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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달리는 인생 - 임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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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le 댓글 0건 조회 4,168회 작성일 10-09-2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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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를 만났다. 30여년 만에. 그 낭떠러지에서.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키, 귀밑으로 짧게 자른 단발머리, 콧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실룩거리는 뭉툭한 코, 남루한 티셔츠.......
아이들과 정신없이 노느라 저녁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찾아 나선 사람처럼 누나는 물었다.
너, 그동안 어디 있었니?



1

  -야아아아아.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함성은 신작로에 부옇게 일어나는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서 끝없이 펼쳐진 벼이삭의 고요하고도 장엄한 파도에 이내 묻혀 버렸다. 한가로이 논둑길을 넘나들던 메뚜기들과 눈치를 보며 벼이삭에 앉기를 반복하던  참새들도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봉구도 악을 쓰며 함성을 질러 대었다. 눈을 질끈 감은 봉구의 눈꺼풀 안쪽이 아릿한 하늘색으로, 다시 회색으로 반복해서 바뀌었다. 앞발이 땅에 닿을 때 마다 하얀 메뚜기 같은 것들이 눈앞에서 튀어 오르며 색깔을 부수었다.
  아이들은 벼이삭이 끝없이 펼쳐진 철원 평야 한가운데서 갑자기 만나는 수백 길의 낭떠러지 끝-더 이상 갈 수 없는 그곳-까지 그렇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낭떠러지 코앞에서 갑자기 돌처럼 멈추어 버리는 내기를 하며 놀았다.
  돌 더미가 흙처럼 부서져 내리는 수백 길의 낭떠러지 밑에서는 언제나 서늘한 공기가 울부짖는 동물의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낭떠러지 난간에 엎드려 밑을 내려다보면 그 울부짖는 소리는 이내 슬프고 가녀린 소녀 같은 목소리로 바뀌었다가 서서히 숨을 참으며 멈추었다. 봉구는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야를 반으로 가른 분지에 정물처럼 놓여 있는 그 한탄강의 물위로 나비처럼 날아가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걸음만 더 떼어 놓으면 돌처럼 추락하여 암청색의  강물로 빨려 들어 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 낭떠러지에, 가장 빨리 그 곳에 도착한 아이는, 그들 사이에서 깡이 제일 센 놈으로 등극되고 대장이 되었다.
  아이들 중에 또래 보다 서너 살 위인 복식이가 항상 일등을 하고 대장이 되었다. 함성을 지르며 땅을 박차던 아이들의 두발은, 낭떠러지 부근에 가까이 갈수록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땅에 붙어 움찔 거리는 듯했다. 아이들의 달리기 속도가 느려질수록 복식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건너편 평야로 건너 뛸 듯이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복식이의 깡이 무척 세다며 부러워했다. 정작 복식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낭떠러지 앞에는 늘 서늘한 공기가 벽처럼 막아서고 있거든.

  아이들은 복식이가 몰래 낭떠러지 다다른 부근에 무엇인가 표시를 해 두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며 입을 삐죽 거렸다.
  봉구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누나에게 얘기하니, 누나는 그런 위험한 장난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잡힌 메기처럼 펄펄 뛰었다. 한번 만 더 그런 짓 하면 엄마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누나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봉구의 눈매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엷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죽음의 순간에 닥치게 되면 차가운 공기가 갑자기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거든. 복식이는 그 순간에 달리기를 ‘탁’ 멈추는지도 모르지.
  봉구는 누나가 별 것을 다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다시 몇 마디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봉구는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강이나 군부대 사격장 부근에 떨어져 있는 신주나 고철 등을 주우러 다녔다. 애들은 고철은 신주에 잽도 안 된다고 했다. 신주는 몇 조각만 주워도 봉구네 개, 누렁이의 기다란 노란 똥 같이 생긴 엿을 두 손에 가득 바꿀 수 있었으니까.  
  홍수나 여름이 지난 강 주위에는 어디에서 떠내려 왔는지 작은 고철 조각들이 많았다. 자루 없는 호미나 부러진 칼, 뿌리처럼 엉켜 있는 철조망 더미, 용도를 알 수 없는 고철 조각, 찌그러진 양은그릇을 비롯해서 재수가 좋으면 신비로운 금빛을 발 하는 신주 조각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주를 발견하는 일은 대부분 복식 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얼굴을 땅에 박고 부산하게 돌아다녀도 먼 경치를 바라보는 아저씨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 뒤에, 아이들이 미처 가보지 못한 엉뚱한 곳으로 가서 몇 번 뒤지다가 신주를 발견하곤 했다. 아이들은 복식이 집이 고물상이라 신주를 찾는 특별한 기술을 아버지에게 배웠을 거라고 얘기했다. 정작 복식이는 아무 말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아이들이 주은 고철 더미는 대장인 복식이 에게 언제나 전부 모아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의 집 밖에서 기다리며 더러운 손가락을 빨았다. 봉구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복식이의 뒷모습이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거침없는 양어깨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손가락만한 노란 엿 조각을 군인들이 쓰는 누런 휴지로 둘둘 말아서 갖고 나오는 복식이의 모습은 늠름하고도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받아 든 엿을 다 먹을 때쯤이면 언제나 불만을 쏟아내었다.
  -내가 제일 많이 주웠는데 엿은 제일 작은 것으로 주었어.
  -복식이가 중간에서 엿을 감추고 우리한테 쬐끔만 갖고 나왔을거야.
  -복식이네 엿은 동네에 가끔 오는 엿장수 아저씨네 것보다 굵기가 너무 가늘어.
  -맛도 없구.
  하지만 정작 복식이 앞에서는 엿 먹은 아이들이 되어 누구하나 입도 벙긋 하지 못했다. 누나는 엿 맛은 세상 어디서도 비슷하다고 했다. 엿은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를 뿐이지. 그리고 엿 먹으면서 남 흉을 보면 엿이 목구멍에 달라붙어서 숨을 못 쉬고 죽게 될지도 몰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이거든. 흉보는 사람들에게 엿을 먹였대.
  봉구는 흉을 보았던 아이들이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목덜미를 슬그머니 만져 보았다.

