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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국제학교의 태극기 [박선목/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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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333회 작성일 10-04-2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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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목/인도네시아] 국제학교의 태극기

내가 다니고 있는 자카르타 국제학교에는 50여개 국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어서 작은 지구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나라가 다른 만큼 저마다 독특한 기질들을 지니고 있는 까닭으로 종종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은 학교 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더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와 언어의 차이는 이따금씩 에피소드의 차원을 넘어 사건의 수준에까지 이르고는 한다.

한국 부모님들의 대단한 교육열을 반영이라도 하듯 학교에는 미국 학생들과 거의 맞먹는 정도의 한국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의 선후배 관계를 두고 선생님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여덟 번 째 불가사의라고 말씀하신다. 선생님들과 마주쳐도 하이 (hi),'''''''' 혹은 헬로우 (hello)''라고 가볍게 인사말만 건네는 학생들이 정작 한국 선배를 만나면 고개를 한껏 숙여 정중하고 엄숙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선생님들도 한국 학생들의 놀라운 끈기와 매사에 보여주는 왕성한 활동 의지에 대해 놀라시곤 한다. 민족적인 우수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보편성의 잣대로 한국 학생들을 평가하시는 게 그렇다. 선생님들의 기대 한편에는 때로 지나친 의욕에 대한 우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재작년의 유엔의 날 (UN DAY) 행사가 그 계기였다.

유엔의 날은 각국의 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특징적인 문화를 공연하는 행사로 오래 전부터 학교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잡아 왔다. 이 행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곧 나라를 대표한다는 소명감으로 모두들 땀흘려 공연 준비를 한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공연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다. 물론 원한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 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다만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의 공연이 준비한 만큼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공연 준비는 행사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누나가 한국 학생들의 모임인 코리안 클럽 (Korean Club)'''''''' 부회장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연 참가자들의 연습 광경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한국 학생들이 계획한 공연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뮤지컬 난타였다.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의견 교환과 기획을 마치고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들은 정말 보기 좋았다. 노력은 사람의 몫이고 결과는 하늘의 몫이라는 말이 있던가. 나는 공연 참가자들의 연습 광경을 지켜보면서 공연의 결과보다도 저렇듯 한마음으로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엔의 날이 다가왔다.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각 국의 학부모님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나는 친한 친구들과 공연장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습한 만큼만 실수 없이 보여주었으면 했다. 비교보다는 우리민족의 존재 의미와 자부심을 다른 나라 학생들에게 느끼게 해 주었으면 한다는 바램으로.

여러 나라의 인상적인 공연이 끝난 후 마침내 우리 나라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한국 호랑이의 포효같은 힘찬 쇠북소리가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북소리가 울리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공연에 직접 참가한 학생들보다도 내가 더 긴장한 게 분명했다. 밝아진 무대 앞부분에는 공연을 리드하는 고수()들이, 그 양켠에는 요리사 복장을 한 출연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식칼로 도마를 두드리고, 뒤에는 큰 물통을 거꾸로 세워 놓고 북처럼 치는 출연자들이 보였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빠른 몸놀림 속에 묘한 리듬이 실려, 모든 관객들은 귀를 한껏 열어놓은 채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과 요동치는 마음의 물결이 공연장 전체에서 일고 있었다. 혼연일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는지. 

어느새 내 의식은 무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공연자들의 가슴 한 가운데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때로는 언어보다도 음악과 율동이 더 큰 교감을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객석과 무대가 따로 없었다.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도 묘한 리듬의 조화가 느껴지는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관객들이 넋을 잃고 무대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느려진 속도를 따라 관객들의 고조된 감정들이 수그러질 때쯤, 무대 뒤켠의 대형 화면에는 민속춤, 탈춤, 전통 가옥 등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를 편집한 여러 장면들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모습들이 비쳐졌다. 관객들은 다시 한 번 깊이 모를 바다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 번에 빠져 든 바다는 난타 공연과는 다른 바다였다.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또 다른 안타까움이 가슴 안쪽 깊은 곳에 자리잡았다. 공연이 너무도 성공적이었다는 기쁨과 함께 조국 분단의 슬픈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갑자기 어두워진 골목 미로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화면의 영상이 사라지고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리듬이 다시 이어졌다. 다른 관객들은 공연 분위기에 쉽게 이끌려 들었지만, 나는 좀처럼 화면의 영상들을 지워내지 못했다. 눈물어린 이산 가족의 상봉 장면들이 눈 앞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마침내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고,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긴장했던 몸의 근육들을 한껏 풀어 놓았다. 장내엔 비어버린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부터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박수 소리는 곧 무대가 떠나갈 듯 커졌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도 박수를 쳤다. 손이 아픈 줄도 모르고. 

무대가 다시 밝아졌을 때, 나는 무대 전면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태극기를 보았다. 가슴 저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학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연이었다는 선생님들의 칭찬의 말씀보다도, 자랑이나 자부심 보다도,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정체성을 되찾은 소중한 계기였다.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더라도, 나는 그 날의 기억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게 되리라고 예감했다. 

행사가 있은 며칠 뒤 주말 오후에 나는 작은 태극기 하나를 그려 책상 앞에 앉으면 바라보이는 벽에다 붙여 놓았다. 내가 바라보는 그 태극기는 공연장에 있던 대형 태극기와 모양과 크기가 똑 같은 그런 태극기였다. 내 마음 속 허공에서 항상 힘차게 펄럭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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