집 언니를 불렀다. 나는 그런 아내의 행동이 민망해 우리만큼은 그러지않기를 바랬지만 요지부동으로 말을 듣지않았다. 이렇게 그 사건은 미스테리를 남기며 한 달을 넘겼다. 그동안 오박사에게 전화도 왔고 나 또한 빌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어떤 실마리도 잡지못했다. 사실 누구나 이민 생활에 모두 눈코 뜰세없이 바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도 한 순간이고 관심도 생각할 세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리고 3월로 들어섰고 추위는 수그러들었지만 뉴욕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이 추었다 더웠다 하다가 5월이 됐다. 오늘따라 화사한 햇살이 아침부터 약방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와 마치 살프시 새색시가 봄 소식을 주는 듯 황홀해지며 나도모르게 맨하탄 거리를 활보하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옴짝달삭없음에 회의를 느끼며 한 잔에 커피에 신문을 펼치는 행복으로 마음을 위로하기로 하고 막 한국신문을 펼치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점원인 미스 정이 수화기를 들면서 나를 처다봤다. 그건 분명 나에게 온 전화이고 말을 안해도 아내의 전화라는 것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전화 할 사람도 친구도 친적도 없기 때문이다.
“ 왠일로 이시간에 전화했어?”
나는 보나마나 아내라는 것도 알지만 방금 집에서 약방으로 왔는데 무슨 전화를 거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아내도 만만치 않아 일이 있으니깐 전화를 했는데 무슨 잔말이라는 뜻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무조건 일 마치면 집으로 오라는 통보였다. 나는 다급한 아내의 말소리에 혹시 훈이 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싶어 언성을 낮추며 물으니 오박사 일로 몇몇 가정과 우리집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는 전달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왜 오박사일로 우리집에서 만나는가 하며 또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아내는 할 수 더 떠서
“ 그러면 안돼나요? 언제까지 빌리 말만 듣고 있어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말 하다말고 그만 머슥했지만 무엇보다 미스정 보기에 민망에 몸둘바를 모르자 미스정도 눈치를 체고 무엇을 사러가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매사가 이런식이었다. 그렇다고 내 자존심만 세우고 고집을 부릴 계기도 못되는 게 미국에 이민온 부부들의 부인들은 하나같이 남편 못지않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는데 그들 또한 타당한 이유는 이역만리 와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할세가 어디 있다고 자존심을 세우느냐하는 것이다. 결국 아내는 빌리 수사관 믿고 기다릴게 아니라 몇몇 집이 힘을 모아 돈이 들더래도 확실한 수사를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동안 빌 리가 추리해 놓은 것은 교통사고로 누군가 데리고 가서 감쳐놓았을 가능성과 또 하나는 개인 적인 감정으로 납치를 했을 가능성 마지막으로 부부 싸움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은페의 연극으로 추축해 놓았다.
나는 오후 4시경에 파타임으로 일하는 김약사에게 가게를 맡기고 집으로 가기위해 약방에서 나왔다. 퇴근시간이라 인파속에 자동차들은 갈길을 잃고 허둥되는 바람에 자동차는 더욱 거북이 걸음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차 선을 바꿔 사우스 훼리고 갔다. 마침 배가 들어와 훼리 안으로 자동차를 밀고 들어갔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지하 파킹장에 자동차들이 많지않아 쉽게 파킹을 하고 배 위층으로 올라가 창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는 천천히 움직이는 듯해도 물살을 들여다보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맨하탄에서 그린 아일랜드를 자동차로 가면 한시간은 걸리는 것을 30분 정도면 갈 수가 있어 편리 한 점이 많고 자동차까지 운반을 해 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마는 사람의 욕심은 한 노선으로 가야하는데 버스에 배에 다시 써브왜이를 타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기를 원했다.
이른 저녁에 우리집에 모인 사람들은 자주는 만나지않았지만 교회에서 또는 한국식품점에서 이미 안면이 있던 사람들로 백약사부부,치과 박씨, 수퍼마겟을 경영하는 김씨, 소아과 닥터 정씨, 세탁소 한씨, 사진 디피점 윤씨 네 우리 부부 해서 모두 14명이었다. 그리고 이모임은 순전히 부인들 끼리 간호원 선후배, 친구 해서 안면이 있는 부인들로 구성되어 자연히 남편들도 알게 된 사이었다.
회의는 아내가 생각한대로 의견에 모두 동참하기로 한 것이기에 쉽게 결정이 됐다. 문제는 우선 빌리 말고도 돈이 들더라도 개인 사설 탐정사를 두어 병원 가까이 주변 상황을 자세히 알보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이번 기회에 우리민족이 얼마나 단결이 잘되어있고 함부러 건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린 몇 번의 모임을 추진했고 모두 생업에 메인 사람들이라 부엉이처럼 밤에 만나 의논을 했다. 나는 어느 정도 우리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결정이 날 때 오박사에게 알리는 몸둘바를 모르고 고마워 했다.
“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그동안 말을 안해서 그렇지 사는게 사는 것이아니었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지네들 강아지만 잃어버려도 사진을 돌리며 무슨 색갈에 어떤 종자에 족보까지 들추며 호들갑을 떠는데 하믈며 사람이 없어졌는데 남의 집 강아지 보듯 마냥 그러고 있으니 이게 다 동양인을 얕보고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 글쎄요... 워낙 여러 인종이 모여 사니 소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작년 겨울에도 젊은 금발 여인 실종사건이 났는데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았으니 말이에요.”
오박사는 몇 달 동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나마 건강한 체격이라 덜 축이 나 보여서 그렇지 속을 들여다보면 새카맣게 타들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 그동안 저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미련했다는 것을 지금에사 깨달았으니 ... 이러나저러나 그 사람이 나타나야 어떤 조치를 하던 해야할텐데 그 사람 나한테 시집와서 일만 죽도록 했는데 만약 무슨일이 생기면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합니다.”
용케도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은 일주일이 겨우 지나서야 추진이되었다. 그건 내가 잘아는 변호사 친구로부터 이 지역에 꽤 이름이 나 있는 사설 수사관을 소개받기위해서 시간이 지체 된 것이다. 그는 유태인 계열로 미국 이름은 살로몬 스타인버거였고 나이는 오십은 좀 넘은듯싶었다.
그는 나에게 그린아일랜드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과 강간 사건을 년도 별로 열거하면서 작년에 실종 사건 등을 설명하는데 그린아일랜드 지역이라면 한국의 제주도 정도 크기만한 곳에 그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않았다.
“ 무슨 원한인지 모르나 그렇게 많이 살인 사건에 실종이 됐다니 믿어지지않습니다.”
“ 그렇습니다. 작년 11월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떠한 증거도 실마리도 잡지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은 머리가 금발인 젊은 여인으로 강간 흔적은 없고 하나같이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졸랐는데 이번에는 머리 검은 동양 여자라리 범인을 추적하기가 더 어려워진 게 살인범위가 다양해 졋다는 것이지요.”
“ 그렇다면 그건 정신 이상자의 짓 같은데 너무도 교묘한 행동으로 봐서 정신이상자의 짓도 아닌것같네요.”
