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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송아지 할머니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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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55회 작성일 10-04-2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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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이인순] 송아지 할머니

“미세스리 그라니가 된 거 축하해”
토요일 오후 한국에서 수업을 마치고 허겁지겁 산골 농장으로 돌아오자 휴영감님이 뛰어나오며 할머니가 된 걸 축하한다고 하셨다. 그는 주말이면 우리 농장으로 와 일을 도와주며 쉬다가는 스코틀랜드 출신 영감님이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감이 잡히질 않았다.

병아리는 벌써 알에서 깨어난 지 오래 되었고, 새로 알을 품고 있는 암탉도 이즘에는 없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수놈, 멍멍이 두 마리도 수놈이라 도무지 할머니가 도리 이유가 없는데…….


 “송아지가 새끼를 낳았어.”


 “송아지라구요? 우리 집 소가요? 정말로요?”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물음표가 3개나 붙도록 연달아서 되물었다.


 “으응, 정말이야. 오늘 아침 11시쯤에 개들이 하도 짖어서 가보니까 새끼를 낳았더라구.”


 “우와아.”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나는 작업복에 장화를 갈아신을 사이도 없이 구두를 신은 채로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새끼를 낳았다는 그 소는 이웃집 브라이언한테 송아지를 사면서 한 마리 공짜로 끼워 받은 15년 된 늙은 암소였다. 우리가 관리하지않던 소라서 브라이언이 새끼를 가졌다니까 가졌나보다 했을 뿐, 얼굴도 모르고 진짜로 새끼를 가졌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있던 소였다. 그런 늙은 암소가 새끼를 낳았다니. 뜻하지 않게 송아지 할머니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뛰는 동안에도 가슴이 마구 설레었다. 비육우만 열댓 마리 노는 땅에 키우고 있는 우리 농장에서는 송아지를 구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우리 집에도 정말 송아지가 생긴 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진흙 구덩이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부지런히 뛰었다. 저만치 개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어미소가 눈에 띄었다.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 송아지가 혼자 앉아 있다. 갓 태어난 새끼는 갈색 털에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사슴 같은 송아지였다. 숫송아지였다.


 그러나 어미소나 송아지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송아지를 받아 본 경험도 없어도 이웃집 소들이 새끼낳는 걸 더러 보아온터라 그런데로 소를 보는 눈은 있었다. 건강한 상태라면 아무리 갓 태어난 송아지라도 비척대며 일어나 어미 주위를 맴돌테고, 어미역시 송아지를 보호하기 위해 쫓아다닐 것이다. 지난번 브라이언네 소가 우리 집 개울가에서 새끼를 낳았을 때도 그랬다. 어쩌다 새끼가 개울에 빠져 뻘흙을 뒤집어쓴 채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녀석은 제법 똘망돌망  걸어다니며 제 어미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오전에 새끼를 낳았다는 늙은 암소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일으켜 세워도 비틀대다 주저앉아버렸다. 젖 한 모금 먹지 못한 송아지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송아지를 일으켜 흙투성이 얼굴을 털어주며 걸음마를 시켜보았다. 뱃가죽이 홀쭉한 송아지는 코를 씰룩이며 간신히 걸어다녔다. 송아지가 제 곁에서 멀어져도 어미소는 이따금 신음처럼 맴매거리며 눈으로만 새끼를 쫓을 뿐 일어서지 못했다. 조금 쉬게 하면 나을까 하고 기다리다 짧은 겨울 해가 훌쩍 넘어가기 시작하자 슬슬 불안해졌다.


 할 수 없이 소를 많이 기르고 있는 모리할아버지네로 달려갔더니 소한테 놓는 칼슘 주사액을 놓아주고 두 병이나 주었다. 놓을 줄도 모르면서 돈아저씨가 어렵게 주사를 놓아주고 송아지는 따로 떼어놓으라고해서 데려다 마대로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처량하게 눈만 껌뻑이고 있는 녀석에게 우유라도 먹였으면 좋으련만 무얼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심지어는 송아지용 젖병 하나도 준비해 둔 게 없으니 이러다간 하룻밤도 못 넘기고 송아지를 잃게 생겼다. 이번에도 돈아저씨가 트럭을 타고 모리할아버지네로 달려가 따끈하게 데운 우유 한 병과 젖꼭지를 얻어다 억지로 송아지 입에 물렸다. 송아지는 우유를 먹지 않으려고 한사코 도리질을 해댔다.


 “미세스리, 송아지를 잘 껴안고 한 번 먹여봐.”


 휴영감님 말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송아지 머리를 받혀주면서 억지로 입을 벌리고 젖병을 밀어넣었다.


