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생오지 뜸부기(1회) – 문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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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608회 작성일 10-04-0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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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등뻐꾸기가 새벽부터 뒷산 잡목숲에서 트럼펫소리를 냈다. 나는 오늘도 먼동이 틀 무렵 새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창문을 훨쩍 열어젖히자 부연 안개가 마당 앞 먹감나무 우듬지를 친친 감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새들의 오케스트라 연주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매일 아침 5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들이 연주하는 ‘한여름 동틀 무렵’이라는 곡명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한다. 새들의 연주회 무대는 내가 살고 있는 한갓진 골짜기 마을 생오지. 이곳은 버스도 들어오지 않고 휴대전화 통화권 이탈지역이다.
새들의 오케스트라 단원 수가 가장 많을 때는 여름날 아침 동틀 무렵. 이 시간이 지나 안개가 걷히고 구리철사 같이 뾰쪽 뾰족한 햇살이 숲속에 꽉 들어차, 빈틈없이 퍼지기 시작하면 새들은 서서히 무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새들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저마다의 음색으로 한껏 목소리를 뽐내며 바이어린과 피아노. 하프.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피콜로. 심벌즈 등의 여러 가지 악기소리를 낸다. 딱새는 힛힛힛 삐쭈삐 찌이히찌, 쇠솔새는 쪼-리 쪼-리 쪼-리 쪼-리 큐-웃 큐-웃, 소쩍새는 솥-적다 솥-적다, 박새는 뽀로로로로 쬬쬬 쯔-비 쯔-비 쯔쯔비, 개개비는 개개개개개 개액개액 , 굴뚝새는 초르-초르-초르 하고 소리 낸다. 검은 등 뻐꾸기는 뒷산에서 호올-딱 버엇-고 호올-딱 버엇-고 하며 트럼펫 역할을 하고 뒷마당에 내려앉은 산비둘기는 구국구욱 구국구욱 작은 북소리를 낸다. 개울 건너 닭장에서 수탉의 홰치는 울음소리는 영락없는 심벌즈 역할이다.
요즘에는 소쩍새가 낮에도 노래를 한다. 아름다운 고음에 떨림이 좋은 목소리를 가진 굴뚝새 소리는 경쾌하고 가락이 있으며 멀리까지 들린다. 작은 몸집으로 어디서 그처럼 힘찬 목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이따금씩 쓰르람 매미가 날카롭게 목청을 돋우며 연주회를 훼방치곤 한다. 방해꾼 매미 소리에 섞여 앞산 굴참나무 숲에서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운다.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마치 늙은 남자가 혼자 숨어서 우는 것처럼 애잔하고 슬프다. 그런가하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동박새 소리도 들린다.
3년 전 이맘 때 나는 녹색 등에 턱 밑과 배가 희고 아래꼬리 덮개 깃이 황금색인 동박새 한 마리가 금목서 가지 끝에 외롭게 앉아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랜만에 듣는 동박새 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새들이 연주하고 있는 동안에는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귀를 통해 소리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서다. 소리를 통해 머릿속에 그린 상상의 그림은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더 투명하고 아름답다.
가끔 연주회를 망치는 것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때까치다. 제각기 무질서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분위기를 수선스럽게 흐트러뜨리기도 한다. 때까치는 흐리거나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는 울지 않고 하늘이 화창하고 맑게 갠 날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른다. 이럴 때는 때까치 대신 아름다운 노래장이 휘파람새가 날아와 와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휘파람새는 지난봄에 호-호-호 홋-홋 하고 노래하며 온통 목소리 하나로 숲속을 휘어잡았었다. 이런 날 휘파람새와 꾀꼬리가 참가해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회가 되겠는가 싶다.
문득 올리비에 메시앙이라는 작곡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의 스승 폴 듀카스가 어느 날 숲 속을 거닐며 메시앙에게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라. 그들이야 말로 작곡의 거장이다.”라고 했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생각할 때, 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음악가인 것 같다.
