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아버지 : 조성숙(중국) > 아메리카 이민문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아메리카 이민문학


 

수필 수필 : 아버지 : 조성숙(중국)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71회 작성일 10-04-26 23:19

본문

아버지

우수상│조성숙(중국)

내가 어렸을 때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말하라면 아버지는 자애로운 분도 아니시고 자상한 분도 아니시며 그렇다고 자식들을 너무 엄하게 교육하거나 그런 분도 아닌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지금 애들처럼 아버지 무릎에서 어리광을 부려보거나 아버지의 꺼실꺼실한 얼굴에 뽀뽀를 해보았거나 하는 기억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한 가정의 세대주로서 아버지는 밤낮 생산대 일에 바삐 돌아치신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학교에 다니는 고모 둘에다 조롱조롱한 우리 여섯 자식까지 12식솔이나 되는 대가족이여서 아버지는 언제 우리 자식들을 곱다고 어루 만져줄 사이가 없었는가 보다. 그 때는 자식들에 대한 자상한 사랑보다 12식솔의 생계문제가 더 급선무였을 테니 말이다. 식솔이 많아서였는지 그때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다툰 날 만약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불문곡직하고 어머니를 때리시곤 하였다. 그때면 우리들은 한쪽 구석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 옆에 가서 같이 울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년들, 모두 죽지 못해 환장했어. 그만 울지 못할까.’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감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속이 한줌만해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어느 한번은 생산대에서 소를 잡고 술을 마셨는데 아버지는 엉망이 되여 돌아오셨다. 그리고 무슨 일로 어머니와 걸고 들어 주정을 하였는데 가마뚜껑이 땅바닥에 메쳐지고 밥상이 바닥에서 뒹구는 대소란이 일어났다. 그때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포대기를 둘러쓰고 구석에서 덜덜 떨었었다.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 이발이 덜덜 떨리고 머리칼이 곤두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소학교 3학년쯤의 일인 것 같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마을 옆에는 늪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늪의 물이 땅땅 얼어 우리 꼬맹이들은 짬만 있으면 거기에 가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썰매를 타기도 하였다. 그때 농촌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천연 얼음판은 무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곳이었다. 지금 지니스락원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그런 즐거움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끽했다. 그날 우리는 얼음판에서 친구들과 미끄럼질을 타다가 깨진 유리병을 주었다.


 


