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 : 프리데리케의 아이 : 천복자(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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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33회 작성일 10-04-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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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데리케의 아이
가작│천복자(독일)
내가 사귄 첫 독일 친구는 지그프리드 Siegfried와 프리데리케 Friederike다. 처음 독일에 와서 어학 코스를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 컴퓨터로 자료를 찾는 방법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컴퓨터로 자료 찾기를 마친 어떤 남자가 막 일어서고 있었다. 얼굴의 반은 길지 않은 수염으로 덮여 있는데, 착하게 생겼다. 용기를 내어 좀 도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찾는 책은 맞은편에 있는 언어학과 도서관에 있다면서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내가 찾는 첫 번째 책이 있는 자리를 알려 주고는, 더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다른 책들은 혼자서 찾을 수 있으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싱긋 웃으며 이 친절한 남자는 가버렸다. 책 찾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친다. 돌아보니 조금 전의 그 남자가 컴퓨터로 책 찾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거냐고 묻는다. 염치가 없어서 부탁하지 못한 속마음을 이 착하게 생긴 남자가 읽은 것일까? 컴퓨터 사용법을 배운 후, 우리는 도서관 아래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내려가서 그 남자는 맥주를,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내 주위 한국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한 나와 지그프리드, 그리고 그의 아내 프리데리케와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그프리드는 그 당시 제 2차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박사과정에 있었다. 법률학과 도서관에 고정석을 받아서 박사논문 쓰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마치 회사원이 회사에 출퇴근하듯 매일 아침 8시에 도서관에 나와서 오후 5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의 시간은 그의 아내와 함께 보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박사 논문을 쓴다는 사람이 어떻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마치 회사원이 직장을 나가듯이 공부를 하는 것일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했는데, 들쭉날쭉한 나의 공부하는 시간과 늘 고정적인 그의 공부 시간을 계산해 보니, 그가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것이었다. 나의 오전 4 시간의 어학 코스가 끝나는 시간이면 지그프리트도 점심을 먹는 시간이어서, 우리는 자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의 아내 프리데리케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금세공사
Goldschmied가 되기 위한 견습공 과정에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 애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리사는 가정과 양립하기에는 힘든 직업이어서, 손으로 두드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그 애의 취미를 쫓아서 금세공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장식품에 밀려서 전처럼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값비싼 귀금속은 여전히 금세공사의 손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졸업 작품으로 그 애는 철사 줄처럼 동그란 은테에 여러 가지 보석을 박은 특이한 모양의 목걸이와 귀걸이 한 쌍을 완성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손으로 만드느라, 덩치가 큰데 비해 작고 섬세한 프리데리케의 손은 언제나 꾀죄죄했다. 이들 부부를 통해 나는 낯선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생활에 비교적 쉽게 적응해 갔을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들 부모는 빌레펠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도시에 사는데, 프리데리케의 아버지는 은퇴한 의사고, 어머니는 간호사이었는데 결혼 후 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먼지 하나 없이 잘 닦여진, 맨 위층의 지붕 아래에는 넓은 파티 홀까지 갖춘 멋진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렇게 멋진 집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프리드리케가 집을 구경시켜주는 동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프리데리케의 어머니는 집에서도 옷에 구두의 색깔까지 맞추어서 차려입는 전형적인 도시풍의 부인이었는데, 점심식탁에 올랐던 가늘게 채 썬 산뜻하고 정열적인 황색 당근사라다의 새콤달콤한 맛은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지그프리트의 부모는 그와는 반대로 따뜻하고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촌사람들이다. 