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 : 사라져가는 빨래방치방치 : 천광일(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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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74회 작성일 10-04-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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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빨래방치방치: 방망이의 평안도 방언소리
가작│천광일(중국)
봄이라 출렁 해란강 풀리고
마을의 처녀들 빨래를 하네
옥순아 웬 빨래를 그리 깨끗이 빠냐
옳지 알았소 뒷동네 그 총각이
어화라 방치야 지화자 방치야
흥겨웁게 노래하자 빨래방치야
강변의 실버들 멋들어 졌어도
살뜰한 처녀마음 더 아름답네.
비할데 없이 흥겹고 정겨운 우리 민족의 얼이 폭 배인 노래이다. 이 노래는 60년대, 70년대에 연변의 시가지, 시골 마을 곳곳에서 처녀 총각들이 사랑을 동경 하면서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이곳 연변은 사계절이 분명한 곳이다. 그런 환경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양상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찾아오니 쌀쌀하던 날씨가 따스해지면서 실외 활동이 잦아지는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활기 띤 모습들이 어려 있다.
휴식일을 맞아서 한주일간 사업 중에 피로해진 머리를 쉬우면서 시원한 공기도 마시고 오래도록 일터를 지켜가며 무거워진 몸을 움직이며 운동도 할 겸 백양나무와 버들나무가 늘어선 강변 제방뚝으로 찾아 갔다. 비록 따스한 늦봄이라고는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은 아직은 퍽 찬듯한데 강가에 놓인 넓적한 빨랫돌을 마주하고 한 여인이 빨래 방치를 휘두르며 빨래를 하는 모습이 바라보이는 중에《척, 척, 척》하는 절주있는 방치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그림 같은 그 정경을 바라보노라니 고향 마을에 살던 때에 날씨기 따스해지면서 마을 앞 도랑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동네의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저마다 빨래 함지를 머리에 이고 냇가에 찾아와서는 널찍한 빨랫돌위에 옷견지들을 올려놓고 빨래 방치를 휘두르면서 찬물에 적셔지는 맨손이 시린 줄도 잊은 듯이 왁자그레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흥겨웁게 빨래를 하던 정경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지금은 시가지에 사는 가정들은 두말없고 시골 마을에서 사는 집들에서도 세탁기를 갖추어놓고 콸콸 흐르는 수돗물을 쓰면서 옷견지는 물론 이불 안팍같은 큰 빨래감도 집에서 마음대로 씻을 수 있으며 또 생활이 많이 펴이면서 예전처럼 판나서 덧기운 묵직한 옷들이 없이 성한 옷견지들이기에 씻기도 헐하다. 더구나 지금은 세척제, 가루비누, 빨래비누들이 구전하여 부녀들은 힘든 일에서 많은 해탈을 받고 있는 좋은 세월이지만 빨래 방치는 차츰 집구석을 지키는 신세가 되였으며 강가의 빨래 방치소리도 차츰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가루비누는 원체 없고 빨래 비누도 귀하여 통장제를 하던 세월인지라 마음대로 쓰지 못하였기에 옷견지들을 씻을 때에는 손으로 부비고 방치로 두드리여서 때물을 빼면서 억지 빨래를 하여야했다. 그러다보니 집집마다 방치가 있는 것은 물론 어떤 집들에는 여러 개씩 갖추어져 있었다.
낙후하고 가난하게 살던 그 세월에는 이불 하나로 여럿이 덮고 자야하였고 입는 옷들도 일할 때나 나들이 할 때도 춘하추동 한 벌 옷으로 행세를 하다 보니 판나면 깁고 덧기워 가죽옷마냥 두터웠고 그마저 자주 갈아입지 못하여 때가 푹 배인 옷들을 씻으려면 참말로 힘들었다. 더욱이나 수돗물까지 없다보니 때시걱에 쓰는 물도 부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드레박 우물물을 힘겹게 길어먹는 형편에 물을 왈랑왈랑 마음대로 쓸 수 없었기에 아낙네들과 처녀들은 봄이 오면 한 동삼을 내처 입던 진때가 얼룩진 옷견지들과 뜯은 이불 안팍들을 빨래 함지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강가에 이르러서는 빨랫돌 위에 올려놓고 방치로 자근자근 두드리고 맑은 물에 헹구고 또 헹구어서 묵은 때를 쭉 빼여 널어 말리우면 진때 묻은 옷견지들은 알뜰한 여성들의 손을 걸치고 나면 둔갑이나 한 듯이 말쑥하고 깨끗하게 변해진다.