스멀스멀 안개가 회색빛 머리를 갈기갈기 풀어헤치고 춤추듯 하늘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안개가 벗겨지면서 한여름의 찐득거리는 푸른 속살이 조금씩 요염하게 드러나고 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힌 후에도 멀리서 우는 산새는 볼 수가 없다. 나는 소리만 듣고 새의 생김새며 무슨 나무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본다. 안개가 말끔히 걷히자 한동안 어지럽게 소란을 피우던 산 까치와 멧비둘기만 남고 하나씩 사라져간다.
새들의 연주회는 한 시간 쯤 후, 내가 뒷산으로 소리산책을 나서려고 할 때쯤에야 끝났다. 안개가 걷히자 연주회가 끝이 난 것인지, 아니면 연주회가 끝나자 안개가 걷힌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안개가 걷히는 도중에 연주회도 시들해진 것인지도. 클라리넷 연주를 담당하던 굴뚝새가 닭장 앞 황금 편백나무 가지에서 작은 몸을 툭툭 튀듯 움직이더니 대밭 쪽으로 포르르 날아오른 후,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뒤를 이어 뒷산 관목림에서 노래하던 피아니스트 솔새의 목소리도 뚝 그쳤다.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빠지면서부터 연주는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연주회가 끝나자 생오지 골짜기 안통이 텅 빈 것처럼 고즈넉하다. 아침 한 때 새소리로 가득했던 골짜기가 조용해지자 나는 갑자기 이유 없이 슬퍼진다. 나는 침묵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본다. 새들의 연주시간 동안 숨을 죽였던 개울물 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되살아났다.
장마 뒤끝이라서 참새골과 매봉골 두 골짜기 바닥을 훑고 내려온 개울물은 무릎높이로 넉넉하게 흐른다. 물이 줄어든 것인지 하룻밤 사이에 물 흐르는 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진 듯싶다. 개울 속도 또 하나의 소리세상을 이루고 있다. 바람은 한동안 싸리나무 언덕을 맴돌며 해찰을 하다가 소리도 없이 먹감나무 이파리를 간질이고 달아난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걸레처럼 볼품사납게 땅에 떨어진 널찍한 오동나무 잎이 바스락거린다.
내가 막 운동화를 꿰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다급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고모부님, 뜸북새는 찾으셨어요? ”
서울 사는 사촌 처조카한테서 온 전화다. 며칠 전 전화가 와서 뜸부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이웃마을에 가보겠다고 했더니 그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처조카가 내게 전화 한 것은 뜸부기 소식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못 찾았어. 멸종 위기에 있는 새인데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겠어? ”
내 대답은 목구멍 속으로 깊숙이 잦아들 것처럼 이내 시들해진다.
“모래 쯤, 집 사람하고 고모부님 댁에 내려가 볼까 하는데....괜찮겠어요?”
“그렇게 해.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전화를 끊고 아내가 잠들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내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올 무렵에야 일어나는데, 오늘 아침에는 처조카 전화 때문에 한 시간쯤 빨리 깨어난 것이다. 아내는 부스스한 얼굴로 아득히 먼 시선을 무념하게 말아 올린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있다.
이럴 때 아내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생각이 빠져나가버린 아내의 모습은 메마른 갈색 참나무 잎처럼 가벼워 보이게 마련이다. 요즈막 아내는 무엇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기라도 한 듯 몸도 마음도 놓아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도시에 살 때는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몸치장에 신경을 쓰고 말도 많았던 아내였는데, 시골로 오면서부터는 침묵의 늪에 빠진 채 늘 휘주근해 있다.
피부는 껍질이 벗겨져 푸슬푸슬했으며 반백의 머리는 풀머리 그대로 며느리밑씻개 넝쿨처럼 얼크러졌고 오래토록 목욕을 하지 않은 몸에서는 시지근한 묵은 지 냄새가 났다. 시선이 풀린 채 살고 있는 아내는 지금 마음속에 아무것도 움켜쥔 것이 없어 보인다. 자식들에 대한 집착도, 살림살이에 대한 욕심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모두 놓아버리고 빈 손 펴고 살아가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나는 가슴에 동굴이 뻥 뚫린 듯 허전하고 슬프다.
