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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P 선생의 빨간 냄비 - 이 영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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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ynasty 댓글 0건 조회 4,078회 작성일 09-10-2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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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선생의 빨간 냄비


 


올겨울 내 패션의 컨셉은 빨강색이었다. 컨셉이라고 하니까 거창한 느낌이 들어서 쑥스러운데, 사실인즉 큰애가 사준 빨간 색 스카프를 두르고 다닌 이야기를 멋지게 표현해본 것이다. 빨간 색 스카프를 사다 주면서 한 큰애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큰애는 “엄마 나이의 사람들이 악세사리 한 가지만이라도 밝은 원색으로 액센트를 주면 더 젊어 보이고 명랑해 보이더라. 엄마도 젊어지라고 샀으니까 하고 다니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어디에 가든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젊어 보인다니까. 그 뿐이 아니다. 딸이 같은 색깔의 핸드백까지 골라주는 바람에 빨간 백과 스카프가 셋트가 되었다. 당연히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했지만, 남이야 뭐라 하든 어떤가. 원색이 내 몸과 함께 하고 있으니 진짜로 기분이 고양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빨간 색은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색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우울할 때 립스틱을 짙게 바르는 것일 게다.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빨간 색 티셔츠를 입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까지 덩달아 하다 못해 시계줄까지 빨간 색으로 걸치고 방방 뛴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빨간 색에 대한 나의 추억은 어릴 때 설빔으로 입었던 다홍치마와 대학 시절이다. 대학에 입학해서 맞은 첫 번째 겨울방학에 맞춘 겨울코트가 빨간 색이었다. 그 코트를 졸업할 때까지 입었으니 빨간 코트는 학우들 사이에서 내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였다. 긴 코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코트도 아닌 내 빨간 코트는 말하자면 7부 코트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코트를 입으면 모던해 보이고 세련돼 보여서 지금까지도 그 때 빨간 코트 차림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학우들이 많다.


그런 기억을 보면 아마도 나는 원래부터 빨간 색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음식을 할 때도 색깔에 신경을 쓰고, 대부분의 음식은 빨간 색으로 액센트를 주어야 맛이 살아난다. 음식 얘기를 하니까 또 생각나는 일이 있다. 재작년 서울에 갔을 때, 소설가 P선생이 댁으로 초대해주셨다. 그 때가 3월이었는데, 3월이면 이미 김장김치는 다 먹었을 때다. 그런데 동네에서 김치 담그는 솜씨 좋은 분이 아직 싱싱한 김장김치를 갖다 주었다면서 김치찌개를 끓여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도 P선생은 내가 서울에 갈 때마다 집으로 불러 음식을 해주시곤 했다. “다른 반찬이 없으니 오늘은 김치찌개만 먹어요.”하면서 손수 김치를 썰고 돼지고기를 썰어 빨간 색 조그만 냄비에 넣고 끓이셨다. 그 찌개가 얼마나 맛있던지 나는 밥을 두 공기나 먹고 너무 배가 불러 쩔쩔 맸다.


여기서 포인트는 김치찌개를 끓인 그 냄비였다. 한 사람 분의 라면을 끓일 수 있는 지름이 15cm 정도의 그 빨간 냄비는, 다른 냄비들과는 달리 높이는 거의 10cm 정도였다.  보통 냄비보다 속이 두 배 정도는 깊은 것이다. 그렇게 속이 깊어서였는지 몰라도 정말 파도 넣지 않고 다른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오로지 김치와 돼지고기만으로 만든 찌개가 별미 중의 극치였던 것이다. 빨간 색이 사람의 구미를 돋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김치찌개의 맛은 냄비가 아니라 김치 맛일 것이다. 요즘은 옛날 같은 김장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난스런 나는 김치냉장고를 l이미 몇 년 전에 장만해 김장을 담궜던 사람이니까 거기에 3년 된 김치까지 저장돼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김치냉장고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김치를 옛날처럼 많이 하지도 않는 시대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사철 내내  배추를 살 수 있으니까 김장에 대한 절박함이 없어지기도 했다. 당연히 3월까지 차가운 땅 속에서 김장김치를 꺼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그 날 그 앙증스러운 속 깊은 냄비에 담겨 있던 김치찌개가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후, 나는 똑같은 빨간 냄비를 사려고 백화점이며 부엌용품 파는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 같은 냄비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독일제 냄비라는데, 유럽에 가도 미국에서도 서울에서도 아직 찾지 못했다. 집착이 강한 탓일까. 김치찌개를 끓이려면 반드시 그 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언제든 빨간 냄비를 찾으면 나도 내 김치냉장고에 3년 묵혔던 김치를 꺼내 김치찌개를 끓일 것이다. 그리고 노란 좁쌀밥을 지어 맛있게 먹겠다. 밥을 먹은 후엔 빨간 색 스카프와 빨간 색 백을 들고 외출해 멋진 영화라도 한 편 볼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영원히 젊고 싶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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