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쿠바 한인의 후예를 찾아서 5 (민혜기)] 쿠바 한인의 후예를 찾아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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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46회 작성일 10-06-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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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후예들이 살았던 모양의 집

▲ 에네켄 농부 한인후예들의 기념비에서 마르타 임씨의 여기에 얽힌 역사와 정황 설명을 듣고 있다
엘바로 마을 애니깽 농장을 향해
마탄자스 거주 한인들과 이별의 아쉬운 정을 뒤로 하고 우리는 서둘러서 떠나야 했다. 어두움이 깃들기 전 에니껭 농장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르타 임씨는 마탄자스에서 4Km 떨어진 외딴 마을 엘보로 에니껭 농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초라한 가옥들과 잡초만이 욱어진 폐허의 불모지 땅이 가는 길 목 마다 끝이 없다.
마침내 콩크리트로 지어진 기념비 앞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건너편엔 제법 나무가 있고 울타리가 쳐져있는 오래 된 가옥 앞에 세 여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 기념비와 더불어 얽혀있는 한인후예들의 고난의 역사를 듣고 싶어 했다. 마르타 임씨는 생생하게 지난 역사를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주었다.
‘선조들이 경작했던 에네켄 농장은 독일인들이 와서 운영했습니다. 저기 초라히 보이는 집 모양이 선조들이 살던 곳입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저 문이 한글학교와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었죠. 지금은 쿠바인들이 살고 있기에 내부는 보기가 힘듭니다.’
마르타 임씨는 1997년 ‘쿠바의 한인들’이란 책을 펴낸 일이 있다. 쿠바한인 이민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학자다. 남편인 쿠바 역사학자인 라올 루이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을 김운영 취재기자에게 보여주어 읽게 한 것은 쿠바한인 역사를 배우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한국일보 김운영 취재기자의 기획르포‘쿠바의 코레아노’참고 바람)
나는 유심히 기념비 안 석판에 쓰여진 글을 한 줄 한줄 읽어 내려갔다.
‘여기 “엘볼로”에 1921년 이민으로 온 대부분의 한인들이 쿠바유일의 전통한인촌을 이루어 살면서 에니껭 수확에 힘쓰는 한편 고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한국 학교를 세우고 교회와 한인회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는데 노력 하였다. 이들 후예들이 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 사업은 씨애틀 한인장로교회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기념비 주변엔 어린 에니껭이 빙 둘려 심겨져있다. 토실토실 살찐 어미닭과 병아리 떼, 연신 땅에서 무엇인가 쪼아 먹고 있다. 자연이 주는 벌레와 씨앗들이 저들의 양식이겠지. 인간이 땀 흘려 가꾸어야 할 채소밭이나 농사에 관심이 없는가 주변은 황폐한 땅으로 그냥 버림받고 있다.
한국에서‘에니깽’으로 불리는 에네켄은 헤너킨(Henerquen)의 멕시코식 발음이다. 멕시코 원산의 다년생 초본으로 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열대 식물이다. 우리 말 이름으론 잎 모양이‘용의 혀’ 같다고 해서‘용설란’으로 불리고 있다.
에네켄을 원료로 밧줄과 로프를 만드는 일은 두 가지 공정을 거쳤다 한다. 하나는 농업 공정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 공정이었다. 한국인들은 농업 공정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 에네켄은 다 자라는 데 몇 년이 걸렸고 수확기에 이르면 잎의 아래 부분을 잘라내 밧줄과 로프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에네켄 재배는 자연히 섬유산업의 발달로 쇠태 되면서 1957년 카스트로 혁명이 일어나면서 한인 농부들은 각각 흩어져 쿠바의 주요 도시로 흩어졌다 한다.
그들은 쿠바 땅에서 88년의 긴 세월동안 베일에 가려 외톨이로 오늘날 까지 희미한 한민족의 정체성을 끌어안고 쿠바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분명 우리에겐 미지의 땅이다.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할까. 또 앞으로 이들의 역사는 누가 어떻게 쓰게 될 것인가. 세계 각처에 흩어진 한 민족들의 고난의 행진이 어찌 이곳에만 있을까만은 캐나다 이민 일세로서 이들을 찾아 나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땅을 스스로 선택해서 이민의 길로 들어섰다면 이들은 고난 받는 한인의 후예로 훨씬 열악한 삶의 조건을 아무 말 없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인 방랑자로서 이 곳 까지 흘러 들어오지 않았던가.
1902년 좀 더 잘 살아보자며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족과의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이 험한 길을 희망에 부풀어 배에 올라탔을 청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진짜 농사꾼들이 왔었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그 억세고 질기기만 한 가시 붙은 선인장을 잘라내고 그 속에서 섬유질을 뽑아내며 배고픔과 외로움과 싸우며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할 거란 것 상상이나 했을까?
분명 그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고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겠다는 각오와 결의로 고국을 떠났을 것이다. 4년간의 계약 노동이 끝나면 가족들께 금의환향은 못 된다 해도 그들의 주머니엔 먹고 살 노동의 대가가 두둑이 들어있게 될 거란 소박한 바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내 조국이 일본사람들의 통치 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에 그 절망감인들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조국 대신 척박하나 귀국 길 대신 쿠바 땅을 삶의 터로 잡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2백 80여명의 조상들이 뿌려놓은 천 여 명 미만의 ‘쿠바노 코리아노’ 들의 삶의 현주소를 비록 겉모양으로나마 확인 하는 마음들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이민 정착의 역사는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
누가 이 책임을 질것인가. 결국 내 조국의 정부가 적어도 여기에 대한 관심과 이들의 자존심의 회복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보일 때 이들은 비로소 우리에게도 자랑스런 모국이 있다는 희망으로 열악한 환경에서나마 한국인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발걸음이 비록 일회용 화장지에 불과 할지라도 이 작은 베품이 고통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 왔다는 순수한 동기만은 이들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다.
쿠바한인들의 실정이 온 세상에 알려졌으면 바라는 마음 또한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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