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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편소설] 너와 나의 부활 (황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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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77회 작성일 10-06-0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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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부활

   함박눈이 춤추듯 내렸다. 막사에 나있는 작은 창들은 하얀 솜뭉치로 도배된 느낌이었다. 토요일을 맞아 외출병들이 떠들썩하게 떠나자 영내는 적막에 싸였다. 혼자 막사를 지키던 주길만 상병은 눈이 가져다주는 좋은 상념으로 인해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눈송이처럼 가벼워진 주 상병은 관물함에서 가장 깨끗한 군복을 꺼내 입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맨발의 청춘’(신성일 엄앵란 주연) 주제가였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밤거리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언제 들어 왔는지 당직 윤 중사가 헛기침을 하며 “봐라! 니는 그 노래밖에 모르나?”라고 초를 치는 바람에 노래는 끊겼다. 주 상병은, 내 좋아하는 유행가는 번번이 중도에서 짤린다며 잊지 못할 옛일을 떠올렸다. 이 노래가 곧 외출해 만나려는 연인과 첫 만남을 만들어 주었었다.

   남산중학교 3학년인 주길만은 면전에선 골목대장이요, 뒷전에선  동네깡패로 불렸다. 길만은 누구와 싸워도 다리를 땅에 찡 박은 듯 버틴다고 해서 ‘찡’이란 별명이 붙었고, 고만 또래의 대장 노릇을 했다.  

   찡은 부활절을 한달인가 앞두고 머리통이 엄청 크다고 ‘짱구’라 불리는 안철동으로부터 교회에 가면 도너츠와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꼬임을 받았다. 항상 인상을 써 ‘찌그리’로 불리는 김경수가 아버지 담배를 슬쩍한 것이 있는데 뒷산에 가서 빨자고 했으나 깡보리밥에 김치로 허기를 때운 길만에겐 도너츠가 눈앞에 아른거려 결국 짱구 뒤를 따랐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날은 예배를 본뒤 곧바로 간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 특별 찬양에 출연할 재주꾼을 뽑는다며 한 명씩 노래를 부르게 한 뒤 빵을 집어가게 하고 있었다. 찡은 그냥 가고 싶었지만, 뱃속에서 쪼르르 소리가 나니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교회 문턱을 넘은 적이 있는 짱구가 시기적으론 안 맞지만, “단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를 음정, 박자 무시하고 소신껏 부른 뒤 도너츠를 움켜쥐었다. 찡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교회가 처음인 찡은 난감했다.

   심사위원은 두 명이었다. 40대의 남자(조남진 장로)와 앳띤 처녀(오혜련 교사)가 심사 용지까지 갖추고 진지하게 앉아 있었다. 찡이 배고픔 때문에 체면이 깎일 순 없다며 밖으로 나가려는 찰라였다. 오혜련 선생이 지휘봉으로 찡에게 아무거나 한번 해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쯤되면 찡도 오도꼬(사나이) 기질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손을 교복이자 유일한 외출복인 바지 주머니에 질끈 쑤셔 넣은 뒤 눈을 감았다. 어쩔수 없이 애창곡(?)이 흘러 나왔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밤거리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찡은 억센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는 바람에 더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조 장로가 험한 얼굴로 꺼져 버리라는 묵언의 암시를 보냈다. 중도 하차했으니 빵을 집을 자격이 없을 것 같아 힘없이 나오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오 선생이 “가능성 있어”라며  도너츠 두개를 건네주었다. 찡은 “빵쪼가리는 얻었지만, 오늘 쪽 팔렸다. 씨…”라고 욕설로 끝맺지를 못했다. 지휘봉 선생이 따사로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찡은 곧 도너츠 사건을 까맣게 잊었다.