  -야. 이제 우리끼리 주우러 다니자구. 복식이 빼구.
  -줍기는 우리가 다 줍구, 그놈은 자기네 집 장사하구 엿은 지가 다 먹구.
  -동네에 오는 엿장수한테 주면 아마 두 배, 아니 세배는 더 받을 거다.
  경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모여서 수근 거렸다. 봉구는 복식이의 우람한 양어깨가 생각나서 슬그머니 빠지고 싶었다. 봉구가 고개를 숙이고 돌부리를 발로 툭툭 차고 있을 때, 경수의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오늘 빠지는 놈은 배신자다. 그리고 간첩이다.
  경수의 동생 강수의 말이 다시 한 번 봉구의 귀청을 때렸다.
  -그놈하고는
  -죽을 때까지
  -같이 놀지 말자.
  봉구는 아이들을 슬쩍 곁눈질 해보았다. 하나도 빠질 ‘놈’은 없어 보였다. 누나말대로 엿이 목에 걸려 죽은 ‘놈’도 한명 없었다.

  사격장 근처의 강 상류 뒤쪽을 뒤지기로 하였다. 금을 찾으러 대지를 떠돌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금빛을 발하는 진귀한 신주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이었다. 혼자서 노련하게 많은 신주를 찾아내었던 복식이에 대한 야릇한 시기심이 더해져서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강가로 뛰어 나갔다.
  강가에 널려진 은빛 조약돌과 나무와 숲,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 구름이 몇 점 떠 있는 평화로운 푸른 하늘, 시끄럽게 조잘대는 새와 뒤질세라 온몸으로 소리 지르는 매미들 사이로 죽어 있는 것. 모래 속에 입을 박고 움직이지 않는 것. 음흉하고도 적당히 부식된 날카로운 것들이 아이들이 찾아야 할 대상 이었다.
  봉구는 복식이 처럼 아이들의 눈이 미처 닿지 못 하는 강기슭 위쪽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강은 개울처럼 좁아지고 조약돌은 점점 더 많아 졌다. 신주 색깔을 띤 조약돌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조약돌사이로 흘끗거리며 얼굴을 내비치는 모래바닥은 상류로 올라 갈수록 점점 더 깨끗하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지만 소리쳐 불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이들은 멀리서 자기들 일에 열중이었다. 갑자기 무리에서 쫓겨난 기분이 들어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빈손이 가로 막았다.
  봉구가 개울가 돌무덤 사이로 금방 도망쳐 버린 가재를 찾느라고 조심스럽게 돌 하나를 건져 내는데 언제 왔는지 복식이가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너 쟤네들 하고 쇳조각 주우러 온 거지?
아이들을 돌아보니 아까보다 더 멀리 강 하구 쪽으로 내려가 있어 새끼 가재들처럼 아주 작게 보였다. 냅다 뛰어서 집으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개울 옆에 벗어놓은 까만 고무신과 복식이 에게 금세 뒷덜미를 잡혀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풀썩 주저앉았다.
  -난....... 가재를 잡으러 왔어.
  복식이는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서면서 말했다.
  -니 누나 땜에 봐주는 줄 알아.
  봉구는 복식이가 돌아서서 강기슭을 한참 걸어 내려 갈 때 까지 그가 왜 누나 땜에 나를 봐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복식이와 누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어떤 금기 같은 것으로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봉구는 ‘비밀’을 배우기 시작했다.


