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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모리스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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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326회 작성일 12-02-22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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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윌리엄 로빈슨은 바위 정원(Rock Garden)을 제창했다. 알프스산맥을 재현한 이 작은 정원은 곧 일대 붐을 형성하면서 영국 안에서 유행한다.
그가 쓴 『야생정원』에는 그의 정원관이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자면, 정원이 설계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고, 꽃의 색과 잎, 식물의 모습, 자연의 성질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내성이 강한 외국산 식물을 특별한 보호 없이도 잘 번식할 수 있는 조건 아래 심는다고 하는 로빈슨 류의 사고방식이 근대정원의 근본적인 원칙이 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의 화단에 토착식물과 외래식물을 섞어 심고, 화초 사이에 구근 식물을 심어 순화시키기도 하면서 식재에 자연스러운 취향을 불어넣기도 했다.
로빈슨은 1871년에 주간지 『가든』을 발간하여 대중적 지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숲, 바위, 물, 초원이 있는 정원을 원하는 로빈슨의 이론은 신종 식물의 풍부한 공급과 맞물리면서 국민적인 원예정원 붐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1883년에 펴낸 『영국화원』(English Flower Garden)은 저자 생전에 15판을 거듭하면서 정원에 개인적인 표현력을 꽃피우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와 같은 로빈슨의 영향으로 정원은 세련되고, 자연환경에 대한 배려도 중시되었다. 이로써 식물상호간의 관계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대소 식물의 배치, 식물의 형태, 잎의 색깔 등을 고려하여 섬세하게 완성시킨 새로운 양식이 생태계에 대한 관심과 함께 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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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거트루드 지클은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정원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1880년대에 로빈슨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1889년에 건축가 에드윈 라디얀즈와 만났는데, 지클은 그의 협력에 의해 정형주의의 틀 안에서 로빈슨의 자연파적 사고방식을 발전시키는 재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토지에 원산지의 수목을 이용하여 정원 디자인과 주위의 자연환경을 연결하는 로빈슨파의 지클은 정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히며, 라디얀즈가 설계한 엄격한 건축적 틀에서 이루어진 식재도 그녀의 천부적 재능을 느끼도록 한다.
그녀는 베르에포크의 넓은 정원에 있는 벽을 배경으로 한 네모난 화단에도 손을 가하면서, 독특한 색조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프랑스 화학자 미셀 슈블르의 색채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연속적인 단색 화단을 꾸미고, 나아가 따뜻한 색, 또는 찬 색의 보색을 점증적으로 배치한 경계 화단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근대 정원을 논하자면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이끈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대량생산의 공업제품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생겨난 이 운동은 중세 직인의 작업에 대한 재평가 등, 영국의 오랜 전통으로의 복귀를 호소했다. 이는 정원의 세계에서 고딕 가든 숭배를 불러일으키고, 외국 식물에 눌려 인기가 없어졌던 재래종 꽃을 부활시켰다.
이처럼 에드워드시대의 고전주의는 미술공예운동의 덕택으로 20세기 영국, 유럽, 미국의 정원에 광범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학자와 예술가, 정치가, 정원 애호가들의 다수가 작고도 간소한 가옥과 자연풍의 정원을 지지하는 한편, 부유한 상공업자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계급과 귀족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장엄한 정원을 갖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중심에 있는 윌리엄 모리스(1834~1896)를 특히 정원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물 모티프를 살린 벽지와 정원 등으로 일세를 풍미

석류, 장미, 튤립 등의 식물 모티프를 살린 벽지와 정원 등으로 일세를 풍미하고 오늘날에도 뿌리 깊은 인기를 계속 누리고 있는 모리스는 항상 생활의 세부까지 향기 높은 예술로 채워 넣기를 꿈꾸면서 눈부신 행동력과 다채로운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가족과 보낸 추억어린 집들과 디자인의 이상을 짙게 남긴 건물들은 이를 둘러싼 정원들과 함께 지금도 모리스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그는 런던 교외의 월삼스토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에 영국의 미술 및 사회비평가인 존 러스킨을 알게 되어 그의 영향을 받아 중세를 동경했다. 그는 일찍이 예술에 눈 떠 졸업 후, 건축을 전공할 것을 목표로 했으나, 그 즈음에 알게 된 화가 단테 게이브리엘 로세티의 권고에 따라 회화에 전념하게 되었다가, 이내 장식예술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아낸다.
