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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나비넥타이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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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322회 작성일 10-04-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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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최영선] 나비넥타이

미국 이민와서 얻은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C와의 만남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이주해 온 지 30년이 넘는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미국화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미국 굴지의 은행에서 고위 간부로 일하고 있다. C는 이민 늦깎이인 나를 미국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터이다. 요즈음은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1주일에 두서너 번은 서로 통화를 하는 사이이다. 그는 얼굴 모습도 너벳벳하게 생겼거니와 언제든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내가 미국 온 지 3년 채 될까말까 한 어느 날, C에게서 전화가 왔다. 뉴욕 국제센터에서 주관하는 ‘우수 기업경영자 시상식’과 더불어 ‘디너 파티’가 있는데, 미국을 좀더 알고 배울 겸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연미복’이 있느냐고 묻는다.


 연미복(燕尾服)이라면 연주회 지휘자나 결혼식 때 신랑이 입는, 위가 둥글게 늘어지고 제비꼬리처럼 갈라진 그것 아니던가, 트라이앵글 주자도 못되는 내 주제에 무슨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연미복이 있겠는가.


 없다고 했다. 연미복이 없을뿐더러 어데 가 물 한 모금 못 얻어 물을 영어 실력이니. 이래저래 거절할 수밖에.


 헌데, 그는 막무가내로 꼭 가야 한다는 게다. 이미 ‘패이 오프(요금지불)’가 다 되었다며 평상양복을 입고 가도 된다고 했다. 사양하는 내 쪽보다 C가 더 단호했다.


 ‘그래, 어차피 미국에 살려면 그런 곳에도 가보고 부딪쳐야지. 보고 배우자.’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일었다. 남의 호의를 너무 저버려도 안 된다는 생각이 일기도 한다. 가겠노라고 했다.


 3일 전에 이발을 해두엇다. 바로 전날 이발을 하면 자연스럽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양복은 내게 잇는 것 중 여느 때는 잘 입지 않고 특별한 날에만 아껴 입는 그 검정 양복이 이번에도 뽑혔다. 새로 세탁해 입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파티에는 화사한 색이 좋을 성싶어 빨간 체크 컬러 넥타이로 골라  맸다. 넥타이 끝은 허리띠에서 약 2인치 정도 내려 매는 것이 적당하다는 말을 누구에겐가 들은 것 같아 몇 번을 고쳐 맸다.


 거울 앞에 서본다. 좌로 돌고 우로 돌아보고, 멋져 보였다. 어째서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지 몰라도 그런데 갔다 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세계 제일의 도시 뉴욕, 맨하탄 40가에 내가 섰다. 마천루 빌딩 숲 사이로 차량들이 질주한다.


 어릴 적 시골, 어쩌다 트럭이 지나가면 흙먼지 속을 해집고 뛰던 촌뜨기가 지금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맨하탄을 활보하는 것이다. 처음 미국 와서는 젊은 남녀가 꽈배기되어 대로변에 섰는 걸 보고는 보는 내가 되레 민망해 눈을 돌렸으나 이젠 예사롭다.


 약속 장소에서 C를 만났다. 그는 턱시도(tuxedo:연미복 대용의 남자의 야간 약식 예복)를 입고 있었다. C를 만나자 그가 내게 연미복이 있느냐고 물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연미복이 아니라 턱시도이었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초청장에 복장 안내가 되어 있었다며, C는 내게 ‘턱시도’라고 말하면 알아듣지 못할까 싶어 ‘연미복’이라 했고, 내 딴엔 연미복의 ‘연미’는 ‘제비 연(燕)’자에 ‘꼬리  미(尾)’자를 쓰고 저고리의 뒤 아래쪽이 째져 제비꼬리 같은 예복으로 상상할 밖에, 엉뚱한 상상력은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같은 예복으로 상상은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무서운 존재다.


 하기사 턱시도인들 내게 있을 리 만무하다.


 파티장으로 향했다. 이미 나선 발길이다. 나는 C부부가 앞서 가기를 주문했다. 뒤따라 걷기를 약 5분, 동판에 별 네 개가 박힌 건물 입구로 들어선다. 호텔인가 보다.


 카펫을 밟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가슴을 편다. 아랫배에 히을 준다. 천정에 매달린 크리스탈 등이 유난히 부시다.


 지금은 신시가지가 되었다지만 나 살던-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가좌리- 옛집, 천정 아래 벽을 뚫어 등 하나로 양쪽 방을 밝히던 그 시절이 잠시 오버랩되어 겹친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도착한 것 같다.