2

  -엄마, 누나하고 나하고 몇 살 차이야?
  빨래를 널 던 엄마가, 얘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봉구를 잠시 바라보았다.
  -정말. 누나네 식구들은 산사태로 전부 죽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누나는 왜 중학교에 안 보내?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는 무슨 학교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봉구의 눈치를 흘끔 살피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빨래를 펴서 하늘에 대고 가슴을 치듯 탁탁 털고는 빨랫줄에 반을 접어 올렸다. 빨랫줄에 걸린 낡은 속옷에서 비집고 나온 고무줄이 송충이처럼 땅바닥으로 슬며시 뛰어 내릴 것 만 같았다.
  봉구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누나를 문틈으로 엿보았다. 귀 밑으로 생뚱 잘린 단발머리에 불그레한 두 볼, 콧물이 잔뜩 담겨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뭉퉁한 코, 무언가를 오물거리는 삐죽 튀어 나온 두툼한 입술, 물기 뭍은 낡은 티셔츠, 그릇 속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두 손.......
  -우리 개울가로 멱 감으러 갈까?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을 나서며 누나가 물었다. 누나가 집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봉구에게 먼저 묻곤 했다. 그것은 까다로운 엄마의 허락을 받기가 쉽기도 했지만 집밖에 나가서도 봉구가 있으면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럴 때면 가끔은 심술쟁이가 되어 ‘싫어’ 소리를 지르거나, 때로는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서주기도 했었다. 누나는 봉구의 변덕에 따라 밖으로 나가던지 아니면 아쉬운 눈빛을 감추며 돌아 서기도 하였다.
  -나 헤엄 못 치잖아?
  -걱정 마. 내 등에 태우고 헤엄치면 돼.
  봉구는 수건을 들고 누나 뒤를 따라 나섰다. 누나의 등을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봉구의 눈을 햇볕이 바늘처럼 따갑게 찔렀다. 그 따가운 느낌에서 어쩌면 복식이가 개울가로 놀러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말이 떠올랐다. 처녀바위가 있는 그 개울 못 깊은 곳에 멱을 감다가 빠져 죽은 처녀 귀신이 살고 있거든. 헤엄치는 남자애들의 다리를 잡아당긴데. 처녀바위 틈 깊은 물속으로 끌고 간 다음에 고추를 톡 따먹고 놓아준데. 그래서 동네에 그것 없는 어른들도 무지하게 많데. 봉구는 손을 바지 속으로 집어넣고 사추리를  만져 보았다. 오줌을 다 눈 것처럼 사추리가 한번 움찔거렸다. 논둑길을 가뿐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누나가 갑자기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나, 안 갈래.
  누나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누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검은 눈동자는, 정말 너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어쩌면 나도 집에 다시는 안돌아 올지도 몰라. 네 맘대로 하렴. 나는 갈 테니까. 하고 말 하는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그놈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지 말자던 강수의 말이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모른다. 봉구는 이맛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터벅터벅 다시 걸었다. 군인들의 작업화 윗부분을 잘라내어 슬리퍼로 만든 누나의 까만 신발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공중을 휘젓는 누나의 하얀 발 뒷굼치가 슬리퍼를 끌고 가는 것인지 발이 담겨서 바삐 가는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처녀바위 개울 못에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햇빛은 튀는 물마다 부서지며 빛났다. 그 중에 복식이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물에 젖어 이마 뒤로 넘겨져 있어 처녀귀신이 전혀 겁나지 않는 아저씨처럼 보였다.
  누나는 치마를 벗고 티셔츠와 팬티차림으로 수영선수처럼 물로 뛰어 들었다. 봉구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처녀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햇볕에 달아 오른 치마 바위가 얄밉게 엉덩이를 따끔거리며 찔렀다. 누나는 개울 못을 몇 바퀴 돈 다음에, 들어오라고 봉구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물 밖으로 고개만 나와 있던 복식이가 봉구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봉구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가야만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등에 업혀. 그리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돼.
  거북이가 바다로 서서히 잠기며 들어가듯, 누나는 봉구를 업은 채로 천천히 개울 못으로 들어갔다. 봉구의 무게로 인해 누나의 하체가 자꾸만 물 밑으로 떨어졌다. 처녀귀신이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따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나의 등에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누나의 두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물위로 쳐 올리고 두 팔은 노를 젓 듯 물살을 갈랐다. 상하 운동을 하는 누나의 허벅지가 가는 진흙을 만지는 것처럼 봉구의 허벅지 안쪽을 간지럽혔다. 물의 부드러움과, 허벅지의 간지러움과, 물 속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두려움 따위로 마음이 물과 밖을 왔다 갔다 했다. 누나 옆으로 자꾸 다가오며 물장구를 쳐대는 복식이 때문에 봉구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갑자기 누나의 몸체가 뒤뚱거리며 한쪽으로 기울어 졌다.