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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행복한 눈물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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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311회 작성일 10-04-2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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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박영희] 행복한 눈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거의 변화가 없는 나의 일과는 아침에 가게 문을 열어 한 장이라도 더 팔아 보려고 손님들과 실랑이하다가 오후가 되면 빠진 옷을 구입하기 위해 도매상들이 밀집해 있는 아베자네다 거리로 종종 걸음을 친다.


한국의 도매시장과는 달리 양쪽으로 길고 화려한 쇼윈도를 가지고 서로 다른 자태를 뽐내려니 결정의 시간에는 갈등도 많다.


 모델 보고 가격을 비교하며 바삐 걷다 보면 낯익은 얼굴들과 스치게 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안부도 묻고 정보도 교환하고, 그러나 서로 시간에 쫓기는지라 아쉽게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4차선 도로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수많은 도매상들 사이에 들어선 구두점은 옷 때문에 피곤한 내 눈에 색다른 유혹이었다.


 이 길을 다닌 지 오년이 되도록 문을 열고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매번 진열된 구두들은 빠짐없이 눈으로 신어 보았다.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팔 물건도 아니지만 어차피 높은 굽의 유행 구두는 종일 서서 손님을 맞거나 바삐 뛰어다니며 옷을 구입해야하는 소매 옷 가게 주인아줌마의 신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이민 짐에 와 고은 먼지가 앉은 하이힐들이 가뜩이나 좁은 신발장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가끔 꺼내 신어 보며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듯 쇼윈도를 보는 시간만은 투박하고 손질도 게으른 구두를 신은 나를 유리 구두의 신데렐라로 만들어 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빠지는 날 없이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자리잡았다.


 허리가 시원치 않은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 따라 나서는 날이면 큰 아이는 말없이 곁을 지켜 주었지만, 막내는 사지도 않으면서 그런다고 꼭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매번 나는 구두점 앞에 멈춰 섰다.


 두 주 전 큰 아이가 pc방으로 아르바이트를 나섰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이지만 늦은 밤에 일이 끝나게 되는데, 우리 집이 교외에 있는데다 얼마 전 강도에게 가방이랑 워크맨을 빼앗기고 들어온 일도 있어 걱정이 많아 주저하다가 하도 간청을 해 마지못해 허락하게 되었다.


 첫 날은 새벽 두 시에 들어오는 통에 잠도 못자고 대문 밖을 서성였는데, 사내 녀석을 치마폭에서 키우려 한다는 남편의 구박에 아르바이트를 말리지 못했다.


 그런데 네 번 일하고는 해고를 당했다. 매장 청소나 컴퓨터 관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커피에 햄버거까지 만들어 서빙해야 하고, 일이 아직 익지도 않은 아이를 오래 근무한 전임자와 자꾸 비교를 하는 통에 자존심도 상했는데, 주인 형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래서 합의하에 해고를 당했다는데 풀이 죽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일하는 걸 탐탁치 않아 했으면서도 은근히 화가 났다.


 가게 일을 도와 줄 땐 싹싹하다고 일부러 큰 아이를 찾는 손님들도 꽤 있는데 너무 짧은 시간에 아이를 평가한 것 같아 속도 상했다.


 내 맘을 아는지 서운한 표정을 감추고 시원하다고 했지만, 혹시 상처받은 건 아닌지 꽤 신경이 쓰였다.


 물소리에 잠이 깨어 보니 이제 여섯 시였다. 아침이면 동네가 떠내려가도록 깨워도 졸고 있던 아이가 샤워를 하고 있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놀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게다 다른 날보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일에 쫓겨서 잊고 있었다.


 점원 아가씨는 몸이 아파 조퇴를 하고 남편은 체육회 모임 가느라 일찍 나가게 되었다. 큰 아이가 늦어지니 시계만 보고 있는 남편의 등을 밀었다. 투덜거리는 막내와 일을 하려니 짜증이 났지만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바삐 움직이면서도 틈만 나면 눈은 밖을 살폈다. 근데 문 닫는 시간을 이용한 좀도둑이나 간 큰 강도들이 많아져 조심조심해야 했다. 큰 아이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시작한 셔터 내리기는 무거운 쇠문을 걸지 못해 쩔쩔매는라 우리 가게만 남게 되었다. 겁 많은 막내는 눈물을 글썽이고 괜시리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도 머리끝이 섰다. 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이 도와주어 보조 자물통까지 채우고 나니 이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큰 아이에게 화도 나고 걱정도 되었다.


 집에 와있으려나 했는데 불은 꺼져 있고 전화 메시지도 없다. 형이 늦게 오는 통에 자기만 일 많이 했다며 심술이 난 막내에게 저녁을 주고 나니 열 시가 넘었다. 이제 열일곱 살이라 토요일, 일요일은 귀가 시간을 연장시켜 주었지만, 평일은 허용되지 않는 외출을 허락도 없이 할 아이가 아닌데 방정맞은 생각만 들었다.


 연신 대문을 보다가 요사이 부쩍 통화가 잦아진 여자 치구네 집에 전화를 했다. 일전에 통화하는 걸 곁에서 보다가 적어놓은 전화번호였는데 요긴히 써먹을 일이 생기다니.