“ 그렇습니다. 이건 보통 머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밥먹듯이하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을 보아 머리가 보통 이상을 넘어 미치기 직전이 아니고 서는 상상이 안돼지요 게다가 혼합 인종이 모여사니 어디에 기준을 둘지도 난감하지요 이건 분명 마약중독자들 짓거리들 같은데 금품은 건드리지않았으니 더욱 난감하지요.”
“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실종자가 자주 다녔던 곳을 중심으로 검토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의 방법은 번거롭지만 집집마다 점검해 보는 것이 어떤 실마리의 근원이 될 수 있지요 예들어서 교통사고로 집안에 은익할 수도 있고 아예 죽어서 어딘가에 묻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병원 주위를 파헤쳐 보았으면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명수사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경찰에서 수사한 자료 이외에 한국에 의레해 오박사는 물론 그의 부인의 사생활까지 알아보고있었다.
나는 살로몬의 지시대로 세 팀으로 나누어 병원 주위부터 점검하기로 했으나 한국 사람도 아닌 외국 사람에 그것도 각종 인종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선 가정 침해로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병원 근방을 살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월요일부터 시작했는데 모두 일터로 나가야 했기에 일하러 가기전에 30분 동안 하기로 했다.
우린 부삽으로 또는 쇠꼬쟁이로 땅을 일일이 쑤시고 다녔지만 막연히 병원 주위를 하기보다 세팀으로 나누어 하는 것이 진전이 빠를 것같아 동쪽 방향은 치과박씨와 수퍼마겟을 하는 김씨 잡화가개 김씨가 맡았고 서쪽 방향은 나와 백약사와 그리고 북쪽은 소아과 정씨와 세탁소 한씨가 맡아 각각 조금씩 살펴 나갔다.
날씨는 그런데로 풀려 쇠꼬쟁이로 땅을 쑤시기는 할만하지만 잔디와 잡초가 엉겨붙어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그것도 요령이 생기자 잡초를 잘 헤치고 꼬쟁이로 쑤시니 땅속으로 잘도 들어갔다. 말이 3월이지 뉴욕 날씨는 워낙 변덕을 부려 아직도 한 겨울같이 땅들이 꽁꽁 얼은 곳이 많았고 낮이면 그런대로 견딜만한데 이른 아침부터 서둘다보니 발이 몹시 시러웠다. 그래서 일행은 20분을 넘기지를 못했다. 한편 살로몬은 병원에 종사하는 의사, 약사,간호사, 간호보조원, 영양사,회계사,청소직까지 일일이 신원 조회를 했고 오박사 사는 집을 중심으로 집집이 점검하는듯했다.
오박사가 부인이 다니는 병원은 특수병원으로 뇌막염을 앓은 환자들로 나이가 8.9세가 되었어도 뇌에 결함이 있어 4,5세 정도의 정신 연령뿐이 안되었다. 그래서 병원이라기보다 신체장애 보호센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에는 기형아 또는 미숙아가 많은 것은 알콜이나 약물로 생긴 아동들이었다. 그래도 정부에선 부모 탓으로 돌리지않고 생명의 존엄성을 위해 무상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살리고 이었다.
아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그 병원에서 일을 하고 며칠을 밥을 못먹고 힘들어 했다. 나역시 그들을 보고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을 실감했다 성경에는 인간의 사악함을 들쳐내며 인간 답게 살 수 있도록 조목조목 제시 했으며 미국을 개척한 청교들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그들의 비행을 보호하고 지원해 주므로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비행에 대해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않은 듯 싶었다.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해서 그 일은 닷새를 넘겼으나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병원 둘레의 땅은 웬만한 대학교 운동장만큼 넓어 새벽마다 꼬쟁이로 땅을 쑤시며 다니것도 보통일이아니었다. 게다가 잔디가 깔린 곳은 그런대로 수월하지만 병원 양옆으로 깊숙이 백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고목이 하늘을 찌를듯한 곳은 매우 습한데다가 음침해 땅을 쑤시고나 파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그런 곳이 오히려 범죄 가능성이 많아 그런 곳을 집중해서 탐색했다. 우리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다시 월요일부터 시작했고 화요일 역시 여느날과 같이 6시30분에 그 장소에 모여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쪽 방향의 잡화가개 김씨가 소리를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동쪽방향은 병원 건물 뒤로 다른 곳보다 매우 으슥하고 고목이 울창해서 땅이 더욱 단단하고 얼음까지 끼어 애를 먹이고 있는데 김씨가 모두 오라고 소리를 친 것이다.
“ 여기 좀 봐요 아무래도 이상한 게 뭐가 걸리는 것 같아요.”
우리는 김씨가 가리키는데로 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지 허연 헝겊이 삐죽 나와 있었다.
“ 글쎄 이게 보이길레 잡아 빼려니 당체 뽑아지지도 않고 꼬쟁이로 쑤셔도 뭔가 뭉쿨한게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 그럼 일단 삽으로 땅을 파 봅시다.”
우리 일행은 모두 모여 땅을 파기 시작했고 일단은 헝겊이 보이는 곳을 중심으로 사면에서 파 들어갔지만 워낙 습한데다가 잡풀과 나뭇잎에 잔돌들이 엉겨붙어 삽으로 파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조금씩 헤쳐가는데 뭔지 나뭇잎과 엉겨붙은 머리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이상한 예감에 그곳을 집중적으로 파 헤쳤고 결국은 흙과 머리털이 엉겨붙은 사람의 뒤통수를 발견한 것이다.
“ 악!...세상에 이럴 수가 ."
우리 모두 기겁으로 뒤로 물러 서면서 어떤 사람은 토악질을 했고 어떤사람은 눈을 가리고말았다. 그러나 나는 더 볼 것도 생각 할 것도 없이 살로몬한테 연락부터 해야 겠다는 생각에 병원으로 달려 갔다.그러나 자리에 없는지 통화도 안돼서 자동 응답기에 말해 놓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20분 쯤 후에 달려 왔는데 엠부런스에 소방차로 눈깜작할세에 없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었다. 소방서 사람들은 오자마자 곡갱이와 부삽으로 땅을 파헤쳤고 결국은 머리색이 까만 여인을 꺼집어 냈다. 그렇다면 그 시체가 바로 오박사 부인이다 생각하니 소름이짝 끼치며 온몸이 경직되며 발길이 떨어지지않았다. 그러자 살로몬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고 오박사도 공장에서 달려왔다.
오박사는 내 전화 통화만 듣고 무조건 “아이구 성현엄마” 하며 통곡을 하면서 병원 뒤로 달려왔다. 10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오박사 부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냉정을 찾으며 오박사를 달래며 시체 있는데로 안내 했다. 그러나 엠브런스를 이미 시체를 자동차에 싣고 헝겊으로 뒤집어 쒸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박사는 자동차 문을 붙잡고 시체 확인을 부탁했으나 일단은 시체 부검 검사부터 하여야 만날 수가 있다고 했다. 오박사는 이런 상황에 시체 확인 부터가 선급이지 무슨 잔말이냐고 악을 쓰자 그들도 그래야 될듯싶은지 오박사를 자동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오박사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순간 그 시체가 바로 오박사 부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체는 몇 달을 넘게 땅속에 파뭍혔지만 워낙 날씨가 춥고 음습한 곳이라 시체는 썩지 않아 쉽게 알아 볼수 있었던 것같았다. 아니 몇십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인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병원 영안 대기실에서 정신을 차리면서 그동안 수없이 실종에 살인사건들이 신문 이나 방송에서 떠들어 됐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무심했는데 바로 내 이웃에 그것도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시체가 영안실로 들어간지도 시간이 꽤 오래됐는데도 이렇다하게 소식이 없자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일단 약방부터 가기 위해 병원에서 나가려는 검사실이 열리면서
“허약사 ...글세 우리 집사람이 아니래요 아휴 살았다. ”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얼싸 안았다.
