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시대의 음악형식: 이탈리아의 성악, 시의 의미를 지닌 마드리갈래 (mardrigale) > 오페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오페라


 

르네상스시대의 음악형식: 이탈리아의 성악, 시의 의미를 지닌 마드리갈래 (mardrigale)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2,072회 작성일 11-10-19 11:26

본문

14 세기 및 16 세기에 성행하였던 이탈리아의 성악 . 어원은 이탈리아 말로 시의 의미를 지닌 마드리갈래 (mardrigale), 혹은 양떼 (mandra) 에서 유래된 목가 (mandriale) 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
 
14 세기의 마드리갈은 음악의 한 종류인 동시에 시의 한 형태였다 . 시의 내용은 전원시와 애정시가 많았다 . 1340 년경부터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발히 작곡되어 , 야코포 다 볼로냐 (Jacopo da Bologna), 지오반니 다 캇치아 (Giovanni da Cascia), 프란체스코 란디니 (Francesco Landini) 등이 마드리갈 작품을 낳았다 . 성부의 수는 2 성 악곡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3 성 악곡이였다 . 그러나 얼마뒤 발라타 (ballata) 가 유행하게 되자 , 14 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드리갈은 쇠퇴해 버렸다 .
 
16 세기 마드리갈은 14 세기 마드리갈과는 무관한 것이다 . 15 세기 말부터 16 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의 궁정을 중심으로 인문주의적 교양이 있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 당시 유행하던 플로톨라 (frottola) 를 보다 예술적으로 세련되게 하고자 하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 초기의 마드리갈은 플로톨라와 별차이가 없었다 .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플랑드르악파 작곡가들이 이 새로운 마드리갈에 착안하고 , 폴리포닉한 기법을 도입하여 귀족사회에 적응되는 예술적 통작형식으로 작곡했다 .
 
1530 년대 부터 50 년대까지 마드리갈은 3 성내지 4 성이 많았고 모방수법과 단성 ( 호모포니 ) 기법이 절충되어 있었다 . 16 세기 후반까지는 5 성부의 기법이 중심이 되고 음악은 더욱 폴리포닉하게 되었다 . 이 시기 마드리갈 작곡의 주도권은 플랑드르인으로 부터 차츰 이탈리아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 16 세기말 부터 17 세기 초에는 가사의 극적인 표출과 주관적인 표현효과를 노려서 반음계적기법 같은 것이 한층 교묘하게 행하여져 16 세기말에 원숙함을 보여주고 있다 . 16 세기말 부터 17 세기 초에 마드리갈은 성악 폴리포니의 틀에서 벗어나 상성부와 통주저음부를 무시한 새로운 표현양식이 채택되어 콘체르타트양식 (stile concertate), 표출양식 (stilereppresentativo) 가 시도되게 된다 . 이와같은 변천은 몬테베르디 한 사람의 작품가운데서도 그 변화가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 한편 16 세기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엘리자베드 1 세 , 제임스 1 세 통치하의 영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이미 1550 년대의 영국에는 이탈리아의 기법을 채택한 약간의 마드리갈 작품이 작곡 되었으나 본격적인 영국 마드리갈 예술의 개화에 자극되어 1588 년 출판된 < 무지카 트란살피나 >(Musica Transalpina) 로써 , 우리말도 번역하면 “ 알프스를 넘은 음악 ” 이란 뜻이다 . 즉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명곡이 영역되고 ,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번역과 영국의 독자적인 마드리갈이 활발하게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영국의 마드리갈은 본질적으로는 이탈리아 특히 마렌치오의 영향이 컸으나 , 영어 고유의 악센트와 영국적 기질이 반영되고 , 선율 , 리듬 , 화성의 모든 면에서 범국민적인 예술로 자라났다 .