이들 부부는 아들 5 형제에 막내로 고명딸을 두었는데, 막내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결혼해서 대부분이 부모의 집에서 10-20 km 근방에 살면서 자주 왕래한다고 한다. 모임이 있을 때면 온 집안이 떠나가게 시끌벅적 각자 자기주장을 하며 다투다가도, 바깥에 문제가 있을 때면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친다고 프리데리케가 말했다. 차를 타고 도시 입구에 들어서면 길게 이어진 담장에 S T R A U T M A N N이라고 쓰인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맏아들 볼프강 Wolfgang과 함께 경영하는 농기구 회사명이자, 이들의 가족의 성씨이다. 최근에 이들이 만드는 신제품은 ‘젖소 마사지 기계’라고 한다. 풀을 많이 먹은 젖소들이 올록볼록한 점이 있는 큰 기계에 가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등을 비벼대면, 기분이 좋아진 젖소가 우유를 더 많이 내놓는다고,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환갑을 갓 넘겼을 이 얼굴이 붉고 건장한 할아버지는, 나와 마주한 짧은 시간에 동양과 한국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서, 나는 그의 왕성한 탐구욕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지그프리트의 박사과정과 프리데리케는 금세공사 견습과정이 끝나, 이들 부부는 빌레펠트를 떠났다. 지그프리트는 그의 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자그마한 휴양도시인 받 이부륵 Bad Iburg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자동차가 없는 나는, 하루에 두 번 운행되는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끔 이들 부부를 만나러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가진 탓인지 객실이 두 개 밖에 없는데도 기차 안은 텅 비어있어서, 마치 내 전용기차를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창 밖으로 푸르게 펼쳐진 밭들을 따라 눈을 주다보면 산꼭대기에 성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것이 라벤스부륵 Ravensburg이다. 옛날에 이곳의 영주에게 딸이 셋 있었다고 한다. 영주는 세 딸들에게 근처에 각각 성을 하나씩 지어주었는데, 이 성들은 세 딸의 이름을 따서 테클라의 Teckla 테클렌부륵 Teklenburg, 이다의 Ida 이부륵 Iburg, 라벤다의 Ravenda 라벤스부륵 Ravensburg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라벤스부륵은 지금은 성만 산꼭대기에 남아있지만, 테클렌부륵과 이부륵은 중세도시의 유산을 간직한 아름다운 관광도시이자 휴양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빌레펠트를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있는 토이토부르거 봘트가 Teutoburger Wald (튜톤족이 살던 숲이라는 뜻) 정점을 이루는 테클륵은 높은 산꼭대기 마을에서 주위의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빼어나고, 가을 햇빛 속에서 나뭇잎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하면 마치 마술사가 금가루를 뿌린 동화 속의 마을처럼 아름다워서, 저지대의 네덜란드 인을 비롯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세계인형박물관, 여름철에 연극을 상연하는 야외극장, 중세의 암흑시대에는 마녀라 간주된 여자들을 가두어 두었다가 화형에 처했다는 마녀탑도 있다. 이부륵에는 시계의 발전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시계박물관이 있는데, 정시가 되면 뻐꾸기시계를 비롯한 온갖 시계들이 있는 대로 각각 제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한다. 지그프리트는 이곳 이부륵에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지그프리트의 변호사 일이 어느 정도 괘도에 접어들자 프리드리케는 임신을 했고, 검소한 그 애의 성격대로 몇 달을 청으로 된 멜빵 임신복 하나로 버티더니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래도 뜸하게나마 왕래가 계속되었는데, 한동안 그 애로부터 소식이 뚝 끊어졌다. 마침 성탄절도 가까워 오고해서, 그해 여름 석사과정 논문을 쓰면서 머리 식히기로 시작해 본 ‘비단에 그림그리기 Seidenmalen’를 해서 큰 사각 마후라를 보냈다. 곧 프리데리케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놀라운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 동안 둘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정상아가 아니란다. 아이는 소위 ‘몽고병자 Mongoloid’라 불리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한다. 이 병은 학문적인 용어로는 ‘트리조미 Trisomie 21’이라 하며, 이는 부모의 유전자중 21 번 염색체 이상으로 생긴다. 이 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보통 지능이 낮은 저능아로 정상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우며 키가 작고, 얼굴과 특히 눈매가 동양인처럼 가는 모양을 하고 있어 흔히들 ‘몽고병자’라 불린다. 대개 나이가 30 세 이상의 산모에게서 이 유전병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다하여, 자기는 단 한순간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단다. 프리데리케는 건강해서 아이를 낳고 곧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왔을 때 그 애는, “아니야! 이건 내 아기가 아니야!” 하고 소리쳤단다.
