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마 이 허 : 최영자(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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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886회 작성일 10-04-3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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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상수리 나무숲을 등에 업고 높은 언덕배기에 올라앉은 마을과 그에 비해 한 키 낮은 지대에 내려앉은 그 남쪽 마을 사이로 제법 넓은 강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는 비단띠같이 자유로운 자태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한눈에 안겨온다. 사시장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이 강을 두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이허?라고 불렀다. ?마이?란 중국어로 개미라는 뜻이고 ?허?는 강이라는 뜻이다. 강줄기의 모양세가 개미허리같이 짤록짤록한 곳이 여러 곳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인데 기실 제일 짤록한 곳이라고 해도 그 폭이 20미터는 족히 된다. 강 북쪽 마을은 상수리나무 숲이 있다고 해서 상수리촌이요, 강 남쪽 마을은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물남 마을로 이름이 통해 있는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을 이름이 다를 뿐만 아니라 생활풍속도 판판 다르고 그들의 혈맥을 이어준 선조도 각이한즉, 상수리는 한족 마을이고 물남은 현 내에서도 유일무이한 조선 동네라는 것을 원근에서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민족이 다르면 언어도 다른 법이다. 그러나 말을 시켜 보지 않고도 마이허 강가에 나와 빨래질을 하는 모습 하나만 보고도 어느 여인이 상수리의 여인이고 어느 여인이 물남 마을 여인인 줄 대뜸 알아맞힐 수 있다. 먼저 빨래하러 나서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상수리의 여인들은 큰 대야에 빨랫감을 넘치게 담아 옆구리에 끼고 나오지만 물남의 여인들은 빨랫감을 담은 대야를 똬리까지 받쳐 머리 위에 이고 나온다. 상수리 여인들은 임을 이는 습관이 없다. 물남 여인들의 키가 작달막하고 다리가 안으로 휜 것이 다 그 임을 이는 버릇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굳게 믿는 상수리 여인들이었다.
상수리 여인들은 강가에서 썩 떨어진 곳에 멀찍이 물러앉아 대야에 물을 떠놓고 대야 안에서 빨래를 꿀쩍꿀쩍 문질러 씻지만 물남 여인들은 돌 쪽이나 널 쪽을 개울가에 물려 놓고 흐르는 물에서 빨래를 방치로 두드려 씻는다. 얼마나 힘 있게 두드려 대는지 멀리까지 망치질 소리가 메아리친다. 상수리 여인들은 그런 물남의 여인들을 보고 옷을 두드려 못쓰게 만든다고 웃었고, 물남의 여인들은 빨래를 그 따위로 하려면 집 안에서 씻을 것이지 힘들게 강가까지 왜 나왔느냐고 상수리 여인들을 빈정거렸다. 물남 여인들은 한겨울에도 강가에 나와 얼음을 깨고 강물에 옷을 뽀득뽀득 씻어 가지만 상수리 여인들은 그런 물남의 여인들을 반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치부하기가 일쑤다.
청명 전에는 핫바지를 벗는 법이 없는 상수리 여인들은 겨울에 찬물에 손을 담그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래서 물남의 여인들은 산후 몸조리도 일주일에서 열흘이면 끝나지만 상수리 여인들은 한 달 동안 변소 출입도 않고 백일을 집안에 들어앉아 밥을 받아먹는다. 물남 여인들은 미역국으로 산모를 대접하지만 상수리 여인들은 좁쌀죽과 닭알로 백일을 채운다. 그만큼 상수리 여인들은 자기 몸을 아낀다는 말이다. 상수리 여인들은 바람과 추위를 무서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덮고 자는 이부자리는 물남 여인들이 만든 이부자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얇고 작다. 물남 여인들이 만든 열두 근 솜을 둔 이부자리를 보고 그걸 무거워서 어떻게 덮고 자느냐고 근심한다. 물남 사람들은 크고 두꺼운 이불 하나를 구들 위에 펴놓고 둘이고 셋이고 식구대로 같이 덮는 습관이 있으나 상수리 사람들은 아무리 정이 좋은 부부라고 해도 한 이불을 덮는 법이 없이 한 구들에서도 이부자기를 각자 따로따로 한다.
