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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 어둠 속에서 : 김건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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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24회 작성일 10-04-3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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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북쪽도시 고스포드, 시드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한 시간여 북쪽으로 달리면 예로부터 호주 원주민들이 흰산(白山)이라 이름 붙인 맹그로브마운틴의 장엄한 산세(山勢)가 나타난다.
이 산(山) 자락을 따라 해변을 끼고 이어지는 구 도로(舊 道路)가 있다.
이 길이 지난 반세기 동안 가난한 이민자들이 좀 더 돈 벌이가 좋다는 노천광산(露天鑛山)이나 제철소(製鐵所)같은 일자리를 찿아서 북(北)으로 뉴카슬과 더 멀리는 브리스베인 퀸슬랜드 주 까지 줄지어 이동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바다와 접한 이 센츄럴 코스트(Central Coast) 도로변은 어김없이 마을과 구멍가게와 값싼 술집과 모텔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 마을 중에 가장 큰 마을이 고스포드였다.
주말 저녁이면 고스포드 펍(*선술집)에는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이들은 월남 전쟁터에서, 혹은 서부독일 지하 탄광에서, 혹은 중동 건설 현장에서 곧바로 귀국 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좀 더 돈(Dollar)을 벌어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꿈꾸며 이곳 호주로 온 한국인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들 한 주간 힘든 노동일을 마치고 이 값싼 선술집에 모여 고국(故國)을 생각하며 두고 온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을 그리면서 아리랑을 불렀고 기타를 두드렸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 호주 이민사(移民史)의 한 페이지요, 오늘의 도시로 발전한 고스포드 역사(歷史)의 한 장(場)이 되어 버렸다.
이곳은 또한 천혜의 자연 조건이 두루 갖추어진 곳이기도 하다. 병풍처럼 둘려 쳐진 맹그로브의 장엄한 산세를 보라.
이 높고도 수려한 산세가 급히 남태평양 바다로 빠져내려 산과 바다의 자연경관이 더욱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도시가 고스포드였다.
이같이 시드니 북부지역 마을들은 모두 맹그로브 산세가 바다로 떨어진 급경사 지형 위에 마을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뒤늦게 승우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5년이 됐다. 승우는 기능직 소방 공무원의 정년을 간신히 채우고 곧 바로 시드니를 벗어나 도망이라도 치듯이 이곳으로 물러나 앉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승우는 전화벨이 계속해 울리는 소리를 잠에 취해 듣고만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소파에 기댄 채로 깜박 오수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빨리 전화 받아요” 아내가 발코니에서 빨래를 걷다 말고 소리쳤다.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승우는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이승우 씨 댁입니까? 저는 고스포드 비상재난 센터 수잔 로렌스 입니다….”
승우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그녀는 용건부터 말했다.
“… 죄송합니다만 선생님께서 급히 도와주실 일이 생겼습니다. 방금 빗물 배수관에 한 소녀가 빠졌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승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열어젖힌 발코니의 문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들이 닥쳤다. 정신이 번쩍 났다.
“그 신고를 받은 게 언젭니까?”
“바로 조금 전이예요.”
“지금 거기… 센터에는 아무도 없나요?”
“예, 모두 뉴카슬 침수지역으로 출동 했습니다.”
“알았어요. 곧 가겠소.” 승우는 윗옷을 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조심하세요. 여보!”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현관까지 따라 나오며 그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곧 다녀오리다.”
승우는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오전 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었는데… 요즘 날씨는 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 주에서는 유래 없는 가뭄으로 인해 두어 달 전에 큰 산불이 번졌다. 그 산불이 한 마을을 덮쳐 200여 명의 인명피해를 낸 호주 사상 초유의 자연재해를 발생시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물난리가 난 것이다.
뉴사우스 웨일스주 시드니 근교 일부 지역에 어제 밤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한 마을이 통째로 물에 잠겨버렸다. 수해를 입은 마을은 이곳에서 50여 킬로미터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수해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구조센터가 여기 고스포드 소방서였다.
그래서 이곳 S.E.S(State Emergency Services) 재난구조 반원들이 모두 그쪽 침수지역으로 총 출동해 일손이 딸린 나머지 부득이 승우에게 도움을 요청 한 것으로 짐작이 됐다.
승우는 이미 현직에서 은퇴 했지만 인명구조 요원으로 계속 소방본부에 적을 두고 무급(無給)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우는 차를 몰아 거리로 나섰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으로 어둠이 저녁처럼 깔린 거리는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들과 하교시간 학생들로 분주했다.
차도에는 불을 밝힌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나온 차들은 곡예를 하듯 끼어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승우는 차 ‘콘솔박스’에서 경광등을 찿아내 그것을 승용차 지붕위에 부착 시켰다.
그의 차에서 곧 귀 찢어지는 경보음과 붉은색 경광등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드디어 그는 양보하는 차량들의 틈새를 비집고 힘껏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SES(재난구조) 본부는 고스포드 소방서 아래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승우는 우선 당직 반장에게 접수된 신고전화 내용부터 분석해 보자고 말했다.
이 신고 센터는 경찰과 합동으로 운용되고 있었는데, 센터로 걸려온 모든 신고전화들은 24시간 동안 전부 녹음이 됐다.
