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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아랫목 추억 (박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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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340회 작성일 10-06-0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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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 추억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던 `에메랄드 시티` ( EMERALD  CITY)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푸른 생명의 도시 시애틀은 이젠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시애틀의 으스스한 겨울 날씨는 아직도 내게는 그리운 내 조국의 그 따스한 아랫목 생각이 절로 간절하게 떠오르도록 한다. 내가 한국에 살 때는 어느 집이라도 겨울엔 아랫목에 작은 아랫목 이불이 깔려 있었다.  지금도 그럴까? 아랫목이라는 관념이 없어지지나 않았을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랫목에 앉아서 듣고 배운 지혜와 교훈이 얼마 이었던가 싶다. 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서 듣던 귀신, 도깨비 이야기로부터 여러 가지 재미스러운 이야기들은 어린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였다. 이야기 좋아하면 게으르다고 하던가. 때로는 귀신, 도깨비 이야기 듣다가 갑자기 소리 지르며 우리를 놀라게 하시던 할머니는 연극 배우 셨던가 몰라. 똑 같은 이야기를 귀달토록 듣고도 그래도 재미있어 했으니까.  어떤 때는 무서움 때문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져서 할머니 앞에 바짝바짝 다가앉으면서도 그래도 이야기를 즐겼으니 그 또한 어찌하랴.
  
아랫목은 수시로 앉을 주인공이 바뀌는  자리이기도 해서 추운 밖에서 들어오는 식구를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여 언 몸 언 손 녹이게 배려하는 자리이다.  늦게 들어오는 식구의 밥그릇을 묻어 두는 자리, 반가운 손님 앉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때로는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 밥그릇을 발로 잘못 건드려서 동그라트리고 깔깔대며 어머니 몰래 수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랫목 이불 속에 발을 들이밀고 앉아서 하루 있었던 일들을 조잘대며 깨알처럼 쏟아내는 동생들은 아랫목의 열기만큼 다정하고 서로 아꼈다.  좁고 복닥거리는 데서 춥고 배고프게 살았어도,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미 흐르는 희생 정신으로 서로 양보하고 도우며 비밀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엔 원조 교제니 명품이니 그런 말은 쓰지도 않았으며, 알지도 못했다.  그만큼 순진무구했으며 배고픈 것 해결이 급선무였으니까.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요로와 져서 세상 살기 좋아 졌다지만 잃은 건 얼마 만큼인가? 이기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의 심성은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해 졌는지? 사람들은 참으로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버리는 우를 날마다 반복하면서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랫목에 앉아서 깨알처럼  쏟아내던 이야기꽃의 밑천도 거덜이 나면 저녁을 먹고 각자 책상이든, 밥상이든 차지하고 그도 차례가 안 오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한다. 그때쯤이면 어머니는 아랫목에 앉아 우리들의 뚫어진 양말을 기술도 좋게 전구를 넣고 기워서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바느질 거리는 많기도 한데 어머니 손에만 쥐어지면 뚝딱 고쳐져서 다시 얼마동안은  아쉬운 대로 쓸 수 있게 하는 신기한 요술쟁이 손을 가지신 어머니였다. 그래서 옛말에 `손이 비단`이라는 말이 있었구나 싶다.

때로 어머니는 어미 닭이 병아리를 모두어 품고 앉은 것처럼 우리들을 데리고 아랫목에 앉아서는 어머니대로의 이야기를 실꾸리 풀어내듯 끝도 없이 풀어놓았다. 원래 어머니는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재주를 타고 나셨는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주인공이 되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마추어 재담가였다.  그런 어머니는 끼가 많아서 그런지 창경원 같은 곳에서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들의 면민회`같은 행사가 있을 적에, 그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노래하며 장구 치고 춤을 추시는 모습에 나는 나의 어머니의 또 다른 면을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아랫목에서 우리에게 노래도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음치인 나만 빼고 동생들은 어머니의 끼를 닮아서 그런지 썩 잘들 한다.

우리 아이들 역시 숙제 마치고 나면  따스한 아랫목에 앉아서 맛있는 먹거리를 들고 들어올 아빠를 기다리다 때로는 그냥 잠들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새새끼 먹이 나르듯 아이들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날라 들이는 아빠.  군고구마와 군밤을 사오는 날은 식을까봐 가슴속에 품고 오는 아빠의 그 따뜻한 사랑은 늘 넘치는 온기로 우리를 감싸 안고도 남았다. 이튿날이면 우리는 아빠가 날라들인 군고구마와 밤이며, 제주 감귤이랑 사과를 껍질이 소복히 쌓이도록 까먹고 손바닥이 노래질 때도 있었다. 우리가 밀감을 먹고 그렇게 손바닥이 노래지는 것은 밀감에 `카로티노인`이라는 착색 성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게으른 편인 나는 방안에다가 커피 끓일 준비를 해놓고 지내다가, 친구가 오면 커피를 끓여서 진하고 향긋한 우정을 한 숟갈 곁들인 커피 향을 즐기며 우리는 사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기름 보일러를 때는 그들도 기름이 비싸 마음대로 땔 수 없기에 춥다고 가기 싫다고, 따끈한 아랫목에서 아랫목 이불을 무릎에 덮고 일어나기 싫어하던 그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어느덧  수 십년 전 아랫목 추억이 되었구나.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따스한 아랫목은 우리 생활 문화의 독특한 장점이며 슬기로운 조상들의 지혜스러움을 다시금  이국 땅에서 생각해  본다. 우리민족만이 간직하고 자손 대대로 누리는 귀한 삶의 빼놓을 수 없는 것을 이민 보따리에 싸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을까?  때로 이곳에서도  방 하나쯤 온돌을 놓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때가 있으니…. 추운 것은 아니더라도, 감기 기운이라도 있을라치면 안절부절못하고 어디 따끈한데 몸을 대고 드러누울 곳이 없을까  하고, 있지도 않는 아랫목을 두리번거리며  찾을 때가 더러 있으니 말이다.

언제 또다시 나의 그리운 조국에 가면 그 중에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있겠지.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 살던 우리의 삶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바로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건강하게 살다가 기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옛일을 회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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