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 으로 누나의 몸체를 얼른 잡았다. 봉긋이 올라와 있는 누나의 가슴이 손에 한웅큼 느껴져 왔다. 누나가 잠깐 동안 몸을 움찔 거렸다. 봉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누나의 목이나 팔을 잡아도 야릇하게 더 간질간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울가로 나오자 복식이도 뒤따라 나왔다. 복식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누나와 봉구의 주위를 맴돌았다. 봉구는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누나의 젖은 티셔츠 가슴 언저리를 흘끔 보았다.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봉긋한 굴곡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가슴의 꼭지도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귀를 한쪽으로 기울여 조약돌에 대고 귓물을 빼던 복식이도 얼굴은 누나를 향해 있었다.
  -너, 엿 먹을래?
  누나는 봉구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바위틈에 숨겨 놓았던 종이를 부스럭 거리며 펼쳤다. 군인들이 쓰는 누런 휴지로 둘둘 말린 엿이 누렁이 똥처럼  누워있었다.
  -싫어. 누나나 실컷 먹어.
  누나는 의아하게 봉구를 한참 쳐다보더니 엿을 하나 들어서 ‘와작’하고 깨물었다. 봉구는 처녀귀신이 그것을 따 먹을 때 저런 모습으로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엿 조각 하나를 뿌리치는 봉구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어 주었다.  단맛을 외면하려 해도 더욱 봉구의 입안에서 살살 녹으며 굴러다녔다. 삼키지 않으려 입안 가득히 물고 있어도 단물이 목구멍으로 자꾸만 기어 내려갔다.
  -경수한테 말해. 결투를 신청 한다구.
  복식이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치마바위 꼭지에 올라서서 봉구에게 소리쳤다. 누나는 복식이를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다시 엿을 ‘와작’하고 깨물었다.
  -집에 안 갈 거야?
  봉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는지 주위에 있는 애들이 돌아보았다. 누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봉구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조금만 더 놀다 가자.
  복식이가 말했지만, 봉구는 들은 척도 안하고 까만 고무신을 양손으로 집어 들고는 박수를 치듯이 몇 번 후려갈겼다. ‘딱딱’하는 소리가 봉구의 가슴을 ‘툭툭’ 건들며 지나갔다. 복식이는 ‘씨익’ 한번 웃고는 개울 못으로 다이빙을 했다. 복식이의 발뒤꿈치가 봉구 키 높이의 물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봉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벼이삭의 파도처럼 봉구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분함이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양손에 고무신을 들고 앞장서서 터벅거리며 걷는 봉구에게 누나가 말했다.
  -내가 업어 줄까?
  싫어.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 왔지만, 그때, 왜 봉구는 허벅지를 간질이던 누나의 허벅지가 갑자기 생각났을까. 봉구는 못 이기는 척 엉거주춤 서 있었고 누나는 봉구 앞에 등을 내밀었다. 봉구는 누나의 등에 몸을 밀착했다. 누나의 등은 넓고 안락했다. 가슴에 요동치던 분기가 야릇하게 사라졌다.
  -봉구야. 왜 그렇게 금방 집에 가자고 했어?
  봉구는 갑자기 침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처녀귀신 땜에.......
  -그런 건 없어.
  처녀귀신에게 따먹힌 동네 어른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 증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누나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너, 사람이 왜 죽는 줄 아니?
  누나의 등을 통해서 나오는 목소리가 좁은 방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려대며 봉구의 귀를 간지럽혔다. 봉구는 자신의 목소리도 귀 잔등에 울려 퍼지는지 나직이 말해 보았다.
  -몰라.
  그리고 다시 크게 말해 보았다.
  -몰라. 몰라.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이야.
  봉구는 아이들과 함께 낭떠러지 쪽으로 냅다 달려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멈추지 않으면 죽는다는 누나의 얘기는 백번 천 번 지당한 말씀이었다. 누나의 등에 입을 바짝 대고 말해 보았다.
  -날아오를 수도 있어.
  그제야 누나처럼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나비가 된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한번 날개 짓을 할 때 마다 몸은 키만큼 하늘로 뛰어 오를 것 같았다. 마치 물장구치는 누나의 다리처럼 날개만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의 발걸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떠서 논둑길을 날아가고 있었다. 봉구는 양손으로 날개 짓을 몇 번 해보았다.
  -더 먹구 싶구, 더 갖구 싶구, 더 하구 싶구, 더더더더더.
  누나의 등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방망이가 귀를 울렸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죽게 되는 거야.
  하나도 안 웃겨. 봉구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귀를 더 바짝 등에 갖다 대었다.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누나의 노랫소리가 귀에 멍하니 울렸다. 노래가 더럽게 우울해서 울면서 불러야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흥겨운 노래만 만들지 않을까. 슬픈 노래는 겪었던 슬픔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사람과 세상을 더 우울하게 만들 것이라는 은근한 걱정이 들었다.
  
