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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스크 : 중국/리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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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619회 작성일 10-04-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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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마스크를 끼고 싶어 산 것은 아니다. 괜스레, 그런 건 뭘 하러? 장농에서 케케묵은 옛 기억 끄집어 내는 것 같아 나는 웃어 버렸다. 윤 사장님은 막무가내이다. 안전이 제일이라며 손수 하나 골라 준다. 방진 마스크, 황사대비용 마스크, 일반 마스크 해서 종류도 얼마 되는지 모른다. 값도 엄청나다. 5만 원 더 주고 유한뽀삐 브랜드 하나 샀다. 뭉툭한 돼지 주둥이처럼 앞이 불거진 것. 웃기네. 내 입도 돼지 닮아 가겠어요. 하니 윤 사장님은 좋네 그려. 한다. 좋다마다? 유한뽀삐의 사명은 대한민국 사스 예방은 우리가 진행합니다이다. 사스? 웃기네. 서울 사람들은 호들갑쟁이다. 사스 때문에 갈 곳도 못 가고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다. 덩치 큰 윤 사장님만 봐도 그렇다. 중국 운남에서 목재를 들여와 제조업을 가동하고 있지만 이미 반 금액 치른 자재마저 수입할 엄두를 못 낸다. 손수 나가 검사를 해야 하는데 두렵다고 한다. 잘난 것, 버렸으면 버렸지 사지()를 왜 가요? 통이 크게 이천 만원 날릴지언정, 그렇단 말이다. 뉴스를 봐도 대외수출입에 매달린 중소기업의 피해가 극심했다. 인구통계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나라, 서울인구 중 몇몇 죽는 데 불과하는 프로에 웬 소란인가?
유행입니다. 윤 사장님이 의아해 묻는다. 유행이라니, 김치? 나는 푹 했다. 북경에서 김치가 크게 유행이란다. 김치 먹는 민족이 걸린 사례가 없다. 윤 사장님은 손수 포장김치 한 통 챙겨 왔다. 법무부에서 한 달 더 연장해 준다는 데두? 하고 그냥 말린다. 하긴 그래, 그 아가씨 때문이지? 허, 아가씨란 단어도 좀 그렇다. 동창이란 데도 아가씨는 웬 뚱딴지 같은?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기에 생긴 유행어일 것이다. 그럼 사스는? 역시, 나는 굳이 설명은 안 했다.
인천공항에 나갈 때까지 나는 마스크를 끼지 않았다. 공항 버스는 적막감을 실어 왔다. 코를 고는 것 같은 동음, 새벽은 아직 깨어 있지 않고 있고, 월미도 부근 바다의 입김이 요사하다. 가시도()를 떨구며 갑갑하게 엉켜 있다. 희미하고 거뭇하다. 설키고 뒤틀리는, 마치 어떤 음흉이 고요히 나부끼는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정리가 되어 갔다. 나란 사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연변에서 이 반도, 고국으로 날아왔다. 서울 구석구석 헤집고 다녔고 한민족 자본주의를 알고 감각했다. 그 속에 윤 사장님도 있다. 우린 쪼끼쪼끼로 드나들며 흑맥주를 마셨고 친구가 되었다. 고국의 정은 깊다. 활기와 밝음과 빠른 절주는 나의 뱃살마저 까주었다. 해도 나는 가야 한다. 왜서?
안개가 일렁인다. 느슨한 빛이 그 속을 헤집는다. 바다의 입김이 조금씩 끓기 시작한다. 뽀얀 연기 날리는 것 같은, 이제 날이 활짝 개일 징조건만 내 가슴은 갑자기 답답해났다. 주머니에 넣은 돼지 주둥이가 손에 맞히어 왔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섬세한 촉감, 그것이 안개와 나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웃기네, 이건 말도 안 돼!