그것을 얼음 대신 이리 차고 저리 차면 때구르르 소리 내면서 굴러가는 것이 여간 재미났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깨진 유리병 을 박살내보자고 하였다. 몇 아이가 얼음판에 메쳤지만 유리병은 좀처럼 박살나지 않았다. 나는 앞의 아이들이 힘이 모자라서 그런 줄로 알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그 유리병을 얼음판 위에 냅다 메쳤다. 그런데 그것은 깨지기는 고사하고 얼을 판에서 튕겨 올라 면바로 나의 눈썹에 와 맞혔다. 원래 깨진 유리병이라 날이 있어서 나의 눈 등에서는 대뜸 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놀라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의 눈 등에서 피가 나자 같이 놀던 애들은 겁이 나서 다 달아나버렸다. 나는 피가 흐르는 눈을 싸쥐고 울면서 집에 달려왔다. 그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쉬려던 아버지는 내가 울며 들어오자 원인도 묻지 않고 계집애가 어디에 가서 일을 저지르고 울며불며 다니느냐며 당장 나가지 못할 가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눈을 싸쥔 채 울면서 집에서 쫓겨났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위생소에 가서 다친 곳에 약을 바르고 가제를 붙여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것은 눈 등을 다쳤으니 망정이지 눈알이라도 다쳤으면 내가 지금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하랴 말이다. 비록 상한 것이 아버지 탓은 아니지만 어쩌면 피를 흘리며 달려간 어린것을 그렇게 쫓아 낼 수 있었는지. 그때 아마도 아버지의 눈에는 징징 우는 나만 보였지 눈을 싸쥔 나의 손에 묻은 피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어릴 때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 재였을 뿐이다. 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생산대장이시였던 아버지는 그때 사원대회를 하면 언제나 우리 집에서 하시였다. 식솔이 많았던 만큼 집도 컸으니 말이다. 한 생산대에 40여 호가 되였으니 40여 세대의 일할 수 있는 노동력들은 다 우리 집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보통 남정들은 윗목에 앉아 담배를 피웠고 여인들은 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였으며 처녀 총각들은 마당켠이나 부뚜막이 있는데 앉았다. 처녀들은 코바늘 뜨개를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담배연기가 꽉 찬 집안에서 회의를 두 시간 좌우 씩 하였다. 회의 때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네 마실을 나가시고 언니와 오빠는 친구 집에 놀러가고 어려서 어디도 갈수 없었던 나와 동생들은 윗간에서 또는 아랫간에서 졸다가 되는대로 엎뎌 자군 하였다. 회의가 끝날 때면 저녁에 밥을 하면서 덥혀놓은 온돌이 거의 다 식은 데다 집안의 공기가 너무 혼탁해서 겨울날의 마당 문을 열고 공기를 한참씩 바꾸지 않으면 안 되였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다 간 다음 썰렁해진 집안을 다시 거두면서 푸념을 하였다. 우리 집만 집인가. 한번쯤은 다른 집에 가서 회의를 해도 안 되는가.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는 가고 말이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없으시었다. 다른 집에서 하면 그 집 식솔들이 우리가 겪는 고생을 겪어야 할 건 뻔한 일이니 말이다. 또 우리 집처럼 큰 집도 드물었거니와 자기 집에서 회의를 해도 된다고 집을 선뜻 내놓을 사람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현성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이런 고생은 겪지 않게 되였다. 후에 생산대가 무너지고 도거리를 하면서 이런 회의도 아마 없어진 것 같다.


