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생오지 뜸부기(4회) – 문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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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649회 작성일 10-04-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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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나는 처조카가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우리 마을 소나무 집 오영기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영기 집에 명품 소나무가 있어 나는 그 집을 소나무 집이라고 부른다. 지난 번 처조카가 생오지에 왔을 때 오영기의 집을 사고 싶다고 해서 두어 차례 그를 만나 집을 흥정하려고 했으나 소나무 한 그루와 영산홍 다섯 그루 때문에 타협이 이루어지 않고 있다.
한 때 농업후계자로 농촌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보겠다고 소를 키우며 발버둥쳐왔던 오영기는 지금 빚만 잔뜩 지고 실의에 빠져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도시로 나가 새 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흔 여섯 살의 그는 아직 육신이 멀쩡하니 막일을 해서라도 두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켜보겠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처조카가 환갑을 바라보는 늘그막에 농촌으로 들어와 이상을 펼쳐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십대 농사꾼 오영기는 농촌에서 실패한 삶을 더 늙기 전에 도시에 나가서 보상받아보겠다고 한다.
처조카는 영악하리만치 도시적 이성과 생리를 타고 태어났고 오영기는 융통성 없고 순박한 흙의 감성을 갖고 있는데, 어찌하여 자신이 살아온 터전에서 안정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처조카는 서울 변두리 극장 앞에서 오랫동안 신기료장수를 해서 구두고치는 일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그는 영화감상이 유일한 취미이다. 한편 오영기는 힘이 좋아 옛날 같으면 상머슴 꾼으로, 농사짓는 선수이고 나무를 가꾸는 전문가다.
처조카가 시골로 온다 해도 구두를 고칠 일은 없을 것이고 오영기 역시 도시로 나가서 나무를 가꿀 일이 없을 터인데, 두 사람이 한사코 옮겨 살겠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삶의 터전을 바꾼다고 해서 반듯이 꿈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 괜히 울적해진다.
집을 나선 나는 경쾌하게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를 들으며 금낭화 밭 옆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마을 이장 동생이 야생화 금낭화를 3백 평쯤 되는 밭에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늦봄까지만 해도 화사한 분홍빛 꽃물결이 보기에 좋았는데 여름 들어 옴씰하게 꽃이 지면서 잎이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 아름다운 꽃은 역시 질 때 지저분한 것이 흠인 것 같다.
더욱이 금낭화는 한두 그루가 꽃이 피었을 때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수천 그루가 집단으로 피어있으면 다만 신기할 뿐, 놀랄 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는 금낭화 꽃밭을 볼 때마다 나는 후진국 청소년들의 대규모 집단 마스게임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야생화는 누가 보지 않더라도 본디 제 자리에서 스스로 자라야, 한껏 제 모습을 뽐내고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낭화 밭 끄트머리 늙은 느티나무 밑에 시멘트 기와지붕의 마을 정자가 있다. 내가 이 마을로 이사를 오던 때까지만 해도 정자 앞에는 5백년 쯤 됨직한 노송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었는데 지금은 베어내고 없다. 5년 전 군에서 마을길을 시멘트포장을 한 후부터 잎이 시들해지면서 시난고난 앓다가 죽은 것을 작년 가을에 크레인을 동원해서 잘라냈다.
노송이 잘려지던 날,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돌다가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나는 노송이 보이지 않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것 같은 허전함에 슬픔의 덩어리가 목울대에 가득 뻗질러 오르는 듯했다. 내가 이 마을에 정처를 정한 것이 뜸부기 소리 말고도 이 노송이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평생 이 마을에서 살아온 토박이 노인들의 심정은 오죽 아프랴.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노송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어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무엇에 마음을 기대어 소원을 말할까. 소원을 빌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허전하고 삭막할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전기톱에 잘린 노송의 둥그스름한 밑동을 바라보다 말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의 무지로 수 백 년 된 나무를 죽게 한 잘못이 내게 있는 것만 같아, 무서운 죄책감에 진저리를 쳤다.
