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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지난 10년 동안 [영국/정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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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105회 작성일 10-04-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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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정파로우] 지난 10년 동안

태어나 막 3개월이 된 아들아이 현아를 등에 업고 한 손에 우윳병과 기저귀가 든 책가방을 그리고 또 한 손에 4살 난 딸아이 영아의 손을 끌며 힘들게 버스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계획에도 없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 대학입시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6살의 중년의 나이에 그것도 머나먼 타국에서지난 10년 동안
.


작은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내 그 희귀한 모습은 당장 나를 유명한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위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사람들은 내가 지나갈 시간을 기다려 일제히 커튼을 열어젖히며 신기해하곤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인간적인 아기를 등에 업은 엄마의 모습이 영국 사람들에게는 원시적이고 동물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아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그 때 삶과 죽음의 세계를 함께 헤매고 있던 내게, 동물원의 원숭이로 보였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으랴.


심한 출혈과 진통으로 응급실까지 실려간 기억은 나지만 내가 출산을 하고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일 주일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의식불명으로 헤맨 며칠 사이에 생과 사를 오락가락, 첨단 기계 속에 묶여 수혈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어렴풋이 내 눈에 비친 갓난아들 현아의 잠든, 그 천사 같던 모습. 지독한 진통과 고통을 통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생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생명의 경이함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할까.


그렇게 해서 의식을 되찾은 내게 산후 처음으로 배달된 병실의 식사는 마른 토스트 두 조각과 한 잔의 티였다. 그 후로 몇 개월 동안 마르지 않은 내 눈물과 우울증은 그 때 그 마른 토스트를 꾸역꾸역 삼키면서 시작된 것 같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미역국을 고파하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한 달 후 퇴원을 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절망은 더 깊어만 갈 뿐, 철없는 네 살짜리 딸아이와 밤새워 울어대는 갓난아들 그리고 이미 10kg 이상을 잃어버려 앙상해진 뼈만 남은 몸으로 기진맥진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가고 있는 내게, 내 손으로 밥을 지어 챙겨 먹고 챙겨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서러움으로 목이 메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간호사의 방문을 받았고, 넋나간 여자처럼 지쳐서 멍해져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내가 정신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을 한 것 같았다. 학교에 full time 으로 등록을 하면 아이들을 무료로 돌보아 줄 뿐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내 아픈 현실을 잊게 해 줄 거라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그 때의 학교 생활이 지금 내 인생의 시작일 줄이야.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20대에 이룰 수 있는 꿈들이지만 나는 40대를 세계 금융의 중심가인 런던 시티의 일인으로 직장인, 엄마, 주부로서의 3인 역할로 바쁜 하루를 이어가고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30년 전 겨우 중학교를 졸업해 기술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만 했던 내게 영국의 대학입시 과정을 밟기 위한 내 영어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수업을 조금씩 알아듣기는 했지만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기에는 완전한 초보자로서 시작이었다. 또한 중학교를 끝으로 일반 공부를 끝내야 했던 내게 수학의 인수분해나 근사치 같은 것을 기억해 낸다는 것도 너무나 무리였다.


그러나 밤을 지새며 울어대는 갓난 현아를 얼러 가면서 함께 풀어가는 인수분해, 최상치 등의 생소한 수식들은 먼 땅에서의 외로움을 잊게 해 주는 내게 가장 좋은 우울증의 치료제였다. 나는 내 모든 슬픔과 고뇌, 외로움을 책 속에 그리고 영국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에세이 쓰는 법을 끝없이 배우고 또 반복 연습하면서 그렇게 정신 없이 몇 개월을 보냈는데.


그 해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내게 대학입시 원서를 내밀었다. 유일하게 우리 반에서 박사학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나는 단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남의 땅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학교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꿈에서만 그려 왔던 대학생이라니, 그것도 중년의 나이에, 남의 나라에서, 두 젖먹이를 데리고.