나의 여 동창생의 얼굴이 확실하게 떠오른 것은 그 찰나, 밝고 야한 정열이 까만 눈과 면부에서 발산한다. 어깨에 닿는 머리채가 치렁거린다. 열일곱, 아니 그 전인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쭉 한 반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늘 빨개 다녔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머리에 김이 문문 났다. 잘 웃고 잘 쏘다니고 별칭은 벌개, 곁에 오면 벌써 몸의 열기가 느껴진다. 그에 반해 나는 키만 껑충했지 약다리, 늘 서리맞은 코스모스 같았다. 지나가는 감기는 다 했다. 코 질질 흘리며 콜록거렸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마스크를 입에 걸고 다녀야 했다. 마스크란 별명은 그래 얻었다. 야, 마스크야. 갑갑하지도 않니, 넌 언제 여물겠어? 그녀는 내 마스크를 잡아당겨 놓았다. 콜록콜록, 나는 기침이 터졌다. 에구에구, 칠십 먹은 영감이 다 됐네. 그녀가 깔깔거리었다.
그 때문인가? 내가 누구인가고? 호호, 너 마스크 영감 맞지, 응? 하고 전화 넣어오자 나는 기억의 아득한 늪에서 마침내 싱싱한 버들치 하나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영자? 최영자? 아아, 28년만에 처음 갖는 통화이다. 그녀는 송료평원에서, 나는 서울에서 문득 접속을 했던 것이다. 우연히 동창 누구누구를 만나 내 소식 알게 되었다고. 중국은 땅이 너무 넓고 아득해서 만나기 힘들지만 서울은 반도이니 소식 알기 쉽더라고. 누구누구도 서울 가 있지 않느냐? 걔가 내 서울 핸드폰 번호 알려 주었노라 한다. 우리는 반 시간 좋이 진한 회포를 풀었다. 얼마 전에 그녀네 집은 광동으로 이사를 갔고, 이 며칠 사이 심양을 거쳐 연길에 가려 한다고 했다. 거래하는 손님이 있어서그녀가 주저하듯 말했다. 옷 장사하는 것 같다. 장사꾼? 어쩜 그녀의 기질과 어울려 보인다. 네가 연변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아쉬워했다. 나는 이 며칠 사이 돌아가기로 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심양 정거장에서의 재회를 약속했다. 왜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썩 밝지 못했다. 전과는 이미지가 완연 틀렸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아닌가?
너 아직도 마스크를 끼니?
그녀가 비로소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 웃기는? 비상시기가 아니냐?
나도 거뿐히 농을 받았다.
그럼 마스크야, 그 때 만나자.
마스크? 손에 닿는 돼지 주둥이의 촉감이 유난히 포근해난다.
여객기는 텅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손님이 반의 반도 안 찼다.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몸이 약간 젖혀진다. 무의식중에 마스크를 찾아 꼈다. 주위 손님 대부분이 마스크를 챙기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어쩜 소담한 옛 기억 한 번 더듬고 싶어서인지 몰랐다. 둘이 각별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나, 그런 기억은 소중하다. 그녀네가 이사 가는 바람에 고등학교 1학년 때 갈라진 후 연락 한 번 갖지 못했지만, 그녀를 위한 기억이 아니고, 느닷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될 계기가 생겼다 할까? 그런 일이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막 쏟아져 내리는데, 난데없는 돌멩이 하나 살같이 날아들었다. 초월하던 차의 뒷바퀴에서 튕기어 온, 유리가 폴싹 내려앉았다. 생활에서도 어느 날, 그런 돌멩이 하나 날아들 것 같은 예감을 평소에 나는 하고 있었다. 최영자가 그런 돌멩이란 말은 아니나, 나는 뭔가 바라고 있었다. 분명히.