“ 거 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아주머니가 아닐거라고 했잖아요.” 나는 기쁨 마음에 신이나서 말했지만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오박사처가 아님에 반가움 마음 뒤에는 뭔지 섭섭 함이 있음에 놀라고 있었다.
시체는 오래 전에 살해 당한 여인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없지만 머리색이 검은 게 동양인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살인자는 서양 여인이외에 동양여자도 살인 대상이라니 정신이 아찔 했다. 그러자 얼마되않은 교포지만 또다시 긴장했고 시체 역시 어떤 상처나 강간 흔적이 없고 목언저리에 시퍼렇게 멍이 든게 목을 졸라 죽였음에 판명됐다. 결국 우리 일행은 새벽에 땅을 파야하는 숙제를 남기고 각자 집으로 떠났다. 일주일 후에 우리 일행은 또다시 병원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아무런 근거가 없자 다들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오박사가 이사를 가겠다고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런 상황에 집까지 떠나면 어떻하냐고 하니 잘 아는 사람에게 일단 집을 맡기고 간다면서 교통사고로 누군가 데리고 갔던 아니면 살해를 당했던 우선은 아이들을 위해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애궂은 시계만 쳐다보며 오박사와 만나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한국식당은 언제 가도 사람이 붐볐다. 식당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오박사가 기다리며 손짓을 했다.
“허약사...내가 그곳을 떠나고나서 허약사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아십니까?”
“ 그야... 그렇겠지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 할 말을 잃은게 오박사 부인에 대해 물었다가 그동안 겨우 안정된 마음을 들쑤셔 놓는 것같에 그만 두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요 그러나 번연히 다 아는 사실을 뭘 감추겠습니까 다만 그당시 더는 그곳에 살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입방아때문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그때 깨달을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더군요 저야 별소리를 다 들어도 괜찮지만 애들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가혹하게 말함니까 그래서 무거운 산보고 탓할게 아니라 가벼운 중이 떠나는 게 더 낫다고 이사를 한 것입니다.“
“ 그러는 아이들도 많이 컷겟네요.”
“ 크다 뿐이겠습니까. 그 어린 미혜가 엄마 역할을 다 해주어 지금까지 버텼지요.”
“ 그럼 그동안 어디서 살았습니까?”
“ 올바니에서 조금 떨어진 추로이에서 살았습니다. 친히 지내는 동기 동창이 권해서 무작정 이사를 했는데 잘한 것같았어요 이제 미혜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성현이도 학교를 마치면 저도 할 일은 다 마칠 것같아 뉴욕으로 이사를 할가싶어 왔는데 이렇게 허약사를 만나다니 인연은 인연이가 봅니다. 그동안 허약사에게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이러는 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너무도 한이 많아 지금까지 끔쩍을 못했습니다.”
‘ 신세라니요, 오히려 그 때 시원하게 일처리를 못해주어 아직도 마음이 꺼림직 한데요.“
“ 무슨 소립니까, 허약사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이 바쁜 이민 생활에 누가 남의 일처럼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오박사가 그렇게 말하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게 알고 보면 아내가 적극 나선 것인데 양심에 찔려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 그럼 이사할 곳은 정하셨습니까.‘
“ 그야 우리같은 사람이 어디든 발 부칠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냥 발 닿는 곳이 고향이라고 그래도 이민와서 정 부친 곳이 뉴욕이라 이곳으로 정했지요.”
“ 잘 하셨습니다. 그럼 살 곳은 정하셨습니까?”
“ 그야 전에 사 놓았던 건물이 있기에 거기다가 그로서리를 하기로 했지요 사실은 얼마 전에 재혼을 했지 뭡니까.”
“ 네... 잘 하셨습니다.”
“ 성현 엄마 생각하면 이러면 안돼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않습니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
“ 그럼요 잘 하셨습니다.”
우린 식사가 끝나자 돈 계산을 할려니 이미 오박사가 지불했기에 다음 기회에 대접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사방은 이미 어둠으로 덮혔지만 생존의 다틈은 어둠과는 아무상관 없이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며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오직 죽음만이 세상을 잠재울 듯 구겨진 시간을 살기 위해 버둥 될 뿐이다.
1991년 월간에세이 추천완료
1997년 Centennial Letter Contest
그 꿈이 나빴다 (영문단편소설 당선 )
수필집: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누구나 마음의 풍경이 있다.
단편소설: 떠나는 연습 장편소설: 청계천
아침부터 매섭게 춥던 날씨가 한낮이 되면 언제 그랬었나 싶게 덥고 저녁이면 다시 추워져서 사람들은 엄살쟁이들 같이 아예 겨울코드를 입고 다녔다.
오늘 아침은 봄이 올 듯 따스한 햇살이 약국 창문으로 고즈넉히 들어오며 여인의 속살같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아주어 나도 모르게 스스르 눈을 감았다. 이런 날은 감옥 같은 약방에서 나가 거리로 활보하고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커피 한잔 마실 틈도 없이 이그러진 두상들이 아침부터 밀려오고 있기에 그만 포기하고 멀 건히 창 밖을 내다 봤다. 그러자 머리가 허연, 중년은 훨씬 넘었을 웬 동양 남자가 아까부터 힐끔힐끔 약방 안을 들여다 보다가 그냥 지나 간다 싶더니 다시 발길을 돌려 멀 건히 바같을 내다보는 나를 자세히 보다가 결심을 한 듯 약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 이게 누구요 허약사가 아니오?"
나는 커피를 마시다말고 그 남자를 멀 건히 쳐다봤다.
" 저 모르겠어요? 나 요, 그린 아일랜드에서 살았던 오박사요 ."
나는 순간 영혼의 필림이 빠르게 돌아가며 기억을 되살렸다.
" 아니, 그럼 오박사, 아이구 죄송해요 오 선생님 아니세요?"
" 세월이 물같이 흘러간다지만 이게 얼마만인가요우리가 헤어진지 한 십년됐지요."
"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아시고... 그동안 궁금했는데 통 알 길이 있어야지요."
" 그러지않아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약사만은 뵙고싶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
오박사는 십년 전 보다 많이 얼굴이 상해 세월이 그렇다치지만 그동안 그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듯 알아볼수가 없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오박사라는 말에 기억이 되살아나며 뭉득한 코에 넓적한 얼굴에 두툼한 이목구비가 그대로 노출 되며 지나간 과거가 환영처럼 지나쳤다. 어찌 그때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나는 등골이 오싹 한기를 느껴야 했다.
“ 허약사는 늙지도 않고 여전하네요 애들도 많이 컷겠군요.”