남자아기 인형을 사 가지고 프리데리케를 만나러갔다. 그 애는 그 사이 출산 때의 충격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다시 씩씩한 얼굴을 하고는 열심히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프리데리케는 이제 3 개월이 된 아이의 온 몸을 은박지로 싸고는 주무르면서, 아이에게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정상아는 몸의 감각이 저절로 자라나지만, 이 병을 가진 아이는 이렇게 외부적인 접촉을 통해서 감각을 일일이 일깨워줘야 한단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마사지를 하며, 집에서는 매일 마사지를 하는데, 노력을 많이 기울이면 보통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보낼 수 있고 거의 정상아로 키울 수 있다며 프리데리케는 희망찬 얼굴을 했다. 벽에는 “나를 몽고병자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 이름은 프레데릭Frederick 이랍니다.” 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었다.
그 다음 해 여름 그 아이를 방문했을 때, 프리데리케는 집을 짓느라고 바빴다. 여기는 거실, 여기는 부엌, 여기는 아이들 놀이 방……. 이곳저곳을 보여준 다음 그 애가 말했다. 지붕아래 3 층은 그냥 공간을 남겨 두는데, 이는 프레데릭을 위한 것이란다. 그 애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지붕 밑에 그 애만의 공간을 꾸밀 것이고, 그 애가 자기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면, 집 앞에 함께 마련해둔 공터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복지시설을 지을 거란다. 그러면서 그사이 네 살이 된 큰 애가 자기 동생을 얼마나 예뻐하고 잘 보살피는지를 열심히 자랑한다. 아이를 돌보려면 육체적으로 몹시 힘이 들 터인데도, 장애아를 두었다며 난처해하거나 그늘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냥 보통의 아주 행복한 가정이다.
독일에서는 장애인이나 지체부자유자를 길거리에서 드물지 않게 만난다. 이는 이들이 한국과는 달리 숨어살지 않고, 가정과 사회에서 자기자리를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는 장애인들도 정상인처럼 살 수 있도록 국가가 각종 복지시설이나 장애인 고용법 등의 정책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장애인과 일반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들은 당당하다. 보통 사람들 역시 무언가 도와 줄 일이 있는가를 물어보지, 피하고 적대시하거나, 거리감이나 멸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가족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린다.
내가 독일에서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장애인은 안겔리카
Angelika다. 보통 겔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지금은 벌써 30세가 다 된 여자인데, 트리조미 21번 장애인이다. 처음 독일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어학코스의 선생님을 통하여 한 독일가정을 소개받았다. 아저씨는 대학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아주머니는 우리나라의 중학교 격인 하웊트슐레의 Hauptschule 영어 선생님인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들과 김나지움에 다니는 쌍둥이 딸이 있었다. 이들 부부 카를로스 Carlos와 바바라 Barbara는 따뜻하고 교양이 깊으며,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만나면 늘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밤 한 두 시가 되어서야 아쉽게 헤어지고는 했다. 이들은 천장이 높다래서 박물관 같은 느낌을 주는 로마 풍의 넓고 오래된 집에, 많은 독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세를 산다. 남편을 만나게 되기까지 그 후 몇 년을 독일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자 가족명절인 크리스마스 때마다,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초대받아 이들 가족과 성탄전야를 함께 보냈다.