  봉구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3
  
  화가 난 엄마의 큰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뒤뜰에서 들렸다.
   -아니, 비 올지 모른다고 그렇게 장독대 덮어야 된다고 내가 아침에 몇 번이나 얘기 했어. 너, 이제. 된장에 구더기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엄마가 누나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넓은 양철조각으로 장독을 가리고 서 있던 누나가 방문을 열고 바라보는 봉구를 흘끔 쳐다보았다. 엄마는 국자를 들고 급하게 장독마다 빗물을 퍼냈다. 퍼내는 빗물만큼 엄마는 더 분기를 참지 못했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비 맞는 엄마는  장독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고, 누나는 알 수 없는 뜨거움을 빗물로 식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고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누나는 싸리 빗자루처럼 처마 밑에 마냥 서 있었다. 누나는 잠자코 서 있었지만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밤을...’이라는 노래를 자꾸 부르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들어 와서 저녁 안 먹구.
  방에서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한 번 훔치고는 누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뚜막에 앉아서 누나는 반찬 몇 개를 꺼내 놓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빨래를 개키는 누나 옆에 슬쩍 앉았더니, 누나가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누나의 흔흔한 눈빛은 저녁마다 처마기둥에 목줄을 묶을 때  ‘끄응’ 소리를 내는 누렁이의 슬픈 눈매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오늘 밤에 강가로 별똥 떨어지는 것 구경 갈까?
  누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빨래만 개키다가 봉구를 다시 보았다. 비 오잖아. 하는 소리 같았다. 비가 벌써 그치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해.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 대고 말을 하면 하늘이 대답 할 때 별똥이 떨어지거든. 별똥이 땅에 닿기 전 소원을 빌면 뭐든지 꼭 이루어진데. 봉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누나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래?
  메뚜기가 ‘탁’ 뛰 듯, 개구리가 놀라서 뛰어 오르듯, 누나의 눈동자가 물기를 깨고 반짝이며 빛났다.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와 자신의 적당한 상상을 덧붙여 주절거린 얘기가 누나에게 감동을 먹이다니. 봉구는 별똥이 수없이 떨어지는 벌판을 벌써 뛰어나가는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비가 그친 검푸른 하늘에는 셀 수 없는 별들이 무수히 반짝였다. 밤이 되니 달과 별들이 슬금슬금 땅으로 전부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물먹은 상큼한 공기는 숨을 들이킬 때마다 알 수 없는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누나를 슬쩍 곁눈질 하던 봉구는, 갑자기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봉구는 알 수 없는 꽃향기 때문 일거라 생각 했다.
누나는 가끔 고개를 들어 별을 세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가끔씩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푸른 광채를 띤 별똥이 하늘을 반쪽으로 가르며 사격장 산 뒤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누나, 지금 소원 빌었어?  
  누나는 금세 잠에서 깬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 소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봉구는 왠지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같이 답답해져 왔다.  
  -소원이 뭔데?
누나는 고개를 돌려 봉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나의 눈에 별이 반짝였다. 앞 산 너머로 별똥이 또 하나의 선을 그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봉구의 물음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별똥은 왜 떨어지는 걸까?
봉구는 풀죽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이 죽는 거야.
-별도 죽어?
누나는 다시 또 입을 다물었다. 봉구는 또 묻고 싶었지만 달빛에 비친 무표정한 누나의 하얀 얼굴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춥다. 이제 별똥 봤으니까 집에 갈까?
  봉구의 물음에 누나는 부스스 앉으며 등을 내밀었다. 봉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누나의 목을 안으며 등에 업혔다. 누나는 집으로 돌아 갈 생각이 없는지 논둑길이 끝나고 허연 바위들이 어둠을 비집고 듬성듬성 보이는 강가 쪽으로 계속 걸었다.
팔에 닿는 누나의 목 촉감이 강바람처럼 부드럽고 매끈했다. 목뒤로 아카시아 꽃향기 같은 것이 솔솔 피어났다. 누나는 힘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빨리 어른이 되어 이곳을 떠나게 해 달라고 빌었어.
  봉구는 평야의 반을 뚝 갈라놓던 낭떠러지처럼 누나와 자신 사이에 크나큰 강물이 갑자기 생겨 갈라놓는 것 같았다.
  -내가 엄마하고 약속 한 것이 있거든.
  누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엄마 말야. 죽은 엄마.
  누나의 떨리는 목소리에 봉구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귀가 간질거리고 강바람에 이마가 자꾸 차가워졌다.
  며칠 동안 비가 쏟아 붓는 것처럼 내리더니, 그날 밤, 집채 만 한 바위덩어리가 지붕을 덮친 거야. 벼락 치는 소리 같은 것에 잠을 자다 눈을 떠 보니 지붕이 뚫리고 무너진 벽사이로 진흙이 성난 파도처럼 밀어 닥쳤어. 엄마의 가슴이 내 얼굴을 막고 작은 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어. 아가. 아가. 빨리 일어나라. 빨리 나가야 돼. 빨리. 나는 부스스 일어나 엄마를 보았지. 엄마의 몸은 뻐얼건 진흙과 무너진 벽 더미에 묻혀 있었고 겨우 얼굴만 조금 나와 있었어. 울부짖으며 손으로 흙을 막 파냈지만 엄마의 머리에는 피가 막 솟구치고 있었어. 손으로 엄마의 머리를 막고 내가 막 우니까, 아가. 빨리나가라. 하는 소리만 해대던 엄마는 ‘빨리 가서 아버지 불러와. 아버지’ 하는 거야. 나는 잠깐 동안 아버지는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 어릴 적에 한두 번 보았던 기억은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엄마가 아버지를 불러 오라는 말에 밖에 나가면 아버지가 있을 것만 같았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무너진 집 밖으로 뛰어 나왔어. 산 밑에 동네로 울부짖으며 아버지. 아버지만 부르며 정신없이 뛰어 갔던 거야. 동네 어른들하고 다시 무너진 집으로 갔을 때는, 이미 우리 집이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체만한 바위덩어리가 무덤처럼 산을 만들고 있었어.
  별똥이 슬픈 푸른빛을 띠고 하늘을 또 지나갔다. 누나는 봉구의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얼굴로 가져갔다. 나 이제 내려서 걸을 게. 누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봉구를 돌아보더니 내려놓았다.
  강가의 허연 바윗돌 사이로 빨간 불이 키가 켜졌다 작아 졌다 하며 주위를 밝혔다. 아이들의 그림자와 큰 바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작은 바윗돌 무덤이 흔들거리며 나타났다가 흐려졌다. 아이들이 깡통 불을 밝히고 가재를 잡는 모양이었다.
  별을 한참동안 세어본 것처럼 눈이 아릿해진 봉구는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한 마리의 가재도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술이 은근히 들었다.  
  