“ 그러는 오선생님의 자제들도 많이 컷겠지요? 내 정신 좀 봐 이젠 얼싸한 대학생에 결혼까지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 그야 그렇게 됐지요. 어차피 다 된 인생 이렁저렁 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오박사는 땅이 꺼질것같은 한숨을 쉬더니 내가 권하는대로 의자에 앉았다. 오박사라하면 누구나 공학박사나 의학박사로 착각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 자동차 정비사로 교포들의 자동차를 잘 고쳐주어 오박사라고 별명을 지어진 것이 아예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도 자신의 별명이 나쁘지 않은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린 십 년 전, 별로 좋지않은 사건들을 새삼 떠올기도 끔직스러워 말꼬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해도 우리 기억은 그때가 전부 였기에 어쩔수 없이 그 때로 돌아갔고 그 때의 실마리도 들락날락하는 손님들 때문에 더는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제안을 하니 오박사도 그러기를 원하는지 승낙을 했다. 오박사가 나가자 손님들도 뜸해지니 갑자기 그 때 오박사 사건이 한 거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1978년 2월 뉴욕은 십 년 만에 오는 대 폭설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백색의 나라가 된 듯 거리고 집이고 자동차 까지 어디로 간 듯 눈으로 덮였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맨한탄 약방에 가야하기 때문에 눈을 치우기로 작정하고 차고 문을 여니 문앞에 놓아든 내 파란 자동차가 보이지를 안았다. 그래도 사람 다니는 길은 터놓아야 하기에 무작정 부샆을 들고 차고 앞줄부터 눈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뒤에서아내가 소리쳤다.
“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이런 날에 약방을 간다니 누가 상장이라도 준데요.?”
아내가 화가 날만도 했다. 허구한날 하루도 빠지지않고 맨하탄으로 출근하는 것도 미웠지만 자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됀다는 어떤 결벽증에 있는 자신을 미워 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낮 설은 이국땅에 누군가 만날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그나마 일거리가 있고 비록 약장사라고 해도 나를 필요로하는 병약자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수 있다는 보람으로 산다는 것을 아내는 너무도 몰랐다. 아무튼 결혼한 지 7년 아내도 나도 권태기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내가 뭐라고 하든 비록 눈을 치워도 시내를 갈 수 없드래도 내 할 일은 해여야 하기에 열심히 눈을 치우는데 누군가 넘어지고 쓸어지면서 소리를 치면서 오는데 알고 보니 오박사였다.
“ 허약사 우리 집 사람이 행방불명이에요.”
“ 뭐라구요 행방불명이라니요?”
“ 글쎄 어젯밤에 병원에 나간 사람이 아직도 집에 오지않았어요.”
“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눈사태에 혹시 발이 묶여서...?”
“ 아니에요, 어제 분명 병원에 연락 했더니 집으로 갔데요.”
“ 그렇지만 이 날씨에 혹시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잠시 친구 집에 간 것은 아닐까요.”
“ 우리 그 사람 자동차를 안타고 다녀요.” “ 예 그럼 걸어서 병원에 다녔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소리를 치다가 언젠가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 오박사 처 말이에요 아무리 지독한 노랭이래도 그럴 수가 있어요? 하루에 8시간 근무가 뭐가 부족해 더불 근무에 자동차도 없이 병원에 다니는 것도 문제지만 자동차 정비에 도가 튼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잘난 고물 자동차 하나 만들어 주지않은 오박사가 더 문제라구요 저러다가 밤길에 무슨 일 나면은 어쩔라구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는 아내는 왠지 그 집 일이라면 쌍지팡이를 집고 신경을 곤두 세웠다. 하긴 아내뿐 만 아니라 몇 안되는 교포들 간에도 화재의 인물이 된 것은 교포들 중에 제일 먼저 집을 샀고 미국 정비공장에서 몇 년간 정비공으로 일하다가 어엿한 자기 주유소에 정비공장을 차린다고 하니 선망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 된듯싶었다.
사실 아내가 오박사 부인에게 더욱 열등감을 가진 것은 같은 병원에서 일을 하지만 그녀는 지방대학 간호학과를 나와 운 좋게 선배 간호사 누군가 미국간호사 시험문제 답안지를 용케도 입수했는 소문과 함께 자격증을 땃기 때문이다. 따라서 똑같이 일을 해도 당당히 RN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간호원들과 주급이나 혜택 등이 엄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차도 없이 병원을 다녔다니 아무리 지독한 구두쇠라도 내가 생각해도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고 비록 병원 가까이 산다해도 으슥한 길에 그것도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걷는 다는 것은 위험 천만이었다. 더욱이 오박사는 인류 정비사로 새차도 아닌 그깐 고물차 한 대 사서 고쳐쓰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그러나 오박사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억척을 떠는 여자들의 문제도 있었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처음 이민 온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웠던 과거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이깐 고생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낫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기 위해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사명감에 단 몇푼이라도 아껴야 했듯이 아내 때문에 이주한 남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업 간호원들같이 보장된 직업도 없거니와 막상 노동 일을 하려고 해도 언어문제에 어느 길을 가야 할 찌 망막했다. 그나마 때론 병원에서 잡일로 페인팅 청소 등을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 일도 한계가 있어 아내가 벌어다 주는 주급으로 유지 할 수 밖에 없기에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했다. 아니 돈 벌기위해 체면이고 위신이고 다 버리고 이역만리 까지 왔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하는 오기로 눈에 불을 키고 산 것은 사실이다.그래서 아내들은 8시간 이외에 파타임 일을 했고 오박사처는 아예 두배로 일하기를 밥먹듯 한 것이다.
이민 온지 7 .8년 되니 언어도 웬만큼 소통되고 돈도 어느정도 모이자 사람들은 오박사같이 정비소를 낸다던가 세탁소,그로서리 잡화 가개를 차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팔마시 약사 자격증을 따기까지 주유소에서 파타임 일을 했고 아내는 병원에서 일을 하느라 첫애를 유산을 할 정도로 강행군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약사 자격증을 따고 맨하탄에 한국인이 하는 선물가개 약방에 약사로 일을 하면서부터 가정에 안정을 찾으며 아내 또한 지금에 훈이를 낳은 것이다.
“ 너무 염려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혹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잠시 친구네 들렀다가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니깐요.”
“ 아닙니다. 아내는 분명 행방불명입니다. 왜냐하면 병원 가까히 친구도 없을 뿐더라 병원에 전화를 하니 어제 밤 10시경 쯤에 병원에서 나갔다고 합니다. 다만 어제 밤에 누군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을려고 하니 그만 끊어져서 그게 의문입니다.”
“ 그것보세요, 전화를 하고싶어도 눈사태로 전화가 불통이 됐으니 왜 안그러겠어요 그러니깐 조금 만 기다려 보시면 알게 될거에요.”
“ 글쎄요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 그러나 저러나 어쩌자구 자동차 한 대 뽑아주지않고 그 지경까지 갔어요?”
나는 하도 답답해서 나도모르게 심한 말을 하고나니 그도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도 화가나는지
“ 그러니깐 저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무슨 놈의 여펜네가 고집이 센지 왠만한 말에 코방귀도 안꾸니 이 지경이 됐지요.”
오박사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니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쳤다. 하긴 내 아내도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속수무책이라 어떤 때는 돈 좀 번다고 콧대가 쎄져서 남편 알기를 개똥으로 여기나싶어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아내들은 이왕 돈 벌기로 나선 것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었지만 나중에 제 살 깍아먹을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을 어떻하면 좋을 것같습니까?”