1801년에 에드워드 번=존즈를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실내장식으로부터 가구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손을 댄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발족한 것을 계기로 벽지, 자수, 태피스트리, 텍스타일,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등의 디자인, 장식, 장정, 인쇄, 시작, 저술과 여러 가지 생활예술에서 걸출한 재능을 보였다. 특히 모리스의 재능이 발휘된 곳은 들장미, 튤립, 인동초, 아네모네, 버들, 데이지 등의 식물문양의 디자인으로서, 이로써 그는 중세 직인들의 수작업에 의해 살아난 아름다운 생활공간의 재현을 이상으로 삼았다. 모리스 내외는 레드하우스를 건축하여 이사하고 1871년에는 코츠월즈 지방의 농촌에 세운 석조건물, 켈름스콧트 마나를 주말의 은둔생활 장소로 빌려 썼다. 그러므로 모리스의 정원에 대한 감각을 살피려면 이곳들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모리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전원풍경 속에서 재능의 원천을 길러왔으니, 지금은 개발되어 주택가가 즐비하지만 모리스 일가가 살던 에섹스주의 월삼스토우에는 에핑 숲이 펼쳐져 있어 그곳에서 태어난 모리스는 유년 시절에 맑은 공기 속에서 자라면서 여러 동물들과 식물들과 자연스럽게 벗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원천이 되었다. 그가 6살에 이사 간 우드포드홀 역시 광대한 영지와 전원지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도 전원풍경 속에 있었는데, 모리스는 그곳에서 학교 수업보다는 학교 부속도서관에서 빌린 양서, 악서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 갔다고 회고한다.
그중에서도 그가 유적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열중한 것은 학교 주변에 있는 유적에서 놀기를 즐겨했던 것과 갚게 연관되면서, 그가 후에 존 러스킨을 만나 중세에 크나큰 관심을 갖게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월터 스코트 경의 일련의 역사소설과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읽으면서 기사들과 상상의 놀이를 펼치면서 그는 성직자를 꿈꿔 옥스퍼드 대학 엑세터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에드워드 반=존즈를 만나 서로 평생의 친구가 된다. 이곳 역시 수려한 정원과 고풍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었는데, 이미 식어버린 영국의 가톨릭 열정에 실망한 이들이 성직자가 되는 희망을 버리고 미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러스킨의 영향이었다. 특히 그가 쓴 『베니스의 돌』제 2권 6장에 해당하는 「고딕의 본질」은 그에게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 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기계라는 근대 병기의 노예가 되고만 현실에 실망한 그들은 중세의 고딕 건축으로 대표되는 직인의 작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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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에게는 예술에 이르는 길은 곧 건축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모리스의 마음속에 시가 깃든 것을 알아챈 반=존즈의 스승이자 라파엘전파의 중심인물이었던 화가 단테 게이브리엘 로세티의 충고에 따라 대학졸업 후 들어갔던 고딕 리바이벌의 기수 스트리트 건축사무소를 그만 두고 로세티의 문하생이 된다. 그와 함께 옥스퍼드 유니온 디베이팅 홀의 벽화 및 천정화 제작에 참여했으나, 프레스코기법에 익숙지 못한 이들의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생애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17세의 제인 바덴과 만난 것이다. 유한 계층 출신의 모리스와 노동자 계층 출신의 제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았으나, 제인은 나름대로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여 모리스가 디자인한 걸게 그림이나 아프리케 자수를 제작해냄으로써 그를 돕기도 했다.
이들이 신혼생활을 위해 새로 지은 저택이 런던으로부터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레드하우스이다.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풍경도 그렇거니와, 순례자들이 들러 가는 고풍한 마을의 역사적인 매력이 그들로 하여금 이곳에 터를 잡게 한 것이다.