그런데 그 성탄모임에 나보다 더 오래 전부터 항상 초대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바바라 아주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에다 Edda 아주머니와 그녀의 아들 볼프강, 그리고 그녀의 딸 안겔리카다. 에다 아주머니는 초등학교의 음악과 종교 선생님이다. 남편은 이름 있는 지휘자인데, 젊은 소프라노 가수와 눈이 맞아 아줌마와 아이들을 떠나갔다 한다. 에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항상 밝고 다정한 미소로 빛나고, 그녀의 눈길은 깊고 잔잔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천사가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불행의 조건을 많이 가진 이 여인의 얼굴이, 이렇게 꾸미지 않은 온화함으로 빛나는 것이 처음에 내게는 커다란 의문이었다. 그러나 안겔리카를 조금 더 알게 되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아마 항상 어린아이 같은 장애인 딸을, 늘 웃음과 사랑으로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그대로 그녀의 행동양식이 된데서 연유하는 것일 거라는. 소위 저능아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태도에는 인간의 때 묻지 않은 원초적인 순수함이 그대로 배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띠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에다 아줌마의 미소는, 매일 이 천상의 비밀을 조금씩 엿보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일까?
이 후펜딕씨네 가족과 처음으로 보낸 성탄 모임에서, 나는 안겔리카를 만났다. 그 때 사춘기의 나이에 접어든 안겔리카는, 모두의 사랑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도 하고, 음식을 먹는가하면 그 날 받은 선물들을 만져보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시간이 꽤 흘러서 아저씨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겔리카가 피리를 들고 나와서는 “카를로스, 카를로스 우리 합주하자.” 한다. 우리는 피아노 주위를 빙 둘러섰다. 안겔리카가 피리를 입에 물고 비스듬히 서서 Hänchen klein ging allein (나비야 나비야)를 불기 시작한다. 그 애의 연주는 높낮이는 없고, 장단만 있다. 그러나 후펜딕 아저씨는 안겔리카의 높낮이가 없는 피리 연주를, 마치 시대의 명연주가를 반주하듯이 때로는 여리게, 때로는 힘차게 따른다. 둘러선 우리들은 짝짝짝 박수를 하고, 안겔리카는 으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답례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21세가 되었을 때 안겔리카는 에다를 떠나 가까이 있는 복지시설에 들어갔다. 안겔리카는 자기와 비슷한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과 생활하게 되었는데, 아주 만족해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다고 했다. 에다 아주머니는 안겔리카의 방을 그대로 두어서, 그 애가 원하면 언제든지 주말은 집에서 지내다 간단다. 이번 여름 후펜딕 아저씨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안겔리카가 얼마 전 가벼운 심장발작을 일으켰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어 그 동안 살던 2 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사했으나, 활발한 그 애의 성격대로 곧 새 그룹에 적응했을 뿐 아니라, 그 곳 동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네가 그 애에게 사랑을 많이 주어서 길렀기 때문에 안겔리카가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 받는가 보다고 했더니, 에다 아주머니는 그게 아니라 “안겔리카는 정말로 아주 특별한 아이”라며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짓는다.
얼마 전 남편 동료의 생일파티에 갔을 때다. 집안을 들어서는데 유독 활발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고 있는 한 남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짧고 뭉툭한 모양의 제대로 자라지 않은 손이 어깨에 붙어있다. 임신부의 약물사용 부작용으로 기형아가 된 경우이다. 1960년 초 독일에서는 콘타간 Contergan 이라는 수면제를 임신기간 중에 복용한 많은 산모들이, 기형아를 출산했다. 지금 나이가 40대 중반에 접어든 이 장애인들은 대부분 팔이 없이 기형의 손이 어깨에 붙어 있거나 발이 기형이다. 나는 저녁 내내 올라프 Olaf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폭포수가 흐르듯 거침없이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학과 역사를 전공했고, 지금은 교수의 조수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하는 일을 주로 하며, 박사과정에 있단다. 유럽 공동체가 (EG) 지원하는 학술부문에 프로젝트를 신청했는데 아마도 곧 허락이 날 것 같으며, 그러면 자기가 살고 있는 뮌스터 Münster를 하나의 예로 전자통신망을 통한 자발적인 시민단체의 발달을 조사할 거라고 한다. 여자 친구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형아로써의 그늘 같은 것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토마스 크봐스토프 Thomas Quastoff라는 성악가가 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열창하는 이 남자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러나 카메라가 무대 전체를 조명하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미소년을 연상하게 하는 얼굴을 지나 시선을 아래로 하면, 10 cm도 안 되는 아주 짧은 팔이 보이고, 팔 길이에 맞추어 재단한 양쪽 옷소매 밖으로 유난히 길게 뻗어 나온 가운데 손가락 세 개가 보인다. 키는 보통 사람들의 절반 정도 밖에 못 미친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까닭에 걸음 또한 매우 불안정하다. 40 대 중반의 이 성악가 역시 콘타간 약물 부작용으로 기형아가 된 경우이다.