면사 같은 구름과 하늘같이 착각이 드는 넓고 푸른 바다, 드디어 광막한 땅과 점점의 인가가 어렴풋이 알려 왔다. 송료평원 변두리이었다. 대학 졸업을 하고 버스로 그 평원 가운데를 지난 적이 있었다. 평야는 끝간데 없이 펼쳐지고, 몇 시간을 달려도 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키가 머리 위까지 자란 옥수수 바다가 쏴아, 쏴, 물이랑 인다. 뽀얀 먼지가 뜨거운 햇빛에 불붙고 있는데 까맣게 탄 애들이 발가벗고 뛰어다니고 있다. 철령이란 곳 지나서야 나는 최영자의 고향이 이 곳 어디쯤이란 기억을 했다. 그녀네 부친은 딸애를 조선애로 만들겠다고 우리가 사는 할머니네 집에 보내 공부시켰던 것이다. 이런 곳에 조선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녀네 집이라니? 경북 예천 단북골에서 건너온 그녀 조부가 처음 뿌리 내린 곳, 옥수수 농사로 평지만 바라보며 삼 대째 부지런히 터전 닦아 왔을 아무도 모르는 삶의 이야기. 너무나 멀고 아뜩한 유리 평면이 펼쳐진 것 같고, 어떤 돌멩이가 날아와야 한 번 폴싹 깨 주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주제할 수 없는 낯섬과 깊이로 펼쳐진 평면에서 우리의 삶은 덧없이 진해 가는지 모른다. 이제 이 땅은 사스의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정말 모를 소리, 서울 매체들은 이제 날마다 누가 보지 않을까 봐 숨 떨어지는 소리내는 것 버릇 되었으니 말이다.
비행기 착륙시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감아 버렸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허, 이게 뭔가? 역전에서 나는 최영자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열차에 올랐다. 맹랑한 에피소드 같다. 혹 약속 시간 잘못 기억한 것은 아닐까? 나를 마중한 이는 미리 침대표를 사서 챙긴, 무순에 있는 삼십대의 한족 여자 쇼왕이었다. 연길 태생인데 후에 심양으로 시집갔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 나를 정거장 문까지 바래 주었다. 사스 차단한다고 더 이상 바래 주지 못하게 했다. 심양은 내가 잘 모르는 고장이다. 어릴 적에 한 번 왔다가 탑 위에 탱크가 있는 것 본 기억만 생생할뿐, 소련 홍군 해방 기념탑이었다. 왠지 지금 그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남 정거장 혹은 동 정거장에 있던가? 모르는 것 굳이 알 필요는 없다. 내가 묻지 않은 원인도 거기에 있다. 이를테면 최영자도 그렇다. 28년 전의 그녀는 알고 있으나 28년 후의 여자는 알 수 없다.
그녀는 내 생활의 돌멩이는 못 된다. 괜히 쇼왕이 좀 쟁그랑거려 왔었다.
오빠가 서울에서 첩첩 포위망을 뚫고 안전하게 귀국했는데 축하, 동북 빠 이갈로 한잔 깐버이(건배) 합시다!
흰 술을 꽤 큰 유리컵에 철철 부어 든다. 속이 찡 하다 못해 타는 것 같다. 첩첩 포위망? 나는 그녀를 안고 돌았다. 술상에 노래기계까지 갖추어 놓는 것이 이 곳의 영업방식이다. 첨잔에 첨잔을 거듭하듯, 서울은 세세 콜콜 세분해 가지만, 이 곳은 버무려 가기 좋아한다. 그녀의 무지 큰 젖가슴도 내 뱃살에 버무려 오는 것 같다. 하긴 나는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이 땅과 이 곳의 풍토를 잘 안다. 사스? 쏘스도 두렵지 않다. 윤 사장님의 호의 뿌리친 것도 그래서이다.