그럴수록 나는 뜸부기를 찾는 일과 자연의 소리에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본다. 숲속에서 들리는 작은 새소리에도 가슴이 설레고 풀밭에 납작하게 깔려 나지막이 속삭이는 바람소리며 햇볕이 짱짱한 한여름 대낮의 잔잔한 개울물 소리, 달빛이 화사한 밤에 어둠을 휘젓는 귀뚜라미 소리에도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러워한다. 이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몇 년 동안 뜸부기 소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골로 내려온 후 풀잎 하나에도 감동하며 활력이 솟구치는 나에 비해, 아내는 날이 갈수록 무념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해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시골로 내려온 후부터 시작된 아내의 무력증은 때때로 나를 외로움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처조카 부부를 우리 마을로 끌어오려고 한 것도 내심은 아내 때문이다. 옆에 처조카가 있어준다면 아내가 시골에 마음을 붙이고 살수 있을지 몰라서다.
서울에서 자라, 아버지 대부터 80년대까지 극장 앞에서 신기료장수를 해 온 처조카는 오래전부터 시골에 내려와 사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극장이 헐리고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일자리를 잃고 어렵게 살아온 그는 지금,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아내와 둘이서 낡은 다세데 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는 다세대 주택을 팔아 우리 마을에 땅이 딸린 농가를 사려고 한다.
“내일 종수 부부가 내려온다네. 이번에 내려오면 소나무 집을 계약하라고 해야겠어.”
내 말에도 아내는 반응이 없다. 반응이 없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과 같다.
아내는 처음부터 시골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 시골이 무섭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번도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긴장이 풀려 삶이 느슨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와 달리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싫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시골의 깜깜한 밤의 적막이 무섭기라도 한 것일까.
암튼 아내는 시골로 내려온 그 날부터 걸핏하면 혼자서라도 도시로 다시 나가겠다면서 한달에 두 세 번씩 보따리를 싸곤 했다. 이제는 그도 지쳐버렸는지 매사에 무반응 무관심이다. 평생 욱대기며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오다가 시골에 내려오자 갑자기 세포가 이완되어버린 것일까. 갑자기 저혈당 환자처럼 기력이 떨어지고 신경도 무디어진 것 같다.
지난봄 내가 휘파람새의 아름다운 소리가 아프게 다가와서 아내한테 들어보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무섭게 찔러보며 귀를 틀어막고는 무섭도록 괴성을 질러댔다. 나는 너무 놀라 손사래를 치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내가 나를 향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아내는 징그럽게도 싫어했다. 아내의 그 같은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시골에 와서 아내가 하는 일이란 하루 세끼 잊지 않고 밥 차리고 빨래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눈물나도록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더 이상 아내한테 새소리며 물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권하지 않는다. 얼마 전 아내는 느닷없이 우리 집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을 달라고 성화였다. 마을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서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아내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에는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데 우리 집만 유별나게 이웃과 경계를 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로 내려오면서부터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없는 터에, 울타리에 대문까지 달고 이웃들과 왕래를 끊는다면 어찌되겠는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종일 입에 담는 말이 몇 마디나 될까 하고 유심히 관찰한 적도 있는데, 끼니 때마다 식사하라는 말, 빨랫감 내 놓으라는 말이 전부인 날이 많았다.
도시에서는 동창들이나 아파트 주민들과 잘도 어울리던 아내가 시골로 내려오면서부터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싫어하는 연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는 자기만의 어둡고 깊은 수렁 속에 갇혀서,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단절의 깊은 수렁에서 아내를 꺼내기 위해서라도 처조카 부부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왔으면 싶다. 만약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이대로 계속된다면 나는 아내를 위해 다시 기계음으로 가득 찬 도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 뒤 임도를 따라 한 시간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아내는 기계처럼 아침을 준비해 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나마나 아내는 또 앨범들을 꺼내놓고 눈이 빠지게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아내는 앨범을 들여다보는 데 하루가 걸린다.
우리는 다섯 권의 앨범을 갖고 있다. 아내와 나의 어린시절부터 아이들을 기르고 결혼시키고 회갑을 맞고 내가 정년을 할 때까지의 삶의 흔적들이 오롯이 다섯 권의 앨범 속에 담겨있다. 우리 부부의 인생이 이 앨범의 사진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통하게도 앨범을 들여다볼 때 아내의 눈빛이 살아있음을 보았다.