신고자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였다.
“아… 여보세요. 거기 구조센터죠? 지금 배수로에 여학생이 빠졌어요. 빨리 구해주세요… 분명히 신고했습니다. 알았죠?”
“예? 배수로라니요? 어디에 있는 배수로죠?… 지금 무슨 소리죠? 아가씨…….”
“에리나 쇼핑센터 사거리 왼쪽에… 빗물 배수관 멘홀이 있죠?… 거깁니다.”
“멘 홀이 어떻게 됐길래?… 아가씨! 잠깐만요. 에리나 쇼핑몰… 그러니까 테리갈 바닷가로 나가는 큰길 옆 사거리를 말하는 겁니까?”
“예. 바로 그곳입니다. 사고 지점이….”
“거기 빠진 사람이 아가씨와 동행인입니까? 아는 사람 이예요?… 빠진 사람 이름과 아가씨 이름은 어떻게 되죠?”
“아니?… 이것보세요. 내 이름은 알아서 뭣합니까?”
“우리는 이 전화가… 장난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아이참 기가 막혀. 이것보세요. 사람이 멘홀에 빠졌단 말이에요. 어린 여학생이에요.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신고합니다. 이렇게 한가히…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죽을지도 몰라요 그 애가…….”
“그럼 구조 소방관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거기에 계시겠습니까? 아가씨.”
“아니… 나는 젖먹이 아이가 있어요. 지금 당장 집으로 가야해요. 알아서 하세요. 나는 분명히 신고를 했어요. 알았죠?… 철컼,” 뚜 뚜 뚜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아마도 공중전화를 이용한 것 같았다.
당직 반장인 그녀가 캐비닛에서 커다란 청사진들을 꺼내며 승우에게 말했다.
“이건 에리나에서부터 테리갈 해변까지의 배수시설 도면입니다. 배수터널, 하수구 등이 모두 표시된 거죠. 지금 지하에 있는 시설물들의 위치는 모두 여기에… 모두 나와 있어요.”
그녀는 청색 도면 한 장을 상황판 위에 넓게 펼쳤다.
“여기… 이 지점이에요. 아이가 빠졌다는 하수구가…….”
그녀가 팔을 뻗어 도면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승우는 돋보기를 쓰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상황판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녀가 빠른 말로 승우에게 계속 설명했다.
“신고 지점 맨홀이 여깁니다. 여기 배수터널은 폭 3.5미터, 높이가 4미터정도로 내부가 꽤 넓습니다. 빗물과 오수를 테리갈 앞 바다로 밀어내는 펌프장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요즘 같은 우기에는 맹그로브 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 까지 모두 이리로 합류 됩니다. 얼마 전에 내린 소나기로 수량이 어떨 진 알 수 없지만… 만약 맨홀에 어린 학생이 빠졌다면… 아마 포기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벌써 바다까지 멀리 떠내려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먼저 현장 확인이 필요 합니다.”
빠르게 설명을 마친 그녀에게 승우가 간단히 질문 했다.
“배수로 중간 중간에 안전망 같은 것은 없습니까?…혹 말입니다. 카운슬(*구청)에서 배수로 청소 작업을 할 때 작업 요원들을 위한 안전시설 같은 것을 해 놓진 않았을까 해서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부근이 바다와 가까운 메인(main)배수로이다 보니… 그러나 너무 믿을 건 못됩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오래전에 설치된 것 일테니…….”
“… 알았습니다. 수잔양! 머뭇거릴 시간이 없군요. 곧 바로 뒤 따라 구조팀이나 빨리 출동 시켜주시오. 나이 먹은 사람이 하수도에 오래 쳐박혀 있기는 싫소, 하하하…….” 승우는 경직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농을 하며 크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미 혼스비 센터로 구조지원 요청을 해 놓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현장 확인만 해 주십시오.”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승우는 출동 차량 대기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바깥 날씨는 점점 더욱 험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웅~웅~ 거리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태풍의 징조라는 것을 알아 챈 작은 새들이 유칼립스 나무 위에서 분주하게 숨을 곳을 찾아 날개 짓을 하고 있다.
멀리서는 천둥소리가 포성처럼 울렸다.
차량에 오른 승우는 무전기 스위치부터 켰다. 얼마동안 전파를 잡느라 칙칙 거리던 무전기에서 침수지역으로 출동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빈은 이곳 고스포드 재난 구조대 책임자였다. 그는 이미 여기 상황을 모두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승우가 지금 출동 중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흥분했다.
“이런 맙소사, 혼자서 출동이라니요 선배님!”
“긴급 신고가 접수됐는데… 어쩌겠나? 가서 살펴봐야지.”
“조금만 더 기다리셨다가 혼스비 팀이 도착하면 그들을 현장으로 안내나 해 주세요. 지금 맹그로브에 집중 호우 경보가 내렸다고요. 그 쪽 산 계곡의 물이 모두 그리로 몰릴 겁니다.”
“맹그로브에 비가 언제 부터 내렸나?”
“지금 막… 지금 빗줄기가… 마치 양동이로 쏟아 붓는 것 같답니다.”