공항 검역은 단조로우나 엄격했다. 사십여 명 되는 손님들이 차례로 레이저 측정기 앞에 서서 웬 괴물 같은, 기계의 빨간 눈알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요상한 꼴을 올려다보며 공손히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유순한 돼지 주둥이 입을 한 나는 공항에서 풍기는 어둡고 침침한 냄새에 약간 질려 있었다. 쌰 이거(그 아래), 샤 이거, 검역관의 중국어는 딱딱하고 생경했다. 어쨌거나 검사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꽤 오래 손님들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게 중남해에까지 번져 갔다. 북경시장이 해임되었다. 광주, 상해지구도 통제에 들어갔다. 하며 한족 여객들이 수근수근댔다. 문득 흰옷 입은 검역관이 뒤에서, 호우라(됐어요)! 소리쳤다. 몇몇이 박수를 쳤다. 침침하고 갑갑한 대청 안이 썰렁해 보인다. 정상 체온보다 높은 여객 한 분이라도 검출되면 어디론가 몽땅 실려 가서 보름 동안 관찰을 받아야 한다고, 사정 아는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며칠 전에도 그런 사례 있었는데 후에 관찰해 보니 환자는 감기라고 한다. 그저 일 아니네, 소문이 옳긴 옳은가 봐. 가만히 혀가 차진다. 첩첩 포위망이란 말이 옳다!
조금도, 머이썰이요(괜찮아요)!
시내 행 버스를 타자 쇼왕이 안위해 왔다. 중국말에 한국말 반반씩 섞으니 표현이 더 생경해난다. 그런 생경 속에 나름대로 살아가는 게 조선족이었다. 서글펐으나 약간 배포도 생겼었다.
시내로 빠진 길은 탁 트이었다. 길 곁에 제멋대로 자라는 초록의 풀빛과 원시적인 땅의 숨소리에서 어떤 자유와 포근함이 푹 젖어 왔다.
그런데 입성을 하니 마음에 약간 그늘이 져 갔다. 트럭과 승용차와 자전거와 사람이 무리지어 우마차까지 범벅을 이룬다. 백화점이나 상점, 슈퍼마켓, 식당 같은 곳은 썰렁하고 유리창에다는 흰 종이 검은 글씨로 본 점()은 이미 소독했음.이라고 줄줄이 써 붙이었다. 길에도 행인이 별로 없다. 흡사 어떤 지독한 유령이 이 도시 어디에 숨어 을씨년스런 바람을 풍기는 것 같았다.
니얜썰쩌멀라(당신 낯색이 왜 그래요)?
쇼왕이 내 손을 잡으며 마음놓으란다. 이렇게 동을 단다. 공항에 나를 마중하러 나온다니 애가 심양에는 절대 가지 말라 신신당부하더라고. 무순과 불과 한 시간 거리이나 심양은 공제지구에 속한다. 만약 부모가 심양에 가게 되면 학교에 보고해야 되고, 자식들도 일 주일간 집에 격리된다고 한다.
쌰쩌어텅(그저 못살게 굴어요.)!
그녀는 낯을 찡그렸다.
흠, 이러는 게 옳은 줄도 몰라!
뭐가 옳아요? 심양에 사스로 몇이 죽은 줄 알아요?.
몇이?
아직 죽은 놈은 없고 의심환자만 한 명이라나? 것도 내몽골에서 온 부녀래요.
거짓말, 거짓말이야! 
호, 내가 왜 거짓부리 해요? 절로 자길 못살게 구는 게 우리가 아닌감?
믿을 수 없어, 도무지!
이 때 나는 오히려 서울 방송을 믿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 나라도 투명해지고 깨끗해지고 밝아질는가? 식당이며, 노래방, 다방은 거의 문을 닫았고 그녀네 친척은 다리를 놓아 가만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츰 머리가 뗑 해났다. 눈에 충혈이 온 것 같다. 떠나오느라 바삐 서둔 탓이리라. 미묘하게 부딪쳐 오는 그녀의 젖가슴이 어떤 비상의 날개를 달아 준다. 푸른 옥수수 바다와 물이랑, 주제 할 수 없는 낯섬과 깊이로 펼쳐진 평면이 묘하게 출렁인다. 아아, 돌멩이는 없는가? 혹, 사스가 어떤 돌멩이라면 그것은 싫다! 나는 느닷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쇼왕, 시간 나면 놀러와요. 짧게 인사만 했었다.