생활이 푼푼하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 오빠 언니는 집 살림을 돕느라고 초중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고중을 다니고 대학시험까지 보게 되였다. 그런데 첫 대학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대학교는 가고 싶은데 시험에서 미끄럼을 탔으니 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려운 생활형편을 뻔히 알면서 한해 더 해보겠다는 말을 하자니 차마 입 밖에 번질 수가 없었다. 기실은 고중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만. 새 학기가 곧 닥쳐오게 되자 나는 집에 들어 누워 끙끙 앓기만 하였다. 나의 속심을 안 아버지는 저녁에 나를 불러놓고 말을 하시였다. ‘다시 한해 더 해볼 생각이 있니?’ 나는 겨우 입속말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 나와 같이 하구에 가자. 외삼촌 집에 가서 어떻게 방법을 대보자.’ 농촌에서 8월은 제일 바쁜 고비였다. 일 년 농사가 이제 막 수확하게 되지만 전해 지은 농사의 밑천을 거의 부려먹은 때였다. 진짜 보릿고개였다. 그런데 재수하자면 500원이란 재수비를 내야 했다. 이 돈이 그때 우리 집에선 엄청난 액수여서 어디가 변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때 외삼촌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임장에서 책임자 직을 맡고 있었다. 우리 가문에서 유일한 봉급쟁이였다. 그래서 외삼촌 집에 가보기로 한 것 같았다. 외삼촌에게 돈이 없다하더라도 봉급쟁이들이 모여 사는 임장에서 삼촌이 변통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아버지를 따라 하구에 가는 길에 나섰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아 도보로 가지 않으면 안 되였다. 우리 집에서 삼촌네 집까지는 거의 60여리가 되였다. 8월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우리는 아침 6시에 길을 떠났다. 10시가 넘자 맥이 빠진데다가 지쳐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며 따가운 땡볕 때문에 목에서는 겻불내가 확확 났다. 성큼성큼 걷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기란 정말 너무너무 힘에 겨웠다. (지금 생각하면 내 평생에 이런 길을 다시 걸을 기회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내가 참 대견스럽다. 어떻게 60여리나 되는 길을 걸었을 가. 지금 애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먼 노정이었다.) 한마을을 지나면 다음 마을이 빠끔히 보이는데 저곳인가 하면 아버지는 아니시란다. 가다가 참외막도 있고 수박밭도 있었다. 그러나 손에 단돈 한 푼 쥐지 않은 나는 그런 것을 먹으려니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한 동네를 지나면서 한족 집에 들려 물 한 모금씩 얻어 마이면 고작이었다. 그 때 앞에서 씨엉씨엉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혼자 가셔도 될 일을 왜 나까지 따라 나서게 해서 이런 고생을 겪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불만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공부하려 했기에 떠난 이 길이였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공부하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그때 나는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지 아버지의 고생쯤은 그때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아버지도 피와 살로 된 사람일진대 그 혹독한 땡볕에서 걸으시는 그이신들 왜 갈증이 나지 않고 힘들지 않았으랴. 하지만 그때 아버지가 나보고 ‘많이 힘들지. 바쁘더라도 곧 도착하게 되니까 참아라.’고 격려했지만 나는 ‘아버지도 힘들지요.’ 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겪는 고생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아버지이기에 돈을 변통해야 되고 60여리 길을 땡볕에서 걸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세상에 ‘응당 그래야 되는 것이 없고’ 각자가 생각해서 하기에 달렸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때 변통했던 500원으로 다시 재수할 수 있었고 나중에 대학까지 다니게 되였으며 지금은 육체적 노동에서 해탈되어 봉급을 타는 공무원으로 되였다. (그때 우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농촌에 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랑 우리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면 촌에서 한평생 소 궁둥이를 때리겠는가고 하였다.) 땡볕에서 걷던 그 한나절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 단돈 500원만이 아니었다. 그때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백번도 더 하게 되였다. 그런데 지금도 아버지가 그때 왜서 나까지 데리구 외삼촌 집에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혼자 가시더라도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감사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츰(이내) 결혼을 하게 되였다. 남편은 대학생이 아니고 제대군인이었다. 우리 두 집 부모님들은 아래 윗동네에서 살면서 서로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남편네 집 생활형편을 보면 동네에서 손꼽히게 잘 살았다. 내가 우리 둘의 관계가 이젠 부모님들도 알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결혼을 하련다고 말을 꺼냈다. 그때 아버지는 담배만 태우시면서 한참동안 말이 없으시었다. 아마도 내가 여태까지 겪은 돈고생 때문에 사람보다도 돈을 선택한 것이 아닐 가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하신 한마디 말씀이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돈고생 하기보다 마음 고생하기가 더 어렵네라.’ 였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알만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단순했던 나는 남편의 이런저런 남들이 알고 있는 그런 결함들을 보아내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렇다면 아무 두려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부모님들께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생활이란 것이 다 생각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후 이런 저런 곡절을 겪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시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8월의 땡볕을 걸음처럼 힘겨워도 지금까지 하나만을 위하여 즉 내 가정을 위하여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 많던 식솔도 하나하나 줄기 시작하더니 큰 집에 아버지와 어머니만 남게 되였다. 연세가 드신 아버지는 손군들을 그렇게도 귀여워하시었다. 오빠네 아이들은 할머니네 집에 놀러오면 돌아갈 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 잘 때면 할아버지의 팔을 베고 잤다. 큰 조카애는 두 살적에 할아버지의 발자국소리까지 분별해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실 때면 발자국소리만 듣고도 할아버지가 오시는 줄 알았다. 젊어서 자식을 귀여워해주지 못했던 것을 손군들에게 깡그리 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렇게도 많아 철철 차고 넘치였으며 무조건적이었다. 우리 딸애는 외할아버지의 볼에 뽀뽀를 해라 하면 수염이 많다고 질색해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허허, 고놈 계집애’ 하며 그래도 귀엽다 하신다. 딸애는 모를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그 애를 질투하는지를, 어릴 때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한 번도 뽀뽀를 못해봤기 때문에. 너무도 무서워서.



