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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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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59회 작성일 24-05-13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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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언제 수확해?" 열무인지 풋배추인치 모를 풀들이 마구 자라고 있다. '더 자라야 해'라는 남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마당의 주인은 남편이니까 나는 두말도 하지 않았다. 팔뚝만 한 잎이 한 켠으로 누렇게 쳐질 무렵, 남편이 수확하는 날이라고 했다. 나는 천일염에, 한국산 고춧가루에, 통통한 새우젓을 준비했다. "그래, 정성껏 담근 김치, 바로 이거야"

나에게 늘 뭐를 주는 친구가 있다. 커피 가루가 씹히는 쪼콜렛, 반짝이 양말, 눈가 주름 펴는 한방 팩. 이런 것도 있나 싶은 신기한 물건이다. 나는 뭘 줘야 할지 막막했다. 이 빠진 접시도 음식이 담기면 되고, 불에 그슬린 주전자도 물이 잘 끓으면 나는 불만이 없다. 물건을 보면 다 그게 그거 같아서 머리만 아파진다. 친구에게 뭐를 주고 싶어서 끙끙대던 참에, 남편이 키우는 오가닉 열무가 등장했다.

김치를 잘 익혀서 줘야지. 밖에서 하루를 두었다. 정갈한 마음으로 맛을 보았다. 쓰고 질겼다. 열흘을 더 기다렸다. 익지 않는 김치도 있나? 씹어도 씹어도 심지가 있었다. 딤채에 박힌 김치는 몇 달이 지나도 심통을 부렸고, 친구에게 주려던 김치는 물 건너갔다. 작년 가을의 일이다.

이제 아침이면 선뜻하다. 8월에 숨어있는 서늘함을 알아챈 풀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상추는 보라 꽃, 파슬리는 연두 꽃, 미나리는 흰 꽃을 내었다. 겉으로는 나비와 건들거리지만, 이세를 퍼뜨릴 꿍꿍이 중 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작년에 노란 꽃이 살랑거리는 어른 열무를 건드렸다가 심한 보복을 당했다. 나도 봄부터 계략을 세웠다. 남편에게 딸까 말까 묻지도 않고, 남편이 없는 시간에 마당에 나갔다. 은밀하게 나오는 꽃대를 잡아내야 한다. 꽃대가 보일랑 말랑하면, 이파리들을 따서 내 부엌으로 데려왔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성으로 강해지는 것은 알았는데, 풀도 이세 때문에 질겨지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쇠심줄이 박히는 늦가을까지 바라보기만 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초봄에 아기잎을 따서 들어오면 그는 매정하다고 눈을 흘겼다. 남편은 새벽에 풀들에 달려간다. 목말라서 애처롭고, 쓰러지면 세워주고, 지들끼리 엉키면 뜯어말리고, 훈계도 하고... 얘들이 자식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지, 찬바람에 씨를 멀리멀리 보낼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은 건지...

아니다. 이것은 남편을 너무 좋게 봐줘서 그런 것이고. 심기는 했지만, 거두는 것이 귀찮아진거다. 분업을 하자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실 난 팬더믹 전에는 풀 한 포기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 이거든 저거든, 내 입에 연한 것이 들어오려면, 내가 악역을 하면 된다.

베이즐의 초록이 윤기가 난다. 잎에 얼룩이가 생기기 전에 베이즐 페소를 만들었다. , 마늘, 올리브 오일, 소금을 넣고 함께 갈았다. 깻잎도 아집이 생기기 전에 장아찌를 만들었다. 나이 들어서, 힘이 잔뜩 들어가면, 사람이나 풀이나 매력이 없다. 냉장고만 차지하다가, 버려지는 것을 남편이 아는지 모르는지.
작년에 못 준 김치 대신 향이 가득한 베이즐 페소를 친구에게 줄 궁리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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