나의 침대는 출입문과 가까운 아래층이었다. 맞은켠에는 웬 나그네가 마스크를 끼고 누워 있다. 열차는 벌써 출발한다. 돼지 주둥이가 답답했지만 벗을 마음이 없다. 곁에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차갑게 나를 쳐다보는 눈에 문득 반감이 든 것이다. 키가 뭉툭한 중년의 사내는 어지간히 배가 나왔고 치머리를 하고 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다. 왠지 불쾌한 느낌을 준다. 나는 짐표가 붙은 세 개의 짐을 아무렇게나 처치해 두었다. 은근히 반발이 생긴 것이다. 그 때까지 나는 이 나그네가 나의 돌멩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야기는 정말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몸이 물먹은 솜같이 나른해났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 짐 세 개를 혼자서 끌고 메고 층계를 오르내리느라 죽을 고생 다 했으니, 그 놈의 사스 때문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옮겨 차장을 향해 벌렁 누웠다. 곁의 손님과 마주한 꼴이 되었으나 상관 안 하기로 했다. 발에서 고린내가 났다. 손님이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한국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환경에 따라 저질이 되다니?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중국이 편하고 좋다!눈앞에서 퍼뜩퍼뜩 풍경이 바뀌어 갔다. 간밤의 빗물에 푹 젖은 넓은 평원과 평원, 끝간데가 없는 요원한 꿈 같은 것.아아, 밝고 야한 정열의 까만 눈과 발그스레한 면부, 후끈후끈 풍기는 체취. 그녀와의 약속이 깨진 것 조금 서운하다. 혹 일이 생겨 지체되었거나 먼저 갔거나 했을 것 같다. 주소를 알고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오겠지! 갑자기 나는 웬 기척에 눈을 떴다. 나와 마주 누운 손님이 벽을 향해 뭔가 켰다 죽이었다 하는 소리. 손전지 같은 작은 물체에서 발간 불빛이 짧게 비쳐 나오고 있었다. 나를 의식했든지 손님은 동작을 멈춘다. 애들같이 무슨 장난을? 이 때 손님이 불시에 나의 물건에다 대고 또 몇 번 비쳐왔다.
손님은 어디서 오는 길이죠?
나그네가 문득 중국말로 물어 왔다.
보다시피 심양에서 올랐는데요. 손전지인가요?
예.
마스크 탓인지 목이 쉰 것 같다. 발음이 똑똑치 않았다. 무의식적인 듯 다시금 내 몸에 불빛을 비춘다. 레이저 불빛 같은, 가는 빛줄기이다. 레이저? 아, 그래, 나는 빨간 눈알이 생각났다. 공항에서 본, 나를 시험대에 올려 놓고 측정하던 요망한 레이저 눈.
저 물건에 달린 표를 보니 북경에서 온 것 같은데요?
그에 나는 참말 그렇구나, 했다. 나를 의심해요? 저것도 레이저 체온 측정기? 웃긴다, 정말! 영어는 까막눈인가 봐, 코리언이란 글도 읽을 줄 모르니! 그와 한 번 게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그래요, 북경에서 부친 짐을 찾아 다시 떠나는 길이지요!
그 곳은, 아주 심하다던데?
그야, 거긴 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항주.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가, 북경의 상황이? 아니면 내가? 이 때 갑자기 기침이 터졌다. 목에 무엇이 막히는 것 같다. 연속 가슴을 쓰다듬는 동작이 나갔다.
감기인가요?
감긴 아닌데, 모르겠어요.
어정말 괜찮겠어요?
나는 짐짓 대답을 안 하고 눈을 감았다. 재미있어 죽겠다. 껄껄 웃으며 발버둥질하며 막 지랄하고 싶다! 빨간 불빛이 내 몸에 몇 번이고 번쩍거려 왔다. 거기에 측정이 된 체온은 얼마일까? 콜록콜록, 눈에서 눈물이 슴배이어 나온다. 아아, 또 터진다. 기침도 사스 증상과 연관 있다 했던가? 그건 전혀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저 의심 많고 비열한 놈만은 혼내 주고 싶다!
