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오! My 코리아 [미국/윤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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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156회 작성일 10-04-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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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박동웅] 오! My 코리아
1991년 3월 2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기쁨에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김포 공항을 향했다. 고생길이 훤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마냥 좋다고 공항 안을 동생과 함께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는 나와 엄마를 붙잡고 많이 우셨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외할머니와 엄마, 두 분 모녀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오! My 코리아
아무것도 모르는 6살 꼬마의 환상, 참 순수했던 어린 시절, 나는 외국이라고 하면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높은 빌딩이 많고 밤거리는 불빛으로 찬란하게 빛날 줄만 알았다. 이런 상상도 잠시, 필리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외국에 대한 나의 환상은 한낱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노이 아끼노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전기 시설의 허술함 때문에 캄캄한 밤은 더 캄캄했으며,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고, 그 더위와 어두움 속에서 눈 크고 시커먼 필리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있어 하늘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원망하지 못했고, 나는 필리핀으로 데리고 온 애꿎은 비행기만 탓했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것과 그와 동시에 나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이 외에는.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초등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하복의 구두를 신고 등교를 해야 했다. 학교 교칙이 그랬다. 눈 큰 왕눈이들과 함께 시작되는 나의 하루는 지옥 같았다. 문화 충격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언어의 차이, 어린 나이에 이것을 감당하기란 나에게 있어서 죽기보다 어려웠다. 나는 그들의 실험 대상이었으며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냥 신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지 어려워 도움을 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인 나를 골탕을 먹였으며, 상처를 주었고, 나와 놀면 안 된다는 법칙까지 만들어 놓고 나를 따돌렸다.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짓눌렀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점과 학교에서의 나의 존재 그리고 나의 위치, 모든 것이 날 힘들게 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난 말보다는 꽥꽥 소리 지르는 것으로 내 모든 것을 해소하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의태어로 부모님께 떼를 쓰고 두 분께 깊은 상처도 많이 안겨 드렸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조개가 자기 안으로 들어온 흙을 아픔과 고통을 참아 내며 아름다운 진주로 승화시키듯이 나도 모든 아픔들을 하나하나씩 헤쳐 갔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영어와 필리핀 언어인 따갈로그 어가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나는 더 큰 장애물을 만났다. 바로 한국말이었다.
한국말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어가 자리를 잡아가자 내 한국어 능력은 점점 떨어져 갔고 부모님과에 대화마저도 힘겨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부모님과에 대화수도 점점 줄었다.
나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내 과거에 영어를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야 했던 것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처럼 난 점점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는 생각보다는 내 부모님의 나라, 한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 부모를 둔 필리핀 사람이라고 내 마음속에 외쳤다. 이런 나를 부모님은 염려하시고 걱정하셨다. 이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1994년 무렵에 한국 아카데미라는 학교가 생겼다. 이 곳 필리핀에 있는 선교사님 자녀들을 기독인, 국제인, 한국인으로 키우겠다는 교육 이념 아래 세워진 학교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난 이 새로 세워진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난 얼마 안 가 부모님 뜻의 따랐다는 것에 대한 깊은 후회와 자괴심 그리고 뼈저린 아픔을 느껴야 했다. 난 또다시 내 정체성에 대한 혼동이 왔으며, 기초부터 닦지 못한 내 한국어 실력이 들통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내 자신이 짜증났고 점점 지쳐 가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때의 비참함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때로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게 수치스러웠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한국인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방황은 계속되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나의 태도는 점점 비뚤어져 갔다. 이런 나를 기도와 눈물로 바라보셨던 엄마 아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하다.
부모님의 끝없는 눈물과 헌신으로 인해 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고 성격도 바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아 갔다. 나의 정체성, 내 성격, 내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말이다. 내 성격이 변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확실한 가치관이 자리잡았고,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거리에서나 백화점을 지나면서 볼 수 있는 우리 나라 상품들은 나의 긍지와 자존심이다. 특히 필리핀 사람들이 국산품이 좋다고 두 엄지를 올릴 때면 이 곳에서의 고생이 값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한국인으로서 더 기쁜 것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한국 방송을 이 나라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필리핀 영어 선생님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한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주로 하는 대화는 텔레비전에서의 한국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들 눈에 비춰지는 우리 나라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우리 나라 연예인들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우아하다고 극찬을 한다. 비록 우리가 하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한국 유행과 문화를 사모하는 그들을 보면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월드컵이야말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 주었다. 택시를 타도, 필리핀 친구를 만나도 항상 외쳤던 한 마디 오! 필승 코리아, 오! My 코리아. 그들에게 나의 조국, 한국을 알린다는 것은 기쁨이고, 이 곳 사람들이 한국을 인정하고 알아 주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필리핀에서의 생활 13년, 내 기억 저편 하나의 추억이 되어 버린 지난 일들을 회상해 본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 그 시간들은 소중한 추억이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6살 어린 나이로 필리핀에 왔던 꼬마가 지금은 고3이 되어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내 미래도 한국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내 작은 소망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내 모습도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자존심과 긍지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는 애절한 마음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나는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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