상수리 여인들은 남편을 개떡같이 여기는 습관이 있으나 물남의 여인들에게는 남편의 말은 성지로 받드는 미풍이 있다. 상수리 여인들이 빗자루 꽁지를 추켜들고 남편의 뒤통수를 두드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러나 아내를 패서 문 밖으로 쫓아내는 남자는 물남 마을 남성들뿐이다. 그래서 누군가 상수리 남자와 물남 마을 여인이 부부가 되면 천하 일등 짝꿍이 될 것이고 상수리 여인과 물남 마을 남성이 부부가 되면 사흘을 못 넘겨 이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다.
물남 마을 남자들은 종래로 부엌에 들어가는 법이 없이 아내가 다 챙긴 밥상을 받쳐 들고 들어와 앞에 놓아주길 기다리나 상수리 남자들은 열에 아홉은 부엌일에 능숙하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명절 음식을 만들 때 아내는 아기를 안고 어르고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돌아친다. 가마에서 나오는 즉시 먹어야 제 맛인 중국 음식은 손님을 앉혀놓고 하나씩 만들어내야 하기에 부부 중 한 사람은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요리사 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아이를 달래는 데는 여인이 방법이 있으니까 남편이 가마목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 씀씀이가 후덕한 만큼 상수리 남자들은 집을 지어도 크고 높게 지었다. 두 키가 훨씬 넘게 용마루를 건뜻 올려지은 그들의 천장은 아무리 키 큰 남자가 손을 펼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시원하다. 그러나 물남 마을의 집들은 거개가 지붕이 낮아 키 큰 남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는 언제나 고개를 수그리고 문을 열어야 한다. 물남 사람들은 뜨락 주위를 막는 법이 없이 이웃과 통마당을 쓰는 데 습관이 되어 있지만 상수리 사람들은 집짓기 전에 토담부터 쌓아올린다. 상수리에서 뜨락이 없는 집은 마을의 구판장과 생산대 외양간과 정미소 같은 공공장소뿐이다. 남을 경계하고 자기 것은 자기 구역 안에 한사코 몰아넣어야 시름을 놓는 심리가 상수리 사람들의 뜨락 문화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물남 사람들은 도적질을 수치 중의 수치로 생각하지만 상수리 사람들은 임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남의 집 인분이라도 자기 집 뜨락으로 끌어들이려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도적질을 하지 않으면 상수리 사람이 아니다?라는 속담 같은 말이 항간에 떠돌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뜨락 안은 매우 지저분하다. 거위와 오리가 농성을 피우듯 뜨락 안에서 꿰닥거리며 소요하고 새끼돼지를 거느린 굴암퇘지가 뜨락 구석구석을 파헤쳐 가뜩이나 정돈이 안 된 뜨락 안이 살벌하기까지 하다. 낮다란 버들 울타리로 둘러친 깨끗하고 소담한 물남 마을의 뜨락과는 완연 다른 풍경이다.
물남 마을 가옥들은 집안 전체가 부뚜막과 함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돌로 되어 있으나 상수리의 가옥들은 집안의 4분의 1이 구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봉당이다. 구들 높이도 얼마나 높은지 다리 짧은 사람이나 아이들은 혼자서 구들 위로 오르지 못한다. 구들이 적고 봉당이 넓어서 집 안이라고 해도 신을 신은 채 활동한다. 그래서 상수리 사람들은 좀처럼 신을 벗지 않는다. 옆집에 잠깐 물건 따위를 꾸러 가서도 밖에서부터 신을 벗는 물남 사람들과 달리 상수리 사람들은 아침에 신을 신으면 밤이 되어 이불 속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을 벗는다. 밥을 먹을 때도 그들은 신을 신은 채 높은 구들 위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밥상을 받는다. 그래서 물남 사람들이 즐겨 신는 끌신이나 고무신과 달리 상수리 사람들은 고리까지 달린 헝겊신을 즐겨 신고 밭으로 나갈 때는 검정색의 천으로 감발까지 한다.