발자국 소리를 줄여 안방에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아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쭉 뻗어 편하게 앉아 앨범을 들여다보고 보고 있다. 아내의 메마르고 가느다란 눈길은 외동딸 미라의 대학 입학 때 찍은 사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미라는 대학교 3학년 때 인도 배낭여행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딸의 얼굴을 못 본 지도 5년이 넘었다.
나는 아내가 아침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 내려온 후부터 끼니때마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혼자 새소리를 듣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둡고 낯선 먼 길을 혼자서 터덕터덕 걷는 것만큼이나 적막하고 고통스럽도록 외롭다. 어쩔 때는 마치 깜깜한 무덤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만이 유일하게 위로가 된다.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저, 긍께로 여그는... 운곡리 이장인디요. 어저께 논에서 뜸부기를 봤다는 사람이 있당께라. 틀림없는 뜸부기였다고 허드만이라우. 소시 적에 봤던 것과 똑 같다고 허드랑께요. 거시기 ,요본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디...”
운곡리 라면 내가 사는 생오지에서 산 너머 수용산 밑 움쑥한 골짜기 마을이다. 나는 3년 전 이곳으로 오자마자 면사무소에 가서 각 마을 이장들에게 뜸부기를 발견하면 연락을 해달라는 전단지를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심심찮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3년 동안에 스무 통화 남짓 전화를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동안 운곡리도 전화를 받고 두 차례나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 전화에도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뜸부기를 봤다는 분 옆에 계시면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
나는 송수화기를 든 채 한참동안 기다렸다. 윙윙윙 전류를 타고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댔다.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니다. 바람소리와 전류 흐르는 소리는 다르다. 바람소리는 아무리 거칠고 드세어도 신경을 긁어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류 흐르는 소리는 뇌가 찌릿찌릿할 정도로 날카롭고 자극적이다. 마치 한밤중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보다 더 나를 불안하게 한다. 피를 말리는 것처럼 기분 나쁜 소리다. 나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때가 많다.
“아, 여보씨요. 전화 바꿨서라우.”
질그릇 깨지는 것처럼 투박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쉰 소리. 전류 흐르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음호에 계속..
검은등뻐꾸기가 새벽부터 뒷산 잡목숲에서 트럼펫소리를 냈다. 나는 오늘도 먼동이 틀 무렵 새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창문을 훨쩍 열어젖히자 부연 안개가 마당 앞 먹감나무 우듬지를 친친 감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새들의 오케스트라 연주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매일 아침 5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새들이 연주하는 ‘한여름 동틀 무렵’이라는 곡명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한다. 새들의 연주회 무대는 내가 살고 있는 한갓진 골짜기 마을 생오지. 이곳은 버스도 들어오지 않고 휴대전화 통화권 이탈지역이다.
새들의 오케스트라 단원 수가 가장 많을 때는 여름날 아침 동틀 무렵. 이 시간이 지나 안개가 걷히고 구리철사 같이 뾰쪽 뾰족한 햇살이 숲속에 꽉 들어차, 빈틈없이 퍼지기 시작하면 새들은 서서히 무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새들은 해가 떠오르기 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저마다의 음색으로 한껏 목소리를 뽐내며 바이어린과 피아노. 하프.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피콜로. 심벌즈 등의 여러 가지 악기소리를 낸다. 딱새는 힛힛힛 삐쭈삐 찌이히찌, 쇠솔새는 쪼-리 쪼-리 쪼-리 쪼-리 큐-웃 큐-웃, 소쩍새는 솥-적다 솥-적다, 박새는 뽀로로로로 쬬쬬 쯔-비 쯔-비 쯔쯔비, 개개비는 개개개개개 개액개액 , 굴뚝새는 초르-초르-초르 하고 소리 낸다. 검은 등 뻐꾸기는 뒷산에서 호올-딱 버엇-고 호올-딱 버엇-고 하며 트럼펫 역할을 하고 뒷마당에 내려앉은 산비둘기는 구국구욱 구국구욱 작은 북소리를 낸다. 개울 건너 닭장에서 수탉의 홰치는 울음소리는 영락없는 심벌즈 역할이다.