 그러데 엄마 선물 사러 나갔던 길이란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오랜만에 만나 밀린 이야기 하다 늦어졌으니 야단치지 마시라며 일하는 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나보다 더 속상해한다.


 여자친구 만나느라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까지 한 아들을 걱정한 것이 약이 올랐다.


 은근히 선물이 기대되고 궁금했다.


 그러데 기다리던 아이보다 전화가 먼저 왔다.


 운수 노조의 야간 운행 파업이 밤 열 시부터 시작되어 아직 정거장에 있단다. 예고가 있기는 했지만 찬반이 반반이라 준비가 없었는지 많은 이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매운 추위와 바람까지 심한 날씨에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느라 길에서  있을 아이 때문에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늦어지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이가 있으면 데리러 갈 수 있을 텐데.’


 비 맞은 중 모양 중얼거리며 대문 밖을 서성였다.


 마침 들어서는 차를 되돌려 아이가 서 있다는 정거장으로 향했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돌아오는 길에도 차창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힘없이 차에서 내리는데 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마침 이웃에서 장사하는 원주민이 알아보고 차를 태워 줬다며 운이 좋았다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니 탈 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화가 났다.


 들고 잇는 쇼핑백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죄송하다는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아이에게, 사내자식이 그렇게 여려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겠는냐면서, 사회생활이 어려운 거라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만 해댔다.


 남편이 중재에 나섰고 그 틈에 슬그머니 쇼핑백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선물 안 줘도 좋으니 걱정시키지 말라며 아이가 보는 데서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눈물을 흘리며 이층 제방으로 향하는 아이가 안쓰럽긴 했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방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야 던져져 있던 쇼핑백을 주워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조심스레 꺼내 보니 낯익은 구두가 들어있었다.


 “예전엔 엄마도 하이힐만 신었는데, 저 구두 참 예쁘다. 엄마 신으면 어떨까?” 하며 눈길이 오래 머문 것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씩씩거리며 야단을 치던 엄마는 철부지 아이마냥 주책맞게 구두를 꺼내 신었다.


 어쩜 왕자님이 신데렐라를 찾았듯이 내 발에 맞춘 양 꼭 맞았다. 엄마 발 치수를 알고 있었다니, 어린아이처럼 신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도 보고 앞뒤로 걸어도 보고 한참을 그러다가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혹시 바닥에 흠집이라도 났을까 깨끗이 닦아 상자에 넣었다.


 다음날 옷을 구입하기 위해 나선 길에 다시 구두 점 앞에 섰다. 손에는 아이가 사다 준 구두가 들려 있었고 늘 하듯이 쇼윈도를 찬찬히 살폈다.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가격이 같으면서 굽이 낮고 발이 편할 듯한 검정구두로 결정한 뒤, 문을 열려다 남편이 해주던 말이 생각나 멈춰 섰다. 예쁘긴 한데 이 구두 신고 갈 곳이 없다는 푸념 끝에 아무래도 신발을 바꿔야겠다며 영수증을 챙기는 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사온 아이 성의를 생각해서 그냥 신어. 정 신을 일이 없으면 모셔놓기라도 해. 그걸 고르던 이이 맘을 생각해 줘야지.”


 그냥 돌아섰다. 애써 번 돈으로 엄마 구두 고르며 아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까? 신발을 바꾸겠다고 들고 나서는 가슴이 말라 버린 엄마에게 실망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가게로 돌아와 구두를 신어 보았다 . 점원 아가씨는 예쁘다고 호돌갑을 떨고, 보고 있던 단골 할머니도 한 마디 거든다.


 우리 아들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다 준 거라고 오는 손님마다 붙잡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돌아오니 구두 이야기를 꺼내기가 쑥스러워 쇼핑백을 슬그머니 감췄다. 모두들 방으로 들어간 뒤에야 쇼핑백을 꺼냈다.


 이미 당분간은 신을 일이 없겠지만 아이에게 내 마음을 보이고 싶어 신발장 맨 앞자리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상자의 봉투를 정리하다가 상자 밑에 붙은 쪽지를 보고는 다시 구두를 꺼내들었다.


 “엄마, 구두점 앞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계신 엄마를 보면 속상했어요. 제 기억에 엄마는 멋쟁이 원장 선생님이셨는데, 이민와서  장사일로 고생하셔서 달라지셨어요. 아르바이트해서 엄마한테 이민오기 전처럼 예쁜 옷에 구두를 신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빨리 잘려서 겨우 구두 살 돈만 생겼어요. 이 구두를 신고 싶어 하셨는지요. 그런데 엄마가 무얼 입고 계셔도 나는 엄마가 제일 멋있습니다. 쑥스러워서 말로는 못했지만 용건이 엄마를 무척 사랑합니다.”


 간간이 틀린 맞춤법이나 어색한 문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구두 마쑤는 일에 신경 쓰느라 하마터면 아들이 보낸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읽지 못할 뻔했다.


 가슴에 구두를 꼭 안았다. 아들의 따뜻한 마음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구두를 바꿨더라면 아이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구두 코에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느라 나온 막내가 “엄마, 울어?” 하고 묻는다.


 “아니야, 엄마 웃고 있는 거야. 웃음소리 안 들려.”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돼서 웃고 있는 엄마를 막내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무 행복해서 소리 내어 웃으며 흘리는 이 눈물을 고이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꺼내어 보며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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