물남과 상수리는 정주간의 구조도 다르다. 물남 사람들은 한 부엌에 뚜껑 달린 쇠솥을, 그것도 세 짝이나 네 짝을 같이 걸고 밥과 국을 한꺼번에 끓이지만 상수리 마을의 부엌에는 달랑 뚜껑 없는 대야식 쇠솥 하나뿐이다. 그래서 상수리 사람들은 ?솥을 깨뜨린다?라는 말을 제일 꺼린다. 하나밖에 없는 솥을 깨뜨린다는 말은 그것으로 그 집의 운명이 끝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솥이 하나이기에 그들이 때를 끓이는 장면도 기이하다. 국이나 죽을 끓이는 한편 솥 둘레에 옥수수가루 반죽을 둥글둥글 빚어 붙여서 구워내는데 떡이 구워지면 죽도 맞춤하게 끓여 일거에 양득한다. 구워낸 떡을 수수깡 버치에 담아 밥상 중앙에 올려놓고 큼직한 사발에 죽을 담아 식구대로 한 그릇씩 안겨 주면 주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물남 사람들이 즐겨먹는 김치와 국을 떠먹는 데 쓰는 숟가락은 상수리 마을 밥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떡 한입을 떼어 먹고 젓가락 끝으로 죽을 휘저어 식힌 다음 죽사발전에 입을 가져다 대고 사발을 이리저리 돌리며 후루룩 후루룩 하고 죽물을 감아먹는데 그래서 상수리 사람들은 ?죽을 먹으세요? 하지 않고 ?죽을 마시세요?라고 권한다.
물남 여인들이 여러 가지 김치를 담그느라 바쁠 때 상수리 여인들은 쏸채(신 배추 절임) 한 대독만 담그면 겨울 준비는 그걸로 그만이다. 여름에는 파와 된장이 주요 메뉴이고 겨울에는 쏸채 한 대독이면 일 년 반찬 준비가 끝나는 상수리 여인들은 그래서 편안하다. 편안해서인지 상수리 여인들은 담배를 지골로 피웠다. 여인들만 피우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피우고 아이도 피웠다. 물남 마을에서는 늙은이 앞에서 담배질을 했다간 후레자식으로 평판이 나기 십상이어서 젊은이들의 담배질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했으나, 상수리 사람들은 담배문화에서는 노소가 동락이다.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에도 맞불질이 예사이고 부부 사이에도 호상 담배를 말아서 권장하며 피운다. 그런 상수리 사람들을 물남 사람들은 ?되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러나 상수리 사람들의 두부 앗는 재간 하나는 알아주어야 했다. 물남 여인들이 앗은 두부는 선떡처럼 부슬부슬하고 뜬뜬했으나 상수리 사람들이 앗은 두부는 희고 하들하들해서 양념간장에 찍어 입 안에 넣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살살 녹아 넘어간다. 그래서 물남 사람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두부만은 상수리 두부를 사다먹었다. 물남의 입쌀 한 근(1킬로그램)으로 상수리 두부 두 모를 바꿀 수 있었다. 상수리 사람들은 쌀밥이 맛있다고 하면서도 입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수전농사를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명절을 계기로 쌀밥을 한두 끼 먹을 일이 있으면 좁쌀이나 옥수수쌀 따위로 물남에 와서 조금씩 바꿔다 먹었다. 입쌀 한 근으로 좁쌀은 두 근, 옥수수쌀은 두 근 반을 바꿀 수 있었기에 물남 사람들 중 가족이 많고 먹을 양식이 빠듯한 집들에서는 그렇게나마 변색을 해서 양식을 불려 먹으며 보릿고개를 넘겼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상수리 사람들은 개를 큼직하게 키워서는 물남으로 끌고 왔다. 개 한 마리에 입쌀을 70근 좌우 바꿀 수 있었기에 상수리 사람들은 집집마다 개를 키웠다. 개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상수리 사람들은 설 명절이 되어야 돼지를 잡거나, 장마당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먹는다. 당면에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요리는 상수리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상등 요리였다.
2
?시노가, 시노가이.?