 내 이름표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YOUNG-SUN CHOI"


 내 명찰을 만든 이가 내 이름을 찍으면서, ‘<젊은 태양>’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별 느낌 없이 마구 찍어 댔으리라.


 ‘The International Center In York Awards Dinner''''라고 인쇄 된 책자를 받는다. 책자 하단에는 ’The Waldorf-Astoria, Starlight Roof New York City''''라고 쓰여 있다.


 12번 테이블을 찾아가 앉는다. 테이블뿐만 아니라 좌석조차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C가 나의 오른쪽에, 그 담음에 그의 부인이, 그리고 내 왼켠에는 백인 여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도 혼자 온 모양 이었다. 애드벌룬 마치나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 왼쪽 위에 잠자리 액세서리는 좀 어색해 보였다. 그녀가 내게 마을 걸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C는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했거니와 예서도 예외는 아니다. 왼쪽 ‘애드벌룬’과 불편할 것을 감지했음인지 자기 자리와 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나는 그들 부부 사이에 앉었다.


 점차 좌석이 찬다. 한 테이블에 8명씩, 얼핏 보아 25테이블, 약 200명 정도임을 쉽사리 알겠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연미복을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질 않는다. 남자들은 턱시도를 입었거나 평상복을 입었더라도 ‘보우타이(bow tie)'''', 일명 ’나비넥타이‘는 빠짐없이 맸다. 남자종업원들까지도 매한가지이다.


 검정이 주종을 이루며, 진 곤색, 호랑나비, 물방울 무늬, 하얀 공단도 눈에 띈다. 검정 벨벳도 있고, 끝이 마름모로 된 것, 네모진 것에 둥근 것도 보인다.


 남자가 줄잡아 100명, 그중 나 하나만만 보우타이가 아닌 퍼 앤 핸드(four-and-hand: 주먹의 약 4배 정도라는 것에서 유래)를 맨 채 앉아 잇는 것이 아닌가.


 산에 돌무더기 흘러내린 너덜겅처럼 볼성 사납게 긴 넥타이를 늘어뜨리고 쭈그렁이가 되어 앉았는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서 멋스러워 보이던 나는 온 데 간 데 없이 쥐구멍이 그리운 지금이다.


 모두들 장교인양 권총을 차고 앉았는데, 나만 사병의 자세로 M1소총을 메고 있는 꼴.


 마주 앉아 영어로 쑥덕이며 해낙낙 까불거리는 두 여인의 웃음에 내 귀가 쫑그린다. 원래 내 왼쪽이었던, ‘린다(Linda) 뭐’라고 하는 명찰을 달고 있는 ‘애드벌룬’도 모들뜬 눈으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까닭은 내 넥타이 때문이리라.


 한 테이블에 앉았는 이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다른 식탁에 앉았는 이들도, 그곳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나를 훔쳐보는 눈초리가 그러했다. 미국사람들은 남의 일에 별관심이 없다더니 이도 헛소리다.


 시상식인지 뭔지, 순서는 어디쯤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도시 정신이 없다. 누구에게도 지금의 내 심정을 보일 수가 없다. C도 지금의 나를 채 읽지 못하고 잇을 거다. 내가 그런 따위로 고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테니깐, 아니면 내 신경을 공연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리라.


 생각해 본다. 넥타이는 애당초 군인들의 전유물이었다던데, 그렇다. 이 파티자은 작은 미국이요, 나는 전쟁터에 와 있는 것이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이쯤은 견뎌야 한다. 우선 내가 나를 이기는 일이다. 역사는 전쟁의 기록이고, 생활은 싸움의 연속이라지 않는가. 뭐 이까짓 일 가지고 좀스럽게 이러는가 싶기도 하다. 저들은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내 생일 11월 26일 연관지어 자주 떠올리는 마태복음 11장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나이다’를 뇌인다. 그렇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인지. 자위해 본다.


 어쨌거나 아내와 함께 오지 않은 것만해도 천만 다행이 아니더냐.


 천지 사이에 깨알보다 작은 나는 유구한 역사 속, 눈 깜짝하는 사이에 태어낫다 사라지는 것인데 그중 나비넥타이를 매지 아니한 한번의 실수가 대수랴.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갈 내 인생 자빠진 김에 누워가지. 이런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대학시절 머리를 박박 밀고 ‘게다’를 질질 끌며 강의실 복도를 누비던 뱃심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랫배에 다시 힘을 부어본다.


