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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평요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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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2,044회 작성일 11-08-2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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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홍등'의 촬영지, 평요고성(平遙古城)
14세기에 형성된 평요고성은 현존하는 중국 고성 중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성 중 하나다.
성벽과 옛 거리, 상점, 민가, 사찰, 사당 등 고대 건축물이 어우러져 있다. 평요고성은 명, 청대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오백여년 동안의 중국 건축 예술과 도시 계획의 변화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족이 만들어낸 중원 지구의 현과 성의 건축 체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옛 마을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 평요는 중국 금융업의 중심이었고, 고성 안의 은행 건물은 더더욱 이목을 끌고 있다. 
위치 : 산서성 중부의 태원(太原) 분지 남쪽에 있다. 태원까지는 약 90km.
역사 배경 : 평요고성은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기원전 827~782년) 처음 건설됐다. 서주의 장수 윤길보(尹吉甫)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시작돼 지금까지 약 27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명나라 홍무(洪武) 3년(1370년)부터 옛 성벽의 기초 위에 보수 공사를 해 600여년 동안 크기와 구획 정리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내려오고 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이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한 이후 평요는 계속 현 소재지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후기 은행이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가 됐고, 전국 금융업을 독점할 정도였다.
규모 : 옛 성의 총 면적은 2.25㎢이다. 지금도 4만2천여명의 주민들이 명청(1368~1911년)의 역사적 풍모가 보존된 성 안에 살고 있다.
현존하는 옛 성벽은 군사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써 명나라 홍무 3년부터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고, 성 안에 보존된 6대 사묘(寺廟)와 현아서(縣衙署), 시루(市樓) 등 고 건축물은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크고 작은 길과 골목 100여개도 있다. 큰길 양쪽의 상점들도 대부분 17~19세기의 건축물이다. 또 3,797채의 전통 민가가 있고, 그 중 400채는 이 지방 특유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 보존 가치가 높다.
평요의 풍수
평요성의 거리 구획은 남다르다.
주축인 동서남북의 큰 거리는 일반적인 십자로와 다르다. 동서대로는 성을 가로질러 있지만 남북대로는 상하 ‘정(丁)자’형으로 이어졌다.
풍수에 따르면 귀성(龜城)의 머리와 꼬리는 서로 상응할 수 없다고 한다.
상업 지역은 남대로, 지형이 낮은 북대로 쪽으로는 전성의 폐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도록 했다. 동서를 엇갈리게 한 것은 재화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면서 풍수를 보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남대로에는 상점이 많고, 북대로에는 민가가 많다.
 평요 소고기
‘평요 소고기’는 평요의 유명한 특산품으로 명나라부터 유명했다. 청말과 민국 초에는 술자리나 연회의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평요 소고기’는 여러 과정을 거쳐 세심한 정성을 들여 만들어진다. 도살부터 소금절이, 찜, 건조 전통적인 방법을 지켰다. 이렇게 만든 고기는 색깔 좋고 윤기가 흐르며, 육질이 신선한데다 보관이 간편하고, 오래될수록 향도 그만이다.
  주요 관광지
옛 성벽 : 높이는 12m, 총 길이는 6.4 km이다. 동서북 3면은 직선형이고, 남쪽은 강의 구불구불한 모양을 따라 만들었다. 성벽의 전체 모양은 ‘신구(神龟)’처럼 보인다. 성벽에 둘러싸고 있는 망루 72개와 요(凹)자 모양의 사대 3000개가 있다. 이는 공자 문하의 72현인과 3000제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성문은 모두 6개이고, 거북 머리 모양을 한 남문이 대표적이다. 문 밖의 우물 2개는 거북이의 눈을 상징하고 있다. 북문은 거북이의 꼬리이고, 동쪽과 서쪽에 있는 각 2개의 문은 거북이 네 다리이다
그래서 ‘오귀성(烏龜城)’이라 불린다.
 옛 거리 :  시루(市楼)를 중심으로 크게 4개의 큰 거리와 8개의 작은 거리, 72개의 골목길로 나뉘며, 이것들은 커다란 ‘팔괘(八卦)’ 도안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 의미가 기묘하고, 구조가 치밀하다.
남대가(南大街)를 중심축으로 대칭 배치를 하고 있다. 왼쪽에는 성황(城隍), 문묘(文廟), 도관(道观), 오른쪽에 아서(衙署), 무묘(武廟), 사원(寺院)을 배치했다. 이런 구성은 중국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좌문우무(左文右武)'의 이념을 최대한 구현한 것이다.
시루에 올라보면 대가소항(大街小巷)이 질서정연하게 교차하고 있고, 청전회와(靑磚灰瓦)의 건축물이 황토 고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상점 시루 주위에는 당시 은행, 전당포, 비단가게, 찻집, 술집, 골동품가게, 여관 등 220여개의 점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네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점포들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전에 은행들이 밀집됐던 서대가(西大街)이다.