“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허약사가 영어를 하니 좀 도와주십사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나는 오박사가 간절히 부탁하는 것에 어떤 이유도 부칠수도 거절도 못하고 무조건 오박사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내 이런 날씨에 왠일인가싶어 멀건히 처다만 봤다. 아내가 차를 대접하기의해 부엌으로 들어가자 나는 경찰서에 전화부터 걸기로 작정하고 전화부 책부터 찾아 집가까히 있는 경찰소를 찾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나는 간단히 그동안 상황을 설명앴다.
“ 세상에 이럴 수가 ... 내 이럴 줄 알았어요 어쩌자구 차 한대 뽑아주지않아 이경까지 갔어요?”
나는 그만 기겁으로 아내의 말을 막았다.
“ 훈이 엄마 말씀도 맞습니다. 낸들 압니까 워낙 고집이 세서... 하긴 제가 더 고집을 부려야 하는데 다 제 잘못입니다.”
뉴욕은 유난히 범죄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 각정이되었다. 나는 수시로 가까운 경찰서에 전화를 하니 계속 통화중이다가 연결이 됐다. 담당 경찰관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이내 수사실로 연결을 해주었다. 목소리가 굵직한 형사인지 싶은 사람이 1시간 후에 오박사네 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주소와 여러 가지 상황을 대충 알려주었다.
오박사가 집으로 떠나자 나는 맨하탄 선물 센타로 약방에 갈 수 없음을 알리고 치우다 만 눈을 대충 치우고 오박사네 집으로 갔다. 오박사네 집은 한 부 락 거리의 지척에 있어 다행이지 조금 만 멀었어도 눈 때문에 갈 수가 없을 정도로 눈을 밟으면 무릎까지 들어가 걸을 수가 없었다.
3년 전 새로 샀다는 오박사네 집은 그 당시 몇몇 친구와 이웃에 사는 한인들을 불러 잔치를 할 때나 별반 변한 것이 없이 이민 초기에 중고로 샀다는앉으면 푹들어가는 소파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세월은 어쩔 수없다고 겨우 초등학교 다니던 딸 아들이 부쩍 커서 누군지 알아볼수 없게 성장했다.
빌리라는 형사는 큰길을 대충 치워났기에 용케도 칲프를 타고 왔지만 오박사네 집까지는 어림도 없는지 걸어서 오는 바람에 바지가 억망으로 눈으로 범벅이 돼서 왔다. 그는 형사치고는 동네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생겨 우선은 거부심이 안생겨 다행이었다. 그가 내미는 명함을 들여다보니 그린 아일랜드 지역의 담당 형사였다.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서류부터 꺼내 무언가 적기 시작부터 했다.
성명: 이금순
나이: 43세
성별: 여자
학력: 간호전문대학 졸업
국적 : 한국, 수원 출생
이민 : 1970년 2월6일
직업 : 북스병원 간호사
현주소: 43 리취몬드 에브뉴 그린아일랜드 뉴욕 11693
관계: 남편 -오상철 딸 - 오성혜 아들 -오성현
성명: 오상철
나이: 50세
성별: 남자
학력: 고등공업학교
국적: 한국 함경도
이민: 1971년 5월3일
직업: 자동차 정비공
빌리는 기재된 사항을 자세히 보더니 나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오박사를 잠간 자리를 피해줄 것을 부탁했다.
“ 미스터 오는 언제부터 알게됐습니까?”
“ 제가 아내와 함께 취업이민으로 와서 뉴져지에 살다가 4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아내가 북스병원에 보조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
“ 당신이 보기에 그들 부부가 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문제가 있어보입니까.”
“ 제가 보기에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나 보통 한국인 부부들같이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봅니다.”
“ 요 근래에 혹시 그들에게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요 예를 들어서 부부 싸움이 잦다든지 아내에게 폭행을 한다든지 뭐 그런거죠?”
나는 순간 형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느꼈고, 빌리는 흔히 미국 가정에서 생기는 부부 싸움이 나중에는 살인으로 치닿는 경우를 말한다는 것을 알고 왠지 심장이 두배로 뛰면서 어떤 굴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한국인들은 도덕적이고 너희들 같이 야만적인 행위는 안 한다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튀어나갈려고 해서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차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빌리는 역시 오랜 세월 노련한 수사의 경험에 의한 질문이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오박사의 신상조사를 컴프터로 조회해 본 결과 오박사는 얼마전에 생명보험을 10만불씩이나 들은 것에 의문을 품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우리같이 이민자들은 보험에 익숙치도 않았고 더욱이 생명보험까지는 웬만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면 관심도 없지만 오히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몇 만불도 아닌 십만불이라니 그 당시로는 십 만불이 엄청난 것으로 왠만한 집한채 값이었다. 그런데 그는 서슴없이 그런 보험을 들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도 없지만 의심이 날정도였다. 아무튼 그들 부부는 아내 말대로 돈에 관한 것은 굉장한 집착을 보였던 것은 사실인 것같았다.
사실 그렇다해도 우리네 생각처럼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만 어디까지 우리네 생각이고 미국에선 세금은 쥐꼬리같이 내면서 어디서 돈이 나와 집을 사고 사업체 차리고 게다가 엄청난 보험금을 문다니 누가 보아도 납득이 안갔다.
“ 전 미스터 오와 가깝지도 않지만 사생활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들은 근면하고 저축심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일단 오박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지만 얼마 전 이곳에 산다는 한 여인이 보험회사에 취직했다고 보험을 들으라고 아내에게 말해서 왠놈의 보험까지나 하며 일축해 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오박사 부부가 타인에 의해 충동적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까지야 알 수 없기에 일단 함구하기로 했고, 설사 그것이 입증되어도 오박사는 탈세 법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쥐꼬리만한 정비사 주급에 부인이 번다해도 집 모게지에 각종 세금 자동차 보험금 등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증가되면 우선은 탈세가 아니면 법에 어긋난 수입처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므로 빼도 박지도 못하게 된다. 그만큼 미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면서도 안으로는 보이지않은 공산국가로 빈부차이를 있는자에서 각종세금으로 알뜰히 챙겨서 없자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하긴 오박사가 그럴만하 여유가 있는 것은 알고보면 가까이 사는 교포들의 자동차를 고쳐주므로 쏠쏠하게 과외 수입을 챙길 수 있다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런 것 까지야 어찌 보고를 하겠는가 미국인들 또한 그렇다해도 그건 어디까지 개인 사생활이고 요령 것 사는 것이 이민생활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빌리는 대충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갔고 오박사는 나에게 와서 무슨 말을 했는가 물어봤다.
“ 그거야 이것저것 오선생님 신상에 관한을 물었지요 그런데 어쩌자구 그렇게 많은 보험을 들었어요 그런 것이 다 의문이 갔나봅니다.”
“ 아! 그거야... 왜 있잖아요 우리교회 약사 부인이 보험회사에 취직했다면서 하나 들어달라고 해서 들었지요 그런데 그게 뭐 무슨 문제가 된답디까?”
“ 그거야 그들이 으레적으로 묻는 질문아님니까 그런데 너무 신경 안쓰셔도 됍니다.”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 잠시래도 오박사를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는 집으로 향해 걸어 가면서도 왠지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리지못한 것은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도 부부가 살면서 아무리 원수지간이 됐다해도 그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할까하는 삭막함이었다.