도술의 아내 안동댁은 딸 신옥이에게 상수리에 두부 바꾸러 가기를 아까부터 재촉하고 있었다. 무신 놈의 지집아가 어미가 한번 말하면 궁데이가 갑싹하니 들어먹어야 할 텐데 아까부터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며 정주간에서 구시렁구시렁 바가지를 연속 긁고 있는 안동댁. 그러거나 말거나 그 딸 신옥은 안방에 들어앉아 한창 코바늘 뜨개질에 여념이 없다. 코바느질은 시집갈 나이가 된 물남 마을 처녀들의 필수 과업이었다. 이불보, 회대보, 탁상보, 방석, 심지어 화장품을 넣어 두는 주머니까지 모두 코바늘로 떠서 마련하는 게 그 무렵 물남 마을 처녀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신옥은 그런 것을 다 떠서 장만했고 지금은 남자 웃옷 깃 안에 다는 덧단을 뜨고 있는 중이었다. 학생용 줄자처럼 좁고 길게 떠서 깃 안에 붙이면 목깃이 어지러워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었고 그것을 부착한 옷 목깃을 슬쩍 젖혀놓으면 자기에게 그런 것을 떠주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는 표적이 되어서 총각들마다 가지고 싶어하는 장식품이기도 했다. 처녀들이 그것을 장만할 때는 약혼자가 있거나 한창 연애중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주려고 뜨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뜨는 동네 처녀들을 보면 마을 어른들은 ?와? 니 그새 중신 들어왔더나??가 아니면 ?니 누구하고 연애 생활하제?? 하고 물어서 부끄럼을 타는 처녀들은 그걸 내놓고 뜨길 꺼려 했다. 지금 신옥이도 그걸 남들이 보는 앞에서 뜨지 못하고 골방에 들어앉아 뜨고 있는 중이었다. 약혼자도 없고 내놓고 사귀는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그걸 내놓고 만지기가 못내 멋쩍고 낯간지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신옥의 마음속에는 은근히 그걸 떠주고 싶은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자기에게 말 한마디 먼저 걸어주지 않는 사람, 그래서 더 듬직해 보이고 마음이 더 끌리는 그 사람은 작년 가을에 마을로 돌아와 마을의 청년회장을 맡고 있는 퇴역 군인이었다. 검정색이 아니면 회색 따위의 따분한 색깔의 옷밖에 입을 줄 몰랐던 마을 사람들 속에 들어온, 쑥색 군복을 입은 그 사람의 의젓한 풍채는 처음부터 온 마을 처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비록 영화 속에서 보던 빨간 영장과 모별을 떼버린 퇴역 군인의 차림새였으나 작디작은 물남 마을을 떠나 유일하게 바깥세계를 접하고 돌아온 사람이어서, 그래서 전에 비해 아는 것도 많아 짜장 물남 마을 처녀들의 눈에는 백마를 탄 왕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장식품을 그 사람의 군복 깃에 달면 쑥색과 어울려 색다른 운치가 돋아날 것이다. 신옥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안동댁이 골방 문을 드르르 열어젖히며 또 소리소리를 질러서야 신옥은 뜨개질감을 부랴부랴 함농 안에 쓸어 넣고 일어서서 헛간으로 내려가 쌀을 퍼 담아 이고 상수리로 향했다.
상수리와 물남 사이를 오가는 데는 줄배 하나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겨울 한철을 빼고 나머지 계절에는 모두 이 배를 타야 상수리는 물론 공사 마을과 현성으로도 나아갈 수 있어서 물남 사람들은 하나같이 줄배 타는 데 능숙했다. 녹이 쓴 철주에는 노도 없고 삿대도 없다. 강 양안으로 드리운 와이어 줄을 잡고 끌어당기는 식으로 발밑의 배를 앞으로 이끌어 나아가면 되기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마다 사공이고 저마다 선장이다.