“그 물살이 여기까지 도달 하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아닙니다. 40분정도…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알았네. 내가 먼저 그 아이를 빨리 찾아 봐야겠네.”
“아니? 선배님… 혼자서요? 그건 무립니다.”
“맨홀에 어린 학생이 빠졌다는 신고를 받았는데… 어쩌겠나… 너무 걱정 말게.”
“선배님 그럼… 멘홀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진 마십시오. 곧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할겁니다. 약 40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 시간적 여유라니??? 40분 후면 수량(水量)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은가?”
“40분이 지나면 안 되죠… 그땐 배수로 안에 물이 하나 가득 꽉 차 버릴 겁니다.”
“맙소사!!! 고맙네, 자 시간이 없네, 이만 끊어야겠네.”
승우는 운전석 앞에 붙은 비상출동 경보스위치를 켜며 소방차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앵~앵~앵~ 곧 요란하게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가 도로에 하나 가득 울려 퍼졌다.
거리는 아직도 어수선 했지만 출동한지 10분이 채 되기 전에 그는 빗물 배수터널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승우는 곧 뒤따라 올 구조팀을 위해 차 시동도 끄지 않고 경광등까지 켜 놓은 채 맨홀 안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그는 우선 등에 짊어질 장비들 중에 산소병과 마스크와 호스, 비상로프, 방수랜턴 등 장비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장비를 둘러본 승우는 출동차량에 비치되어 있는 잠수복처럼 생긴 다목적 구조복으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램프가 달린 안전 모자를 쓰며 사다리에 올랐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숙달되고 익숙해진 자연스런 몸놀림이었다.
승우는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멘홀 아래로 내려가며 모자 앞쪽에 붙은 램프를 켰다.
불빛에 비친 터널 벽은 이끼들이 물풀처럼 길게 자라 덮여 있었으며 아래쪽 바닥에는 검은빛 물결이 강물처럼 도도히 흘렀다.
흐르는 물과 배수로는 승우에게 늘 생경한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들 녀석이… 승우는 아들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은 보이 스카우트 훈련 중에 계곡의 급류에 휘말려 실종이 됐다. 그렇게 된지가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석이 만약 살았더라면 올해로 나이가 스물일곱 살인가? 제법 의젓한 청년이 되었을 터 인데…….’
승우는 단 하나 뿐인 늦둥이 자식 놈을 그렇게 비명에 잃은 후 스스로 지은 죄가 많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인명구조 대원으로 자원 했었다.
승우가 내려선 지하 빗물 배수시설(排水施設)은 크고 작은 곁가지 배수관들이 한곳으로 모여 마치 작은 운하(運河)를 이룬 듯 했다.
땅속에 이렇게 거대한 물길이 있으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 했었다.
승우는 번쩍이는 은빛 물결을 따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수색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맨홀에 빠진 소녀가 아래쪽으로 떠내려갔을 것이란 짐작 때문이었다.
물은 제법 허리까지 찾다.
승우는 우선 배수로 벽에 한 뼘 씩나 자란 이끼 위를 더듬어서 안전로프를 고정시킬 만한 장치가 있는 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녹이 쓸긴 했지만 커다란 금속이 대략 오륙 미터 간격으로 벽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승우는 로프 한쪽을 든든한 금속 고리에 걸고 잠금 장치를 했다.
이제부터 어깨에 걸친 줄을 서서히 풀어 나가며 하류를 향해 수색 작업을 벌이면 될 터이다. 승우는 한 발 한 발 어둠속을 향해 물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아래 감지되는 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물의 깊이와 바닥의 미끄러움 때문에 여학생이 충분히 떠내려 갈 만 했다.
갈수록 점점 터널속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어두움의 깊이가 너무 깊어 켑 램프 불빛이 점점 오렌지색갈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승우는 곳곳에서 숱한 인명구조 작업에 참여 했지만 이처럼 혼자서 터널 속으로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승우는 터널을 몹시 싫어했다.
터널은… 깜깜한 어둠과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자신의 모든 것을 옭아 메기 때문이었다.
어둠속에서 일어날 예상치 못한 일들이 그를 한없이 두렵게 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이 물 흐르는 소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이 어둠… 괴기스런 이 공포감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승우는 몰려드는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아들 녀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떠 올리려 애를 썼다. ‘올해로 나이가 27살 되었으니… 이젠 제법 의젓해 졌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검은 벽 저쪽에서 아들 녀석이 그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승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등에 땀이 배어났다. 그는 어둠을 헤치며 한 발… 두 발… 계속해 전진했다.
계속 전진하며 그는 가끔씩 저 깜깜한 앞쪽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거기 누구 없어요? 대답해요.”
우웅~웅~ ~ 웅~ 없어요~ 해용~ 우웅~ ~
어둠속 저편에서 메아리가 습기 찬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터널 속의 위험을 냄새 맡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 했다. 떠오르는 옛 생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승우는 몰려드는 두려운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이미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
베트남 투이호아(Tuy Hoa)의 붉은색 연기(煙氣), 적군이 파놓은 땅굴을 28연대 수색중대가 발견했다. 대규모의 땅굴이었다.