이탈리아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15세기말 프로톨라를 대신하여 16세기 이탈리아 세속노래 중 가장 중요한 장르로 등장했다. 마드리갈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처음으로 유럽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1501년 페트라르카의 시집이 출판된 것을 계기로 이탈리아에서는 시와 음악의 본질에 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베네치아의 시인이며 문학 이론가인 벰보(Pierre Bambo)는 페르라르카의 시를 분석하면서 단어들의 조화가 독자들에게 주는 음악적 효과를 강조하였다. 벰보의 이러한 분석은 시의 낭송과 노래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작곡가들은 이러한 소리의 효과를 그의 작품에서 모방하려 하였다. 음악은 시가 의도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은 이들은 시가 가지고 있는 내용과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한 결과 16세기의 마드리갈이 탄생하게된 것이다.
 
16세기 마드리갈은 14세기 마드리갈과 그 이름만 같을 뿐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즉 14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ritornello)라는 후렴이 있는 유절형식의 노래인 반면, 16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절형식이므로 선율이나 가사의 반복이 없다. 마드리갈이 프로톨라와 다른점은 첫째 프로톨라의 가사는 비속한 내용이 많은 반면 마드리갈은 세련된 시를 사용하였고, 둘째 마드리갈은 부분적으로는 모방과 같은 폴리포니 서법을 중요시하였으며, 셋째 프로톨라의 대부분이 유절형식임에 비해 마드리갈은 통절형식으로 되어있다는 점 등이다. 마드리갈은 귀족들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기 위해 위촉받아 작곡되기도 했고, 결혼, 잔치, 축제등 궁정에서 열리는 사교모임을 위해서 작곡되기도 했다. 초기의 마드리갈은 4성부 였으나 16세기 중반부터는 5성부로 작곡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때로는 6성부, 아주 드물게는 8-10성부 곡까지 있었다. 연주형태를 비교해 보면 프로톨라는 기악반주가 있는 독주자를 위한 음악인 반면 마드리갈은 3-12명이 부르는 성악 실내악곡으로 보통 한 가수가 한 성부씩 무반주로 부르거나 악기들이 성부를 중복 또는 대신하였다. 그 당시 마드리갈이나 이와 비슷한 다성노래들에 대한 작곡열기는 대단하여 1530년에서 1600년까지 2000여곡이 작곡되었고 이러한 상태는 17세기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마드리갈은 작곡된 시기에 따라 1525-45년 까지 작곡된 것을 초기, 1545-1580년 사이의 것을 중기, 그리고 1580년 - 1620년 까지 작곡된 것을 후기 마드리갈로 분류되고 있다.
 
초기 마드리갈
초기 마드리갈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플랑드르 출신으로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약한 필립페 베르들로(Phillippe Verdelot 1480경-1545), 플랑드르 작곡가들과 비견되는 최초의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인 코스탄쪼 페스타(Costanzo Festa 1490경-1545),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빌라르트(Willaert 1490-1562), 역시 북쪽 출신인 야콥 아르카델트(Jacob Arcadelt 1505경-68경)들이다. 마드리갈은 프로톨라 처럼 사랑을 주제로 하지만 프로톨라의 가사가 지나치게 장식적, 감상적이고 경박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마드리갈은 여전히 음악적으로 프로톨라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윗성부의 선율이 마드리갈의 주요소가 되고, 아랫 성부들은 화성 반주에 지나지 않는 수직 화성적 짜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톨라에 비해 리듬과 화성이 더 다양하며 선율도 더욱 세련되고 개성적이다. 특히 4도 또는 5도 도약을 자주 보이는 베이스 선율은 특이하다.
 