   봉구는 ‘애달픔’을 배우기 시작했다.


5

  버스는 하루에 이평리 쪽에서 두 번, 이평리 쪽으로 두 번씩 지나 다녔다. 주말을 낀 월말이면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동네 인근에 있는 군부대로 면회를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럴 때면 동네는 원색의 옷을 입은 외지의 사람들로 잠깐 동안 들썩 거렸다. 동네에 하나 밖에 없는 경수네 식당은 대목을 맞았고, 아이들은 멋을 한껏 낸 외지의 사람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구경하기 바빴다.
  예쁜 무늬의 양산을 받쳐 든 젊은 여자들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관심을 끄는 구경 거리였다. 머리는 파도를 타 듯 끝을 말아 올리고, 분칠을 했는지, 아니면 서울 여자들은 원래 그런지 얼굴이 조약돌처럼 하얗게 빛났다. 빨간 입술은 얼굴을 더 희게 보이게 했고 흰 얼굴이 빨간 입술을 더 진하게 보이게 했다. 입고 있는 원색의 옷은 화려했지만 무당 옷처럼 어지럽고 천박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봉구는 그 여자들이 나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색깔로 치장을 한 나비의 날갯짓이 눈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세상을 어지럽힐 것만 같았고 누나를 언젠가는 물들일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의 외출을 허락 받은 군인들과 면회 온 사람들은 식당이나, 식품점, 동네 인근 개울가, 혹은 들판으로 흩어져서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시끄러웠다. 그럴 때면 누나는 처마 밑에 서서 꿈을 꾸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왜 나를 벗어 날 수 없는 나로 태어났을까. 어느 날 깨어 보니까 내가 나로 되어 있었어. 제대하는 군인 따라 서울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잠꼬대 같은 누나의 이해 할 수 없는 말이, 봉구는 낭떠러지에 서서 건너편 평야를 바라다보면 가슴 한 가운데로 훠엉하니 지나가던 쓸쓸한 바람처럼 아릿하게 전해져 왔다.
  -야. 서울 것들 연애 하는 것 구경 가자.
  봉구는 경수가 말하는, 연애. 라는 말이 좀 생소 하기는 하였지만, 부러워해야 할 것 보다 숨겨져 있는 음흉한 그들의 치부가 왠지 아릿아릿 눈에 잡히는 것 같았다. 모반을 꿈꾸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경수는 쇳조각을 줍던 사격장 뒤의 개울을 건너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깊은 곳으로 들어 갈수록, 뒤따르는 아이들은 음흉한 웃음을 히죽 히죽 웃어 대었다. 경수는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빨간 양산을 보자마자 자세를 낮추며 자기의 입술 한 가운데로 검지를 바짝 세웠다.
  쉿.
  아이들은 바짝 엎드려서 침을 삼키며 빨간 양산을 노려보았다. 빨간 양산 밑쪽으로 군인과 여자가 앉아 얘기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봉구는 빨간 양산 밑에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음흉하고도 누나의 허벅지 촉감 같은 간지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군인의 팔이 여자의 허리를 감는 것이 보였고 양산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이 하나가 경수의 귀에 대고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노려보았다. 소낙비가 쏟아지기 전 찌뿌드한 하늘처럼 아이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이 구겨졌다.
  봉구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 내렸지만 팔뚝에는 자꾸 소름이 돋았다.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는 밍밍함을 참지 못한 알 수 없는 음흉한 웃음이 목구멍으로 실실 새어 나왔다. 수풀로 가려진 좁은 오솔길 양쪽의 억새풀을 묶어 놓고 뛰어 가는 아이들의 발이 걸려 나자빠지는 것을 숨어서 기다릴 때도 이렇게 목구멍에서 바람이 새지는 않았었다. 군인과 여자가 껴안고 무엇을 하는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군인의 얼굴에 빨간 봉숭아물이 여기 저기 발라져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여자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산이 갑자기 옆으로 비껴 떨어졌고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발견 하였다. 단추가 풀려 앞가슴의 속살이 훤히 보이던 서울 여자는 오줌을 참던 아이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일초 남짓 한 그 순간, 봉구는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의 술래가 스톱이라고 소리 친 듯이 모두의 동작이 얼어붙었다.
  -도망가자.
  경수의 그 말이 없었다면 아이들 모두는 얼이 빠져서 그대로 엎드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뒤돌아 뛰어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었는지, 넘어 졌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다시 튀어 오르듯 일어나 뛰었으니까.
  봉구에게는 동네에서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푸른 제복의 군인은, 짧은 머리에 새까만 얼굴, 상스런 말투, 자유롭게 다니는 동네 사람들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눈에 항상 보여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누렁이 같은 존재였다. 그런 군인이 서울여자를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만지던 모습이나 서울여자의 구겨졌던 얼굴에 담겨 있던 황망함을 누나가 보았다면, 꿈꾸듯 하던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언젠가 거름을 모아놓는 ‘똥통’ 에 빠졌던 복식이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 하던 모습을 보고 흐물흐물 올라오던 웃음을 애써 참던 기억과도 같은 것이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점잖고 귀하게 군림하던 분위기나 존재 따위가 어느 한 순간 부서져 내리며 실체를 내보이는 그 순간, 짜릿한 통쾌함이 온 몸에 퍼져 오르는 것이었다.
  개울을 건너 군인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들은 바위틈 사이로 엉거주춤 모여 앉았다.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었고 움직일 때마다 옷에서 먼지가 풀석 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아이들은 숨을 고르며 깨진 무릎을 보았고, 팔뚝 여기저기에 나뭇가지로 생채기 난 상처를 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하나 둘 히죽 히죽 웃기 시작했다. 헤헤. 헤헤헤.......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멈춰졌다. 언제 왔는지, 복식이가 험악한 얼굴로 아이들 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누군가 한마디라도 말을 하면 복식이의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아서 아이들은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복식이는 아이들을 차례로 노려보았고 경수는 복식이의 눈초리를 피해 발로 돌을 ‘툭툭’ 차고 있었다. 봉구는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복식이가 자신에게는 험악하게 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전부 무릎 꿇어!
  복식이의 화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그대로 서있자 복식이가 가만있지 않았다.
  -어쭈구리. 니들 한번 허벌나게 맞아볼래.
  그 말에 잔뜩 겁먹은 얼굴로 강수가 부스스 무릎을 꿇자 아이들이 하나 둘 복식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는 경수와 봉구 뿐 이었다. 경수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고 봉구는 왠지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복식이가 주먹으로 경수의 얼굴을 갈기자 경수가 복식이를 붙잡고 뒹굴었다. 겁먹은 아이들은 슬금슬금 피하며 구경을 했지만 강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복식이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틈에 경수는 넘어진 복식이를 발길질하기 시작했고 강수는 복식이의 허벅지를 입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복식이는 꼼짝없이 형제들에게 질펀 얻어맞고 있었다.

