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언어와 문자의 벽을 넘어 [일본/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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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068회 작성일 10-04-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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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강혜영] 언어와 문자의 벽을 넘어
나는 귀가 있었어도 들을 수가 없었고, 입이 있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좌우 1.2 정도의 훌륭한 시력을 갖고 있었지만 볼 수가 없었다.언어()와 문자()의 벽()을 넘어
결혼이란 두 글자는 이렇듯 나를 순식간에 장애자 아닌 장애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내 나이 50, 오랜 이국 생활 만큼이나 많이 생겨난 주름살.
지금은 내가 쓴 책 안녕하세요!가 이국() 땅 일본의 전국 어느 서점()에서도 구입해 볼 수 있게 된 도저히 믿기 힘든 현실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부터 28년 전인 1975년, 나는 재일동포 2세인 지금의 남편과 중매 결혼하면서 일본 오사카에 살게 되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처음 겪어 보는 낯설은 이국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젊음탓이었는지 촌뜨기, 철부지였던 난 배짱 하나만큼은 좋았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흘러 넘치는 것이 정보()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딱 정해진 정보에만 의지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또 이국 땅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가끔 어렵게 봤던 영화의 화면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마음으로 동경의 세계를 그려보는 재미는 차라리 흥미진진한 달콤한 세계였다.
이렇듯 일본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꿈 많은 신부의 눈을 호기심으로 가득 채웠다.
일본 사람들의 생활은 역시 윤택했다. 세계 1,2위를 자랑하는 부자나라 일본. 어디를 가나 눈부시기만 해서 마음속에는 하루빨리 우리 나라도 하는 부러운 마음뿐이었다. 상점에는 외국 제품들이 넘쳐나고, 스위치만 누르면 뜨거운 물이 나오고, 먹음직스러운 쌀밥이 곧바로 지어졌다. 특히 그 중에서도 빨래판을 통에 걸쳐 힘들게 빨지 않아도 깨끗이 세탁되는 자동 세탁기가 너무 맘에 들어서 마냥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남편이 차를 몰아 유원지며 바닷가며 가고 싶을 때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났던지,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데도 오히려 그것이 호강에 초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나는 일본말을 몰랐지만 입으로 흉내만 내면 대충 통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일상을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주위에서 대충 들어서 알게 된 일본말. 그래서 적합하지도 않은 단어들을 더듬더듬 흉내내면서 그럭저럭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또 나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이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지적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또 어떤 때는 일본이 한국과 비슷하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같은 아시아 국가, 뚜렷한 사계절, 사람들의 생김새, 식재료 등등.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일본은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으면서, 어색하고 낯설은 땅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아내 노릇 한답시고 신문함에 와 있는 신문을 남편에게 열심히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용이 알고 싶어서 한번 펼쳐본 신문에는 내가 아는 몇몇 한자()만 보일뿐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문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슈퍼마켓의 상품 그림들과 가격을 매겨 놓은 숫자뿐이었다. 뭉클해진 가슴, 그것은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틀에 박힌 생활의 연속들. 갈등이 생겼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한, 이 사회의 말과 글을 모른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제자리걸음과 위축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단 일본어를 배우기로 맘먹었다.
그렇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부라는 말이 왜 그리도 무겁게 와닿는지, 일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마음뿐이었다. 간혹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다시 시작해 보았지만 3일도 못 가서 내팽개치곤 했다.
글을 몰라 힘들 때면 차라리 까막눈이 되면 내가 생각한 것만으로 지낼 수 있으니까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말이 통하지 않아 입장이 곤란할 때에는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다른 언어 의식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하는 식으로 자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주위 사람들이 이방인인 나를 이해하고 감싸 주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점점 초조해지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사람들 누구에게나 걱정근심 하나쯤 없을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언어라는 또 하나의 장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건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가정에서는 가족들에게, 사회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어색함이 없이 살아가려면 언어와 문자의 장벽부터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집 근처의 야간 중학교에라도 다녀 볼 요량으로 전화로 문의를 해 보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 집 환경과는 맞지 않았다.
그 당시 나와 남편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학교 다니겠다고 생업을 팽개칠 수는 없었다.
결국 혼자서 일본글을 배워 보기로 했다. 나는 그 동안 결혼 후 일본어 학교에 보내 주지 않은 남편, 시부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누가 어떻게 해 주겠지 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 땅에서 살려면 말과 글을 알아야 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결국은 나에게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힘으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이 수월해지면 왠지 자유로워질 것 같고, 마음이 든든해질 것 같고, 여유로운 생활이 될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사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남편이 마음내킬 때만 알려 주는 TV, 라디오의 뉴스 내용도 혼자서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걸 혼자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일본어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조금씩 알게 되자 남편이 보는 00신문을 보고 내용이 궁금해졌다. 신문에 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면 그 기사는 무의식적으로 읽고 또 읽었다. 이러한 일은 일본말을 배워 가는 나에게는 또 하나의 재미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몸이 피곤해서 아침이면 아이들 학교 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늦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문 읽어 보는 재미로 빨리 일어나곤 했다. 이 신문을 통해 일본 사회가, 한국이, 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문자를 통해 얻은 정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 등은 마냥 이방인이고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자신을 점점 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깨달아 가게 만들고 있었다.