갑자기 찬바람이 훅 불어 들어왔다.
쩌머후이썰(웬일이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쿵치뿌호우(공기가 나빠 그래요)!
지랄하네.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통풍을 하는 것도 예방에 좋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건 너무 아이러니하다. 나는 일어나 유리창문을 되닫았다.
우리 북경에서는 찬바람 맞는 것 꺼려해요.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 그래도 통풍이 꼭 필요하대요.
나는 갑갑해요!
혹시 열 나는 것 아닙니까?
조금 아마도!
나는 몸을 휘청거렸다. 피곤한 탓일까? 눈앞이 어질거려 온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으며 비칠거렸었다. 한쪽 손에 그의 살이 뭉클 짚어졌다. 허, 사내 녀석이?
아, 손님, 웬일이세요? 복무원!
그 사람이 기겁을 해서 차장을 불렀다. 나는 손사래질하고 일어났다. 그도 무언가 느낀 듯 마스크를 낀 입에 손을 가져다 댄다.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자기도 어김없이 잡혀 들어갈 것이다. 이만 하면 됐다!
불현듯, 나는 자기가 싫어졌다. 웬 꼭두각시놀음이지? 돼지 주둥이를 바로잡고 자리에 가 누웠다. 그가 또 창문을 열어 놓았지만, 이번에는 관계치 않기로 했다. 정말 잠이 왔다. 공항, 쇼왕의 그림자가 뇌리에 빠르게 스친다. 동창생의 까마아득한, 변이 된 얼굴은 알 수가 없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잃어 가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쩜 그것이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하나의 수직과도 같은 평면을 만들어 가는지 모른다. 평소에 다들 그 수직을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한밤중 떠드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왜 안 된다고 그래요, 돈 더 주겠다는데?
자리 없어요. 누군 뭐 돈이 싫어서 그런 줄 알아요?
저 쪽에 자리가 텅텅 비어 있으면서도 거짓말은?
다음 정거장에서 오를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아마 손님이 밉보인 듯싶다. 헌데 자리는 왜 바꾸자 하지? 허, 나는 부러 기침을 콜록콜록 해댔다. 그의 이마가 창백해 보인다. 자지 않고 떨기만 한 것 같다. 여 차장이 흘끔 내 쪽에 의심스런 눈길 던지며 괜찮으세요? 묻는다. 꺼리듯 겁내듯 하는 표정이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열이 바짝 났다. 너네 멋대로 연극 놀라지! 잠이 싹 달아났었다.
레이저 빛이 또 내 몸에 번쩍이어 왔다.
당신 무슨 짓 하는 거요, 지금?
나는 성을 버럭 냈다.
쉿, 남들이 듣겠어요.
나 괜찮으니 이젠 신경 끄고 제발 잠이나 잡시다!
나는 돌아누웠다. 상대는 끽 소리 한 마디 못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의심만 더 증폭시킨 것 같다. 반 시간에 한 번쯤 내 몸에 레이저 빛을 비쳐 왔다. 요망한 놈, 내가 그래 너의 온역신이냐? 아무렴, 네 놈들 머리 속에서 사스가 빠져 나온 것이지! 연구에 의하면 굴로나 바이러스가 곧 그 원인인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 바이러스는 일부 동물들의 몸에 붙어 살고 있는데 특히 사향고양이의 몸에 많이 기생한단다. 그런데 중국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그 사향고양이를 삶거나 볶아 먹는다고 한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를 모르는 것이다!