쑨영감네 두부방은 아직도 두부를 앗아내느라 처땐 장작불 열기에 후텁지근했다. 안동댁이 근심했던 것처럼 두부는 다 팔리고 두부 찌꺼기만 한 초롱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동네 안에 결혼 잔치집이 있어서 두부는 아침결에 앗아내자마자 다 팔려 나갔노라고, 자기는 언제 막내아들 잔치를 치러 줄 수 있겠느냐, 노파가 죽고 같이 살던 막내아들이 군에 가서 쪽쪽하기 그지없다는지, 요즘 퇴대하여 온다고 편지는 왔는데 그게 어느 날이 되겠느냐는 둥하며 묻지도 않는 사설을 장황하게 깔고 있는 쑨영감에게 쌀바가지를 맡기며 신옥은 내일 나올 두부를 약속하고 두부방을 나와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신옥은 상수리 마을 복판에 위치한 구판장에 들렀다. 물남 사람들은 소금 간장 따위의 잔잔한 생활필수품을 다 여기서 구매했다. 신옥은 20전을 주고 시계꽃무늬가 아롱아롱 돋힌 손수건을 하나 샀다. 뜨개질이 끝나는 길로 이 꽃손수건에 포장을 곱게 해놨다가 어느 날 기회를 봐서 그 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전해야겠다고 신옥은 속으로 스케줄을 잡고 있었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철주 위에서 신옥은 맞은편 강가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일남일녀를 보게 되었다. 남자가 입고 있는 쑥색 군복과 전두리 높은 군모를 신옥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긴 머리태의 여자는 옆집의 순희였다. 오래 전부터 분세수를 곱게 하고 다닌다 했더니 끝내 자기 먼저 화려한 고지를 점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신옥이었다. 신옥은 허수아비처럼 철주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맥이 없어 와이어 줄을 당길 수가 없었다. 절인 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신옥을 보며 아무 때 없이 늑장을 부리더니 두부를 사오지 못했다며 내일 아침은 일찌감치 다녀와야지 아버지 술안주가 없어 야단이 났다고 안동댁이 구시렁거렸지만 신옥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신옥은 며칠을 그렇게 두문불출을 했다. 도술영감의 귀따가운 두부 타령도 뒷전으로 한 채 자기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썩어질 놈의 지지배가 뭘 잘못 처묵었나, 염병맞은 년처럼 축 늘어져 갖고 소죽은 귀신이래도 들러붙었나? 와 맨날 고양이 낙태한 상통인고?? 그러면서 안동댁은 딸 방의 창문 커튼을 와락와락 잡아채고 창문을 활활 열어 놓았다. 남 다 오는 만주 땅으로 자리를 잡는다고 먼저 들어온 남편을 찾아 수중에 땡전 한푼 없이 젖먹이 딸 신옥이만 달랑 업고 뒤쫓아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행선지가 똑똑하지 않았던 남편을 찾기란 바다에서 바늘 찾는 격이어서 결국 오가도 못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소개로 나이가 훨씬 많은 도술영감을 만나 물남에 둥지를 틀어 버린 안동댁이었다. 그후로 도술영감과 살면서 주렁주렁 아이들을 셋이나 더 낳아 주었으면 할 도리는 다한 것 같은데 마냥 의붓딸을 별 차별 없이 키워 준 도술영감에게 감격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남편의 분부라면 성지처럼 받들었고 매사에 남편의 눈치대로 행하는 것이 이젠 굳어진 습관이 되었으며 신옥이 일로 해서 남편의 심기가 언짢아지는 일이 생길까 보아 속을 달달 끓이는 안동댁이었다.
술을 무척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산판을 돌며 벌목일도 했고 송화강에서 벌부 노릇도 해봤으며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 담가대원으로도 있었다는 도술영감은 성격이 불 같아서 신옥이는 물론 자기의 친자식들한테도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반주 안주로 모두부를 찾으며 끼니때마다 인상을 쓰고 있는 남편이 끔찍이도 마음에 쓰이는데 심부름을 다녀와야 할 신옥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비뼈를 내대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니 자연히 똥집이 다는 것은 안동댁 혼자일 수밖에 없다. 더 누워 있을 계제가 못 되는 걸 눈치 챘는지 부스럭부스럭 자리를 걷고 일어나 대충 머리카락을 손빗질하고 맡겨둔 두부를 가지러 상수리로 떠나는 신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안동댁의 속도 속이 아니다.