그러나 사람에게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는 것을 나는 1년 동안의 입시 준비 과정에서 그리고 다음 4년 동안 이어지는 나 자신의 대학 생활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 때 입시 준비 과정에서 만난 담임 선생님 Peter는 역사를 가르쳤었는데 그는 깊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역사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내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항상 너덜너덜한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새였지만 진실 그 자체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는 대영제국이 어떻게 무력을 사용해 힘있는 국가가 되었는지를 가르켰다. 무기와 군사력이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지배당하고 살았으리라는 말까지. 그리고 해적의 자손임을 떳떳이 인정하는 그, 그래서 신사의 나라 영국이 진짜 신사가 되고 싶어 무력을 자제하게 되었을 때는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도 어쩔 수 없이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비판력을 갖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고 언론의 자유가 한정되었던 70년대에 교육을 받은 나에게 그의 너무나 비판적인 태도는 아주 큰 충격으로 다가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그가 던진 한 마디;


역사란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실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잘잘못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을 통해 현재를 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학교 때 배워서 기억해 낼 수 있었던 한국의 역사라는 게 달달 외워서 머릿속에 박힌 지겨운 날짜 그리고 왕 이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때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통해, 또 대학에 와서는 일본학에 이어 한국 역사를 선택 과목으로 택해서 나는 한국사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배운 것들은 그 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용감한 한국 역사와 많이 상반된 것들이었으며 그 때 나는 오늘날까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자주 분쟁에 휩싸이는 한국과 일본을 관계를 떠올리며 씁쓸했던 것을 기억한다.
 
영국에 살면서 몇 년 동안 잃어버린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게 되자 나는 공부에 더욱더 매달렸고 1년 후 그 입시 코스를 무사히 마쳤을 때 나는 우리 도에서 최우수 성인교육 성취자로 선정됨과 동시에 37살의 주부로 유럽에서는 동양학으로 제일 유명한 S 대학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인간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진실을 배워 가는 과정에서 영국과 한국의 문화, 교육의 차이에서 내가 받은 충격들은 그 뒤 대학생활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된다.


처음 일 주일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 학생관 복도에 붙은 동성연애자 환영 모임 포스터. 신성한 학당이라는 문구만 믿고 살아온 내게 그 bisexual meeting이란 단어가 안겨 준 황당했던 기억은 625 전쟁의 폐허에 일구어 온 내 세대의 삶과, 유교사상으로 점철된 내 정서에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그건 조그마한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 입시 과정 반에서는 낮에 공부하며 주중 3일 동안 펍에서 일하는 급우가 있었는데, Single mother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일 거라 지레짐작을 한 나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저녁에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누가 돌보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란다. 나중에 그 남편이 지리학 박사로 유명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안이 벙벙해져 왜 밤에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재차 물었다. 대답은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술집여자(?)를 아내로 둔 대학교수로서의 사회적 체면 같은 것은 접어 두더라도, 남편이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도 또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사실에 상관치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 역시 노였다. 자식을 돌보는 것은 남편도 함께 해야 할 임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대학 2년 차, 일본학 박사였던 주임교수는 그 때 당시 29살 노처녀 동갑내기였던 반 친구 S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재학중인 제자와 스승의 결합의 불결 감 내지 경이함 같은 것은 고사하고라도 한국에서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결혼이라고 믿고 있는 나는 정말 우리 애들 말대로 구세대 출신이라선가?


S는 일본에서 나이트클럽 댄스로 5년간 일하고 그 술집이 불황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영국으로 돌아와 운 좋게도 우리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술집여자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며, 일본의 밤 세계, 도쿄 뒷골목의 호스티스 산물 같은 끈적끈적한 삶을 자주 들려주곤 했었다.


이런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을 안겨 주는 사랑 이야기들을 가슴에 안고 나는 당시 5살이 된 딸아이와 함께 학부 과정의 일부로 3개월간의 일본 어학 연수를 떠났다.


연수기간 도쿄와 오사카 두 가정에서 만난 가장 두 분은 각각 북한, 만주 출신의 60대였는데 그들의 과거사는 우리가 미워하고 우리 부모님들을 지옥의 세계로 몰아넣었던 일본 놈의 이야기가 아니라 똑같이 전쟁이라는 잔혹한 실체 속에서 피해받은 평범한 인간사, 그것도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였다.


