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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고집의 승화 - 한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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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152회 작성일 10-04-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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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쭙잖은 앎이나 믿음 혹은 견문을 하늘 같이 믿으며 남의 의견이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의견만 굳게 내 세우는’ 고집(固執)을 꺾지 않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거기다가 보편 타당한 사리(事理)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억지가 매우 센 고집’인 옹고집(壅固執)을 피우는 경우도 적지 않은 현실이다. 적당한 고집은 자기 주장이나 뜻을 펼치려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까닭에 심하게 탓하거나 허물 할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이치에 닿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익숙해진 경우나 사실에 반하는 억지 논리나 세상 이치에 어긋나는 가치관을 교묘하게 앞세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인 오기(傲氣)로 똘똘 뭉쳐진 이들이 현자(賢者)나 선지자(先知者)라도 되는 것처럼 얕은꾀로 술수를 부리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논리나 뜻이 불변의 진리라고 과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같은 착각은 ‘마음 속 깊이 새겨서 잊혀지지 아니하는 병’인 집착(執着)으로 이어져 자기와 궤적을 달리하는 견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전향적인 자세로 대처하지 못하고 배타적인 경우가 태반이다. 집착이나 과대 망상은 ‘심신이 시달려 괴로운’ 번뇌(煩惱)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자기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내재적(內在的)인 요인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부인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그러면서 외부적 원인에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모순(矛盾)에 함몰되어 ‘네 탓이요.’를 입에 달고 살면서 정신적 혼돈(混沌)과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며 이성(理性)이 마비되어 인격 파탄의 경지에 이른다.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거나 논리가 궁한 처지의 옹색한 이들이 모략(謀略)으로 가장하면 자칫 유능하게 비춰질 개연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모략과 ‘남을 속이는 못된 꾀’인 사술(詐術)을 교묘하게 위장한 담론(談論)은 세인의 마음을 얻거나 세상의 흐름을 얻기 어렵다.

사람의 됨됨이에서 본받을 바 없으며 속이 좁고 배움과 앎이 얕은 경우는 세상을 넓고 깊게 보는 지혜가 부족하여 옹졸함을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이런 때문에 자기의 뜻이나 논리를 버리거나 바꾸는 것은 설자리를 몽땅 잃는 것으로 여겨 과민반응을 나타내기 쉽다.

따라서 처절할 정도로 고집을 내세워 병적인 모습의 집착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기보호에 집착하다가 합리적인 가치관이나 슬기로운 판단의 기준이 흔들려, ‘자기 생각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을 업신여기거나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수준’인 아만(我慢)의 나락으로 빠지기도 한다.

인간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가 요청하는 덕목이 어우러져 함께 존립해야 한다는 전제의 충족을 바탕으로 상생과 공영을 지향해야 한다는 명제(命題)를 만족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때로는 과감하게 나를 버리고 공존의 틀을 따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승적인 사고(思考)의 노예가 되어 부질없는 고집이나 집착의 수준을 지나서 아만에 이른다면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는 도(道)를 따를 수 없다. 더욱이 디지털 문화의 위력이 날로 거세지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해묵은 무거운 짐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빈자리에 상생과 공영을 위한 지혜를 채워나가는 대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나를 버리는 겸허(謙虛)함은 ‘번뇌를 버리고 아무런 탐심(貪心)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중(僧)’을 이르는 두타(頭陀)의 정신에서 배워도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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