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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산행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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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80회 작성일 10-04-2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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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김성광] 산행


10여년만의 고국방문, 토요일 오후 친구와 둘이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 후,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든 시각은 오후 2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조차도 자기 나름의 밝고, 맑은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표한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돌려 흐린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킨다.


“야! 이눔아야. 나도 이자 늙었데이.”


오랜만에 만나 친구의 첫 마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어떤 변한 모습으로 비쳐졌을까.
바쁜 이른 아침 잠시 짬을 내어 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로움조차도 잃어버린 채 보낸 많은 시간들 그 잃어버린 여유로움을 잠시나마 만나보기 위해 이렇게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하늘에 맞닿을 듯 오롯이 산자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산골짜기 허름한 민박집에 들었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느라 땀을 흘려서일까. 나른한 피로감이 손깍지 베개를 한 채 살포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 앞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혼요한 상태로 부스스 풋잠에서 깨어보니, 사방이 괴괴한 적요에 잠긴 채 텅 비었다. 밀폐된 방안에는 빈틈없이 어둠이 들어차 아무석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온전한 어둠을 경험한 게 언제였던가. 나 자신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 함께 침잠하고 있다는 자각은 의외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 쌉싸름한 산의 미세한 향기가 코 끝에 베어들고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툇마루로 나 앉자 기다렸다는 듯 하얀 달빛이 살포시 내려와 발목을 촉촉이 적시워 온다.


 “계곡을 흐르는 시리도록 맑은 물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그대로 무진법문(無盡法門)이요. 저 푸른 산을 보면 그것이 그대로 비로자나 법신불의 진면목이거니, 나 이런 경지까지 왔으니, 그 무엇을 더 이상 필요로 할까나…….” 라는 선시(禪時) 줄기로 밤 민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는지 사람의 기척도 이미 오래 전에 끊긴 듯 농익은 정적뿐이다. 곁 고운 미진한 바람의 움직임. 괴괴한 정적의 기운, 그 모든 것이 섬세하게 느껴질 정도로 깊고 정밀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흐릿한 어둠 사이로 가늘게 선을 그어 놓은 듯한 산의 모습이 앞을 막아서면 다가선다. 산은 높은 만큼 골도 깊다. 멀리서 바라보면 산에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숲에 가려 오직 황소 등허리 같은 능선의 윤곽만 보일 뿐. 그러나 가까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사람 다니는 길,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이 따로따로 나 있기 마련이다. 산은 농울차게 꿈틀대며, 우뚝 버티고,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 산은 오만하지도 그 어떤 것에도 거부감을 주지 않으며, 언제나 인간들을 푸근하고 부드럽게 품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유독 인간들은 제대로 나 있는 길 위의 길도 보지 못하고, 마음의 눈과 귀를 닫아 걸은 채 무엇이든 선을 그어 놓고 있지 않은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에 불을 당기려다 언뜻 맑은 밤 공기를 대하기가 민망스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데, 시리도록 하얀 달빛을 받으며, 계곡 옆 바위 틈새에 알몸으로 함초롬히 피어 있는 싸리꽃 무리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깊은 신음소리를 뱉어낸다. 짙고 깊은 꽃향기가 온몸을 가득히 휘감아 오는 듯한 환상에 젖어들며, 감히 인간들은 범접치 못할 경외로운 자태에 초연해질 수가 없어 문득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슬프게도 할 수 있는 걸까. 밝고 맑은 달빛이 오늘밤 이곳으로 되돌아와 천 개의 계곡에 비추어 천 개의 달로 계곡물에 들어앉아 있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산 속에 있으면 어렴풋이나마 바람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고즈넉한 쓸쓸함이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져 버린 쓸쓸함……. 막연한 기다림과 기대감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여 살아왔다고, 내 자신을 스스로 규정지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결핍을 느낄 때 버릇처럼 나는 산에 오르곤 했었다. 그때마다 산은 묵시적으로 그 해답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래서 잠시 세상을 비켜앉아 세상과의 온전한 단절감을 맛보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도 없는 산행을 불쑥 떠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치고 너무 힘이 들어서 가끔씩 기대고 싶어질 때, 포근하게 기대어 있고 싶은, 그러나 아직도 그런 쉼터를 마련하지 못하고, 오직 떠나기 위해 머물러 있는 듯한 이 공간에서 매사가 부질없음을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집착한 만큼, 그 상실감으로 인해 턱없이 허전해 하고, 배로 실망감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견딜 수 없는 자괴감으로 가슴이 아려 온다.


 애초부터 버릴 만큼 가진 것도 없었던 그런 일상이었지만, 깊게 젖어든 권태로운 그 안락함을 벗어 버리기 위해 떠났던 새로운 기다림의 여행길, 그러나 버렸다고 생각만 했을 뿐, 그것은 버린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끈을 놓지 못해 자유로울 수 없는 내 영혼은 그래서 오늘도 허공을 떠돈다.


 얼마 동안을 미동도 않은 채 깊고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일까. 굼실굼실 서늘한 한기가 안개처럼 온몸을 덮어오며, 맨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언제 돌아왔는지 의식의 아득한 저편, 계곡에서 손을 씻던 친구가 갑자기, “물이 되게 차네.”라는 낯 꿩 울음소리 같은 선문답을 던져 온다. 친구는 무위적정(無爲寂靜)의 계곡에서 아마도 변화를 좋아하는 천박스런 인간의 변덕스러움 대신 우주의 순수함을 잠시 만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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