새벽이었다. 차창 밖은 마스크의 색상과 같은 안개가 부옇게 껴 있다. 나는 분명 공항 버스에 앉아 하염없이 가고 있었다. 빛은 안개를 쫓아 낼 수 있으나, 그 빛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오리무중 같은 평면으로 열차는 달리고 있는데, 나는 서울의 어제에서 오늘의 이 곳에 와 있다. 자연이 순리라고, 인간이 의지인 것만은 아니다. 의지가 만들어 가는 것은 흔히 자기 운명의 수직선, 한 점일 뿐인데 인간은 자기를 끝없는 평면으로 착각한다. 그 수직선을 휘두를 줄밖에 모른다. 그래 다 안개 탓인가?
워이, 치라이(어이, 일어나시오.)!
갑자기 마스크에 흰 장갑까지 낀 여 차장이 와서 명령했다.
깐썬머(왜 그러오)?
량이쌰티원(체온 한 번 재 보기오).
맞은 쪽의 손님이 불러 온 것 같다. 엉거주춤 서서, 팔짱을 낀 채 몸을 떨고 있다. 짐마저 챙긴 것을 보니 아차, 하면 다음 정거장에 내릴 모양, 저 병신 같은 것! 못 미더우면 피하면 그만이 아닌가? 네놈한테도 전염되었나 어쨌나 알고 싶어? 허허, 이젠 네 놈도 못 빠지겠지!
콰이데이알(빨리, 좀)!
정말 분통이 터져 죽을 일이다. 나는 돼지 주둥이를 확 벗어 내치며 일어나 앉았다. 그 손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한국말 욕설이 함께 묻어 나갔다.
왜 못 살게 굴어, 이놈아? 니 소원이 대체 뭐야 응?
아, 니쓰(당신은) 마스크 영감?
뭐야?
상대가 맥없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불에 가까스로 기대어 앉는다. 아이, 깜짝이야! 한국말을 한다.
쩐멀라, 니 머이썰바(어찌된 일이요, 당신 괜찮아요)?
여 차장마저 곁에서 꿈적 놀랜다. 그와 나를 번갈아 뜯어 보더니 잠깐만요, 하고 비실비실 물러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가 웃는 것 같다. 손으로 가슴 쓸어 내리며 헐떡인다. 낯을 가린 마스크가 펄럭이었다. 거기에 여과되어 나오는 소리가 괴상했다. 가까스로 마스크를 벗어 내린다.
날 몰라 보겠어?
누군데 어?.
남자머리 깎았으나 남자는 결코 아니다. 붓기 푸석푸석한 얼굴에 땀을 줄줄 흘리며 자꾸 웃으려고 한다. 웃음이 더 나오지 않으니 낯을 마구 구겨 보이었다.
호, 마스크 영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마스크는 왜 썼어요?
어엉? 넌 최영자? 제길, 넌 웬 마스크야?
호, 호호호.
하, 하하하.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찔끔찔끔 쏟아진다. 밸이 다 꼬여 갔다.
마침 여 차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뒤에 경찰 둘을 꼬리에 달고, 그 중 장승같이 생긴 한 경찰이 앞을 척 막아섰다.
칭니먼짠치라이, 껀워조이탕(미안하지만, 일어나 저와 함께 갑시다)!
썬머썰(무슨 일이오)?
베이쒀라, 콰이조우(말 말아, 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해요, 의심 환자인가 해서? 소 웃다 꾸러미 터지겠네, 제길!
하지만 버틸 수도 없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일어났다. 그녀를 돌아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었다. 또 웬일이지? 급성 심근색 질병이 발작한 환자처럼 그녀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은 채 몸을 꼬고 있지 않는가? 낯이 까맣게 죽어 갔다. 우지랄 ! 아아, 그녀는 결국 나의 돌멩이가 되는가? 어쩌면 내가 그녀의 돌멩인지도 몰랐다. 우장짱! 나의 귀에는 벌써 그 소리가 들려왔었다. 오래 전부터 뭔가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만, 오늘과 같은 이런 돌멩이만은 어떻게 생겨난 건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다시 돼지 주둥이를 했다. 빈틈없이 막고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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