28연대는 치고 빠지는 적의 매복 작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부대였다. 28연대 병사들은 눈이 뒤집혔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적을 추적 했다. 그러나 땅굴 속으로 숨어 버린 적군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찾던 중에 이런 대규모의 땅굴을 발견 했던 것이다.
상황은 즉시 상부로 보고되었다. 사령부에서는 승우를 포함한 땅굴수색 정보병 다섯 명을 28연대로 급파했다.
대원들을 태운 시누크(*헬리콥터)가 땅굴 앞에 착륙했다.
대원들은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전과 임무를 수행해 왔지만 매번 땅굴 앞에 설 때마다 서로 간 얼굴만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굴속이…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으로 차마 두렵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실은 모두가 깜깜한 굴속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팀장인 승우가 먼저 붉은색 조명탄 몇 발을 굴 속 깊숙이 던져 넣어 터트렸다. 그런 후에 공기 압축기로 강력한 바람을 굴속으로 불어 넣음으로서 땅굴은 금새 거대한 굴뚝처럼 되어 버렸다. 곧 반경 6~7백 미터 이내의 푸른 초원에서 3줄기의 붉은색 연기가 빠져나와 하늘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제 적이 땅굴 속에서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3곳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 이다. 작전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신속히 시작 됐다.
승우는 아직도 붉은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3곳 탈출구에 그 구멍 마다 대원들을 2명씩 짝을 지어 들여보냈다. 그러나 자신은 짝 없이 홀로 깜깜한 터널 안으로 몸을 굴렸다. 대원들은 누구나 땅굴 안에서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적들이 숨은 굴속의 어둠은 그들을 한없이 두렵게 했다. 그래서 땅굴 수색병들은 서로 간에 무언(無言)의 약속을 한다. ‘땅굴 속에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로… 절대 전우를 그 안에 혼자 버려두고 철수 하지 않기로…….’
그래야만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는 자’들끼리 서로 신뢰가 쌓이고 의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적이 숨어있는 어두운 굴속은 언제 어디서 무슨 위험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숨 막히는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행동 하거나 굴속에 혼자 남겨지기를 원하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땅굴 세구멍에 대한 수색을 끝낸 대원들이 돌아왔다.
돌아온 병사는 3명이였다. 한 명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승우는 보이지 않는 얼굴의 파트너를 족쳤다.
“네 반쪽을 어디에다 잃어버리고 너 혼자 왔느냐?”라고,
녀석은 자신의 반쪽이 ‘깜깜한 굴속에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덪)에 걸려서 죽창(竹槍)이 깔린 깊은 함정 속으로 추락해 버렸다’고 말했다.
순간, 승우의 송충이 같은 검은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승우는 칼날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녀석을 향해 단호히 명령했다.
“지금 즉시 너는 네 반쪽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 굴속으로 다시 가 죽은 시체라도 건져 오너라. 그것이 싫으면 이 칼로 자결해라.”
승우는 녀석의 코앞에 M16 대검을 던져 주었다. 이렇게 승우는 녀석의 등을 떠밀어 또다시 터널 속으로 들여보냈다. 그것이 녀석과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녀석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 했었다.
승우는 지금도 녀석의 얼굴과 낭랑한 그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녀석은 늘 경상도지방 사투리로 말을 재빠르게 지껄였다.
“조장님예, 지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심더, 굴속으로 들어갈 때 마다 머릿속이 멍청해져 뿌리요, 바보처럼 말이요, 어두운 토굴이 지를 죽일 것만 같아예…조장님은 그런 생각 안 들어예? 안 그래예?”
10여 년 전에 승우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녀석의 이런 목소리였다.
‘무서워예. 조장님! 땅굴이… 어둠이… 지를 죽일 것만 같아예, 조장님은 안 그래예?’
‘씨끄러 임마, 너 지금 당장 그곳으로 기어들지 못해, 빨리 가서 시체라도 찾아오란 말이야, 그렇게 해야 넌 우리 전우야.’
승우는 지금 자신의 숨소리조차도 너무 크게 들렸다. 아마 지나친 긴장감 때문이리라. 일정하게 쉼 없이 들려오는 이 물 흐르는 소리… 알 수 없는 이 오싹한 냉기의 정체는 역시 공포 때문이었다.
승우는 공포심을 밀어내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소리를 크게 질러야 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대답해요.”
없어요~ㅇ 옹~옹~ 해요~ㅇ 옹~옹~ 어김없이 메아리는 되돌아왔다.
‘녀석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나 역시 땅굴속이 무섭고 한없이 두려웠지만 내가 팀을 이끄는 ‘리더’다 보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을 그때 억지로 등 떠밀어 그 굴속으로 재차 들여보내지는 말 것을……. 얼마나 무서웠으랴 얼마나 죽음이 두려웠으랴’
이때였다.
자신이 물속을 걷는 첨벙대는 소리에 석여 색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승우는 더럭 겁이 났다.
그의 내면에서 유혹의 속삭임이 계속 됐다.
‘자 이승우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 위험하다. 어서 돌아가……. 그만 돌아가… 어서 이 어둠속을 탈출해… 더 늦기 전에… 어서…….’
승우는 그제야 허리띠에 매 달린 방수용 야광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유혹은 여전히 계속 됐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를 위해… 너는 지나치게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어서. 그만… 포기해 버려라’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색다른 소리가 더욱더 분명하게 들렸다.
