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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아내의 흉터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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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30회 작성일 10-04-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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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안광환] 아내의 흉터


오늘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다.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은 폭죽과 함께 강가의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등불들로 치장될 에펠탑을 구경하러 간다며 한참 부산을 떨던 집주인 내외가 아이를 앞세우고 문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이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닫히는 문소리에 끊긴 뒤 집안에는 금세 정적이 흘렀다.


 열 평도 채 안 회는 작은 방에 중국제 탁상시계만이 홀로 똑딱거리리며 부지런히 제 갈길을 가고 있다.


 나는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시계는 어디를 향해 저렇게 쉼 없이 걷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건가.’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군’


 어제 아내는 입원실에서 아오는 내 주머니에 작은 쪽지 하나를 살며시 넣어주었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해진 쪽지를 꺼냈다. 병석에 누워서 어렵게 쓴 탓인지 글씨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아내의 눈물이 배어 있어서 그런 것처럼.


 



 그리운 광한씨,


 내 남편, 지금 당신 곁에 있는나는 너무도 행복행


 내게도 전과 같은 행복이 다시 찾아오겠죠. 화기애애한 가정,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 그리고 우리의 미래인 아이.


 최근 2년 동안의 나날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 시련이었던가요. 하지만 이 모든 고통과 설움도 결국 흐르는 시간의 물결 위에 실려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조금씩 멀어지겠지요. 모든 거이 다 좋은 추억이었다고 기억될 그 어느날 까지 아주 조금씩...


 아마 내일은 좀더 아름답겠죠. 그걸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져요. 나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새 날을 기약하고 싶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짧은 아내의 편지는 내 마음을 몹시 흔들어놓았다.


 뒤늦게 외국나들이 바람에 말려들어 온갖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던 악몽과 같았던 지난 2년.


 초기에 내가 염두에 두었던 곳은 일본이었다. 당시 한국은  IMF로 진통을 겪고 있던 터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뿐더러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료도 낮았기 때문이었다.


 일본행을 위해 내가 지불해야 했던 총 수수료는 만육천 달러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수속이 아니었던 탓에 기대와는 달리 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일본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선금 팔천 달러를 떼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공무원이었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액수였다. 게다가 고리(高利)로 빌린 돈인 터라 그 소식을 듣고 곧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아우성을 쳤다. 


 이제 어떻게 하던 나는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많은 빚을 갚자면 중국에서의 내 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기 떄문이었다.


 나는 비교적 수수료가 싼 프랑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빠져 나오면서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희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선 듯한 감격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언어부터 낯선 이국 땅에 발을 디딘 내 존재는 사막 한 복판의 한 톨의 외로운 모래알과 같았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렇게 낯설기만 하던 이곳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안정의 바탕에는 교민신문사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 비록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중국 화폐로 환산할 때 상당히 큰 액수였기에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남편을 외국에 보내고 애와 함께 살아야 했던 아내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홀로 온전히 견뎌야 했고, 게다가 경제난이라는 이중고까지 겪어야 했다. 설날 아침 아내의 주머니 속에는 돼지고기 일킬로를 살 수 있는 돈 칠 원만 달랑 남아 있었다.


 아내는 그 돈을 손에 쥐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코 다가올 것 같지 않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몇 달 뒤 아내는 내가 보낸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중국돈으로 칠천여 원에 이르는 큰 액수였다.


 아내와 아이는 너무도 신기해서 돈을 세고 또 세고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다가 다시 세보곤 했다. 이제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듯 싶었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몸이 좀 불편해서 우연히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았던 아내를 기다린 것은 자궁에 큰 혹이 생겼다는 진단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선진국에서야 그리 어려운 수술이 아니었지만 의료시설과 기술이 낙후한 중국에서는 자궁을 잘라내거나 심한 경우 전체를 들어내야 했다. 아직 젊은 여자에게 있어 그건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었다.


 혼자서 끙끙 앓던 아내는 결국 그 사실을 한국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여동생에게 알렸다. 여동생은 의술이 발달한 한국을 추천했고, 회사에서 초청장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회사 직원도 아니고 한국어에 능통하지도 못한 아내는 결국 한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여동생 부부에게 말했다.


 “내겐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싶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죽든 살든 남편과 함께 있고 싶다. 이렇게는 도저히...”


 결국 아내는 여동생 부부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올 수 있었다. 일년간 떨어져 있던 우리 부부는 그렇게 이국땅에서 다시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만남의 기쁨도 잠시, 우리 사이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아내는 내가 여자들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한번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에만 전념하는, 이성에 관한 한 다분이 폐쇄적인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친구처럼 만나 부부 아닌 부부로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몹시 꺼려오던 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에, 이국 땅에 혈혈단신으로 돈벌러 온 여자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때면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 덕에 아내의 의심의 눈길은 점점 더해갔고, 아래의 말투에는 늘 가시가 돋아 있었다. 자연히 부부싸움이 눈에 띄게 늘었고, 나는 몰라보게 변한 아내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에 있는 누나와 통화를 하던 중, 나는 아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편인 내게조차 말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후 나는 여러모로 아내를 돌보며 힘든 일을 가능하면 시키지 않았다. 아내에게 정신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되도록 사람들과의 만남도 자제했고,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휴일에는 가능하면 함께 집에 있거나 함께 외출을 했다.


 그러다 적당한 시기에 맞추어 나는 아내에게 내가 아내의 병에 대해 알고 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영원히 아내만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병을 속이고 있던 아내는 이 뜻밖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결국 내 품에 안겨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남편을 외국에 보내놓고 빚쟁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내야 했던 지난 1년 동안의 고초, 그리고 남편과의 상봉 후에도 말할 수 없었던 병 때문에 아내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는지 아내는 섧게섧게 울었다.


 “만약 내가 아내 노릇을 하지 못하면 아직 젊은 당신은 어떡해 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그 뒤 나는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들을 하나씩 밟아나갔다. 우선 체류증을 신청하고 의료보험에도 들었다.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은 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술을 받을 날짜가 정해졌다. 병의 진행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의지하며 위로하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수술날이 왔고 나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귀에다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말고 수술 받아. 다 괜찮을거야. 만일 무슨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당신의 영원한 남편이고, 당신 또한 내 영원한 아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밖에서 프랑스 혁명일을 경축하는 폭죽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이제 시작인가 보군.’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밤하늘에 긴 꼬리를 늘이며 퍼지는 폭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정말 저 폭죽이 화려하게 수놓은 밤하늘처럼 새로운 날이 내게도 다시 찾아올까.’


 수술실에서 무사히 나온 뒤 초췌한 얼굴로 아내가 했던 말이 바람결처럼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술 결과가 좋아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대요. 중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병으로 젊음을 잃고, 가정도, 행복도, 여성의 자존심도 잃은채 눈물로 적셔진 쓸쓸한 인생을 보내고 있어요. 그들이 이런 좋은 시설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파요.“


 나는 잠시 웃어보인 뒤 아내의 옷을 조금 들춰서 수술자리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면 저 자리에 흉터가 남겠지.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그 흉터도 조금씩 희미해지겠지.


 는 순간적으로 아내의 배에 난 흉터가 조금씩 꿈틀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벌리고 웃으며 저 멀리 날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탁상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시계소리는 단조롭게, 하지만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 앞을 향해 부지런히 걷다보면 언젠가는 아내의, 아이의 손을 잡고 저 작열하는 폭죽의 물결 속을 폭죽보다 더 환한 미소와 함께 뛰어볼 날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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