중기 마드리갈
1540년대 부터 마드리갈의 중심지는 베네치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곳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일하던 빌라르트가 초기양식과 중기양식(고전양식)의 마드리갈을 모두 작곡함으로써 이 두 양식의 중간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가사와 음악의 조화를 이룩한 첫 작곡가들 중 한사람으로 그의 원숙기 마드리갈은 초기의 수직 화성적 짜임새에 모방적인 요소가 가미되고 가사의 극적 낭송도 잘 보여주고 있다. 가사에 대한 빌라르트의 특별한 관심은 그이 제자인 로레(Cipriano de Rore, 1516-65)에 의해 계승되어 중기 마드리갈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로레는 플랑드르 출신 작곡가로 플랑드르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주로 이탈리아의 페라라와 파르마에서 활동하였다. 1547-58년 사이에 페라라의 에스테공의 궁정에서 일하였으며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은 로레를 해고하였다. 1536년 빌라르트의 후임으로 베니스의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선임되어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얼마지나지 못하고 1564년 파르마로 돌아와 1565년 그곳서 죽었다. 그는 조스캥의 후계자이자 몬테베르디의 선구자 였다. 미사, 모테트, 샹송도 작곡하였지만 당시 뛰어난 마드리갈 작곡가로 120여곡의 마드리갈을 남겼다. 1542년 그의 첫 5성부 마드리갈 모음집이 출판되면서 마드리갈 작곡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로레의 마드리갈은 플랑드르의 대위법에 바탕을 둔 4-5성부곡으로 모방서법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베이스는 대위법적인 대선율과 화성적 기능을 동시에 제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각 단어를 음악적으로 묘사하여 시 전체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반음계적인 변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취향은 16세기 후반의 다른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몬테베르디는 그를 존경하여 “그의 화성은 가사에 정확하게 순응한다”고 하였다.
로레 외에 중기 마드리갈 발전에 기여한 플랑드르 작곡가로는 라수스, 몬테(Philippe de Monte, 1521-1603), 베르트(Giaches de Wert, 1535-96)가 있다.
 
후기 마드리갈
16세기말 부터 17세기 초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전성시대로서 이전과는 달리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들이 마드리갈 작곡에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다. 마렌치오(Luca Marenzio, 1553경-99), 제주알도(Don Carlo Gesualdo, 1561-1613)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등이 이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마렌치오 는 북 이탈리아 브레시아(Brescia) 부근 코카리오(Coccaglio)에서 태어나 브레시아 대성당의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약했으며 이 지역의 악장 콘티노(Giovanni Contino)에게 사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1577년 23-24세때 이미 마렌치오의 작품이 출판되었던 점은 이 작곡가의 음악적 재능을 짐작케 하는 일이다. 그는 1578년 부터 86년에 걸쳐 로마 추기경 루이지 에스테(Luigi d'Este)를 섬겼고 추기경의 사후에는 신치오 알도브란디니(Cinzio Aldobrandini), 만토바의 곤차가가, 피렌체의 메디치가와의 관계를 가졌다. 1589년에는 피렌체에서 페르디난드 대공의 결혼 축제를 위한 「인테르메디오」(Intermedio)가 상연되었다.
마렌치오의 작품은 5성 마드리갈 9권, 6성 마드리갈 6권, 4성 마드리갈 1권, 3성 비라넬라 5권 등, 1580년 부터 99년 까지에 걸쳐 간행된 세속 작품이 약 420곡 된다. 종교음악곡으로는 5성 종교적 마드리갈, 4성 모테트, 그외 5성~ 7성의 종교합창곡이 약 80곡이 된다.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균형잡힌 폴리포니 서법이 중심이 되어 있지만 이탈리아 풍의 명쾌하고 뚜렷한 리듬과 선율이 뛰어났다. 특히 마렌치오의 작품에 일관하여 나타나는 기품과 격조를 지닌 절도있는 표현으로 인해 르네상스 이탈리아 마드리갈은 고전적 완성에 도달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사실 마렌치오의 작품은 이탈리아 국내 뿐만 아니라 플랑드르, 독일, 영국 등에서도 출판되어 국제적으로 애창되었다.
 