비누가 귀한 그때는 빨래를 할 것이 있으면 어머니는 낡은 버들광주리를 찾아서는 볏짚을 엷게 한 벌 깔고 그 위에 양사보를 펴고 부엌에서 파낸 싸리 나뭇재를 좀 두텁게 편 다음 재광주리를 큼직한 토기 물그릇위에 올려놓고 물을 떠놓으면 노르스름한 재물이 흘러내리는 데 그물에 빨랫감들을 담궈 밤을 재운다.
이튿날 되면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손수 깎아 만든 널찍한 피나무 함지에 빨래 견지들을 담고 빨래방치까지 올려놓은 다음 머리에 이고서 나의 손을 이끌고 마을 뒤 오솔길을 걸어 산골짜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시냇가에 찾아가서 반듯한 빨래돌 곁에 함지를 내려놓고는 빨래 견지들을 물에 헹구면서 돌 판에 올려놓고 방치질을 하면 《척, 척, 척》소리가 절주 있게 들려오는데 어머니의 빨래를 하는 모습에 그 소리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들려왔다.
어머니는 차디찬 시냇물에 맨손이 벌겋게 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깨끗이 씻어진 이불안을 물을 꽉 쥐여 짜서는 앞마당에 매여 있는 빨랫줄에 널어서 햇빛에 며칠 동안 바래우면 눈가루를 뿌린 듯이 새하야 케 변해 진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불 안팎에 멀건 죽을 쑤어서 만든 풀을 먹여서는 방치돌 위에 올려놓고 툭탁툭탁 쌍방치질하여 자근자근 두드린 다음 헝겊 보에 싸두었다가 이불을 꾸며놓으면 주름살 없이 깨끗한 이불이 되는데 그 이불을 덮고 잠을 잘 때면 포근하고 잠도 잘 온다. 그토록 어머니는 한평생을 집식구들의 살림에 모든 심혈을 다 바쳐 우리 여섯 남매를 키우면서 아버지가 정성들여 만든 빨래 방치로 낡은 옷이라도 남의 자식들보다 깨끗이 챙겨 입히고자 모든 정성을 바쳐오셨다.
내가 시대의 흐름 속에 사라져가는 빨래방치를 그토록 선호하고 고집하는 데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굴 닮았는지는 몰라도 늦되는 축이여서 사춘기도 늦게 찾아왔다 그래서인지 일찍이《셈이》드는 동년배 아이들은 소학교 때부터 얼뜨기 연애를 하노라고 계집애들 뒤를 쫓아다니면서 으시댔지만 나는 초중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와서 농사일을 하면서부터 늦되기 연애에 눈을 뜨게 되였다.
우리 동네에는 나와 함께 초중을 함께 다니던 나보다 한살위인 분옥이란 여자애가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한 반에 다니면서 때론 한 책상에 앉아서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때에는 그저 일개 계집애로 여겨왔지 그가 고왔던지 미웠던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것이 차츰 나이가 들면서 또 한 생산대에서 그들과 일 밭에도 함께 다니고 회의도 함께 참가하면서 차츰 여자 애들한테 호감을 갖게 되였고 여자애들과 친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처녀애들을 눈여겨 살펴보게 되였는데 올리 보고 내리 봐도 분옥이가 말수가 적고 키도 맞춤하며 동그스름한 얼굴에 쌍겹진 눈으로 사람을 대할 때마다 활짝 피는 해당화 마냥 웃는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로부터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아도 아름다워 보였고 하루만 못 보아도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일을 할 때나 회의 때면 그녀와 정작 가까워지게 되면 저절로 쑥스러워지고 문예선전대에서 함께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연출을 할 때에도 그녀의 가까이에 다가설 때면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군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원체 말수가 적고 활달하지 못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나는 사랑의 고백을 마음 한구석에 잠겨두고 안타까운 짝사랑만을 하였다.
마을 앞 논 물도랑 가에는 커다란 수양버들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해마다 도랑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동네의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옷견지들을 씻곤 하였는데 우리 집과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날도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때시걱이 아직 이르기에 밭일을 하면서 흙이 묻어 어지러워진 옷을 소래에 담아가지고 물도랑으로 찾아갔는데 멀리서 보니 누군가 빨래를 하고 있기에 남자가 빨래하려 다닌다고 비웃음이라도 살까봐 잠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여 다가가 보니 마침 분옥이가 빨래를 한창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무척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소래를 살그머니 내려놓으면서
“빨래를 하니?”
“응 그래, 너는 여기에 뭘 하려 왔지?”