흐르는 물소리와 자신이 물속을 걷는 첨벙대는 소리에 섞여서 확연히 들여오는 사람의 목소리 “헬로우~핼프……. 핼프미~…….”
정신이 번쩍 났다.
승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저만치 검은 공간에 나타난 섬뜩한 여자의 형상이 희미한 캡 램프 불빛을 받아 어른거렸다. 승우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드디어 소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소녀가 몸을 떨며 승우에게 말했다.
“뭔가가… 제 한 쪽 발을 잡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래 알았다. 안심해라. 이제 내가 널 도와주마.”
흐르는 물이 아이의 가슴 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이가 주춤 주춤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다 무엇엔 가에 발이 걸려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아이는 물속으로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아이는 무서움에 절어 울지도 못했다.
울음조차 잊은 아이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간신히 또 승우에게 말했다.
“… 무엇이 제 발목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아요.”
승우가 아이를 진정 시키려 황급히 아이 가까이 다가갔다. 급히 서둘렀다.
그는 아차 하는 순간 길게 미끄럼을 탔다. 아이가 있는 주변 바닥이 유난히 미끄러웠다. 승우의 왼쪽 발이 미끄럼을 타고 어디론가 푹 빠지며 몸이 물속으로 곤두박질했다. 그 서슬에 아이도 동시에 넘어졌다. 둘이 함께 물속으로 잠겼다가 손을 마주잡고 같이 일어섰다.
“얘야, 괜찮니?”
“네, 괜찮아요. 흐~흑…….”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진정해라… 이제 우리는 아무 일없이 곧 구출될 꺼야.” 승우의 말에 아이가 더욱 더 흐느꼈다.
깜깜한 배수로 검은 물속에서 두 사람이 모두 무엇인가로부터 한쪽 발목을 잡힌 채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자,‐얘야, 내가 널 꼭 구해주마 나를 믿어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잘 되겠지요?”
승우는 곧 자기 머리에 쓴 전등이 달린 안전모를 벗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소녀의 머리위에 씌워 주었다. 대신 그는 잠수용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등 뒤 산소통의 벨브를 열었다.
그는 순식간에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 까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승우는 주저앉는 자세로 물 밑으로 내려갔다. 재바른 몸놀림 이었다
물속은 침전물이 가득했다.
수중 램프를 켰지만 불빛이 흐렸다.
그는 곧 자신과 소녀의 발밑을 살폈다. 그러나 잘 보이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왼쪽 발을 움직여 보았다. 발은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쉽게 빠지질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에 콘크리트 바닥에 설치된 무슨 철제구조물 사이로 두 사람의 발이 빠진 듯 했다.
승우는 먼저 소녀의 빠진 발을 장님처럼 두 손으로 더듬어 만져 보았다.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철 구조물의 두께가 만만하게 만져졌다. 용기가 났다.
그는 소녀에게 말하듯 자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 내가 곧 빼내 줄 테니 얘야 너무 무서워 말아라. 곧이야 잠깐이면 될 거야.’
승우는 전신에 힘을 모아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쇠붙이를 벌려보려 애를 썼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버둥거리며 용을 쓰는 동안에 흙탕물만 가득히 일어났다. 승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스패너를 지렛대로 이용해 보기로 했다. 스패너를 그 쇠붙이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눌러 버티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그는 팔목이 시큼거리도록 계속해서 그 지렛대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손과 팔이 아프도록…….
손과 팔이 너무 아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신음소리가 산소마스크를 통해 공기방울이 되어서 물위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산소가 쉭 쉭 소리를 내며 승우의 폐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승우는 계속해서 혼신의 힘을 두 팔에 집중시켰다.
더욱더 이를 악 물었다.
장갑을 끼지 않는 손과 손목이 시큼 거리고 아팠지만 그는 온 몸으로 더욱 힘을 썼다. 드디어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던 철제빔의 두텁게 부식된 녹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휘어지는 느낌이 왔다.
1미리씩… 2미리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휘어지는 그런 느낌이 었다. 금방 곧 잘 될 것 만 같았다. 승우는 한층 더 힘을 써서 젖 먹던 힘 까지 모두 쏟아냈다. 어깨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마와 목, 팔의 푸른 정맥이 실지렁이처럼 꿈틀 꿈틀 움직였다. 손과 팔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은 심장에까지 전달 됐다.
그런데… 쇠붙이의 틈 사이는 더 이상 벌어질 기미가 없는듯했다. 진전이 없었다.
그는 이제… 힘에 부쳐서 도저히 못할 것만 같았다. 그만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 어느 때… 부터인가? 승우의 귓가에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힘내세요…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요…….’
이상하다? 그는 이상했다.
그에게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는 자신의 몸 어디에서 이런 새 힘이 솟아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가 최후로 마지막 남은 힘을 두 팔에 모두 쏟아 부었을 때… 그때 소녀의 발이 그곳으로 부터 쑥 빠져 나왔다.
기진맥진 해진 승우가 물속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무의식 적으로 등 뒤로 손을 뻗어 등에 진 산소통 벨브를 잠궜다. 가능한 산소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목을 길게 뺀 다음 힘겹게 산소마스크를 벗었다.