  봉구는 ‘비겁’을 배우기 시작했다.


  5
  
  네가 갖고 싶은 것 무지하게 많을걸. 하고 봉구를 불렀던 복식이는 봉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복식이 집 입구에 널려 있는 헌 타이어 더미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로 된 기계 조각들, 타이어 림, 쇠망치, 녹을 한껏 먹은 오래된 공구들, 부서진 군용 실탄 박스, 잘려진 철사 조각 등 이 눈을 어지럽혔다.
  아랫동네 무당집의 열려진 방 문 사이로 드러나 귀신처럼 움직이던 셀 수 없는 촛불의 바다와, 신주 색깔의 눈 없는 불상, 천장을 어지럽히며 깃발처럼 걸어 놓은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이 넘실대던 그 방이 생각난 봉구는, 사추리를 한번 움찔거렸다.
  복식이는 입구에서 슬쩍 안의 동정을 한 번 살핀 다음 자기를 따라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들어서자마자 썩은 기름 냄새와 군인들이 쏟아내던 느끼한 땀내 같은 것이 범벅되어 한꺼번에 ‘훅’하며 쏟아져 나왔다.
  미군 군용 텐트로 된 찢어진 지붕 사이로 하늘 조각이 듬성듬성 보였다. 지붕을 사방으로 받치고 있는 찌그러진 선반 과 쇠기둥 사이로 비추는 햇빛 조각이 그런대로 음침한 실내를 어둡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음습한 바닥은 기름에 절어 있어, 쥐어짜면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먼지 묻은 천막 조각들과 밧줄이 한 쪽에 쌓여 있었다. 얼기설기 지붕을 지나간 쇠 파이프에 걸려 있는 녹슨 공구들 사이로  창호지와 대나무로 만든 큰 밥상만한 연이 한쪽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갖고 싶은 것 하나 골라 봐.
  복식이는 봉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 많은 것들 중에 내 맘에 드는 것을 하나 가질 수 있다니. 봉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렸다. 그중에서 군용 침대 옆에 쌓여져 있는 조그만 바퀴들이 신기해 보였다. 긴 나무 끝에 둥그런 깡통 뚜껑의 가운데에 대못을 박아 굴렁쇠 놀이를 하던 것이 생각나서 바퀴를 갖고 싶기도 했다. 겨울에 썰매로 탈 수 있는 천막 기둥 옆에 쌓아 놓은 군용 실탄 통 뚜껑이 갖고 싶기도 하고 그 안에 담겨진 신주를 주머니 가득 갖고 싶기도 하였다.  
  봉구는 매달려 있는 연을 집어서 만져 보았다. 단단한 날개를 갖고 있는 새처럼 금방이라도 창공으로 박차고 올라 설 듯 듬직했다. 갖고 싶었지만 복식이가 그것만큼은 줄 것 같지 않았다. 슬그머니 다시 내려놓았다. 복식이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 것 같아 마음은 바빠졌지만 딱히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했다.
  복식이는 낡은 책상 뒤쪽 깊숙한 곳에서 조그만 나무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 속에는 책이 몇 권 담겨있었다. 책 속에 파란 지폐 몇 장이 은행 낙엽처럼 끼워 있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난 서울 갈 꺼다.
복식이는 누군가와 단단한 약속을 하듯이 혼자 중얼거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빨리 골라.
복식이는 구석 쪽의 낡은 창살문과 봉구를 번갈아 보며 보챘다. 방문이 삐그덕 거리며 열렸다. 낡은 군용 작업복을 걸친 광대뼈가 튀어 나온 남자가 고개는 바닥으로 떨구고  치켜 뜬 눈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봉구는 들고 있던 작은 바퀴를 얼른 내려놓았다. 하얀 눈자위가 고양이 눈처럼 무서웠다. 동네 사람들이 잘 상대 하지 않는 복식이 아버지였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뭘 또 훔쳐다가 팔아 먹을려구.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훔치기는 뭘 훔쳤다구 그래!
복식이의 발길질에 바퀴가 이리저리 굴러 나갔다.
-너, 신주 주워 오는 거, 여기서 훔쳐다가 다시 갖고 오는 것 내가 모를 줄 알아?
봉구와 복식이를 노려보던 그는, 말없이 주저앉더니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구리줄을 집어서 팔꿈치와 손에 걸고는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구리줄은 동그랗게 감기기 시작 했지만 구리줄이 그의 팔과 팔꿈치를 서서히 벗어나 목으로 칭칭 감겨 버릴 것만 같아서 봉구는 아랫도리를 다시 움찔했다.
  복식이가 나가자는 눈짓을 하며 봉구를 툭 쳤다. 봉구는 차가운 공기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누나가 말했던 차가운 공기가 이런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식이는 언제 들고 나왔는지 바퀴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어 봉구에게 내밀었다. 복식이 아버지의 노려보던 하얀 눈이 어른 거렸다. 그렇지만 봉구는 그것을 얼른 받았다. 바퀴는 먼지에 절어서 누렇게 변해 있었다. 봉구는 바퀴 안쪽을 침으로 발라서 옷으로 열심히 닦았다.
-이제, 우리는 같은 편이다.
복식이의 말에 봉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구가 순순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자신이 붙었는지 복식이는 한마디 더 붙였다.
-니 누나하고도....... 전부 같이 놀자.
  봉구는 바퀴가 혼자 굴러서 어디론지 막 달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바퀴를 던져 놓고 집으로 가버릴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바퀴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구가 엉거주춤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복식이가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서울 가면 아주 보지도 못할 텐데.......뭐.......
  봉구는 복식이가 금세 서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주’라는 말에 품었던 의심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러면, 내가 아끼는 연도 너 줄게. 잠자리비행기 보다 더 높게 뜨는 연이야. 실에다가 초칠을 며칠 동안이나 했는데........
  봉구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봉구는 ‘거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6
  