 녀석은 반쯤은 흘려가며 어째가며 2리터짜리 우유 한 병을 겨우 다 받아먹었다. 힘껏 빨아들일 때는 손가락이 딸려들어갈 정도였다. 우유를 먹이는 동안 추워서 입고 나간 낡은 무스탕 외투를 송아지가 제 어미털인 줄 알고 비벼대는 통에 침 범벅, 우유 범벅이 되어버렸는데도 아깝지 않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송아지를 보호할 수 있다면 무스탕 옷으로 담요라도 만들어 덮어주고 싶었다. 몇십 분도 안 되는 숫송아지의 값을 헤아려서가 결코 아니었다. 추위에 떨며 둥그렇게 눈을 뜨고 앉아 있는 고놈의 슬픈 눈망울 때문이었다. 긴 속눈썹을 깜빡일 때마다 드러나는 순하디 순한 송아지의 눈, 그런 녀석을 마대로 덮어주었대도 한데다 두고 들어오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땐 한국처럼 외양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집 안으로 들어오자 모리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사를 놓았으면 소가 개울로 빠지지 않도록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라는 것이었다.


 식구들은 또 소를 옮겨주러 들판으로 나갔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해도 겨울날씨라 턱이 덜덜 떨렸고, 들판은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하다. 후레쉬 불빛을 의지하며 개울가로 내려가자 어미소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난건가? 하고 사방을 둘러보는 사이, 아뿔사 어미소는 이미 개울로 굴러떨어져 찬물에 목만 겨우 내놓고 있는 것이었다. 때마침 비가 온뒤라 개울이 많이 불어나서 소가 떠내려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한밤중에 개울에 빠진 소를 어떻게 건져내랴.


 어쩔 수없이 트랙터 가지고 있는 모리할아버지한테 염치없는 부탁을 또 드리는 수밖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영감님이 싫은 기색도 없이 부랴부랴 트랙터를 몰고 내려오셨다. 물에 빠진 소를 밧줄에 메고 식구들이 밀고 당기며 둔덕으로 끌어올리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땅이 짙어 커다란 트랙터 바퀴가 더 깊은 수렁을 만들면서 헛도는 바람에 진흙이 사방으로 튀어 사람꼴이 말씀이 아니다.


 조용히 잠든 동네로 트랙터가 타타거리며 내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퍼져나갔다. 모리영감님 트랙터는 1950년 형이라 푸푸거리며 검은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물에 빠진 소도 고통스럽겠지만 건져내려는 우리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들 물구덩이에 빠져 물에 빠진 소와 비슷한 꼴이었다.


 갖은 고생 끝에 소를 끌어올리기는 했어도 찬서리가 내릴 그 밤을 물에 흠씬 젖은 소가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는 건초를 가져다 두둑히 덮어주는 것밖에 달이 방법이 없었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오자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데서 떨고 있을 송아지나 물에 젖은 어미소나 다 마음에 걸려 우리들만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기가 미안하기 짝이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에 송아지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자리를 조금 옮긴 송아지가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눈을 뜨고 있다.


 ‘어, 살아 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송아지를 만지러니까 움직임이 없다. 녀석은 이쁘고 선한 눈을 그대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 있었다.


 참 가슴이 서늘하다.


 언젠가 보물처럼 아끼며 매일 들여다보던 병아리가 죽던 날. 징징 웅ㄹ면서 인공호흡을 시킨다고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나를 본 돈아저씨가 껄껄대며 말했다. 강한 농부의 아내가 되려면 죽은 짐승들을 바라보면서도 울지 말아야한다고.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송아지가 죽었는데.”


 나는 송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소리없이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맑은 송아지 눈 위로 뚝 떨어졌다. 송아지도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볼세라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녀석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잘가라 임마. 내가 네 할머니였단다.”


 전에는 작은 병아리 한 마리만 죽어도 겁이 나서 만지지도 못했고 차갑고 뻣뻣한 감촉이 싫어 기겁을 하고 달아났었다. 주검을 보고나면 이상하게도 등에서부터 찬 기운이 돌며 머리털이 쭈볏 곤두서서 머리가 빙빙 돌았다. 무섭고, 싫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장에서 2년 가까이 동물들과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용기를 배웠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일 뿐 살아서 벌떡 일어나지도 않고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는 것.


 이번에는 어미소가 누워 있는 개울가로 나가보았다. 가로로 길게 누워버린 소가 끙끙 앓고 있다. 밤새 진흙창에 얼굴을 비빈 탓으로 한쪽 눈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뒤늦게 수의사를 불렀다.