“저기, 일하고 돌아와서 시간이 좀 있기에 옷을 좀 씻으려고…….”
라고 나는 조금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분옥이는 가볍게 웃으며
“새파란 젊은 남자가 빨래를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웃으면 어쩔라구?” 하였다.
나는 그 말에 웬간이 반발심이 생겨나며
“쳇 남자들은 왜서 못 한다더냐.”
하며 팔을 거두고 옷견지를 도랑물에 적시였다.
“그러지 말고 내가 씻어줄게 그저 구경이나 하려무나.”
라고 하며 분옥이는 소래를 자기 앞으로 당겨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여 “이럼 미안해서 어쩌지?” 라고 하니,
“미안하긴 뭘 동생의 옷을 누나가 씻어주는 것이 응당한 일이지.”
나는 그의 허물없이 하는 대답에서 저도 모르게 담이 커지면서
“그래도 처녀가 동네 총각의 빨래를 해준다고 놀려주면 어쩌려고.”
그녀는 “내가 마음에 내켜 하는데 남이야 무어라든 무슨 대수냐” 라고 약간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나는 제꺽 “네가 한평생을 나의 빨래를 해주면 얼마나 좋겠니.” 라고 하였더니 분옥이는 홍조가 어린 새무룩이 웃음 띤 얼굴로 말없이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분옥이가 빨래를 마칠 때까지 빨래터에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옥이는 동생 여럿이다보니 자주 빨래하려 다녔는데 그날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나는 일터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아무리 피곤하여도 또 날이 저물어도 그 빨래방치소리가 들리면 모든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 듯이 어김없이 빨래터를 찾아가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싹을 틔워가면서 일터에서, 회의모임에서 만나면 반갑고 헤여 지면 그리워하면서 우리들의 사랑노래 엮어갔다.
풍운조화는 가늠하기 어렵듯이 사람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분옥이는 친척의 소개와 부모들의 주장으로 시가지의 노동자한테로 시집을 가게 되였다.
그날 신랑과 함께 길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는 사랑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자신을 통탄하였으며 노동자와 농민을 차별시한 세상을 저주하였으며 시골 농부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그 뒤로 내가 사회에 진출하고 시가지 처녀와 결혼을 하여 시내에 와서 새 살림을 꾸리게 되였는데 어머니는 우리에게 빨래방치 하나를 넘겨주면서 항상 부지런하고 깨끗이 옷견지들을 씻어 입으면서 참답게 살라고 부탁 하셨다. 우리는 그 방치로 옷견지들을 씻으면서 두 아이를 자래웠고 셋집에서 단칸집으로 단칸집에서 아파트로 옮겨 살면서 그 방치는 언제나 잊지 않았는데 비록 다슬고 또 다슬었지만 화장실 구석에 놓여있는 그 방치를 볼 때면 어머님이 집안 어디엔가 계시는듯한 친절한 느낌이 갈마든다.
내가 고향을 떠나서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 고향마을을 찾아가 보면 도랑 옆 수양버들은 온데간데없고 옛 빨래터도 황폐해지는 마을의 사연을 하소연하듯이 풀만 자라서 그토록 정겨웁던 빨래방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글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 변혁으로 빨래방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단란하게 모여 살던 조선족 마을들에서 너도나도 외국으로, 내지로 돈벌이를 떠나고 시내로 진출하면서 마을에는 처녀라야 금싸락같이 귀하고 그나마 인간 동네를 생기 넘치게 이끌어 주던 적지 않은 아낙네들마저도 돈벌이를 떠났으며 바자굽을 오가면서 아래윗집 문전 나들이를 하며 조금이나마 동네에 생기를 안겨주던 할매들마저도 자식 따라 시내에 옮겨 살다보니 동네 골목에 뜸하게 보이는 사람들이라야 삶의 희망을 저버리고 인생을 하느님께 맡겨 허송세월을 살아가는 덜먹 총각들과 친인들을 타향에 떠나보내고 매일마다 불쌍한 술로 허황한 가슴을 달래는 남정들만이 하늘을 쳐다보며 울바자굽만 지키고 있는 식어가는 동네에 그 누가 빨래방치를 휘두르겠는가?
그래도 나는 고향을 다녀올 때 마다 옛 빨래터를 바라보노라니 기억속의 옛일들이 떠오르며 마음 한 구석에 잠겨있던 처녀의 빨래방치 소리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귀전에 울려오면서 언젠가는 고향 마을에 또다시 정다운 빨래방치 소리가 울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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