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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성지, 무당산 고건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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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2,445회 작성일 11-08-23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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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무당산, 무림의 지존 '무당파'를 아시나요
도교의 성지로 유명한 무당산에는 궁전과 사당, 민가 등이 있다.
이 곳의 건축물들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각 시대의 건축 양식과 예술적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당산에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주로 명나라 때 건립된 것이지만 기원전 7세기 때의 도가 건축도 남아 있다.
무당산의 건축물들은 천년 동안의 수준 높은 중국 건축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의 도교 문화
동한(东汉) 이후 어떤 도인이 무당산에 와서 초가로 암자를 짓고 수련했다. 당나라 초기 무당산의 도교는 제왕적 추앙을 받았다. 당나라 정관(贞观) 년간(627~649) 큰 가뭄이 생기자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는 요간(姚简)를 무당산에 보내 기도했다. 그리고 영응봉(靈應峰)에 ‘오룡사(五龙司)'를 건립했다.
송나라부터 청나라까지 각 나라의 왕은 무당산 진무신(真武神)을 추앙하고 ‘사직가신(社稷家神)’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때는 9궁(宫), 8관(觀), 100여개의 사당과 단(檀), 정(亭), 대(台), 교(桥) 등을 지었다.
명나라 때 가장 흥성했다. 영락(永樂) 10년(1412년) 9궁(宮), 8관(觀) 등 33개의 도교 사당을 지었다. 명나라 왕이 직접 관리하는 무당도량(武当道场)이 되었고, '황실가묘(皇室家廟)'라 불렀다. 이 때 금은옥주석사(金银玉珠石丝)로 많은 신상을 만들었다.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 때문에 ‘황금백옥세계(黄金白玉世界)’라 부른다.
무당 무술
2008년 상하이국제관광제 때 무당권법을 홍보하고 있는 무당파 수련생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무당 도사 장삼풍이 집대성해 ‘개산조사(开山祖师)’라 불린다. 그 후 무술 연마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충실하게 갈고 닦아 중국 최고의 무술 유파로 거듭났다.
그래서 ‘북종소림(北宗少林),남존무당(南尊武當)'이란 말이 생겼다.
무당의 권법은 충만한 내공을 바탕으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고, 늦은 듯 앞서가는 것이다. 또한 항상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며 상대를 제압한다. ‘4냥의 힘으로 천근을 발휘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신비하다고 느낀다.
무당권법은 심신을 수양하고 단련해 방어력을 키우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무당산의 기념품
무당산에는 귀한 기념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당검(武当剑)이고, 다른 하나는 만수등괴장(万寿藤拐杖)이다.
무림에는 ‘소림곤(少林棍) 무당검(武當剑)’이라는 얘기가 있다. 무당검은 좋은 철로 주조해 검신의 양쪽에 '용풍도안(龙风图案)'을 새겼다. 칼집은 꽃 무늬가 들어간 나무로 만들었고, 무당검이란 3 자를 새겼다. 검의 손잡이는 황동에 꽃을 새기고, 자루는 좋은 동청목(冬青木)으로 만들었다.
만수등괴장은 무당산 맞은 편에 있는 사무당(赛武當)에서 나는 나무로 만들었다. 질이 좋고, 탄성이 강하고, 활동도가 높다. 뿌리의 모양이 각양각색이며 모양은 금정(金顶), 수성(寿星), 용두(龙头), 봉두(凤头), 후두(候头), 조두(鸟头) 등 수십가지다. 이런 것은 여행이나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나 노인에게 선물하면 그만이다.
위치 : 호북성 단강구시(湖北省 丹江口市)
역사 배경 : 무당산은 중국의 4대 도교 명산 중 하나로써 ‘진무대제(眞武大帝)가 이곳에서 수련하고 득도한 뒤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진무를 언급하지 않고 마땅함을 논할 수 없다(非真武不足以當之)’는 이야기가 있다. 무당(武當)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왔다.
동주(東周) 이후 2000여 년 동안 수많은 도사(道士)들이 이 곳에서 수련했다. 그 중 명나라 때 장삼풍(张三丰)이 가장 유명하다. 장삼풍은 도가의 정(精), 기(气), 신(神)과 도학(道學) 중에서 팔괘(八卦), 삼동계(参同契), 오행(五行), 음양(阴阳))을 수련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태극권(太极拳)의 원형을 만들었다.