마을 안길로 접어들자 오영기 집 소나무의 푸른 우듬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멀리서부터 소나무를 보면서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나무는 의연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 소나무를 보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큼 튼실하고 멋들어지게 잘 생겼다.
새소리에 비교하자면 늦은 봄 푸른 숲속에서 누구인가를 부르는 듯 청랑(晴朗)하고 애절한 꾀꼬리 소리 같고 사람으로 치자면 일찍 깨달음을 얻은 청년 도사 같다고나 할까. 나는 소나무를 볼 때마다 눈 내리는 겨울이 기다려진다. 소나무는 눈 내리는 겨울에 그 푸름이 한껏 빛나 보이게 마련이다. 처조카도 오영기네 소나무를 무척 탐냈다. 오영기는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는 조경업자한테 팔겠다고 했고 처조카는 이 소나무를 그대로 두지 않으면 집을 사지 않겠다고 했다.
마침 오영기는 팔순의 노모와 함께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몽골에서 시집 온 그의 처 멍질라는 보이지 않고 두 아이들만 처마 그늘 밑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멍질라는 요리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광주까지 요리학원에 다니고 있다.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식당에 취직을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서울에 가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안 판다는디 뭣땜시 또 오셨당가요? 나는 죽어도 서울로 안 간당께.”
으름덩굴이 휘덮인 아치형의 그늘 막을 지나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오영기의 노모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뿜어냈다. 오영기의 노모는 집을 팔아주려는 나를 무척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영기가 손에 쑥이며 망초 등 잡초를 한 움큼 든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저녁 때 쯤 처조카가 오겠다고 해서....이번에 아주 계약을 했으면 하던데...”
“소나무 대신 영산홍을 남겨두기로 허지요. 사실 저 소나무와 영산홍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정성들여 가꾼 것이라서 옮기고 싶지 않어요. 봄이면 아버님이 묘소에서 영산홍 꽃을 내려다 볼 수 있지 않겠어요? 허지만 돈 땜시 어쩔 수 없이 소나무만큼은 업자한테 팔아야 겄네요. 저렇게 잘 키운 영산홍 없당께요. ”
오영기가 집 옆 텃밭 모퉁이에 창창한 소나무와 키 높이의 영산홍을 보면서 말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다섯 그루의 영산홍은 진홍빛 꽃을 구름처럼 뭉얼뭉얼 피워 올렸다. 나는 세 차례나 이 집에 영산홍 꽃구경을 오기도 했었다.
꽃이 지고 난 후 지금까지도 풍염하도록 아름다운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영기 아버지가 30여 년을 키웠다는 영산홍은 그 빛깔이 화사하고 곱거니와 우아하면서도 앙당그러진 수형이 가히 예술품이다. 나는 그 영산홍이 너무 욕심나서 한 그루 사다 심을까 싶었지만 차마 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업자한테 소나무를 얼마에 팔기로 했는데? ”
“오백은 받아야지요. 임자를 만나면 천짜리는 되고도 남어요.”
“오백이라....아버님께서도 저 소나무가 이 집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실 걸세. 그러니 삼백을 쳐주면 어떻겠는가. ”
나는 쩝쩝 연신 입맛만 다시며 안타까운 눈으로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나무를 돈으로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요. 사실 저 영산홍도 돈으로 치자면 이 백은 넘은 건디...”
“그래? 암턴 처조카가 내려오면 다시 이야기 해보세. 헌데 갈 곳은 확실히 정했는가? ”
“조카 분 사시는 데가 의정부 허고 가깝다면서요? 서울 남쪽은 집값이 너무 비싸서 북쪽으로 알아보려고요. 제가 의정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잘 알거든요.”
“자당께서 저렇게 반대를 하시는데 꼭 서울로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
“지금꺼정 집 앞에 있는 토질 좋은 밭에 콩을 심다가 제작년에 산비탈 자갈밭에 심었더니 소출이 엄청 많이 나오데요. 그러고 저기 저 단감나무도 밭에서 캐다가 두엄자리 옆에 심었더니 씨알도 굵고 많이 열리드라니께요. 사람도 식물이나 같지 않겠어요? 저저끔 살 자리를 잘 잡어야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데요.”