쑨영감네는 여느 때 없이 웬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쑨영감의 군대 갔던 막내아들이 퇴대하여 마을로 돌아와서 동네 인사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쑨가 성 가진 그 떨레들만 모여 왔는데도 너른 봉당이 미어질 듯 사람의 수효가 많았다. 상수리에는 쑨가 성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인근에서는 상수리를 쑨가툰이라고도 불렀다. 자복에 대해 집착하는 상수리 사람들은 물남 사람들과 달리 자식 욕심이 많았다. 정부에서 산아제한국책을 그토록 강조해도 피난을 다니면서라도 낳고 싶은 자식은 다 낳고야마는 상수리 사람들이었다. 셋을 키우나 넷을 키우나 그게 그것이란다. 옥수수 죽가마에 물 한 바가지만 더 퍼붓고 젓가락 한 모만 더 갖추면 되는 일이라고 상수리 사람들은 자식 키우는 일을 쉽게 생각했다. 뜨락이 그렇게 지저분하고 찬이라고는 된장에 파밖에 없어도 상수리 마을의 애들은 큰병 한번 앓지 않고 물오이같이 쑥쑥 잘 자라 주었다.
쑨영감은 두부를 가지러 온 신옥을 보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 오늘은 자기 집에서 두고 쓸 것밖에 남지 않아서 안됐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쑥색 군복을 입은 쑨영감의 막내아들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야 다른 반찬도 있는데 고객을 빈손으로 되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면서 날랜 솜씨로 박 바가지에 두부 네 모를 담아 신옥이에게 건네주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마음속 병을 앓고 있던 신옥이의 여리고 텅 빈 가슴에 쑥색 군복은 감로수가 되어 흘러들었다.
3
신옥은 전에 없이 상수리 구판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중국말을 일언반구도 모르는 안동댁이 상수리 구판장에 갈 일은 모두 신옥이를 시키는 원인도 있겠지만 신옥은 구판장으로 갈 일을 알게 모르게 만들어 자진해서 다니기도 했다. 신옥이가 상수리 쑨영감의 막내아들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마을 안에 쫙 퍼졌다. 듣다 금시초문이라는 식으로 눈이 동그래지는 부류도 있고 내 진작 그럴 줄 알았다며 입을 비쭉거리는 부류도 있었으나 그거 참 잘 됐네 하고 기뻐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을 안은 금시 큰 사변이라도 난 것처럼 뒤숭숭해졌다. 뒤늦게야 소문을 들은 도술영감이 구들 복판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불호령을 내렸다.
?시노가! 시노가이!?
범같이 험상궂은 도술영감의 얼굴빛에 신옥은 벌써 사색이 되어 있었다. 도술영감은 그렇게 나와 앉는 신옥의 얼굴을 넉가래 같은 손바닥으로 보기 좋게 갈겼다. 신옥은 걸레짝처럼 방구석에 구겨박혔다.
?다리몽시를 탁 분질러 버릴끼다.?
그러면서 다시 저만치 구겨박혀 옴싹달싹을 않는 신옥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구들 위의 빗자루를 거꾸로 움켜쥐고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어메어메, 이놈두상 사람 죽일락카나, 이쯤 했으마 말로 하이소 말로. 좋은 말 놔두고 와 이카능교??안동댁이 몸으로 남편의 빗자루 매를 대신 감당하며 맞고만 있는 신옥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빌어묵을 지집아가 죽을락꼬 환장을 했나? 무신 놈의 망신살이 뻗쳐 해괴하게 되놈이 뭐꼬 되놈이. 눈깔이 뒤집히?나? 오늘 니 죽고 내 죽고 그라고 마자고마. 이놈의 지집아야.?그러면서 아래턱을 달달달 떤다. 신옥은 그런 두 사람의 발밑에 쭈그리고 앉은 채 미동도 않는다. 죽이려면 죽여 자시소 하는 그런 배짱인지 빨리 피하라는 뜻에서 발끝으로 직신직신 걷어차는 안동댁의 충고도 아는지 마는지 쇠고집을 피우고 있다. 그것이 더 화가 난다는 듯 도술영감은 길길이 날뛰며 이리저리 중간에서 방패 노릇만 하는 안동댁의 몸을 훌쩍 들어 멀리 뿌려 던졌다.