제주알도 : “베노사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제주알도는 유서깊은 귀족 출신으로 직업적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의 형 루이지가 1585년 급사하자 베노사공의 지위를 계승하고 사촌인 마리아 아바로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2번 결혼한 과거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애인과 통정을 계속한 사실을 알게된 제주알도는 아내의 부정 뿐만아니라 자식의 출생에도 의문을 품고 1590년 그의 아내와 애인, 더욱이 아이들 마저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매우 진기한 사건으로 세인의 지탄과 처가의 복수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는 베노사성에 칩거하였다. 그후 화해가 이루어져 1594년 페라라의 에스테가의 에레오노라와 재혼하였다. 그후 처와 함께 페라라 궁정에 거주하면서 많은 문인, 예술가와 친교를 맺고 마드리갈 제 1권, 제 2권을 속속 간행하였다. 1596년 나폴리에 귀향하여 먼저 죽은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광기에 가까운 음울한 생활을 하다가 1613년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알도의 작품은 1594-1611년 사이에 간행된 6권의 마드리갈 곡집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외 종교곡으로 모테트 「성 토요일을 위한 테네브레 응창가」(Tenebrae Responsories for Holy Saturday)등이 있다. 그의 마드리갈에는 파란만장했던 일생과 광기어린 성격을 반영하듯 사랑의 쓰라림, 죽음을 사랑하는 영혼의 절규등이 표현되어 있다. 날카롭고 때로는 낭창풍의 흐르는 선율, 광기에 가까운 멜리스마의 질주와 도약, 단편적이고 돌발적인 리듬, 특히 반음계의 효과적 사용으로 인한 어두운 세계의 표현등이 그의 음악의 특성이다.
 
몬테베르디 : 크레모나(Cremona)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1590년 부터 만토바에서 활동하다가 1613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하여 1643년 사망할 때 까지 그곳에서 일하였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곡가로 그의 마드리갈은 이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마드리갈 중 첫 네권은 르네상스적인 무반주 다성성악 앙상블 곡이고, 다음 두 모음집은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며, 콘체르토(Concerto)라고 제목을 부친 마지막 모음집인 제 7권의 마드리갈은 기악반주를 갖는 독주, 이중주 곡으로 뚜렷이 바로크적인 양식상의 변화를 보인다. 그의 초기 마드리갈은 수직화성적인 부분과 다성음악적인 부분의 자연스런 조화, 가사의 묘사에 충실함, 그리고 불협화성의 자유로운 사용 등 16세기 후반의 마드리갈 기법으로 작곡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법들을 제주알도와 같이 극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17세기의 새로운 양식으로 자신있게 움직여 나갔다. 예를 들면 그의 음악 동기들은 레시타티브와 같이 낭송적이고, 짜임새도 비슷한 성격의 다성성부가 아니라 베이스의 화성반주를 갖는 이중주적인 것으로 바로크 경향을 이미 나타내고 있다.
몬테베르디의 위대함은 르네상스의 전통적 음악서법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창작으로 바로크 세계를 개척했다는 점에 있다. 몬테베르디의 손에 의해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공전의 극적 표현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붕괘점에 도달한 르네상스 마드리갈을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바로크의 예술로 변용되었다. 즉 르네상스의 마드리갈은 몬테베르디에 의해 바로크시대의 칸타타 내지 아리아로 변화되어 해체하게 되었다.
 
그외 마드리갈 작곡가로는 조반니 가브리엘리가 있는데 그는 교회음악의 중요한 작곡가였지만 마드리갈에 있어서는 복합창(Cori spezatti)의 에코 효과, 음색의 대비, 극적 표현 등의 특징있는 작품을 작곡했다. 그외 오라치오 베키(Orazio Vecchi, 1550-1605), 아드리아노 반키에리(Adriano Banchieri, 1568-1634)들은 정경을 완전히 마드리갈로 묘사해 나가는 희극과 같은 특수한 마드리갈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한편 16세기 후반에는 마드리갈 보다 단순하고 약간 통속적인 성격을 가진 빌라넬라(Villanella), 이탈리아어로 “작은노래”라는 뜻의 칸조네타(Canzonetta), 발레토(Balletto)등의 가벼운 무곡풍의 노래들이 유행하였다. 이 두 음악은 비슷한 것으로 명확한 화성의 수직화음적인 짜임새를 가지며 자주 반복되는 각 부분은 균등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파라라” 후렴을 갖는 것이 특징인 발레토는 춤곡으로 쓰여졌지만 노래로 부르거나 악기로 연주되기도 했다. 이 노래들은 독일과 영국에도 널리 애용되어 영국 및 독일작곡가에 의해 칸초네타와 발레토를 만들게 된다.