어둠 속에서 소녀가 승우에게 안겨왔다.
소녀는 작은 새처럼 몸을 떨며 말했다.
“됐어요 아저씨 이제 발을 뺐어요, 어서 밖으로 나가요. 어서… 어서…….”
승우는 빨리 판단하고 재빨리 행동에 옮겨야 했다.
이제 맹그로브 산 계곡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물결이 곧 이 터널 안을 휩쓸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야광시계 분침은 벌써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소녀가 혼자서도 능히 행동할 수 있도록 승우는 소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만했다. 그는 소녀에게 물속을 걷는 요령과 로프를 다루는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요점만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그는 곧 바로 결론을 내렸다.
“자, 이제는 너 혼자 힘으로 이곳을 탈출해야한다.”
어둠속에서 소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얘야 나는 도저히… 너와 같이 갈 수 없구나. 나도… 너처럼 뭔가가 지금… 내 왼쪽 발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단다.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나를 도와주어야 할 차례야.”
“어떻게요? 제가… 어떻게…….”
“너는 이 로프를 잡고 계속해서 이 줄만 따라 가 거라. 그러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어. 가능한 빨리 움직여야 해, 20분 이내로 꼭 이곳을 벗어나야 하거든…….”
소녀가 20분이라는 말에 또다시 수긍치 못하고 머뭇거렸다.
“얘야 20분이 지나면……. 이 배수로 안은 물이 하나 가득  찰 거야.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네가 먼저 빨리 밖으로 나가 나를 구출해 줄 사람들을 불러 다오. 지금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마저도 산소통에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자 어서 출발해라. 빨리…….”
승우는 소녀의 머리위에 씌어준 전등이 달린 안전모의 끈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조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혁대에 걸려있는 안전 고리를 풀어 소녀의 허리에 든든히 채워 주었다. 이렇게 그는 두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소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잘 해 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하고 격려하는 말을 계속했다.
소녀의 표정에서 결연한 결심이 묻어났다. 드디어 소녀가 용감히 출발했다.
소녀가 로프를 잡고 물길을 거슬러 오를 때 배수로가 굽어지는 지점에서 불빛은 사라졌다. 깜깜한 터널의 어둠이 또다시 승우에게 몰려들었다.
깜깜한 터널… 터널작전을 손쉽게 종료(終了)시키기 위한 한 방법으로 승우 팀은 늘 굴속에 폭약을 설치했다. 베트남의 구찌 땅굴에서도 승우는 녀석과 함께 폭파장치를 했다. 그는 어두운 굴 안에서 온 신경의 촉수를 손끝에 모았다. 둘은 20분 후에 터지도록 폭약의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어 놓은 후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굴속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퇴각할 때는 랜턴을 켜 들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퇴각을 시작한지 10여분이나 됐을까? 들어 갈 때는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새끼 터널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승우는 그 굴속을 향해 전등불을 비추며 반사적으로 사격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터널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마터면 승우는 M16을 쏘아 갈길 뻔 했다. 그것은 정글복을 입은 피습된 아군의 시체였다.
시체의 목이 헝겁 조각으로 만든 인형 목처럼 앞으로 깊숙이 꺾여 있었다.
정글복 가슴에 새겨진 부대 마크위로 목에서 부터 흘러내린 검은 피가 바닥에까지 흥건했다. 놈들이 칼을 사용해 우리 수색대원의 목을 뼈만 남긴 채 단칼에 잘라버린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병사였다.
반쯤 열려진 병사의 눈꺼풀은 눈동자가 없는 텅빈 검은 구멍이었다.
병사의 목을 뒤로 젖히자. 거기에는 그것보다도 더 큰 목구멍이 뻥  뚤려 있었고 그 구멍 속에 아직 채 응고 되지 않은 검붉은 핏덩이가 가득 고여 있었다. 하마터면 승우는 토할 뻔 했다. 그때도 그는 파트너 녀석과 시비가 붙었다.
녀석은 병사의 시체라도 건져 본국으로 송환시키자 했고 승우는 이미 폭파장치가 된 땅굴 속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했다.
승우는 훈련 받을 때 배운 대로 우리는 빈손으로 어서 빨리 퇴각해야 한다고 녀석을 설득했다.
그러나 녀석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승우는 녀석을 위협해 겨우 굴 밖으로 끌고 나왔다.
녀석이 끌려나오며 승우에게 말했다.
“조장님예, 전우를 적진에 내 삐리고 도망치면 안 된다고 했잖아예, 조장님이 먼저 그리 말 했잖아예. 안 그래예?”
“야, 임마! 그건 땅굴에 폭파장치가 안 되었을 때 얘기야…….”
마치 녀석은 승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어깃장을 놓았다.
녀석은 가끔 야생 대마 잎을 담배처럼 피워 물고 환각 상태의 몽롱한 정신으로 혼자 땅굴 폭파 작업을 하겠다며 나설 때도 있었다. 공포로 부터 벗어나려 녀석이 대마초를 흡입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작전 병으로서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평소 승우는 자신의 마음속에 녀석의 행동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그런 잠재의식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자신의 의식 속에 녀석에 대한 그런 미움의 감정이 존재했었다면?