나는 오영기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오영기는 내게 생명 있는 존재들의 삶의 터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은 저마다 자기의 생리에 맞는 환경에서 터전을 잘 잡아야 안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습지식물은 습지에서, 건지식물은 건지에서 잘 살고, 나무들도 등고선에 따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갈매기는 바다에서 살고 참새는 집 주위에서 살아가듯.
“우리 같은 사람은 농촌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도시에서는 그래도 땀 흘린 만큼 수입이 생기는디, 농촌에서는 골병들게 일을 하면 할수록 손해만 나요. 그런디 어뜨케 살겄어요. 농촌에서는 거지노릇도 못 헌당께요. 도시에서는 공짜로 밥 주는 데도 많다고 헙디다만, 농촌에서는 어디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먹을 데 없어요. 농촌 인심 좋다는 것도 옛 말입니다.”
오영기는 그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
“나는 죽어도 서울 안 간다. 정 가고 자프면 에미 죽거든 땅에 묻고 가.”
오영기의 노모가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아들 쪽으로 상반신을 틀어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화난 목소리로 쏘아댔다. 저렇듯 완강하게 버티는 노모를 모시고 어떻게 고향을 떠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오영기가 그의 노모를 설득하기란 어머니의 굽은 허리를 곧게 펴기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 서울이 무서워서 저러시는 겁니다. 사실은 나도 겁나게 무서운디, 평생 기차 한번 안 타보신 어머니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렇지만 무서움은 절망보다 훨씬 낫지요. 절망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지만 무서움은 용기만 있으면 곧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열일곱에 아랫마을에서 시집온 오영기 노모는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60년 동안 꼬박 이 마을에서만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고향 떠나기가 죽기보다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집 밖에 나간 일이라고는 아들 결혼식 때 광주 나들이가 처음이었고 고작 장날 읍네 구경이나 해온 처지에 멀고 낯선 서울이라니. 그런 오영기의 노모를 보면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자꾸만 망설여지기도 한다.
오영기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기분이 찜찜했다. 죽어도 생오지를 떠나기 싫다면서 원망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오영기 노모의 시선이 따끔따끔 심장을 쪼아대는 것 같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달랠 겸 뒤꼍의 느릅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오영기의 처 멍질라가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겅중겅중 춤을 추듯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요리학원에 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리는 길을 양산도 받치지 않고 짱짱한 햇볕 속을 걸어오고 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잠시 멈칫거리더니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 깡똥한 키에 둥글납작하고 보글보글한 얼굴을 한 그녀는 옅은 밤색의 개량한복차림이다. 입만 열지 않는다면 생김새가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멍질라가 주춤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동안 멍질라가 혼자서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선새니임.... 부타키 있어 와서요. 우리... 소나무 꼬욱 팔라야 해요. 소나무 팔라야 몽골 우리 어머니 눈 뜰 수 이서요. 이 말 하라고 와서요.”
멍질라가 나를 보자마자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약간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 안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한사코 망설이는 멍질라를 앞세우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웃 사람이라면 담을 쌓고 살다시피 한 아내가 어찌된 일인지 현관 밖까지 나와 멍질라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아내가 마을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현관 밖까지 나온 것은 처음이다.
놀랍게도 아내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고 냉커피까지 내왔다. 더욱이 멍질라가 고향에 있는 앞 못 보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아내도 시울이 펑 젖어 멍질라를 안아주며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던 예전의 아내를 다시 보는 듯했다.
몽골 고향에 있는 멍질라의 어머니는 십여 년 전부터 각막 궤양으로 눈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멍질라가 한국으로 떠나올 무렵에는 가까스로 딸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단다. 멍질라가 한국으로 시집 올 결심을 한 것도 어머니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눈은 몽골 의료진으로는 고칠 수가 없게 되어 한국으로 모셔와 치료를 받아야만했다.
다음호에 계속..