실내장식은 온통 로세티와 반=존즈 등 친구들이 담당하면서 가구를 비롯해 일체가 중세풍의 저택을 완성하여, 지금도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는 역사유산으로 그 분위기를 잘 보존하고 있다. 식물을 좋아하는 모리스의 취향에 따라 집 앞 뜰에는 온통 여러 가지 과수와 수목, 그리고 꽃들이 심겨져 있다. 비록 이 곳에서 5년밖에 살지 않았으나, 이곳은 모리스의 장식예술을 향한 다양한 재능이 농익은 곳이기도 하다.
레드하우스뿐만 아니라 모리스가 휴일을 보내기 위해 빌린 별장인 코츠월즈에 있는 켈름스콧트 마나도 그 스스로가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을 정도로 자연과 잘 어울렸다.
두꺼운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면 라임스톤(석회석)으로 지어진 이 별장 부지에 벚꽃과 버드나무, 그리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가 하면, 돌을 깔아 만든 보도 양쪽으로는 장미가 흐드러지고, 현관까지는 기하학적 배치를 갖춘 앞뜰이 전개되어 있다. 하루 종일 새들이 지저귀는 집 앞으로 테임즈 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어 모리스는 이곳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 지금은 모리스기념관으로 활용되어 레드하우스에 있던 가구와 태피스트리 등도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그중 그가 23세 때 중세 교회로부터 전해진 자수 기법을 활용하여 직접 만든 태피스트리가 그의 취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 기법은 아내와 두 딸에게 전수되어 ‘모리스자수’라는 애칭으로 인기를 모았다. 모리스의 영향은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에서도 읽혀질 정도로 우리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히드콧트 마나와 씨싱하스트

코츠월즈 지방에 있는 또 하나의 명물 히드콧트 마나의 정원은 20세기 초에 5헥타르의 농지에 건설되었는데, 작자는 영국에 귀화한 미국인 장군 로렌스 존스트이다.
그는 재능 넘치는 조원가 노라 린제이와도 교우관계를 맺었는데, 두 사람은 협력하여 히드콧트 마나의 정원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원래의 지형은 엄격한 건축의 대상이 되어 변화되었지만, 이 정원은 돌로 만든 작은 집의 계단 부분에서 닫힌 잔디 정원 길과 몇 개로 구분된 작은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일련의 작은 정원은 무성하게 살아있는 멋과 미적으로 조작된 아름다움의 조화로 돋보인다. 그들은 서두에서 말한 거투르트 지클의 점증적 색채기법과 통일된 구성을 뛰어넘어 담장과 잔디의 카펫을 배경으로 직감적인 식재를 시행했다.
로맨틱한 폐허라고 일컬어지는 씨싱하스트는 1930년에 귀족 출신의 시인 피터 샤크빌 웨스트와 정치가로서 소설가이기도 한 하롤드 니콜슨의 소유가 되었다. 교양과 정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씨싱하스트는 새로운 영국정원의 모델이 되어 세계각지로부터 방문하는 애호가의 숫자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2헥타르의 작은 정원은 건축적인 공간조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존스트가 히드콧트에 설계한 일련의 작은 정원과도 공통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신이 두 개의 정원의 독창적인 식재를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히드콧트는 이지적이고, 씨싱하스트는 작자의 치밀한 성격을 반영한다. 가족이 사는 켄트주의 17세기 건물을 사랑했던 피터는 후에 르네상스의 도시 휘렌체와 페르시아를 꿈속에 그리면서 야생적인 풍경을 비추는 꽃들과 낙원을 생각하는 정원에 매료되었다. 씨싱하스트의 경우, 엄밀한 설계를 담당한 니콜슨이 피터가 필요로 한 틀을 짜내는 데 성공했던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건설된 이 정원은 질서와 미의 상징, 문명과 평화가 몸을 깃들이 숨어있는 집이라 할 만하다. 씨싱하스트의 화이트가든이 이를 대표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밖에도 장미원, 과수원, 그리고 시계를 멀리까지 연장시키는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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