요즘에는 소쩍새가 낮에도 노래를 한다. 아름다운 고음에 떨림이 좋은 목소리를 가진 굴뚝새 소리는 경쾌하고 가락이 있으며 멀리까지 들린다. 작은 몸집으로 어디서 그처럼 힘찬 목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이따금씩 쓰르람 매미가 날카롭게 목청을 돋우며 연주회를 훼방치곤 한다. 방해꾼 매미 소리에 섞여 앞산 굴참나무 숲에서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운다.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마치 늙은 남자가 혼자 숨어서 우는 것처럼 애잔하고 슬프다. 그런가하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동박새 소리도 들린다.
3년 전 이맘 때 나는 녹색 등에 턱 밑과 배가 희고 아래꼬리 덮개 깃이 황금색인 동박새 한 마리가 금목서 가지 끝에 외롭게 앉아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랜만에 듣는 동박새 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새들이 연주하고 있는 동안에는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귀를 통해 소리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서다. 소리를 통해 머릿속에 그린 상상의 그림은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더 투명하고 아름답다.
가끔 연주회를 망치는 것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때까치다. 제각기 무질서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분위기를 수선스럽게 흐트러뜨리기도 한다. 때까치는 흐리거나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는 울지 않고 하늘이 화창하고 맑게 갠 날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른다. 이럴 때는 때까치 대신 아름다운 노래장이 휘파람새가 날아와 와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휘파람새는 지난봄에 호-호-호 홋-홋 하고 노래하며 온통 목소리 하나로 숲속을 휘어잡았었다. 이런 날 휘파람새와 꾀꼬리가 참가해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회가 되겠는가 싶다.
문득 올리비에 메시앙이라는 작곡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의 스승 폴 듀카스가 어느 날 숲 속을 거닐며 메시앙에게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라. 그들이야 말로 작곡의 거장이다.”라고 했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생각할 때, 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음악가인 것 같다.
스멀스멀 안개가 회색빛 머리를 갈기갈기 풀어헤치고 춤추듯 하늘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안개가 벗겨지면서 한여름의 찐득거리는 푸른 속살이 조금씩 요염하게 드러나고 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힌 후에도 멀리서 우는 산새는 볼 수가 없다. 나는 소리만 듣고 새의 생김새며 무슨 나무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본다. 안개가 말끔히 걷히자 한동안 어지럽게 소란을 피우던 산 까치와 멧비둘기만 남고 하나씩 사라져간다.
새들의 연주회는 한 시간 쯤 후, 내가 뒷산으로 소리산책을 나서려고 할 때쯤에야 끝났다. 안개가 걷히자 연주회가 끝이 난 것인지, 아니면 연주회가 끝나자 안개가 걷힌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안개가 걷히는 도중에 연주회도 시들해진 것인지도. 클라리넷 연주를 담당하던 굴뚝새가 닭장 앞 황금 편백나무 가지에서 작은 몸을 툭툭 튀듯 움직이더니 대밭 쪽으로 포르르 날아오른 후,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뒤를 이어 뒷산 관목림에서 노래하던 피아니스트 솔새의 목소리도 뚝 그쳤다. 피아노와 클라리넷이 빠지면서부터 연주는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연주회가 끝나자 생오지 골짜기 안통이 텅 빈 것처럼 고즈넉하다. 아침 한 때 새소리로 가득했던 골짜기가 조용해지자 나는 갑자기 이유 없이 슬퍼진다. 나는 침묵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본다. 새들의 연주시간 동안 숨을 죽였던 개울물 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되살아났다.
장마 뒤끝이라서 참새골과 매봉골 두 골짜기 바닥을 훑고 내려온 개울물은 무릎높이로 넉넉하게 흐른다. 물이 줄어든 것인지 하룻밤 사이에 물 흐르는 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진 듯싶다. 개울 속도 또 하나의 소리세상을 이루고 있다. 바람은 한동안 싸리나무 언덕을 맴돌며 해찰을 하다가 소리도 없이 먹감나무 이파리를 간질이고 달아난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걸레처럼 볼품사납게 땅에 떨어진 널찍한 오동나무 잎이 바스락거린다.