연세가 많아지면서 아버지도 이런저런 병을 앓으셨다. 당뇨병 때문에 아버지는 그렇게 즐기시던 술도 못 마시게 되였다. 그리고 식사 전마다 혈당을 내리게 하는 주사를 맞곤 하시였다. 밥 먹듯이 매일 반복하는 그 일이 얼마나 지겨웠으랴.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언제 한 번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걱정하고 근심스러워 할까봐. 명절이 되여 우리 형제들은 엄마네 집에 모이게 되였다. 아버지는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가마에 앉히고 장작불을 땠다. 장작을 때면 따로 불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어쩌다 한데 모였는데 앉아서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고 불은 아버지가 보겠다고 하시였다. 밖에 나가 장작 한 아름을 안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갑자기 기운이 빠지시었던지 장작을 부리워 놓고 구들 모서리에 쭈그리고 눕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치시여 혈당이 불시에 내려간 것 같았다. 우리 들이 깜짝 놀라 허둥대며 설탕물을 대접하고 의사를 부르려 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조금 누워있으면 괜찮으시다고 하시며 괜히 너희들을 놀라게 했구나 하며 도리여 미안해 하시였다. 여직껏 자기 살림을 하느라 부모님들을 잘 돌봐드리지 못한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가 힘겨워 하는 것을 보자 죄책감에 부모님 앞에서 골을 들 수 없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들이려고 돈이라도 내놓으면 아버지는 아직 너희들의 방조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제 힘으로 살수 있다면서 자식들의 내놓은 돈을 받아쓰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우리 딸들에게 시집살이를 잘하라고 천만번 당부하시였다. 늙은이들의 앞날이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많지 못할 것이기에 시부모님들을 절대 노엽히지 말라신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되여 뵈러 가면 그리도 반가와 하시였다. 그리고 떠날 때면 언제 다시 오는가며 자꾸 기다리신다. 아마도 연세가 드시면서 외롭고 사람이 그리운가본다. 강냉이 철이면 풋강냉이를 먹지 못할 가봐 걱정하시였고 밭에 심은 감자를  햇감자를 맛보라고 보내 주시였고 가을이면 고추를 말리우고 물고기새끼들을 말리워서 자식들에게 보내주시느라 명심이 대단하시였다. 전에는 부모님 뵈러 갔다가 아침 버스로 떠날 때면 문밖까지 배웅하시던 아버지는 그 번은 마지막인줄 앓으셨던지 버스 역까지 나오시어서 버스가 떠나는데도 들어가시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서 있으시는 것이였다. 아버지가 불시에 위급하다기에 만사를 제쳐놓고 두 시간 만에 달려갔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뇌출혈이 와서 링겔을 건채 두 시간도 안 되시여 자식들도 보지 못하시고 급급히 세상을 떠나시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손은 부드러운 그대로였다. 불러도 못 돌아오실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부르며 내 기억 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에 대고 부벼 보았다. 떠날 준비를 하시였는지 수염도 반반하게 깎으시었다. 아버지, 이렇게 급급히 떠나시다니요. 아직 자식들의 효성도 받아보시지 못하시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아픈 기억이 새롭다. 장작을 들고 들어오셔서 지쳐서 구들 모서리에 쭈그리고 누우셨던 그 모습, 버스가 떠났는데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으시던 그 모습이 수시로 가슴이 저리게 떠오른다. 돈 고생보다 마음 고생하기가 더 어렵네라. 그러시면서 이 딸에게 절대적으로 사랑을 선택할 권리를 주시였던 아버지. 이 딸이 그렇게 미더우셨을가. 아니면 그런 도리를 살면서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셨을가. 아마도 이 딸이 쓸데없는 속을 태우지 말고 편하게 살 수 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인생을 살면서 땡볕을 걸을 때처럼 힘겹고 지겹고 답답한 순간들이 많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나는 그 길을 걸어냈다. 그래서 사는 것이 힘들 때가 많지만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아버지에게 미안한 자식이 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도 내가 어릴 때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하여 자애로우시도 않으시고 자상하시지도 않으시며 그저 무서운 그런 존재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다시는 없는 것으로 하여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지금 생전이라시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는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