나는 처조카가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우리 마을 소나무 집 오영기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영기 집에 명품 소나무가 있어 나는 그 집을 소나무 집이라고 부른다. 지난 번 처조카가 생오지에 왔을 때 오영기의 집을 사고 싶다고 해서 두어 차례 그를 만나 집을 흥정하려고 했으나 소나무 한 그루와 영산홍 다섯 그루 때문에 타협이 이루어지 않고 있다.
한 때 농업후계자로 농촌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보겠다고 소를 키우며 발버둥쳐왔던 오영기는 지금 빚만 잔뜩 지고 실의에 빠져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도시로 나가 새 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흔 여섯 살의 그는 아직 육신이 멀쩡하니 막일을 해서라도 두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켜보겠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처조카가 환갑을 바라보는 늘그막에 농촌으로 들어와 이상을 펼쳐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십대 농사꾼 오영기는 농촌에서 실패한 삶을 더 늙기 전에 도시에 나가서 보상받아보겠다고 한다.
처조카는 영악하리만치 도시적 이성과 생리를 타고 태어났고 오영기는 융통성 없고 순박한 흙의 감성을 갖고 있는데, 어찌하여 자신이 살아온 터전에서 안정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처조카는 서울 변두리 극장 앞에서 오랫동안 신기료장수를 해서 구두고치는 일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그는 영화감상이 유일한 취미이다. 한편 오영기는 힘이 좋아 옛날 같으면 상머슴 꾼으로, 농사짓는 선수이고 나무를 가꾸는 전문가다.
처조카가 시골로 온다 해도 구두를 고칠 일은 없을 것이고 오영기 역시 도시로 나가서 나무를 가꿀 일이 없을 터인데, 두 사람이 한사코 옮겨 살겠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삶의 터전을 바꾼다고 해서 반듯이 꿈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두 사람을 생각하면 괜히 울적해진다.
집을 나선 나는 경쾌하게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를 들으며 금낭화 밭 옆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마을 이장 동생이 야생화 금낭화를 3백 평쯤 되는 밭에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늦봄까지만 해도 화사한 분홍빛 꽃물결이 보기에 좋았는데 여름 들어 옴씰하게 꽃이 지면서 잎이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 아름다운 꽃은 역시 질 때 지저분한 것이 흠인 것 같다.
더욱이 금낭화는 한두 그루가 꽃이 피었을 때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수천 그루가 집단으로 피어있으면 다만 신기할 뿐, 놀랄 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는 금낭화 꽃밭을 볼 때마다 나는 후진국 청소년들의 대규모 집단 마스게임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야생화는 누가 보지 않더라도 본디 제 자리에서 스스로 자라야, 한껏 제 모습을 뽐내고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낭화 밭 끄트머리 늙은 느티나무 밑에 시멘트 기와지붕의 마을 정자가 있다. 내가 이 마을로 이사를 오던 때까지만 해도 정자 앞에는 5백년 쯤 됨직한 노송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었는데 지금은 베어내고 없다. 5년 전 군에서 마을길을 시멘트포장을 한 후부터 잎이 시들해지면서 시난고난 앓다가 죽은 것을 작년 가을에 크레인을 동원해서 잘라냈다.
노송이 잘려지던 날,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돌다가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나는 노송이 보이지 않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것 같은 허전함에 슬픔의 덩어리가 목울대에 가득 뻗질러 오르는 듯했다. 내가 이 마을에 정처를 정한 것이 뜸부기 소리 말고도 이 노송이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평생 이 마을에서 살아온 토박이 노인들의 심정은 오죽 아프랴.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노송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어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무엇에 마음을 기대어 소원을 말할까. 소원을 빌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허전하고 삭막할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전기톱에 잘린 노송의 둥그스름한 밑동을 바라보다 말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의 무지로 수 백 년 된 나무를 죽게 한 잘못이 내게 있는 것만 같아, 무서운 죄책감에 진저리를 쳤다.