내가 막 운동화를 꿰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다급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고모부님, 뜸북새는 찾으셨어요? ”
서울 사는 사촌 처조카한테서 온 전화다. 며칠 전 전화가 와서 뜸부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이웃마을에 가보겠다고 했더니 그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처조카가 내게 전화 한 것은 뜸부기 소식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못 찾았어. 멸종 위기에 있는 새인데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겠어? ”
내 대답은 목구멍 속으로 깊숙이 잦아들 것처럼 이내 시들해진다.
“모래 쯤, 집 사람하고 고모부님 댁에 내려가 볼까 하는데....괜찮겠어요?”
“그렇게 해.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전화를 끊고 아내가 잠들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내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올 무렵에야 일어나는데, 오늘 아침에는 처조카 전화 때문에 한 시간쯤 빨리 깨어난 것이다. 아내는 부스스한 얼굴로 아득히 먼 시선을 무념하게 말아 올린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있다.
이럴 때 아내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생각이 빠져나가버린 아내의 모습은 메마른 갈색 참나무 잎처럼 가벼워 보이게 마련이다. 요즈막 아내는 무엇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기라도 한 듯 몸도 마음도 놓아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도시에 살 때는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몸치장에 신경을 쓰고 말도 많았던 아내였는데, 시골로 오면서부터는 침묵의 늪에 빠진 채 늘 휘주근해 있다.
피부는 껍질이 벗겨져 푸슬푸슬했으며 반백의 머리는 풀머리 그대로 며느리밑씻개 넝쿨처럼 얼크러졌고 오래토록 목욕을 하지 않은 몸에서는 시지근한 묵은 지 냄새가 났다. 시선이 풀린 채 살고 있는 아내는 지금 마음속에 아무것도 움켜쥔 것이 없어 보인다. 자식들에 대한 집착도, 살림살이에 대한 욕심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모두 놓아버리고 빈 손 펴고 살아가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나는 가슴에 동굴이 뻥 뚫린 듯 허전하고 슬프다.
그럴수록 나는 뜸부기를 찾는 일과 자연의 소리에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본다. 숲속에서 들리는 작은 새소리에도 가슴이 설레고 풀밭에 납작하게 깔려 나지막이 속삭이는 바람소리며 햇볕이 짱짱한 한여름 대낮의 잔잔한 개울물 소리, 달빛이 화사한 밤에 어둠을 휘젓는 귀뚜라미 소리에도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러워한다. 이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몇 년 동안 뜸부기 소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골로 내려온 후 풀잎 하나에도 감동하며 활력이 솟구치는 나에 비해, 아내는 날이 갈수록 무념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해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시골로 내려온 후부터 시작된 아내의 무력증은 때때로 나를 외로움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처조카 부부를 우리 마을로 끌어오려고 한 것도 내심은 아내 때문이다. 옆에 처조카가 있어준다면 아내가 시골에 마음을 붙이고 살수 있을지 몰라서다.
서울에서 자라, 아버지 대부터 80년대까지 극장 앞에서 신기료장수를 해 온 처조카는 오래전부터 시골에 내려와 사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극장이 헐리고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일자리를 잃고 어렵게 살아온 그는 지금,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아내와 둘이서 낡은 다세데 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는 다세대 주택을 팔아 우리 마을에 땅이 딸린 농가를 사려고 한다.
“내일 종수 부부가 내려온다네. 이번에 내려오면 소나무 집을 계약하라고 해야겠어.”
내 말에도 아내는 반응이 없다. 반응이 없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과 같다.
아내는 처음부터 시골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다. 시골이 무섭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번도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긴장이 풀려 삶이 느슨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와 달리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싫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시골의 깜깜한 밤의 적막이 무섭기라도 한 것일까.
암튼 아내는 시골로 내려온 그 날부터 걸핏하면 혼자서라도 도시로 다시 나가겠다면서 한달에 두 세 번씩 보따리를 싸곤 했다. 이제는 그도 지쳐버렸는지 매사에 무반응 무관심이다. 평생 욱대기며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오다가 시골에 내려오자 갑자기 세포가 이완되어버린 것일까. 갑자기 저혈당 환자처럼 기력이 떨어지고 신경도 무디어진 것 같다.