?이이코, 사람 죽는다 ! 사람 살리소! 이보소들, 사람 좀 살리소!?그러면서 창문을 열고 이웃의 방조를 구하니 가뜩이나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모여 온 이웃들이 딴은 말리는 모양이나 거개가 구경하는 쪽이 진짜다.
이튿날 신옥은 마을 풍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마을 부녀자들에게 끌려갔다. 조무래기들이 구경거리라고 신옥의 뒤를 쫓아 마을 회관 쪽으로 밀려갔다. 부녀회 회장의 주최하에 마을 부녀들은 신옥의 비행에 대해 침을 튕기며 공노했다. 동네 안에 총각이 없어 하필이면 상수리의 되놈이었더냐, 시집을 못 가 바람이 났더냐, 쑨영감네 두부방에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정말이냐, 처녀로서 얼굴 깎이는 줄도 모르는 년, 머리도 숙이지 않고 뭘 하냐, 동네 안에 나쁜 물을 들이기 전에 마을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느니 뭐니, 좌우지간 입 가진 아낙마다 한마디씩 질매를 하는데 악머구리가 따로 없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신옥은 두 눈이 퉁퉁 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붙는 불에 키질이란가, 두부쟁이 쑨영감이 웬 빨래 꾸레미를 들고 와 도술영감 앞에 펼쳐놓고 야료 같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핏자국이 묻은 요자리 거죽이었다. 보다시피 자기 아들과 신옥이는 갈 데까지 갔으니 싫어도 깨진 사발 버리는 셈치고 신옥이를 며느리로 달라는 것이었다. 도술영감의 두 눈에서 불똥이 툭툭 튀고 한 뼘 자란 채수염이 턱 아래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신옥의 방을 들여다보던 안동댁은 이부자리 속에 신옥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온 동네를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옥이는 아무 데도 없었다. 오후 해가 썩 기울어서야 동네와 동떨어진 ?마이허? 강 물굽이 쪽에서 신옥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땋았던 긴 머리태가 풀려 온 얼굴을 뒤덮고 있어서 물귀신이 따로 없었다고 동네 장정들이 게두덜거렸다. 안동댁은 강가의 범소에 퍼질러 앉아 두 손으로 땅을 후벼 파며 꺼이꺼이 울어댔다. 반구는 절대 안 된다는 마을 좌상들의 집요한 반대에 신옥의 시체는 강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상수리의 말마차를 빌려 현성 화장터로 옮겨졌다. 그러나 안동댁의 애걸로 신옥의 골회는 마이허 하류 쪽에 뿌려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동네사람들은 딸아이 건사를 잘못한 안동댁을 나무랄 뿐 재무지에 떨어뜨린 두부처럼 닦아 먹지도 불어 먹지도 못하게 된 바에는 그편이 외려 합당하다는 듯 신옥이가 죽은 뒤에도 별로 애석해하는 표정을 누구도 짓지 않았다. 그후에도 상수리 사람들은 예나 다름없이 쑨영감네 두부를 사다먹었다. 덕분에 쑨영감은 상수리에서 맨 처음 벽돌집을 지었다. 지붕도 자기네 식대로 예전처럼 들썽하니 높이 얹고 흙토담 대신 빨간 벽돌담을 한 키 넘게 쌓아올린 쑨영감은 막내아들 내외에게 두부 앗는 비법을 물려준 후 뜨락에 앉아 소일하는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그는 두부를 사러 온 물남 사람들 앞에 쩍 하면 아들이 입었던 쑥색 군복을 꺼내놓고 아까운 며느리감이 죽었다고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옷깃 안에는 신옥이가 손수 뜬 실뜨개 덧깃이 그때까지 붙어 있었다. 물남 사람들은 그런 쑨영감을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든 뒤어질 영감이라고 욕했다. 욕을 하면서도 쑨가네 두부는 그냥 사다먹었다. 쑨영감의 아들 쑈쑨은 쑨영감처럼 앉아서 두부를 팔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두부를 앗아 멜대로 지고 강을 건너와서 팔았다. 물남 사람들은 그러는 쑈쑨을 돈 버는 데 애비 찜 쪄 먹을 놈이라고 또 욕을 했다. 욕을 하면서도 전보다 편리해서 좋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입쌀 한 근으로 두부 두 모를 바꾸던 세월이 지나고 이젠 입쌀 한 근에 두부를 한 모밖에 바꿀 수 없었으나 물남 사람들의 아침 밥상에는 변함 없이 두부찌개가 올랐다. 쑈쑨이 부르는 사구려 소리는 원근 치고도 특이했다.