그의 부모는, 이미 그가 어릴 때 성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성악가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가 25 년 전에 하노버 Hannover 음악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을 때, 연주하는 악기가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데트몰트 Detmold 음악학교를 졸업한 이 성악가는, 기다란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해 보여준다. 신체가 불구라는 가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항상 대중을 앞에 서야하는 성악가로써 직업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이 남자의 모습은, 작은 일에도 좌절하곤 하는 우리 보통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가끔 TV에서 ‘장애인에 대한 실제적인 고용 차별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막으라’는 장애인들의 시위를 보면, 법적인 동등권의 보장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장애인들 역시 실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는 해도, 이곳의 장애인들의 삶은 한국의 장애인들의 삶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한국의 장애인들이 사회적 차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여전히 가족들의 보호의 울타리 아래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사회적인 삶의 기회를 포기하고 있는데 비해, 독일의 장애인들은 비교적 사회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장하며 산다. 국가는 가능한 한 이들이 보통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여러 형태로 지원을 한다. 장애자 복지시설, 휠체어를 이용할 수 있는 공공건물의 장애인용 출입구, 모든 주차장의 가장 편리한 위치에 장애자용 주차공간의 설치……. 그러나 이 외적인 조건에 앞서,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멸시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보통 독일 사람들의 의식이, 이들의 삶이 그늘 속에서 숨어살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신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보통사람이 영위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개인적인 노력과 인내가 요구되기에, 이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그날 저녁 올라프는 자기는 다리에도 결함이 있어서 뼈를 보조하는 쇠를 갈아 넣는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며 웃었다.
얼마 전 알록달록 밝고 환상적인 색깔의 어린이, 청소년의 옷을 많이 생산하는 이탈리아의 ‘베네통 Benetton’ 이라는 회사가 옷을 선전하는 플래카드에 ‘트리조미 21’ 을 가진 여자아이를 모델로 삼아 화제가 되었다. 이 회사는 전에도 유고 내전의 한 장면, 또는 기아와 전쟁을 피해서 이탈리아에 배를 타고 밀입국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나라로 되돌려 보내지는 광경 등을 선전 포스트로 사용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도 기형적인 것을 이용해서 시선을 끌려고 하는 파렴치한 상술의 일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왜 잘 생긴 사람들만 모델이 되어야 하는가, ‘트리조미 21’을 가진 사람들도 모델이 될 권리가 있으며, 자기와 다른 것은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의 의식이야말로 비민주적이며 구시대적이다, ‘트리조미 21’을 가진 여자애가 방울모자를 쓰고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엽지 않은가? 하고 반론하는 사람들로 의견은 양분된다.
화제의 주인공인 카타리나의 Katharina 어머니는 카타리나가 사진을 찍는 작업과정을 아주 즐겼다고 전해준다. “카타리나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걸 좋아하죠. 그 애는 성격이 활달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을 아주 즐긴답니다.” “녹색 윗도리를 입고 빨간 모자를 썼어요. 청색 외투도 입구요.” 카타리나가 TV에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왜 모양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해서, 우리는 어디에나 정상인, 비정상인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 나를 몽고병자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 이름은 카타리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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