도쿄의 나까무라 상은 네 살 때 당시 북한 청진에서 군인으로 있던 아버지가 종전과 동시에 소련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감옥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어머니, 누이와 함께 일본 귀향자 틈에 끼여 청진에서 부산까지 걸어야 했단다. 일본 귀향선을 타기 위한 그 질병과 추위, 굶주림의 노정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만 목숨을 잃고, 나까무라 상만이 다른 일본인의 도움으로 부산까지 올 수 있었다고. 4개월에 걸쳐 목적지까지 도착했을 때는 신고 있던 게다가 다 닳았었다고 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다고부산에서 한국인 소유의 어떤 고깃배를 겨우 빌려 탔을 때, 한국인 주인이 그에게 첫날,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김치를 챙겨 주었는데 그 때 그 밥맛을, 꿀보다 달콤했던 그 밥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그렇게 맛있는 밥을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에 한국 학생을 받게 되어 정말 반갑다고.


그리고 또 자신은 그 무서웠고 추웠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쓰라린 기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명한 신문사의 편집장이 된 그 때까지도 외국 여행을 한번도 못 해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를 두려움 없이 돌아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에게 전쟁의 상처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은 그 때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할까?


나이 어린 영국 급우들을 제치고 받아 내는 학교 성적도 그랬지만, 동양학(한국, 중국, 일본)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배우는, 그리고 일본의 소설, 잡지 등을 직접 읽으며 쌓여가는 지식과 그것으로 얻어지는 삶의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은, 두 젖먹이를 데리고 왕복 2시간을 왔다 갔다 한 고난의 통근길도, 시험 기간이면 며칠씩 신경성 설사를 겪어야 했던 정기적인 고통도, 자주 앓는 고열과 설사로 긴 밤을 아이들과 함께 꼬박 새워야 했던 그 수많은 밤들도, 배움의 희열과 성취감에 묻혀 내 4년간의 대학 생활은 꿈같이 흘러, 어느 새 40대의 주름진 얼굴로 변해 버린 5년 전, 남편과 아이들의 손에 끌려 꿈에서만 그리던 대학 졸업장을, 나는 일 등급(first class degree)의 영광으로 받아 냈다.


비록 남들보다 20년 이상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들게 받은 대학 졸업장이 안겨 준 고용기회 덕분에 나는 지금 런던의 어느 컨설팅 회사 소속으로 한국인 고객들과 더불어 보람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학 시절 만원 버스에 구겨 타는 게 싫기도 했지만 버스비 10원을 아끼기 위해, 겨울이면 꽁꽁 언 손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벗삼아, 여름이면 끝없이 이어지는 경부선 철로의 아지랑이를 벗삼아, 산과 들을 넘어 작은 발걸음을 쉼 없이 옮겨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배움터, 그렇게 고달픈 행로를 오가면서 막연히 먼 나라 영국을 꿈꾸었는데.


가끔은 영국인들의 만사 태평 자세가 한국인들의 빨리빨리에 물들어 있는 내 사고방식과 충돌이 일면 이러니 요놈의 대영제국에 다시는 해가 안 뜨지 하며 중얼거리곤 했는데 나는 왜 영국이 다시 부흥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지 그리고 영원히 해가 지지 않으리라는 대영제국이 결코 그 영광을 잊어버리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대학 생활을 거쳐, 다시 서비스 정신으로 물들어 있는 영국의 사회생활을 통해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


한국은 지금 세계 11대 무역국으로 성장해 있고, The most wired nation in the world로 알려져 세계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주부와 여성들에 주어지는 기회는 그 성공에 발맞추어 가고 있는가. 미혼모의 소외감, 가정폭력, single mother에 대한 편견, 그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모두모두 사라져.


그래서 언젠가는 한국의 여성, 주부들에게도 나와 같은 기회가 주어질 거라는 걸,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남들이 몇백 년에 걸쳐 이뤄온 경제부흥을 우리는 지난 50년 만에 해 냈고 그 짧은 기간 중, 세계 11대 무역국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우리들이었기에. 한국 사회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가난한 자에게도, 부유한 자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그런 너그러운 사회가 멀지 않은 날 꼭 이루어질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가능성의 잠재력은 우리 인간 모두의 것이다. 그러나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부여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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