영국 마드리갈
엘리자베스왕조 시대의 영국 세속음악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충실한 발전을 하였다. 버드의 세속작품에는 플랑드르적인 폴리포니 기법이 두드러져 있지만 1550년대의 몇몇 영국작곡가들의 작품에는 그 윤곽이 명확한 선율,구성, 훌륭한 리듬, 약간 호모포닉한 구성 등 이탈리아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마드리갈은 1560-70사이에 영국에서 다수 필사되고 있다. 1588년 런던의 출판업자 니콜라스 영(Nicholas Younge, 1619년 사망)은 영국인들의 마드리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57곡의 이탈리아 마드리갈을 영역 편집 출판하였다. <뮤지카 트란살피나>(Musica translpina) (원래 뜻은 알프스를 넘어온 음악)라는 이름의 이 곡집에는 마렌치오, 팔레스트리나, 라수스 등의 마드리갈 45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후에도 영역 이탈리아 마드리갈 출판은 계속되어 대중의 폭넓은 인기를 차지 하였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영국 작곡가의 창작의욕을 북돋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수법을 모방하며 새로운 영국 마드리갈이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영국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마드리갈에서 볼 수 있는 심각하고도 극적인 표출, 가사의 낭송, 반음계법, 음화법, 가사 그리기법 보다는 다소 가벼운 분위기의 빌라넬라와 발레토 등을 규범으로 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마드리갈은 이탈리아 마드리갈에서 볼 수 있는 심오하고 고전적인 균형감은 모자라지만 장난스런 흐름과 경쾌한 리듬이 음악의 중심이 되었다. 이탈리아 마드리갈이 궁정과 인문학을 중심으로 전문가들을 위한 귀족 예술이었던데에 비하여 영국의 마드리갈은 중류시민에 기초를 둔 아마추어를 위한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로서 주목할 인물은 윌리엄 버드와 그를 이은 토마스 몰리(Thomas Morley 1557-1602)이다. 이미 1593년에 간행된 몰리의 <3성의 칸초네트 곡집>에는 이탈리아 기법이 영국 특유의 낙천적이고, 명랑한 표현과 일체화 되어있다. 더욱이 유명한 「이제 5월이 왔다」(Now is the month of Maying), 「나의 연인은 사랑스럽다」(My bonny lass she smileth)등을 포함한 1595년에 출판된 「5성 발레토곡집 제1권」 (The First Booke of Balletts to five voices)에는 이탈리아의 발레토가 완전히 영국의 토양에 동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발레토 특유의 “파라라”의 후렴은 빠른 악구와 느린 악구와의 교대, 흐르는 듯한 경쾌한 선율, 각 성부간에 짧은 모티브에 의한 모방 등, 모든 요소가 영어의 정확한 억양에 뒷받침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몰리에 이어 자일스 파나비(Giles Farnaby 1563-1640), 죤 파머(John Farmer 1570- ? ), 프랜시스 필킹턴(Francis Pilkington 1570-1638), 죤 베넷트(Hohn Benett 1570- ? ), 죤 와드(John Ward 1571-1638), 토마스 톰킨스, 죤 윌비, 토마스 윌크스에 의한 마드리갈 곡집이 차례로 출판되어 엘리자베스 왕조기 영국 마드리갈의 황금시대가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서 윌크스는 마렌치오풍의 약간 중후한 표현을 장기로 하는 이색적인 작곡가였다. 1600년 간행된 그의 「5, 6성 마드리갈 곡집」에 수록된 「오 근심이여, 빨리 떠나라」(O care, thou wilt dispatch me)은 “파라라”와 같은 발레토 특유의 후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반음계와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해 어두운 탄식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외 소박한 민요풍의 작풍을 보이는 파머, 필킹턴이 있고, 폴리포닉한 처리에 훌륭한 톰킨스, 윌비 등 은 각각 독자적인 매력을 가진 가작을 많이 작곡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