‘때를 맞추어 녀석이 자기에게 잘못 걸려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기가 녀석을 재차 땅굴 속으로… 그 사지(死地)로 내몬 것은 아닌지?
승우는 생각을 지우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소녀가 거슬러 올라간 물길을 따라 어둠속 저편에서 또다시 녀석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듯 했다.
‘조장님예! 전우를 내삐리면… 자신의 반쪽을 삐리면… 안된다고 조장님이 먼저 그리 말했잖아예, 안 그래예~에~에~에~에~~~~~~.’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승우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어둠의 공포가 점점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승우는 끝내 구조대의 구조를 받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무서웠다.
이 터널은 맹그로브 산(山) 계곡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수십 만 톤의 물 폭탄으로 이미 폭파장치가 된 터널이었다. 승우의 머릿속에서 계속 위험 경보가 울렸다. 경보와 함께 푸른 연기가 자욱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승우는 또다시 머리를 도리질했다.



 


 


 


3
푸른 연기(煙氣)가 오른 곳은 판문점 이었다. 북한은 같은 공산국가인 북 베트남의 전술교리를 본받아 땅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이 1973년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종전될 무렵이었다.
한반도에서 6.25전쟁 휴전 이래 새로운 남침 계획의 일환으로 드디어 북한이 남쪽을 향해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터널을 판 것이었다.
북쪽에서 파 내려온 그 남침용 땅굴을 우리 국군이 최초로 발견한 날이 그 해 11월 15일 이었다. 한미연합사(韓美聯合司)와 1군(軍)은 즉각 데프콘2를 발령했다.
군(軍) 작전처는 당연한 조치로 베트남 전쟁터에서 특수작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을 소집했지만 이미 예비군이 된 그들 중에 땅굴수색을 자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도 승우는 어김없이 녀석의 예의 그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우는 당일 13시에 육군 헬리콥터에 실려 파주군 고량포 비무장 지대에 투입 됐다. 놀랍게도 서울기점 52km, 파주 동북방 8km지점에 그 땅굴이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연천군 백합면 백령리였다.
승우는 GOP(*최전방 관측소)에 올라 베트남에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발견된 땅굴 입구 깊숙이 푸른색 조명탄을 계속 던져 넣어 터트렸다. 그런 후 아트라스 코프코 압축기로 강력한 선풍기 바람을 굴속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GOP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땅은 겨울철 마른잡초가 우거진 황량한 불모지였다.
드디어 그 마른잡초 더미 사이를 비집고 북녘 땅의 한 지점에서 푸른색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관측 장교가 재빨리 거리 계산을 했다. 직선거리 3천5백 미터 지점이었다.
북한군이 3천5백 미터 이상의 지하터널을 남침용으로 건설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후일 이 터널을 제1호 땅굴이라 이름 붙였다.)
이미 그날 오전에 지역 부대장이 땅굴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대장에게 수색을 지시해 다섯 명의 부하를 잃고 한 명의 병사마저도 행방이 묘연한 사건이 벌어진 이후였다.
승우가 재수색을 겸한 실종병사의 행방을 찾아 나선 것은 짧은 겨울해가 떨어질 시각이었다. 승우는 파트너로 옛 부하 한명과 함께 그 굴속을 들어섰다.
비무장 지대를 관통해 북녘 땅으로 이어진 긴 터널 입구는 높이가1.2미터 폭이 90센티 정도로 좁은 굴이었다.
휴대장비 검사를 마친 두 사람은 엎드린 자세로 포복 전진하기 시작했다.
승우가 총을 잡고 승우 짝이 손전등을 비추며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분담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막대기 끝부분에 손전등을 윗 쪽으로 매달아 겨우 어둠을 밝혔다.
막대기를 이용해 전등불을 사람 키 높이만큼 높인 이유는 어둠 속 저편에서 날아드는 총탄이 항상 불빛을 조준해서 쏘기 때문이다. 또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았을 때도 역시 적을 속이는 한 방법이 되었다.
천천히 조심조심 굴속을 포복하고 있는 두 사람은 공포의 열기로 땀이 비 오듯이 흘러 내렸다.
승우는 눈으로 흘러드는 땀방울을 손 등으로 훔치며 땅굴의 벽과 바닥을 열심히 살폈다. 행여 적군이 설치했을 지도 모를 부비트랩(*위장된 폭탄)의 견인 철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계속해 포복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까진 무릎과 팔꿈치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고 아팠지만 그런 정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어느 때 쯤 인가 둘은 휴식 자세를 취하기 위해 전등을 껐다.
불이 꺼지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의 공포가 곧 두 사람을 덮쳤다.
어둠 속에서 둘은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진정 시키려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는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쿵쿵 뛰는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았다.
굴속 어둠이 마치 자신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두렵고도 무서웠다.
휴식이… 휴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차례 더 휴식을 취하고 또다시 움직였을 때 승우는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거뭇한 핏자국을 보았다. 터널이 좀 넓어진 지점이었다.
핏자국은 암반이 굴착된 흰색 바닥에서 더욱 선명했다.