규모 : 무당산은 거대한 건축 규모 때문에 유명하다. 당을 시작으로 송, 원, 명, 청에 걸쳐 건축됐다. 명나라 정성(鼎盛) 연간에 모두 33개의 건축군이 100여만㎡에 지어졌다. 이 건축물들은 '진무수선(真武修仙)'이란 도교 고사에 따라 황실의 건축 양식을 채용했다. 건물의 크기와 간격은 산세에 따라 절묘하게 배치했다. 풍경구는 옥허궁(玉虚宫), 태자파(太子坡), 남암(南巖), 태화궁(太和宫, 金殿), 경대(瓊台), 오룡궁(五龙宫) 등 6개 지구로 나뉘며 72봉(峰), 36암(巖), 24간(涧), 11동(洞), 3담(潭), 9천(泉), 10지(池), 9정(井), 10석(石), 9대(台) 등 총 면적은 312㎢에 달한다.
주요 명승지
현악문(玄嶽門)
‘치세현악(治世玄嶽)’이란 문의 속칭이다. 삼간사주오루(三间四柱五楼)식의 석재 건축물로서 명나라 가정(嘉靖) 31년(1552년)에 건립했다. 높이 12m, 폭 12.8m로 석착순묘(石鑿榫卯)식으로 완성했다. 문의 중앙에 가정 황제의 친필인 ‘치세현악’이란 힘 있는 필치의 네 자가 새겨져 있다.
우진궁(遇真宫)
현악문 서쪽 1km 지점에 있고, 명나라 영락제(永乐帝) 15년(1417년) 건립했다.
장삼풍(张三丰)은 무당권법의 창시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그를 ‘진선(真仙)'이라 부른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명나라 성조 주체(朱棣)가 그를 아주 존경해 만나고 싶어했지만 장삼봉이 피했다.
이 궁은 장삼봉이 마음에 맞게 건축됐다. 현재 주요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잘 보존돼 있고, 산문과 제당 등도 남아 있다. 그 중 주전인 진선전(真仙殿)에는 원래 장삼풍이 만들어 놓은 높이 1.4m의 청동 주조 금좌상(金坐像)이 있다.
이 불상은 자태가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명나라의 소중한 예술품이다. 현재 원화관(元和观)에 보존돼 있다.
옥허궁(玉虚宫)
본래 이름은 ‘현천옥허궁(玄天玉虚宫)’이다.
명나라 영락(永乐) 11년(1413년) 건립됐다. 궁관묘(宫官廟)는 2200간으로 지어졌다. 가정(嘉靖) 31년 다시 수리했고, 현재 무당산의 옛 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훼손이 있었지만 청나라 건륭(乾隆) 10년에 현존하는 건축물과 유적을 복원했다. 그리고 무게 100톤에 이르는 ‘귀타비(龜馱碑)’ 4개를 건립했다.
마침정(磨针井)
현악문(玄嶽门)에서 10km 쯤 떨어진 등산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원이다.
명나라 때 처음 건립했고 청나라 때 보수했다. 도교의 기록을 보니 정락국(净乐国)의 태자가 무당산에 와서 수행하는데 의지가 박약하여 속세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산을 내려갈 때 나이 든 아줌마가 우물가에서 바늘은 갈고 있었다. 아주 신기한 마음으로 아줌마한데 왜 바늘을 갈고 있냐고 물었다. 노파는 엷은 미소를 보이며 “쇠를 갈아서 바늘로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다.
진무대군 좌상
진무는 대오각성, 다시 돌아가 수련했다. 결국 도를 깨우쳐 신선이 됐다. 그가 바로 진무제군(真武帝君)이다.
마침정의 중심 건물은 조사전(祖师殿) 안에 있다. 사면에 채색화 ‘진무수진도(真武修真图)'가 그려져 있고, 중앙에는 젊었을 때의 진무상이 모셔져 있다. 정전 앞에는 마른 우물과 조악한 테두리를 하고 있는 쇠 2개 있다.
복진관(复真观)
또 다른 이름은 태자파(太子坡)이다. 현악문에서 8km쯤 떨어진 무당산 주봉의 동복 쪽에 있다.
진무가 15세 때 여기에 주거하면서 입산수도한 것이 유래가 되어 태자파(太子坡)란 이름으로 불린다. 산 옆에 세워진 5층 누각이다. 절벽을 뒤로 하고, 깊은 계곡을 내려보고 있는 절경이다. 주전 뒤에 태자전이 있다.
자소궁(紫霄宫)
전기봉(展旗峰) 밑에 있다. 무당산 유적중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구 건축물 중 하나로써 무당산 8궁, 2관 건축군의 중심이다.
명나라 영락 11년(1413년)에 세워졌다. 궁은 산세를 따라 건립됐고, 층층이 올라가는 형태로써 백 여개의 돌계단이 주요 건축물인 궁문(宫门),용호전(龙虎殿),귀비정(龟碑亭),십방당(十方堂),자소전(紫霄殿),부모전(父母殿) 등과 이어진다.
