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여행기 히말라야의 봄의 제전 > 문화도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문화도시


 

오지 여행기 히말라야의 봄의 제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1,247회 작성일 12-02-22 20:18

본문

World-Travel_01.jpg
 
안나푸르나에는 여러 트레킹 코스들이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산군 전체를 도는 일주 코스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갔다 오는 코스, 그리고 푼힐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코스 등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중 가장 접근이 쉽고 아름답다는 푼힐(Poonhill·3193m) 전망대를 향해 길을 잡았습니다.

푼힐은 안나푸르나 산군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입니다. 이곳에서는 8000m가 넘는 다울라기리 연봉을 비롯해 안나푸르나 남 봉과 특히 네팔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마차푸차레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해 뜨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합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히말라야는 그야말로 눈의 거처였습니다. 마치 산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 같았습니다. 저 높은 산자락으로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걱정 반 기대 반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포카라 부근 나야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트레킹은 시작되었습니다. 길은 계곡을 끼고 이어졌습니다. 길섶으로 작은 가게들이 줄이어 있고 작은 마을길을 지나갑니다.
신들이 사는 설산들은 아직 보이지 않고 네팔의 농촌마을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한 아낙이 마당에 앉아 발가벗긴 어린 아이에게 오일을 발라줍니다.
 
거친 바람과 태양에  피부가 트지 말라고 행하는 일종의 목욕법이랍니다.
 어린 양을 안고 나온 아이들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듭니다. 저들의 순박한 미소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여행자들의 얼굴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합니다.
 
World-Travel_02.jpg
 
World-Travel_03.jpg
 
레섬 삐리리로 다가온 안나푸르나의 첫 밤
힐레라는 마을에서 첫 밤을 쉬어 갑니다.
가파른 산자락으로 계단 논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골골이 패인 논배미들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던 늙은 셀파의 주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골이 깊어 하늘이 좁은 이곳에도 달빛은 비쳐듭니다.
 
숙소 마당에 당나귀들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여물을 먹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짐을 져 나른 걸까요? 당나귀들의 잔등이 다 벗겨져 있습니다.
저 짐승들의 삶의 무게가 하루의 피로와 함께 온 몸을 짓누릅니다. 우리의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른 셀파족 여자는 짐을 부리고 창가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레섬 삐리리 레섬 삐리리”
끊어질듯 이어지는 구슬픈 노랫소리, 달빛에 실려 계곡으로 스며듭니다. 저 노래는 우리의 아리랑 같은 네팔의 민요입니다.
 
비단 스카프 펄럭이며, 비단 스카프 펄럭이며
사랑하는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것도 알지 못하고 사냥감으로 오인해 총으로 쏴버렸네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서 가슴이 아프다는’ 슬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첫 밤은 레섬 삐리리와 함께 깊어갑니다. 
트레킹 이틀째, 끝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계단 길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말과 당나귀의 배설물, 들리는 건 짐을 실은 당나귀들의 방울소리와 거친 숨소리뿐입니다. 동쪽 산위로 안나푸르나의 남 봉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곳까지 무겁게 따라다니는 내 안의 근심들을 저 장엄한 풍경 앞에 잠시 내려둡니다. 지난밤 묵었던 마을이 발 아래 작은 점으로 보입니다.
내 안의 근심들도 하찮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참 많이도 올랐다는 뿌듯한 마음에 ‘나마스테’하고 설산에게 인사를 해 봅니다.  

오후가 지나서야 비로소 숲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랄리구라스’라는 처음 보는 나무들의 군락지입니다. 나무에는 동백꽃 같기도, 철쭉 같기도 한 붉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이 꽃이 네팔 국화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나무는 고원지대에서 자생하는 수종이랍니다.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걷는 길은 그야말로 천상의 꽃길입니다. 산을 오른다는 느낌보다 숲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World-Travel_04.jpg
 
하얗게 빛나는 히말라야 설산 앞에서
해질녘, 붉은 꽃길 사이로 하늘빛 양철지붕을 인 집들이 보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급작스레 나타난 마을은 마치 반군 기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마도 이곳까지 오면서 네팔 반군들의 깃발이 그려진 집들을 많이 보아 온 탓일 겁니다.