마을 안길로 접어들자 오영기 집 소나무의 푸른 우듬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멀리서부터 소나무를 보면서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나무는 의연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 소나무를 보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큼 튼실하고 멋들어지게 잘 생겼다.
새소리에 비교하자면 늦은 봄 푸른 숲속에서 누구인가를 부르는 듯 청랑(晴朗)하고 애절한 꾀꼬리 소리 같고 사람으로 치자면 일찍 깨달음을 얻은 청년 도사 같다고나 할까. 나는 소나무를 볼 때마다 눈 내리는 겨울이 기다려진다. 소나무는 눈 내리는 겨울에 그 푸름이 한껏 빛나 보이게 마련이다. 처조카도 오영기네 소나무를 무척 탐냈다. 오영기는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는 조경업자한테 팔겠다고 했고 처조카는 이 소나무를 그대로 두지 않으면 집을 사지 않겠다고 했다.
마침 오영기는 팔순의 노모와 함께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몽골에서 시집 온 그의 처 멍질라는 보이지 않고 두 아이들만 처마 그늘 밑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멍질라는 요리학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광주까지 요리학원에 다니고 있다.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식당에 취직을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서울에 가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안 판다는디 뭣땜시 또 오셨당가요? 나는 죽어도 서울로 안 간당께.”
으름덩굴이 휘덮인 아치형의 그늘 막을 지나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오영기의 노모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뿜어냈다. 오영기의 노모는 집을 팔아주려는 나를 무척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영기가 손에 쑥이며 망초 등 잡초를 한 움큼 든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오늘 저녁 때 쯤 처조카가 오겠다고 해서....이번에 아주 계약을 했으면 하던데...”
“소나무 대신 영산홍을 남겨두기로 허지요. 사실 저 소나무와 영산홍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정성들여 가꾼 것이라서 옮기고 싶지 않어요. 봄이면 아버님이 묘소에서 영산홍 꽃을 내려다 볼 수 있지 않겠어요? 허지만 돈 땜시 어쩔 수 없이 소나무만큼은 업자한테 팔아야 겄네요. 저렇게 잘 키운 영산홍 없당께요. ”
오영기가 집 옆 텃밭 모퉁이에 창창한 소나무와 키 높이의 영산홍을 보면서 말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다섯 그루의 영산홍은 진홍빛 꽃을 구름처럼 뭉얼뭉얼 피워 올렸다. 나는 세 차례나 이 집에 영산홍 꽃구경을 오기도 했었다.
꽃이 지고 난 후 지금까지도 풍염하도록 아름다운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영기 아버지가 30여 년을 키웠다는 영산홍은 그 빛깔이 화사하고 곱거니와 우아하면서도 앙당그러진 수형이 가히 예술품이다. 나는 그 영산홍이 너무 욕심나서 한 그루 사다 심을까 싶었지만 차마 팔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업자한테 소나무를 얼마에 팔기로 했는데? ”
“오백은 받아야지요. 임자를 만나면 천짜리는 되고도 남어요.”
“오백이라....아버님께서도 저 소나무가 이 집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실 걸세. 그러니 삼백을 쳐주면 어떻겠는가. ”
나는 쩝쩝 연신 입맛만 다시며 안타까운 눈으로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나무를 돈으로 따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요. 사실 저 영산홍도 돈으로 치자면 이 백은 넘은 건디...”
“그래? 암턴 처조카가 내려오면 다시 이야기 해보세. 헌데 갈 곳은 확실히 정했는가? ”
“조카 분 사시는 데가 의정부 허고 가깝다면서요? 서울 남쪽은 집값이 너무 비싸서 북쪽으로 알아보려고요. 제가 의정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잘 알거든요.”
“자당께서 저렇게 반대를 하시는데 꼭 서울로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
“지금꺼정 집 앞에 있는 토질 좋은 밭에 콩을 심다가 제작년에 산비탈 자갈밭에 심었더니 소출이 엄청 많이 나오데요. 그러고 저기 저 단감나무도 밭에서 캐다가 두엄자리 옆에 심었더니 씨알도 굵고 많이 열리드라니께요. 사람도 식물이나 같지 않겠어요? 저저끔 살 자리를 잘 잡어야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데요.”