사면은 거대한 붉은 벽이 에워싸 기세가 웅장하다. 용호전에는 청용과 백호 신상이 2개 있고, 귀비정에는 좌우 양쪽에 커다란 거북 모양의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명나라 성조가 내린 성지가 새겨져 있다. 주전인 자소전에는 명나라 황실에서 제작한 옥황대제(玉皇大帝)의 금상이 모셔져 있다. 향불이 끊이지 않고, 숙연함이 장엄하다.
남암(南巖)
무당산의 남암
자소궁의 뒷산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무당산 36암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 많은 도사들이 이 곳에서 수련했다. 원나라 때 보수해 궁궐의 모습을 갖췄고, 명나라 때 640간으로 중수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청나라 말에 훼손돼 현재는 원나라 때의 천을진경궁(天乙真庆宫) 만이 고건축물로 남아 있다. 천을진경궁은 ‘남암석전(南巖石殿)’이라고도 불린다. 남암의 가장 중요한 궁궐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에 위치해 위로는 절벽이,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있다. 석전은 목조로서 아름답게 조각했다.
주전에는 삼청소상(三清塑像)를 모셨고, 주전의 왼쪽에는 '태자와룡상(太子卧龙牀)'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주전 외에 절벽 위에 팔괘정(八卦亭),장경각(藏经阁) 등이 있고, 용이 새겨진 석주(石柱)도 있다.
남암석전의 서쪽은 소장대(梳妆台),비승애(飞升崖) 등의 진무제군의 유적이 있다. 진무제가 이 곳에서 수련한 뒤 소장대에서 옷을 갈아있고, 비승애에서 신선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태화궁(太和宫)
천주봉(天柱峰) 정상의 20여㎡의 넓이로 지어졌다. ‘금전(金殿)’이라고도 한다. 무당산의 대표적인 도교 건축물 중 하나다.
또한 중국에 가장 큰 동주류금대전(铜铸鎏金大殿)이다.
명나라 영락 14년(1416년)에 건립했다. 높이 5.5m, 폭 5.8m, 깊이 4.2m이다. 기반은 화강석(花岗石)로 만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동으로 만들었다. 정전 안 중간에 10톤짜리 진무제군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좌우 양쪽에 ‘금동옥녀(金童玉女)’와 ‘수화이장(水 火二将)’이 있다. 모두 동으로 만들었다. 이 동상은 명나라 동상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아주 진귀한 예술품이다.
정전 안의 대들보와 천정에는 모두 정교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천정 위에 류금명주(鎏金明珠)를 달아 놓았는데 ‘벽풍선주(避风仙珠)’라고 부른다. 이 보석이 산정의 바람이 정전의 문을 열 수 없게 해 정전 안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한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 산 바람이 들어갈 수 없는 원인은 벽과 문이 아주 주도면밀하고 정확하게 끼워 맞춰졌기 때문이다. 중국 옛 장인들의 우수한 주조술과 건축술, 도금술 등이 어루러진 결과인 것이다.
금전 밖에는 천금조석(千金条石)으로 만든 자금성(紫金城)이 있다. 밖에서 보면 벽체가 안쪽으로 기울었고, 안에서 보면 밖으로 기울었다. 둘레는 1500m로 천주봉을 둘러싸고 있다.
관광객들이 천주봉에 올라 금전을 보고 싶다면 먼저 십팔반(十八盘)을 건너 천개의 돌계단을 밟고, 다시 구연등(九连磴)을 건너 천년철색(千年铁索)을 지나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무당산 경치 중 으뜸이다.
 경대관(瓊台观)
천주봉 동남 자락 10km, 직선거리 1350m 지점은 상관(上观), 중관(中观), 하관(下观)으로 나뉜다.
원나라 때 ‘경대관’이라 불렀다. 명청 때 보수하며서 도교 사원 24개와 사당 수백 개를 만들었다.
청나라 함풍(咸业) 6년(1856년) 전쟁으로 소실됐다. 현재는 사당의 일부를 보수했다. 여기가 무당산 등산의 출발점이자 중요한 집결지다.
오룡궁(五龙宫)
영응봉(靈应峰) 밑에 있다. 당나라 정관(贞观) 년간(627~649년) 오룡사(五龙司)를 건립했다. 명나라 영락 10년(1412년) 제전(帝殿), 산문(山门), 랑무(廊廡), 옥상전(玉像殿), 부모전(父母殿), 조사전(祖師殿), 계성전(启圣殿), 창고 등 215칸을 건립했다.
가정(嘉靖) 년간까지 이 궁은 850칸이었다. 민국 19년(1930년) 불이 나 훼손됐지만 현재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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