 사실 난 나의 모교- 오산(五山)학교 설립자이신 남가 이승훈 선생님께서 나비텍타이를 매신 사진을 보고 그 멋스러운신 모습에 매료되었었다. 해서 고교를 졸업한 60년대 초부터 자주 나비넥타이를 매보았다. 특히 모 합창단 단원으로 행사가 잇을 때마다 나비넥타이를 사용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처음 나비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설 때의 기분을 망이순(望耳順)의 나이에도 잊지 못하고 있다.


 회억에 잠시 잠기더니 60년대 초에 나비넥타이를 맸으면 무슨 소용이랴. 지금의 나로 돌아와 창피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든다. 촌닭이 따로 없지 싶다. 스스로 철판을 깔자던 내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달아오름을 느끼겠다.


 밖에 나가서 어디 나비넥타이 파는 데가 잇나 찾아볼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까도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 동료 직원들과 종종 야외로 나들이를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일동쪽으로 갈 때는 막걸리를 마시게 되니 양재기를, 다른 곳에 맥주를 사가지고 가는 경우에는 유리컵을 준비해 가는 ‘챙김이’이었는데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집에 있는 서너 개의 나비넥타이 중 한 개만 주머니에 넣고 왔어도 이런 봉변은 면했을 것을.


 솔제니친이 쓴 이반데니소비치 감옥의 하루보다 더 긴 시간이 흐른다.


 지금 내다주는 음식은 초등학교 때 학교 앞에서 파는 칡뿌리보다 훨씬 쓰다는 느낌이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새가 없이 오직 나비넥타이뿐이다. 밝은 등불 밑이 이토록 캄캄하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당초 못 간다 했을 때 더 버텨야 했을 것을.


이브가 뱀의 굄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뒤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듯 숨고 싶은 심정이 이러 했을까.


 고육지계로 이 긴 넥타이를 잘라 신제 나비넥타이인양 매 볼까? 가위, 실, 바늘만 있으면 화장실에 들어가 해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따위의 도구가 있을 리 없다.


 궁리해 본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서빙’을 하고 있는 저 흑인을 따로 부르자. 얼마의 달라를 주고 에멜무지삼아 나비넥타이가 여유 있으면 달라고 해보자. 게걸음으로 나선다. 흑인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갔다. 내 긴 넥타이를 들어보이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내어 돈 꺼내는 시늉을 했다. 그 검은 얼굴에 제가 창피하다는 듯 달아오르는 면모를 읽을 수 있겠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딘가를 급하게 다녀왔다.


 그 흑인은 나의 아픔을 잘 감싸주는 요두리가 되어 주었다. 검정색 나비넥타이를 손에 들고 온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그런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보는 뿌듯한 순간이기도 하다.


 아까 게걸음으로 나올 때와는 달리 보무도 당당하게 내 자리를 찾아간다. 나도 장교답게 권총을 찼다는 생각으로 나비넥타이를 매만지며 으스댄다.


 “여보셔들, 나도 나비넥타이를 맺다고요.”


 입 속에서 들썽인다. 나와 같은 테이블의 식객들이 나를 보고는 의아해 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없다. C만 “보우타이가 있었구나.”한다. 그날 나는 미국 공부 퍽이나 한 셈이다.


 이러구러 세월이 흐르고 연전, 하나밖에 없는 여식의 결혼 날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흰 민들레꽃처럼 제 짝의 품으로 날아가는 날이다.


 한데 신부 아버지도 턱시도를 입어야 한다고 딸애가 성화이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내숭을 떨며, 대여점에 가 빌려 입었다. 그랬더니 보는이마다 한 마디씩 거든다.


 “잘 어울리셔요.”


 “훤 해지셨어요.”


 “나비넥타이가 멋있어요.”


 야단들이다. 빈 말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는 이들이 예뻐보였다.


 그날 딸애는 제가 저 좋은 사람 찾아 훌쩍 날아갔다지만 나는 딸을 빼앗긴 그런 기분이었다. 딸을 시집보낸 애비들은 다 그러했을 것이다.


 빼앗긴 딸로 피곤했던가보다. 집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는가 싶은데 홀겹이 덮어주는 손이 둔탁하다. 제 누이 결혼식 뒷정리를 하고 들어온 막내아들 녀석임을 잠결에도 알겠다.


 제 누이 몫이었는데 이젠 제가 맡으려나보다.


 “쯔쯧, 보우타이라도 끄르고 주무시지 않고…….”


 녀석은 나의 뒷목 언저리를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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