나는 오영기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오영기는 내게 생명 있는 존재들의 삶의 터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은 저마다 자기의 생리에 맞는 환경에서 터전을 잘 잡아야 안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습지식물은 습지에서, 건지식물은 건지에서 잘 살고, 나무들도 등고선에 따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갈매기는 바다에서 살고 참새는 집 주위에서 살아가듯.
“우리 같은 사람은 농촌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도시에서는 그래도 땀 흘린 만큼 수입이 생기는디, 농촌에서는 골병들게 일을 하면 할수록 손해만 나요. 그런디 어뜨케 살겄어요. 농촌에서는 거지노릇도 못 헌당께요. 도시에서는 공짜로 밥 주는 데도 많다고 헙디다만, 농촌에서는 어디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먹을 데 없어요. 농촌 인심 좋다는 것도 옛 말입니다.”
오영기는 그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
“나는 죽어도 서울 안 간다. 정 가고 자프면 에미 죽거든 땅에 묻고 가.”
오영기의 노모가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아들 쪽으로 상반신을 틀어 고개만 옆으로 돌린 채 화난 목소리로 쏘아댔다. 저렇듯 완강하게 버티는 노모를 모시고 어떻게 고향을 떠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오영기가 그의 노모를 설득하기란 어머니의 굽은 허리를 곧게 펴기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 서울이 무서워서 저러시는 겁니다. 사실은 나도 겁나게 무서운디, 평생 기차 한번 안 타보신 어머니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렇지만 무서움은 절망보다 훨씬 낫지요. 절망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지만 무서움은 용기만 있으면 곧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열일곱에 아랫마을에서 시집온 오영기 노모는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60년 동안 꼬박 이 마을에서만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고향 떠나기가 죽기보다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집 밖에 나간 일이라고는 아들 결혼식 때 광주 나들이가 처음이었고 고작 장날 읍네 구경이나 해온 처지에 멀고 낯선 서울이라니. 그런 오영기의 노모를 보면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자꾸만 망설여지기도 한다.
오영기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기분이 찜찜했다. 죽어도 생오지를 떠나기 싫다면서 원망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오영기 노모의 시선이 따끔따끔 심장을 쪼아대는 것 같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달랠 겸 뒤꼍의 느릅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오영기의 처 멍질라가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겅중겅중 춤을 추듯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요리학원에 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15분 이상 걸리는 길을 양산도 받치지 않고 짱짱한 햇볕 속을 걸어오고 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잠시 멈칫거리더니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 깡똥한 키에 둥글납작하고 보글보글한 얼굴을 한 그녀는 옅은 밤색의 개량한복차림이다. 입만 열지 않는다면 생김새가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멍질라가 주춤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동안 멍질라가 혼자서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선새니임.... 부타키 있어 와서요. 우리... 소나무 꼬욱 팔라야 해요. 소나무 팔라야 몽골 우리 어머니 눈 뜰 수 이서요. 이 말 하라고 와서요.”
멍질라가 나를 보자마자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약간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 안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한사코 망설이는 멍질라를 앞세우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웃 사람이라면 담을 쌓고 살다시피 한 아내가 어찌된 일인지 현관 밖까지 나와 멍질라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아내가 마을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현관 밖까지 나온 것은 처음이다.
놀랍게도 아내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고 냉커피까지 내왔다. 더욱이 멍질라가 고향에 있는 앞 못 보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아내도 시울이 펑 젖어 멍질라를 안아주며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던 예전의 아내를 다시 보는 듯했다.
몽골 고향에 있는 멍질라의 어머니는 십여 년 전부터 각막 궤양으로 눈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멍질라가 한국으로 떠나올 무렵에는 가까스로 딸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단다. 멍질라가 한국으로 시집 올 결심을 한 것도 어머니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눈은 몽골 의료진으로는 고칠 수가 없게 되어 한국으로 모셔와 치료를 받아야만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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