  마을 어귀의 아카시아 나무마다 꽃이 피었다. 마을 어귀가 보이는 고갯마루까지 진한 향기가 전해졌다. 아이들은 긴 막대로 가지를 꺾어 꽃줄기를 입으로 훑었다. 달콤한 꽃들은 입안 가득히 남고 가지는 이내 땅바닥으로 던져졌다. 입 안을 꽉 채운 꽃은 침이 묻으면 금세 눈 녹듯 작아져서 야릇하게 허전했다. 야릇한 허전함은 아이들에게 다시 꽃줄기 훑기를 반복하게 했다.
  신작로에서 아이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봉구는 궁금해서 슬쩍 무리에 끼어들었다. 아이들은 두 마리의 개를 향해 웃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봉구는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누렁이가 어느 똥개하고 꼬리가 서로 붙은 채로 둘러싸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누렁이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붙어 있는 꼬리가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돌을 던져도 ‘끄응’소리만 내던 누렁이가 봉구를 보더니 침을 흘리며 혀를 밖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봉구는 머리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렁이를 죽도록 패주고 싶었다. 누렁이의 엉덩이를 걷어찼더니 엉뚱하게도 누렁이와 꼬리 붙은 똥개가 물려고 달려들었다. 피하느라 나자빠진 봉구를 보고 아이들이 ‘와아’하고 웃어 재꼈다.
  봉구는 얼른 일어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피해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놈에 누렁이 때문에. 누렁이. 에이 나중에 가만두나 봐라. 봉구는 그 생각만 하면서 뛰었다. 몇몇 아이들이 놀리며 봉구를 쫓았고 그중에는 경수도 보였다. 봉구는 뛰던 것을 멈추고 다시 걸었다. 창피했던 만큼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겨났다.
  -야. 너 간첩이지?
  경수가 빈정대며 봉구 뒤에서 소리쳤다. 복식이와 자기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의미로 다그치는 것이었다. 봉구는 못들은 체 하며 아무런 대꾸 없이 신작로에 돌부리를 발로 차면서 걸었다. 경수가 봉구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너, 내말이 안 들려?
  경수의 뜨거운 콧김이 봉구의 눈썹에 닿았다. 비릿한 역한 냄새가 났다. 경수의 부라린 눈매에 봉구는 눈이 아릿해왔다. 아이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숨을 죽였다. 싸움을 절대 해서는 안 돼.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 될 것 같으면 선제공격을 해서 상대방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해. 딴 전 피우는 척 하다가 이마를 상대방의 코에 겨누고 박치기를 해버리는 거야. 상대의 코피가 터지게 되면 싸움은 거의 끝나게 되어 있어. 비겁하지 말아야 하지만 싸움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 복식이가 경수 형제에게 엄청 두들겨 맞은 날 누나가 핏대를 세우며 한 말이 생각났다.
  -나 간첩 아냐. 나는 편 가르는 것도 싫고, 어느 편도 아냐.
  전혀 예상치 못한 봉구의 반응에 아이들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경수도 얼빠진 표정으로 잠시 멈칫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봉구는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나게 윽박지르는 경수가 개구쟁이 강수로 보였고 콧물을 흘리고 있는 먹다 남은 감자 껍질처럼 지저분한 아이들의 모습도 우스꽝스러웠다.
  옆으로 비켜서 다시 돌부리를 차며 걷는 봉구를, 아이들은 엿이 이빨에 붙은 것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쳐다보았다. 경수가 약 오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쟤 누나하고 복식이 하고, 헤헤.......
  아이들도 ‘헤헤’ 거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울 것들 연애하던 것 구경하고 웃던 음흉하고도 비겁한 웃음이었다. 꼬리가 열 개 달린 복식이가 꼬리 달린 누나의 뒤를 쫓아 뛰어 가는 모습이 봉구의 눈  앞에 어른 거렸다. 복식이의 꼬리가 흔들거려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봉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경수가 바짝 다가와서 섰다.
  -어쭈구리 한 번 해 보자는 거야?
  경수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의 이마가 경수의 콧잔등을 박아 버렸다. 머리가 갑자기 비어 버린 것 같은 봉구에게 조청 같이 끈적끈적한 것이 온 몸을 한번 뜨겁게 달구고 나서 경수를 단번에 박아 버린 것이었다.
  경수는 뒤로 나자빠졌고, 누나의 말대로 경수는 코피가 터졌다. 경수는 믿기지 않는 듯 얼른 일어나려다가 코피를 확인하고는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봉구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믿겨지지 않는 듯 뒤로 물러서서 봉구의 눈치를 살폈다.
  -한번만 더 까불면 주욱을줄 알아.
  봉구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돌아서서 걷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등 뒤에서 큰 바윗덩어리가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이 불안했다. 걷는 것인지 땅이 발밑을 막 지나 가는 것인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경수가 다시 한 번 덤비면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수에게 감히 덤빌 생각을 하다니. 경수의 코피. 얄미운 누렁이와 누나. 그리고 누나와 복식이. 쉴 새 없는 생각들이 신작로에 깔려 있는 돌부리처럼 지나쳤다. 지나치는 것만큼 마음도 바뀌어 갔다. 아릿거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간질간질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금세 터질 것만 같은 이 간지러움. 다리와 어깨는 후들거리는데 속은 정반대로 뜨거워서 이를 악물어도 덜덜거리며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히히히히.......이제, 내가 대장이다.
  집에 돌아 온 봉구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숨이 벅차서 누워도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복식이는 경수에게 두들겨 맞았고, 경수를 내가 한 방에 보냈으니 당연히 이제 내가 대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해야겠는데 가장 중요한 누나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봉구는 ‘분출’을 배우기 시작했다.


7

  연줄을 감을수록 하늘에 떠 있는 연은 더 높이 날고 싶어 했다. 연이 날아가고 싶은 만큼 가도록 연줄을 계속 풀어 주었다. 연은 강을 건너 건너편 평야의 하늘을 끝없이 날아 올라갔다. 연줄을 다 풀어 주었을 때, 마치 큰 날개를 단 새처럼 봉구마저 하늘로 끌어 올릴 것만 같았다. 봉구의 발이 허공으로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닿기를 반복했다. 봉구는 연 줄을 잡아당겨 몸에 칭칭 감고 낭떠러지를 박차고 날개 짓을 시작했다. 나비처럼 하늘로 올랐다. 서 있던 낭떠러지와 멀리 보이는 동네가 조그맣게 보였고 죽은 듯 퍼렇게 흐르던 강물이 실개천처럼 보였다. 건너편의 광활한 평야에 신주 빛의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고 끝이 안 보이는 평야의 끝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봉구를 묶어놓은 연줄이 갑자기 ‘딱’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렸다. 연은 건너편 평야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가고, 봉구는 퍼런 강물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봉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봉구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은 조용했고 방안은 푸르르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학교에 가야 할 아침인지 한 밤중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밖을 나서니,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적막했다. 처마 밑에 누워서 자신의 꼬리 밑을 핥고 있던 누렁이가 꼬리를 두어 번 흔들고는 이내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길게 누운 누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봉구는 아무도 없는 집안이 궁금해서 뒤뜰과 부엌을 오가며 살폈다. 방문 마다 열어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쌀을 놓아 둔 광문도 열어보았다. 부스럭 거리는 쥐 소리만 났다. 문 옆에 매달아 놓은 연이 허옇게 빛나고 있었다.

  전부 어디에 간 것일까.

  하늘은 푸르르하고 땅은 검푸르 했다. 논둑길은 발길이 논바닥에 빠지지 않을 만큼만 보였다. 바람이 평야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는 쓸쓸하고도 삭막했다. 벼이삭의 누런빛이 검은 땅에서 가끔씩 솟았다. 그럴 때마다 봉구는 소름이 돋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느 때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가만히 두나 봐라.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냐. 분명히 그곳에 있을 거야. 두 사람이. 바위틈새에 깡통 불을 밝히고 헤헤 거리고 있을 거야.  
  누나와 같이 별똥 구경을 보러간 자리와 아이들이 깡통 불을 밝히고 가재를 잡던 냇가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처녀귀신이 도사리고 있는 처녀바위까지 뒤져 보았다.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가 집밖까지 크게 들렸다.
  -그 계집애 서울로 도망간 것이 틀림없어.
  어휴 이를 어째, 하면서 벽을 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 애 에게 돈 심부름을 시키냔 말야.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고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받았다.
  -걔가 남에 자식이야?  당신 자식이잖아.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봉구는 뜬금없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봉구는 집을 나와 동물 울음소리가 나는 낭떠러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낭떠러지에서 무엇인가를 꼭 만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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