?떠우 퍼, 떠우 퍼(두부요, 두부).?
마이허를 건너면서부터 부르는 억양이 센 사구려 소리는 동네 안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만큼 청청했다.
4
남의 말은 덕대 위에 올려놓고 하지 않는다고, 신옥이가 죽어간 이야기는 이제 물남 사람들에게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도술영감과 안동댁을 비롯한 늙은이들이 거의 다 죽었고 그 당시 신옥이의 뒤를 따라 구경거리라고 쫓아다니던 또래들은 열에 아홉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나가 버렸으며 그 아래아래 되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하나둘 마이허를 건너 물남 마을을 빠져나가니 마을 안은 다 파먹은 김칫독처럼 휑뎅그렁하다. 쭈그렁밤송이가 된 파파 늙은 노파 몇 명과 칠칠치 못한 노총각들이 남아 예전처럼 마이허 물을 퍼서 논농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어서 새삼스레 그 일을 끄집어내어 말밥에 올리는 사람은 이제 없다. 논농사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면서 방치된, 주인 없는 가옥들이 하나둘 비바람에 풍화가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키 낮은 가옥들이어서 그런지 쓰러지는 데도 빨랐다. 뜨락 둘레에 둘러쳤던 개암버들 울타리들이 삭아서 문드러졌고 깨진 유리창 틀만이 쓰러져 가는 초가 속에 포혈처럼 남아 주인 돌아오길 기다리며 지쳐 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상수리 사람들은 물남 마을로 들어와 방치된 물남의 빈 집들을 헐값으로 사들이고 쑥대가 우거진 뜨락 터에 찰옥수수와 두부콩을 잔뜩 심어 놓았다. 그리고 벽돌을 실어다 텃밭 둘레에 담을 쌓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개암나무 울타리를 세운 물남의 본토박이 집들이 더 초라해 보였다. 가을이 되자 마른 옥수숫잎 부딪는 소리와 콩꼬투리 튀는 소리가 벽돌담 안에서 듣그럽게 들려 나왔다.
어느 날 개암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뜨락 안에서 오래간만에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즘 뭐나 흔해서 좋은데 처녀 구하기가 고양이뿔 구하기보다 어렵다며 우는 소리를 하던 와중에 물남의 노총각 하나가 장가를 가는 것이다. 한국에 가 돈을 벌어 부쳐 주는 누나 덕분에 용하게도 떠꺼머리 신세를 면하게 된 귀식이라는 총각이 파파 늙은 홀어머니 앞에서 자랑스레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신부는 ?마이허? 북쪽의 상수리 마을 처녀라고 한다. 상수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신부는 식장이라고 만든 뜨락 안 돗자리 위에 서서 아미를 다소곳이 숙이고 새색시답게 서 있는 대신 빨리 담뱃불을 붙여 달라고 법석을 떠는 친정 쪽 하객들을 향해 히쭉벌쭉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다음은 신랑과 신부님의 맞절이 있겠습니다.?
?씬랑씬냥 뛰이 빠이!?
주례는 조선말로 한 번, 중국말로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의 주례사를 곱씹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하객의 절반 이상이 상수리 마을 사람들인데…… 딸자식을 시집보낼 때 하객으로 따라가는 친정 식구들의 수효에 의해 그 가문의 문풍과 위력이 과시된다고 여기는 상수리 사람들이 남녀노소 떼를 지어 허장성세하며 마이허를 건너 물남 마을로 밀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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