거리는 이제 눈 치우는 자동차로 거리는 숨통이 트일 정도로 거리를 말끔했지만 길 양편으로 밀어 놓은 눈은 마치 장막을 친 것같았다. 그런 속에서도 개구쟁이 등쌀에 끌려온 부모들은 눈을 치우다말고 눈싸움에 합세하느라 거리는 온통 눈 축제같았다. 훈이도 엄마와 같이 눈사람을 만들다가 나를 보자 쫓아와 안겼다. 아이의 빰은 홍조를 띤 복숭아같이 빨갛게 익어서 할딱이는데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하며 힘껏 훈이를 안아주었다. 아내는 집으로 들어가자말자 한바탕 떠들어됐다.
“ 아무리 돈이 최고라지만 그럴 수가 있어요? 성현엄마가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말렸어야지요 자동차 보험금을 얼마나 낸다고 하여튼 오박사 그분 알아준다니깐요?”
다른 때 같으면 남의 일에 왠 챙견이냐고 한마디했지만 오늘은 나도할 말이 없어 그만두었다.
오박사 처 행방불명은 현실로 나타내는지 삼일이 지나고 닷세가 지나도 소식커녕 어떤 실마리도 잡지못했다. 그 사실은 차츰 데일리 미국신문은 물론 그린아일랜드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 파문으로 남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교민들 사이에 별 희안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처를 만나기 전에 오박사에게 동거한 여인이 있었다느니 이금순씨 또한 오박사를 만나기 전 남자가 있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느니 만약 그게 사실이래도 이번 실종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설사 그렇다해도 어디까지 지나간 과거고 이역만리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소문은 그들 부부로 끝나지않앗고 12살짜리 성혜 에게까지 불통이 떨어졌는데 노랑머리 서양남자애 하고 놀아 났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설마하고 부정을 했지만 때아닌 오박사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한동안 이웃집에 살았다는 간호원 친구의 남편의 말에 의하면
“ 오상철 그 사람 내 친구의 친구가 그러는데 여자 관계가 복잡했고 한동안 다방레지와 동거했다는 소문인데 또 아나 그놈의 속을...”
하며 일축했다.
실종사건이 나고 얼마동안은 사람들은 오박사 체면을 생각해서 또는 남의 눈치 때문에 쉬쉬 하더니 이제는 노글적으로 말들을 내밷었다. 이제 가갑게 지내던 이웃도 발길을 끊으며 피하려고 했다. 아내 역시 곧잘 오박사 딸인 성현이를 불러 베비시타를 시키더니 다른 집 언니를 불렀다. 나는 그런 아내의 행동이 민망해 우리만큼은 그러지않기를 바랬지만 요지부동으로 말을 듣지않았다. 이렇게 그 사건은 미스테리를 남기며 한 달을 넘겼다. 그동안 오박사에게 전화도 왔고 나 또한 빌리에게 전화를 했지만 어떤 실마리도 잡지못했다. 사실 누구나 이민 생활에 모두 눈코 뜰세없이 바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도 한 순간이고 관심도 생각할 세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리고 3월로 들어섰고 추위는 수그러들었지만 뉴욕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이 추었다 더웠다 하다가 5월이 됐다. 오늘따라 화사한 햇살이 아침부터 약방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와 마치 살프시 새색시가 봄 소식을 주는 듯 황홀해지며 나도모르게 맨하탄 거리를 활보하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옴짝달삭없음에 회의를 느끼며 한 잔에 커피에 신문을 펼치는 행복으로 마음을 위로하기로 하고 막 한국신문을 펼치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점원인 미스 정이 수화기를 들면서 나를 처다봤다. 그건 분명 나에게 온 전화이고 말을 안해도 아내의 전화라는 것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전화 할 사람도 친구도 친적도 없기 때문이다.
“ 왠일로 이시간에 전화했어?”
나는 보나마나 아내라는 것도 알지만 방금 집에서 약방으로 왔는데 무슨 전화를 거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아내도 만만치 않아 일이 있으니깐 전화를 했는데 무슨 잔말이라는 뜻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무조건 일 마치면 집으로 오라는 통보였다. 나는 다급한 아내의 말소리에 혹시 훈이 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싶어 언성을 낮추며 물으니 오박사 일로 몇몇 가정과 우리집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는 전달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왜 오박사일로 우리집에서 만나는가 하며 또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아내는 할 수 더 떠서
“ 그러면 안돼나요? 언제까지 빌리 말만 듣고 있어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말 하다말고 그만 머슥했지만 무엇보다 미스정 보기에 민망에 몸둘바를 모르자 미스정도 눈치를 체고 무엇을 사러가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매사가 이런식이었다. 그렇다고 내 자존심만 세우고 고집을 부릴 계기도 못되는 게 미국에 이민온 부부들의 부인들은 하나같이 남편 못지않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세우는데 그들 또한 타당한 이유는 이역만리 와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할세가 어디 있다고 자존심을 세우느냐하는 것이다. 결국 아내는 빌리 수사관 믿고 기다릴게 아니라 몇몇 집이 힘을 모아 돈이 들더래도 확실한 수사를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동안 빌 리가 추리해 놓은 것은 교통사고로 누군가 데리고 가서 감쳐놓았을 가능성과 또 하나는 개인 적인 감정으로 납치를 했을 가능성 마지막으로 부부 싸움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은페의 연극으로 추축해 놓았다.
나는 오후 4시경에 파타임으로 일하는 김약사에게 가게를 맡기고 집으로 가기위해 약방에서 나왔다. 퇴근시간이라 인파속에 자동차들은 갈길을 잃고 허둥되는 바람에 자동차는 더욱 거북이 걸음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차 선을 바꿔 사우스 훼리고 갔다. 마침 배가 들어와 훼리 안으로 자동차를 밀고 들어갔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지하 파킹장에 자동차들이 많지않아 쉽게 파킹을 하고 배 위층으로 올라가 창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는 천천히 움직이는 듯해도 물살을 들여다보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맨하탄에서 그린 아일랜드를 자동차로 가면 한시간은 걸리는 것을 30분 정도면 갈 수가 있어 편리 한 점이 많고 자동차까지 운반을 해 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마는 사람의 욕심은 한 노선으로 가야하는데 버스에 배에 다시 써브왜이를 타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기를 원했다.
이른 저녁에 우리집에 모인 사람들은 자주는 만나지않았지만 교회에서 또는 한국식품점에서 이미 안면이 있던 사람들로 백약사부부,치과 박씨, 수퍼마겟을 경영하는 김씨, 소아과 닥터 정씨, 세탁소 한씨, 사진 디피점 윤씨 네 우리 부부 해서 모두 14명이었다. 그리고 이모임은 순전히 부인들 끼리 간호원 선후배, 친구 해서 안면이 있는 부인들로 구성되어 자연히 남편들도 알게 된 사이었다.
회의는 아내가 생각한대로 의견에 모두 동참하기로 한 것이기에 쉽게 결정이 됐다. 문제는 우선 빌리 말고도 돈이 들더라도 개인 사설 탐정사를 두어 병원 가까이 주변 상황을 자세히 알보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이번 기회에 우리민족이 얼마나 단결이 잘되어있고 함부러 건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린 몇 번의 모임을 추진했고 모두 생업에 메인 사람들이라 부엉이처럼 밤에 만나 의논을 했다. 나는 어느 정도 우리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결정이 날 때 오박사에게 알리는 몸둘바를 모르고 고마워 했다.