병사는 앉아서 변을 당했다. 땅굴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병사는 고개를 앞쪽으로 깊숙이 꺽인 자세로 죽어 있었다. 그의 전투복 상의에 쓰인 ‘민정경찰’이라는 네 글자가 목에서부터 흘러내린 검은 피로 얼룩져 읽을 수조차 없었다. 피는 가슴을 적시며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승우가 베트남의 땅굴 속에서 발견했던 그 어린병사의 죽음과 너무도 흡사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승우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맹세코 그 떨림은 두려움에서 오는 그런 부류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 해 겨울은 승우에게 너무나 추운 그런 겨울이었다.
또다시 승우는 세차게 머리를 도리질해 생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어두운 배수로 안에서 물소리 흐르는 소리 이외에 어떤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 승우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작은 빛이라도 무슨 빛이 보이지나 않는지… 눈이 아프도록 어둠속을 응시했다.
아직은 나타나지도 않을 구조대의 손길을 그는 그렇게 기다렸다.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소금기 섞인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눈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눈이 따가웠다. 눈물이 났다.
눈을 수없이 깜박이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때였다.
섬뜩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승우는 어둠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코발트 빛 두 눈동자를 분명히 보았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눈동자 가 드디어… 천천히… 신중하게… 이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점점… 승우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의 신경세포가 머리로 비상경보를 전달하며 아우성을 쳤다.
껴입은 잠수복 안으로 식은땀이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승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몽키스페너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어둠속 가까운 곳에서 빤짝이는 그 눈을 향해 묵직한 쇠붓치를 힘껏 휘둘렀다. 처~처엄~ 벙 잠시 요란한 물소리가 났지만…….
승우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물위로 헤엄쳐 떠내려 온 한 마리의 커다란 퍼슴(*쥐과 대형동물)이였다.
터널의 어둠이 또다시 평상을 되찾았다.
승우는 지나치게 체력을 소모했다.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몸이 떨리고 추웠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숨이 차오르고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등에 걸머진 산소통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아~아 이제 곧 산소 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깜박일거야…….’
먼 곳으로 부터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우는 그 소리가…거대한 물보라가 배수로 벽을 강타하며 기세롭게 흘러 내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금세 알았다. 허리춤을 더듬어 야광시계를 찾았다.
시계의 분침이 1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소녀를 떠나보낸 지 25분이 지났다.
소녀가 배수로를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잠시 그의 얼굴을 스치는 듯 했다.
이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산소로 최후 순간까지 버티어야 했다. 거센 물보라가 들이 닥쳐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 이 전에 그는 어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는 멜빵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다시금 산소마스크를 얼굴위에 썼다. 산소통의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물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가 막 물밑 바닥의 철 구조물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을 때 그 순간 머리위로 거대한 물기둥이 회오리치며 통과했다. 마치 물속에서 일어나는 태풍과도 같은 엄청난 위세의 소용돌이가 간발의 차이로 그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순식간에 지하 배수로 안이 물로 하나 가득 꽉 들어차 버렸다.
물이 가득 채워진 배수로 바닥은 마치 깊은 호수의 바닥처럼 어둡고도 고요했다.
승우는 부유물이 떠다니는 어두운 호수의 바닥에 발이 붙잡혀 가라 앉아 있었다. 붉은 빛 경고등이 검은 물결에 반사되어 깜빡였다. 산소통에서 공기가 부족 하다는 응급 신호였다. 그는 힘없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흔들리는 물결에 스스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호흡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쉬며 공기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의 머릿속은… 베트남과 판문점과 고생한 아내와 아들 녀석의 얼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베트남에서 먼저 보낸 녀석들을… 나는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또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면 녀석이… 나를… 이 아빠를 알아나 볼까?… 아내는 연금으로 여생을 쓸쓸히 살아가겠지?’
그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숨을 쉴 공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승우는 폐활량을 더욱 더 줄였다.
승우는 가능한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했다.
‘아마… 지금쯤… 수중 구조대원(水中救助隊員)들이 나를 찿기 위해 이 부근을 샅샅이 탐색하고 있을 거야.’
승우는 계속해 희망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줄어드는 폐활량으로 인해 가슴에 통증이 오기 시작 했다.
서서히… 의식이… 가물거렸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 구조대가 지금 날 찾고 있어… 조금만 더… 견디자.’
승우는 안간힘을 썼다.
어느 때 쯤 인가부터 가슴의 고통은 사라지고 다시 평안이 찾아 왔다. 깊은 물속의 고요한 어둠은 한없이 계속 됐다.
산소부족을 알리는 경고등 불빛마저 슬며시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을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산소가 바닥났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점… 점… 숨이 막혔다…….
가슴이 시렸다.
추웠다.
아내가 보고 싶다.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한없이 그리웠다.
따뜻한 생기를 나누어줄 사람의 체온이 몹시도 간절하다.
아내 사진을 넣어둔 지갑이 있는 곳을 더듬어 보기 위해 승우는 떨리는 손을 연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이미 팔과 손이 모두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반쯤 뜬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 한 방울이 잠수경안으로 뚝 떨어졌다.
눈물 고인 망막위로 그는 한줄기의 빛이 아련히 스며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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