중국 근대 은행업의 원조로서 환전과 어음 업무를 도맡아 했던 ‘일승창(日昇昌)’이 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최초로 ‘어음’을 만들어 전문화시켰고, 어디에서나 교환 가능하게 지점망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와 성을 물론 심지어 한국, 일본, 싱가폴, 러시아, 인도 등 무려 404개의 지점을 거느려 ‘회통천하(匯通天下)’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이 곳 때문에 평요고성은 금융 중심지가 됐고, 중국의 근대 금융업 100년을 이끌어 왔다.
지금 ‘일승창’의 옛 터는 어음박물관이 됐고, 예전의 어음을 많이 진열 전시하고 있다.
옛 민가 :  평요 고성의 가장 큰 특색은 수많은 전통 가옥이 잘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보존가치가 있는 민가가 3798채이고,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존된 곳도 448채이다.
중국의 민가는 원래 북으로는 산서(山西)와 남으로는 환남(晥南)이 유명하다. 만약 규모와 밀집도로 따진다면 평요고성은 화하(華夏)의 으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거리를 거닐다보면 정교한 집들이 줄줄이 늘어섰고, 높은 담장들이 서로 마주보듯 서있다.
100~200년 동안 풍상을 거치느라 곳곳에 쇠락한 모습도 보이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한 기세를 느끼게 한다.
주민들은 집 안팎의 장식을 화려하게 했고, 정교한 조각을 곁들여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어떤 곳은 관광지로 변했고, 나머지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많은 집들도 관광객이 들어와 살펴보고 사진 찍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옛 사찰과 사당 :  평요고성은 옛 중국의 사찰과 사당, 도교 사원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동양의 채색 조소의 보고’라 불리는 쌍림사(双林寺)다. 이 절은 고성에서 서남쪽으로 7km 떨어진 교두촌(桥头村)에 있다. 북위(北魏) 초(386~534년)에 건립돼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찰의 주요 건축물인 대웅보전(大雄宝殿)의 사면에는 100폭에 달하는 원나라 때 채색벽화가 보존돼 있다. 이는 유명한 영락궁(永樂宮)의 벽화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찰의 건축물에는 원나라부터 명나라까지 만들어진 불상, 보살상, 금강역사상, 천왕상, 나한상 등 2000여개의 귀중한 채색 조각품이 있다. 그 중 제대로 보존된 1566개는 조형미가 아름답고, 개성이 살아 있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주는 채색 조소 예술의 진품이다.
평요 옛 민가의 구조 해설
평요고성의 특색과 가치는 주로 성벽 안에 있는 회색(灰色) 민가에 있다. 예전부터 성 안에서 ‘북쪽은 궁핍하고, 서쪽은 부유하고, 동쪽에는 사찰이 많고, 남쪽에는 상점이 많다(北城穷,西城富,东城大院,南城铺)’는 속어가 전해 내려온다. 기본적으로 평요의 민가 분포를 설명하는 것이다.
민가에서 문루(门楼)는 집 주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관직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돈이 있거나 세력이 있는 상인 또한 금빛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었다. 성안의 큰 거리나 작은 골목을 걷다보면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한 문을 보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원에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각된 종루(鐘樓)나 고루(鼓樓)를 만들었다.
원래 위치에 루(楼)를 만드는 경우 외에도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곁채나 전청(前廳) 위에 속칭 ‘루원(樓院)’을 만들기도 한다.
평요에는 이런 민요도 있다.
‘동쪽, 서쪽, 남쪽에 누각, 비단 공을 굴리는 사자는 머리를 뒤로 돌려도 좋아라(东楼西楼南正楼 狮子滚线球 好的在后头)’ 
이 밖에 풍수루(风水楼)도 있다. 지위가 높은 자와 비교하길 좋아하는 평요 사람들은 좋은 팔자를 위해 풍수를 즐겼다. 그래서 왕왕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조벽식(照壁式) 묘식(廟式),수루식(繡楼式) 등의 풍수루를 추가로 세웠다. 다른 집과 사는 것이 차이가 있더라도 지붕 위에 기와를 더 올려 이웃집보다 높게 보이도록 했다.
정방(正房)은 평요의 저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다. 집안의 최연장자가 기거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장식한 수화문(垂花门)이나 전랑(前廊)이 있다. 때론 사치스럽다는 느낌도 준다. 이렇 듯 풍격을 높이는 것은 평요 사람들이 전통 관습을 중요하게 생각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평요의 사합원은 윗사람을 알현할 수 있는 지구인 남북이 길고, 동서는 좁다.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문이 있는 곳에 ‘일(日)’자 혹은 '목(目)'자의 장방형 정원을 둔 형태이다.
전통적인 풍수의 필요성 외에도 평요 사람들의 저택에는 수많은 특별함이 있다. 예를 들어 저택의 바닥은 각층마다 높이를 달리해 나가면서 정방을 가장 높은 곳에 배치했다. 전저후고(前低后高)는 자손들의 영화를 바라는 의미다.
단파정(单坡顶)의 가옥은 사면이 모두 정원이고, 후원의 담은 높다. 방풍이나 도둑 방지 외에도 사방에서 모여든 물이 정원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한 물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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