지난봄 내가 휘파람새의 아름다운 소리가 아프게 다가와서 아내한테 들어보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무섭게 찔러보며 귀를 틀어막고는 무섭도록 괴성을 질러댔다. 나는 너무 놀라 손사래를 치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아내가 나를 향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아내는 징그럽게도 싫어했다. 아내의 그 같은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시골에 와서 아내가 하는 일이란 하루 세끼 잊지 않고 밥 차리고 빨래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눈물나도록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더 이상 아내한테 새소리며 물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권하지 않는다. 얼마 전 아내는 느닷없이 우리 집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을 달라고 성화였다. 마을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서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아내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마을에는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데 우리 집만 유별나게 이웃과 경계를 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로 내려오면서부터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없는 터에, 울타리에 대문까지 달고 이웃들과 왕래를 끊는다면 어찌되겠는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종일 입에 담는 말이 몇 마디나 될까 하고 유심히 관찰한 적도 있는데, 끼니 때마다 식사하라는 말, 빨랫감 내 놓으라는 말이 전부인 날이 많았다.
도시에서는 동창들이나 아파트 주민들과 잘도 어울리던 아내가 시골로 내려오면서부터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싫어하는 연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는 자기만의 어둡고 깊은 수렁 속에 갇혀서, 몸도 마음도 위축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단절의 깊은 수렁에서 아내를 꺼내기 위해서라도 처조카 부부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왔으면 싶다. 만약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이대로 계속된다면 나는 아내를 위해 다시 기계음으로 가득 찬 도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 뒤 임도를 따라 한 시간쯤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아내는 기계처럼 아침을 준비해 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나마나 아내는 또 앨범들을 꺼내놓고 눈이 빠지게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아내는 앨범을 들여다보는 데 하루가 걸린다.
우리는 다섯 권의 앨범을 갖고 있다. 아내와 나의 어린시절부터 아이들을 기르고 결혼시키고 회갑을 맞고 내가 정년을 할 때까지의 삶의 흔적들이 오롯이 다섯 권의 앨범 속에 담겨있다. 우리 부부의 인생이 이 앨범의 사진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통하게도 앨범을 들여다볼 때 아내의 눈빛이 살아있음을 보았다.
발자국 소리를 줄여 안방에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아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쭉 뻗어 편하게 앉아 앨범을 들여다보고 보고 있다. 아내의 메마르고 가느다란 눈길은 외동딸 미라의 대학 입학 때 찍은 사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미라는 대학교 3학년 때 인도 배낭여행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딸의 얼굴을 못 본 지도 5년이 넘었다.
나는 아내가 아침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 내려온 후부터 끼니때마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혼자 새소리를 듣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둡고 낯선 먼 길을 혼자서 터덕터덕 걷는 것만큼이나 적막하고 고통스럽도록 외롭다. 어쩔 때는 마치 깜깜한 무덤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만이 유일하게 위로가 된다.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저, 긍께로 여그는... 운곡리 이장인디요. 어저께 논에서 뜸부기를 봤다는 사람이 있당께라. 틀림없는 뜸부기였다고 허드만이라우. 소시 적에 봤던 것과 똑 같다고 허드랑께요. 거시기 ,요본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디...”
운곡리 라면 내가 사는 생오지에서 산 너머 수용산 밑 움쑥한 골짜기 마을이다. 나는 3년 전 이곳으로 오자마자 면사무소에 가서 각 마을 이장들에게 뜸부기를 발견하면 연락을 해달라는 전단지를 나눠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심심찮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3년 동안에 스무 통화 남짓 전화를 받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동안 운곡리도 전화를 받고 두 차례나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 전화에도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뜸부기를 봤다는 분 옆에 계시면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
나는 송수화기를 든 채 한참동안 기다렸다. 윙윙윙 전류를 타고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댔다.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니다. 바람소리와 전류 흐르는 소리는 다르다. 바람소리는 아무리 거칠고 드세어도 신경을 긁어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류 흐르는 소리는 뇌가 찌릿찌릿할 정도로 날카롭고 자극적이다. 마치 한밤중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보다 더 나를 불안하게 한다. 피를 말리는 것처럼 기분 나쁜 소리다. 나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때가 많다.
“아, 여보씨요. 전화 바꿨서라우.”
질그릇 깨지는 것처럼 투박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쉰 소리. 전류 흐르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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