고라파니(Ghorepani 해발 2750m)라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푼힐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곳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말 몇 마리가 물을 먹고 있습니다. 아침 8시에 출발한 산행길이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지만 아름다운 꽃과 숲의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마을은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컸습니다.
선물가게와 숙소들이 줄지어 있고 숙소들마다 여행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가게에 진열된 상품이며 먹을거리들이 모두 말이나 당나귀,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이곳까지 운반되어진 것들입니다. 벗겨진 당나귀의 등짝과 목이 꺾이도록 짐을 지고 오던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짠해집니다.  

석양에 붉게 물든 만년설 봉우리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설산들은 구름에 숨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숙소 커튼 사이로 달빛이 비쳐듭니다.
문을 열고 밖을 나오자 거대한 설산이 달빛 아래 우뚝 솟아 있습니다.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입니다. 만월인 이 밤, 하얗게 빛나는 히말라야 설산 앞에서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까지 올라왔던 육체적 고단함도,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내 안의 근심들도 저 몽환적 풍경 앞에서는 모두 달빛 아래 묻혀 버립니다. 내 생애 잊지 못할 풍경 하나를 안나푸르나 여신은 달빛을 통해 그렇게 내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푼힐 전망대로 오르는 새벽 산길이 부산합니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동쪽 하늘은 아침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푼힐 전망대 못미처 아무도 없는 광활한 랄리구라스 군락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만의 일출을 맞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차푸차레 등 너머로 밝아오기 시작한 붉은 태양은 8000m가 넘는 다울라기리 봉우리를 먼저 깨웁니다. 닐기리, 투쿠체, 안나푸르나 남 봉,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마치 출석을 부르듯이 태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키의 순서대로 봉우리들을 깨웁니다.
안나푸르나의 아침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산봉우리들을 깨운 태양은 안나푸르나 여신의 치맛자락으로 옮겨옵니다.
수많은 붉은 꽃송이들이 여신의 치마폭을 수놓으며 안나푸르나 봄의 제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달빛 아래 순결한 모습에서부터 푸른 새벽의 신비로움까지, 안나푸르나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길,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서로에게 인사를 합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당신 안의 신께 경배를… ”
이 풍경이 꿈이 아니길 바라며…

다시 길을 떠납니다. 누구는 점점 더 깊은 안나푸르나 품안으로, 누구는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고라파니에서 동쪽으로 난 숲길을 오릅니다. 8000m가 넘는 다울라기리 봉우리는 거대한 새처럼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고, 안나푸르나 남 봉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옵니다.
저 풍경들을 두고 가기가  아쉬워 몇 번이나 뒤돌아봅니다. 내 짐꾼인 ‘루션’이 랄리구라스 꽃을 따 주며 먹어보라고 합니다. 꽃송이를 손바닥에 대고 거꾸로 흔들자 꽃송이에서 물이 떨어집니다. 물을 마셔보니 아주 달콤합니다. 어릴 적 진달래꽃 따서 먹던 시간들이 엊그제였는데…. 
 
World-Travel_05.jpg

따라오던 설산들도 골짜기로 너머로 숨어버리고 길은 계곡으로 접어듭니다. 랄리구라스 군락지 사이사이로 가문비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습니다. 울창한 산림으로 인해 하늘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나무 화석들이 계곡 곳곳에 보입니다. 바위가 되어버린 나무의 나이테를 만져보면서 태고적 시간으로 돌아가 보기도 합니다.
한 무리의 염소 떼들이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어디선가 소년이 개를 몰고 나타나 염소들을 몰아갑니다. 마을이 가까워졌나 봅니다. 산이 무너질 듯 천둥번개 치더니 비가 쏟아집니다.
깊은 골짜기 하나 올라서자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타다파니(Tadapani 2630m)입니다. 지도에는 안나푸르나 남 봉 바로아래 마을이라는데 설산은 구름 속에 숨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조끼 같기도, 앞치마 같기도 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보입니다. 이곳 원주민인 구릉족이라고 합니다. 

히말라야의 비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숙소의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밤새 구름은 걷혀 있었고 거대한 설산 하나 밤사이 마을 뒤편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남 봉입니다.
개 두 마리가 달려와 꼬리를 흔듭니다. 아마도 녀석들이 새벽 설산을 보라고 나를 깨운 모양입니다.
새벽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숙소를 나섰습니다.
마을 언덕에 작은 사원 하나 있어 그곳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개 두 마리가 수호신처럼 나를 호위합니다. 어느새 마차푸차레 봉우리 너머로 여명이 밝아옵니다. 새벽 달빛 아래 웅크리고 있는 마을은 안나푸르나 신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신비로운 풍경입니다.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 올 때까지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이 풍경이 꿈이 아니길 바라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