“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그동안 말을 안해서 그렇지 사는게 사는 것이아니었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지네들 강아지만 잃어버려도 사진을 돌리며 무슨 색갈에 어떤 종자에 족보까지 들추며 호들갑을 떠는데 하믈며 사람이 없어졌는데 남의 집 강아지 보듯 마냥 그러고 있으니 이게 다 동양인을 얕보고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 글쎄요... 워낙 여러 인종이 모여 사니 소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작년 겨울에도 젊은 금발 여인 실종사건이 났는데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았으니 말이에요.”
오박사는 몇 달 동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나마 건강한 체격이라 덜 축이 나 보여서 그렇지 속을 들여다보면 새카맣게 타들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 그동안 저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미련했다는 것을 지금에사 깨달았으니 ... 이러나저러나 그 사람이 나타나야 어떤 조치를 하던 해야할텐데 그 사람 나한테 시집와서 일만 죽도록 했는데 만약 무슨일이 생기면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합니다.”
용케도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은 일주일이 겨우 지나서야 추진이되었다. 그건 내가 잘아는 변호사 친구로부터 이 지역에 꽤 이름이 나 있는 사설 수사관을 소개받기위해서 시간이 지체 된 것이다. 그는 유태인 계열로 미국 이름은 살로몬 스타인버거였고 나이는 오십은 좀 넘은듯싶었다.
그는 나에게 그린아일랜드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과 강간 사건을 년도 별로 열거하면서 작년에 실종 사건 등을 설명하는데 그린아일랜드 지역이라면 한국의 제주도 정도 크기만한 곳에 그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않았다.
“ 무슨 원한인지 모르나 그렇게 많이 살인 사건에 실종이 됐다니 믿어지지않습니다.”
“ 그렇습니다. 작년 11월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떠한 증거도 실마리도 잡지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은 머리가 금발인 젊은 여인으로 강간 흔적은 없고 하나같이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졸랐는데 이번에는 머리 검은 동양 여자라리 범인을 추적하기가 더 어려워진 게 살인범위가 다양해 졋다는 것이지요.”
“ 그렇다면 그건 정신 이상자의 짓 같은데 너무도 교묘한 행동으로 봐서 정신이상자의 짓도 아닌것같네요.”
“ 그렇습니다. 이건 보통 머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밥먹듯이하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을 보아 머리가 보통 이상을 넘어 미치기 직전이 아니고 서는 상상이 안돼지요 게다가 혼합 인종이 모여사니 어디에 기준을 둘지도 난감하지요 이건 분명 마약중독자들 짓거리들 같은데 금품은 건드리지않았으니 더욱 난감하지요.”
“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실종자가 자주 다녔던 곳을 중심으로 검토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의 방법은 번거롭지만 집집마다 점검해 보는 것이 어떤 실마리의 근원이 될 수 있지요 예들어서 교통사고로 집안에 은익할 수도 있고 아예 죽어서 어딘가에 묻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병원 주위를 파헤쳐 보았으면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명수사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경찰에서 수사한 자료 이외에 한국에 의레해 오박사는 물론 그의 부인의 사생활까지 알아보고있었다.
나는 살로몬의 지시대로 세 팀으로 나누어 병원 주위부터 점검하기로 했으나 한국 사람도 아닌 외국 사람에 그것도 각종 인종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선 가정 침해로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병원 근방을 살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월요일부터 시작했는데 모두 일터로 나가야 했기에 일하러 가기전에 30분 동안 하기로 했다.
우린 부삽으로 또는 쇠꼬쟁이로 땅을 일일이 쑤시고 다녔지만 막연히 병원 주위를 하기보다 세팀으로 나누어 하는 것이 진전이 빠를 것같아 동쪽 방향은 치과박씨와 수퍼마겟을 하는 김씨 잡화가개 김씨가 맡았고 서쪽 방향은 나와 백약사와 그리고 북쪽은 소아과 정씨와 세탁소 한씨가 맡아 각각 조금씩 살펴 나갔다.
날씨는 그런데로 풀려 쇠꼬쟁이로 땅을 쑤시기는 할만하지만 잔디와 잡초가 엉겨붙어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그것도 요령이 생기자 잡초를 잘 헤치고 꼬쟁이로 쑤시니 땅속으로 잘도 들어갔다. 말이 3월이지 뉴욕 날씨는 워낙 변덕을 부려 아직도 한 겨울같이 땅들이 꽁꽁 얼은 곳이 많았고 낮이면 그런대로 견딜만한데 이른 아침부터 서둘다보니 발이 몹시 시러웠다. 그래서 일행은 20분을 넘기지를 못했다. 한편 살로몬은 병원에 종사하는 의사, 약사,간호사, 간호보조원, 영양사,회계사,청소직까지 일일이 신원 조회를 했고 오박사 사는 집을 중심으로 집집이 점검하는듯했다.
오박사가 부인이 다니는 병원은 특수병원으로 뇌막염을 앓은 환자들로 나이가 8.9세가 되었어도 뇌에 결함이 있어 4,5세 정도의 정신 연령뿐이 안되었다. 그래서 병원이라기보다 신체장애 보호센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에는 기형아 또는 미숙아가 많은 것은 알콜이나 약물로 생긴 아동들이었다. 그래도 정부에선 부모 탓으로 돌리지않고 생명의 존엄성을 위해 무상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살리고 이었다.
아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그 병원에서 일을 하고 며칠을 밥을 못먹고 힘들어 했다. 나역시 그들을 보고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을 실감했다 성경에는 인간의 사악함을 들쳐내며 인간 답게 살 수 있도록 조목조목 제시 했으며 미국을 개척한 청교들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그들의 비행을 보호하고 지원해 주므로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비행에 대해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않은 듯 싶었다.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해서 그 일은 닷새를 넘겼으나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병원 둘레의 땅은 웬만한 대학교 운동장만큼 넓어 새벽마다 꼬쟁이로 땅을 쑤시며 다니것도 보통일이아니었다. 게다가 잔디가 깔린 곳은 그런대로 수월하지만 병원 양옆으로 깊숙이 백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고목이 하늘을 찌를듯한 곳은 매우 습한데다가 음침해 땅을 쑤시고나 파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그런 곳이 오히려 범죄 가능성이 많아 그런 곳을 집중해서 탐색했다. 우리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다시 월요일부터 시작했고 화요일 역시 여느날과 같이 6시30분에 그 장소에 모여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쪽 방향의 잡화가개 김씨가 소리를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동쪽방향은 병원 건물 뒤로 다른 곳보다 매우 으슥하고 고목이 울창해서 땅이 더욱 단단하고 얼음까지 끼어 애를 먹이고 있는데 김씨가 모두 오라고 소리를 친 것이다.
“ 여기 좀 봐요 아무래도 이상한 게 뭐가 걸리는 것 같아요.”
우리는 김씨가 가리키는데로 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지 허연 헝겊이 삐죽 나와 있었다.
“ 글쎄 이게 보이길레 잡아 빼려니 당체 뽑아지지도 않고 꼬쟁이로 쑤셔도 뭔가 뭉쿨한게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 그럼 일단 삽으로 땅을 파 봅시다.”