가게일을 하면서 틈틈이 신문에 나와 있는 글자를 무조건 그대로 옮겨 써 보는 일을 반복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한 문장을 읽고 나서 그대로 쓰는 것이 어느 정도 자유스러워졌다. 그래서 모험을 한 것이 신문에 독자 투고를 써서 보내기로 했다.
1984년 10월 29일로 기억된다.
그 날자 요미우리 신문 조간 란에 내가 익명으로 보낸 투고가 그대로 실렸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의심하면서 읽고 또 읽어 보았지만 틀림없이 내가 써서 보낸 글이었다. 내가 쓴 글이 일본 신문에 실리다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1980년대 일본은 고도성장기로 접어들면서 마이 홈 붐이 일어났다. 우리 집도 조금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짐을 정리하면서 한 권의 낡은 노트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노트를 보면서 10여 년 전의 내 모습이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나는 결혼 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비서실에 근무했었다. 학장님은 이국만리 시집가게 된 나에게 우리 강아지, 너 일본 가면 뭐든지 좋으니 여기다 적어 두어라 하시면서 노트 한 권을 주셨다. 그 때 철없던 나는 속으로 에계계, 고작 공책 한 권! 하고 투덜대면서 받아 두었는데, 어떻게 일본에까지 들고 왔던 것 같다. 펼쳐 보니 보나마나 무엇하나 적어 놓은 것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곧 서울대로 국제전화를 돌렸다. 퇴직하신 학장님의 안부를 물어보니 이미 세상을 떠나신 후였다. 인자하셨던 학장님의 얼굴이 떠올라 그 동안 배은망덕한 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용서해 주세요. 학장님! 하고 하늘을 보면서 빌고 또 빌었다.
공책을 찾아 낸 후로 학장님의 그 말씀이 귀에 생생해 그 때부터 나는 마이 북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고향 한국과 또 하나의 고향 일본, 내가 두 나라에 깊은 인연을 갖고 태어나게 된 운명의 발자취를 적어 보고 싶었다. 내일()의 자기사()를 갖고 싶었다. 백발에 지팡이 짚고, 늘어난 주름살이 만들어 낸 내 인생살이를 고백하고 싶었다. 두 아들에게는 딴 애들의 엄마와는 다르게 서투른 일본말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활자체로 만들어 장롱에 넣어 두고 죽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다. 책이 만들어지면 학장님의 묘 앞에 가져가 바치기로 다짐도 했다.
노트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일은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노트를 적어 가면서 마음이 무겁고 답답할 때면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 버릇 하나가 생겼다. 집에서 제일 높은 베란다에 올라가 두 팔을 높이 들어 손깍지를 끼고, 발뒤꿈치를 세우면서 부르는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왠지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쪽 나라 내 고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쓴 노트장을 모아 보니 한 손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의 양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내 손으로 썼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원고를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흐뭇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2000년 12월 19일 동경에 있는 라는 출판사에 이 원고를 보냈다. 이듬해 1월 6일 출판사로부터 한 통의 답장이 날라왔다. 떨리는 손으로 펼쳐 보니 내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현관까지 달려나왔다. 그 때 남편은 울고 있는 나를 보고 고향에서 누가 죽어서 전보를 받았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원고는 출판사측의 도움을 받아 마이 북 안녕하세요!로 탄생했고, 그 해 7월 15일부터 전국의 서점에서 발매되었다. 재무대신인 시오카와 마사주로( ) 씨는 이방인인 내가 쓴 책에 추천문을 써 주었다.
부족한 내가 글과 말을 배우고 책까지 내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언어의 핸디캡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한 이방인의 도전과 용기가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위의 많은 분들의 도움과 아낌없는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이 발간되고 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게 단골손님인 N 의사는 부인과 함께 이 책을 열 권이나 사 와서 표지에 사인을 해 달라고 졸라댔다. 사인한 책표지에 눈물이 흘러 번져 내렸다.
지금까지는 외국의 낯선 생활환경에서 동정을 받으며 힘없이 살아온 줄만 알았는데 이 책은 나에게 커다란 삶의 힘이 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렇게 해서 나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이국 땅에서 자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처럼.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그립고 포근했던 옛이야기에 흠뻑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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