 “어제 의사님을 불렀더라면 송아지랑 어미소랑 다 살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수의사는 짧고 뚝뚝하게 답할 뿐 정확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100% 죽을테고, 치료하면 50%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만 덧붙였다. 그러면서 주사를 놔주고 보온 커버를 트럭 배터리에 연결해서 들어주며 소를 일으켜 앉혔다.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


 수의사가 간 뒤로도 휴영감님과 돈아저씨를 비롯한 온 식구가 소곁에 붙어서서 등을 두드리며 넌 이겨내야 한다고 힘을 북돋워주었다. 건초를 더 날라다 덮어주고, 부숭부숭 부어 있는 눈 주위도 쓸어주었다.


 우리들은 하루 온종이 일하는 틈틈이 들판을 들락거리며 소를 돌봐주었다. 오후에는 않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또 지나갔다. 월요일 새벽 농장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휴영감님을 모셔다 드리러 돈아저씨가 나가고, 남편과 둘이서 조심스럽게 어미소를 찾아갔다.


 소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한 채 그녀의 15년 삶을 고통스럽게 마감하고 조용히 누워 흙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병아리나 송아지보다 훨씬 큰 소가 죽었을 때는 소리내어 울었었는데 그보다 훨씬 큰 어미소가 죽었는데도 눈물이 나지 않다니, 생명에 대해 무디어져서였을까, 눈물이 말라버린 것일까, 둘 다 절대 아니였다. 나느새 건초를 한가득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며 소들을 돌보고 병아리들을 기르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덤덤하게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울고불고 난리를 clsekhr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포기할 때는 냉정하게 포기해야 한다는 어떤 순리를 깨우친 덕이리라. 단순한 포기와 체념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송아지야 어떻게 묻는다쳐도 트랙터도 없는 형편에 집채만한 어미소를 치울 일이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진 구덩이에서 힘겹게 움직였던 모리영감님네 트랙터는 하도 낡아 소를 들어올릴 장비가 없었다. 그저 바퀴나 굴러 무얼 끌어내는데 쓰일 뿐.


 남편과 돈아저씨가 삽을 들고 와 구덩이를 파려고 보니 죽은 소가 더 크게 보였다. 덮어주었던 보온 카버를 벗기는데도 셋이서 끙끙대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겨우 움직였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소를 죽은 자리에다 그대로 묻을 수도 없는데다 허리가 휘도록 판다해도 그놈을 묻으려면 하루 종일 파도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이 나라 땅은 두어 삽만 밑으로 파들어가면 돌덩이 같은 찰흙이 삽날에 척척 들러붙어 나중에는 찰흙 투성이 삽이 떡메처럼 무거워진다.


 생각다 못해 우리에게 소를 거저 끼워주었던 브라이언한테 부탁을 해서 점심 무렵에야 성능 좋은 그의 트랙터가 와주었다. 360에이커(45만 평)에 300마리나 되는 젖소를 기르고 있는 브라이언은 장비도 많이 갖추고 있어서 아쉬울 때는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다행히도 우리 농장 너머에서 포크레인이 땅을 파고 있어 소를 묻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전내 삽자루를 들고 죽은 소와 씨름하던 우리 앞에 브라이언네 번쩍이는 트랙터는 눈깜짝 할 사이에 죽은 소와 송아지를 들어올려 실었다. 이미 뱃속에 들어 있던 송아지는 아주 잠깐 세상 구경을 하고는 또 다시 어미를 따라 제가 왔던 그 어떤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으며 송아지와 어미소를 그렇게 실어보내고 나자 들판에는 어미소를 덮어주었던 건초 더미만 수북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 셋은 건초 더미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등을 쪼이며 말없이 앉아 있는 건초 중치만 빼고 눈 깜짝할 사이에 건초들을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들판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평화와 정적이 감돌았다. 배부른 소들이 햇볕 좋은 곳에 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있고, 야생오리들이 날다가 날개를 접고 잠시 쉬느라 꽥꽥거리는 소리가 아득하다.


 농부가 되기 전, 동물들과 함께 살기 전에는 무심히 보아오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한없는 평화 뒤에는 얼마나 많은 자연과의 거친 싸움이 숨어 있는지. 죽음 태어남, 희생 참 많은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송아지 할머니가 된 기쁨은 이틀도 가지 못했지만 나는 자연 앞에서 그냥 자연인으로 덤덤하게 살아가는 법을 또 한 번 배웠다. 자연 속에서 사노라면 욕심낸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심은 것만큼만 거두고, 그보다 넘치거나 못할 때가 있어도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게 된다. 병아리나 송아지, 그보다 더한 어떤 것도 자연이 내게 배풀지 않으면 거둘 수 없다는 냉혹하면서도 분명한 사실 앞에 욕심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평생 사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송아지처럼 맑은 눈빛을 지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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