우리 일행은 모두 모여 땅을 파기 시작했고 일단은 헝겊이 보이는 곳을 중심으로 사면에서 파 들어갔지만 워낙 습한데다가 잡풀과 나뭇잎에 잔돌들이 엉겨붙어 삽으로 파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조금씩 헤쳐가는데 뭔지 나뭇잎과 엉겨붙은 머리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이상한 예감에 그곳을 집중적으로 파 헤쳤고 결국은 흙과 머리털이 엉겨붙은 사람의 뒤통수를 발견한 것이다.
“ 악!...세상에 이럴 수가 ."
우리 모두 기겁으로 뒤로 물러 서면서 어떤 사람은 토악질을 했고 어떤사람은 눈을 가리고말았다. 그러나 나는 더 볼 것도 생각 할 것도 없이 살로몬한테 연락부터 해야 겠다는 생각에 병원으로 달려 갔다.그러나 자리에 없는지 통화도 안돼서 자동 응답기에 말해 놓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20분 쯤 후에 달려 왔는데 엠부런스에 소방차로 눈깜작할세에 없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었다. 소방서 사람들은 오자마자 곡갱이와 부삽으로 땅을 파헤쳤고 결국은 머리색이 까만 여인을 꺼집어 냈다. 그렇다면 그 시체가 바로 오박사 부인이다 생각하니 소름이짝 끼치며 온몸이 경직되며 발길이 떨어지지않았다. 그러자 살로몬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고 오박사도 공장에서 달려왔다.
오박사는 내 전화 통화만 듣고 무조건 “아이구 성현엄마” 하며 통곡을 하면서 병원 뒤로 달려왔다. 10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오박사 부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냉정을 찾으며 오박사를 달래며 시체 있는데로 안내 했다. 그러나 엠브런스를 이미 시체를 자동차에 싣고 헝겊으로 뒤집어 쒸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박사는 자동차 문을 붙잡고 시체 확인을 부탁했으나 일단은 시체 부검 검사부터 하여야 만날 수가 있다고 했다. 오박사는 이런 상황에 시체 확인 부터가 선급이지 무슨 잔말이냐고 악을 쓰자 그들도 그래야 될듯싶은지 오박사를 자동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오박사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순간 그 시체가 바로 오박사 부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체는 몇 달을 넘게 땅속에 파뭍혔지만 워낙 날씨가 춥고 음습한 곳이라 시체는 썩지 않아 쉽게 알아 볼수 있었던 것같았다. 아니 몇십년을 같이 살아온 부부인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병원 영안 대기실에서 정신을 차리면서 그동안 수없이 실종에 살인사건들이 신문 이나 방송에서 떠들어 됐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무심했는데 바로 내 이웃에 그것도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시체가 영안실로 들어간지도 시간이 꽤 오래됐는데도 이렇다하게 소식이 없자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일단 약방부터 가기 위해 병원에서 나가려는 검사실이 열리면서
“허약사 ...글세 우리 집사람이 아니래요 아휴 살았다. ”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얼싸 안았다.
“ 거 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아주머니가 아닐거라고 했잖아요.” 나는 기쁨 마음에 신이나서 말했지만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오박사처가 아님에 반가움 마음 뒤에는 뭔지 섭섭 함이 있음에 놀라고 있었다.
시체는 오래 전에 살해 당한 여인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없지만 머리색이 검은 게 동양인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살인자는 서양 여인이외에 동양여자도 살인 대상이라니 정신이 아찔 했다. 그러자 얼마되않은 교포지만 또다시 긴장했고 시체 역시 어떤 상처나 강간 흔적이 없고 목언저리에 시퍼렇게 멍이 든게 목을 졸라 죽였음에 판명됐다. 결국 우리 일행은 새벽에 땅을 파야하는 숙제를 남기고 각자 집으로 떠났다. 일주일 후에 우리 일행은 또다시 병원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아무런 근거가 없자 다들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오박사가 이사를 가겠다고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런 상황에 집까지 떠나면 어떻하냐고 하니 잘 아는 사람에게 일단 집을 맡기고 간다면서 교통사고로 누군가 데리고 갔던 아니면 살해를 당했던 우선은 아이들을 위해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애궂은 시계만 쳐다보며 오박사와 만나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한국식당은 언제 가도 사람이 붐볐다. 식당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오박사가 기다리며 손짓을 했다.
“허약사...내가 그곳을 떠나고나서 허약사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아십니까?”
“ 그야... 그렇겠지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 할 말을 잃은게 오박사 부인에 대해 물었다가 그동안 겨우 안정된 마음을 들쑤셔 놓는 것같에 그만 두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요 그러나 번연히 다 아는 사실을 뭘 감추겠습니까 다만 그당시 더는 그곳에 살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입방아때문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그때 깨달을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더군요 저야 별소리를 다 들어도 괜찮지만 애들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가혹하게 말함니까 그래서 무거운 산보고 탓할게 아니라 가벼운 중이 떠나는 게 더 낫다고 이사를 한 것입니다.“
“ 그러는 아이들도 많이 컷겟네요.”
“ 크다 뿐이겠습니까. 그 어린 미혜가 엄마 역할을 다 해주어 지금까지 버텼지요.”
“ 그럼 그동안 어디서 살았습니까?”
“ 올바니에서 조금 떨어진 추로이에서 살았습니다. 친히 지내는 동기 동창이 권해서 무작정 이사를 했는데 잘한 것같았어요 이제 미혜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성현이도 학교를 마치면 저도 할 일은 다 마칠 것같아 뉴욕으로 이사를 할가싶어 왔는데 이렇게 허약사를 만나다니 인연은 인연이가 봅니다. 그동안 허약사에게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이러는 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너무도 한이 많아 지금까지 끔쩍을 못했습니다.”
‘ 신세라니요, 오히려 그 때 시원하게 일처리를 못해주어 아직도 마음이 꺼림직 한데요.“
“ 무슨 소립니까, 허약사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이 바쁜 이민 생활에 누가 남의 일처럼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오박사가 그렇게 말하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게 알고 보면 아내가 적극 나선 것인데 양심에 찔려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 그럼 이사할 곳은 정하셨습니까.‘
“ 그야 우리같은 사람이 어디든 발 부칠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냥 발 닿는 곳이 고향이라고 그래도 이민와서 정 부친 곳이 뉴욕이라 이곳으로 정했지요.”
“ 잘 하셨습니다. 그럼 살 곳은 정하셨습니까?”
“ 그야 전에 사 놓았던 건물이 있기에 거기다가 그로서리를 하기로 했지요 사실은 얼마 전에 재혼을 했지 뭡니까.”
“ 네... 잘 하셨습니다.”
“ 성현 엄마 생각하면 이러면 안돼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않습니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
“ 그럼요 잘 하셨습니다.”
우린 식사가 끝나자 돈 계산을 할려니 이미 오박사가 지불했기에 다음 기회에 대접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사방은 이미 어둠으로 덮혔지만 생존의 다틈은 어둠과는 아무상관 없이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며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오직 죽음만이 세상을 잠재울 듯 구겨진 시간을 살기 위해 버둥 될 뿐이다.
1991년 월간에세이 추천완료
1997년 Centennial Letter Contest
그 꿈이 나빴다 (영문단편소설 당선 )
수필집: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누구나 마음의 풍경이 있다.
단편소설: 떠나는 연습 장편소설: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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