   상도동과 사당동을 이어주는 산길은 비포장이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장화가 없으면 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소위 하꼬방들이 성냥갑처럼 엎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후진 것이 찡의 집이었다. 찡은 6. 25때 경찰관이던 부친이 공산당에게 납치 당해 간 뒤 홀어머니가 노량진 시장에서 생선튀김 가게를 해, 여동생(주길순)과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찡의 엄마는 일요일 수입이 제일 짭짤했지만 교회에 가기 위해 가게문을 닫았다. 엄마는 찡이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채찍을 드는 법이 없이, 다만 아들의 두 손을 잡아 성경책 위에 놓게 한 뒤 기도를 했다. 그때마다 다음 요절을 꼭 외우기에 찡도 따라 암기하게 됐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엄마가 팔다 남은 튀김을 갖고 집에 오면 밤9시가  넘곤 했다. 찡이 동네 애들을 못살게 구는 것도 배고픔을 잊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꽃샘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던 음산한 저녁이었다. 어째 오늘은 동생 길순이가 밖에 나와 배고프다고 징징거리지 않지?  하며 고개길을 뛰어 올랐다. 찡이 방문을 여는 순간, 맛있는 음식 냄새가 그의 허기진 배를 고문했다. 제기랄! 옆집에서 무슨 잔치라도 하는 모양이지하고 투덜거리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여자가 허술한 부뚜막 근처에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저, 누구신지요?” 찡은 그녀를 뜯어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기억 안나나 보구나.” 초면인데도 반말이었다. 찡은 다른 여자 같았으면 당장 “왜 온밥 먹고 반말이요”라고 대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뭔가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젖는 찡에게 3주전 교회에서 만났었지 하며 미소를 보냈다. 왈칵 고마움이 밀려 왔다.

   그녀는 가끔 교회를, 아니 도너츠를 기웃거리는 짱구를 통해 길만의 집을 알아냈고, 자신도 가정형편이 신통치 않아 칼치 자반과 쌀, 김치를 조금씩 가져 왔을 뿐이라고 얼굴을 붉혔다. 주일학교 교사의 심방 정도로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했다.  오 선생은 벌써 두 그릇째 비우고 있는 길순에게 천천히 많이 먹으라며 찡에게도 수저를 집어 주었다.

   오 선생은 싫다는 찡의 숙제를 도와주었다. 또 찡의 가장 처지는 과목인 수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기초를 모르면 영원히 싫어지는 것이 수학이라며 중학1, 2학년 공식부터 차근 차근 일러주었다. 몇 번의 만남 이후 찡은 차츰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그녀의 칭찬이 그의 진도를 거들었다. 오 선생은 초급대학 1학년 학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데 1주일에 이틀은 찡에게 무료로 할애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찡에게 엄마가 다니시는 교회에 나가라고 권했지만, 찡은 오 선생이 재직하는 교회를 골랐다. 엄마는 말을 안 듣던 아들이 아무 교회라도 나간다니 대만족이었다. 찡이 동네애들 코피 터트리는 일이 없어졌다. 힘들던 수학을 외운 공식을 이용해 하나씩 풀어 가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교회 출석 3주째, 오 선생이 찡에게 성경책을  선물했다. 속표지에 ‘성경만이 진리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오혜련’이라 써 있었다. 찡은 ‘자유’ 보단, 오 선생님의 친근감에 감복돼 틈나는대로 읽었다.

   찡이 오 선생 덕으로 교회와 학업에 모두 신바람이 날 즈음 교회를 떠나야하는 호된 일이 닥쳤다. 교회행정을 쥐고 있는 조 장로의 아들 성국이가 발단이 됐다. 오 선생은 성국이의 가정교사였는데, 찡은 성국과 한반이었다. 꼴찌이던 찡의 성적이 우등생인 성국보다 훨씬 나아지고, 오 선생이 찡을 무료지도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조 장로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소나기가 기다려지는 무더운 주일이었다. 성국이가 찡한테 “오늘따라 생선냄새가 심하다”고 학교 성적 순위 바뀜을 화풀이했다. 예전의 찡이 아니었다.  웃으며 말했다. “단벌 신사거든. 이해해 줘.” 곁에서 듣고 있던 찌그리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찌그리가 안 보인다 했더니 뒤뜰에서 성국이를 박살내고 있었다. 찡이 뛰어 갔을 땐 이미 늦었다.

   곧 조 장로가 달려 왔다. 보통 아들인가, 3대 독자다. 그는 아들의 코피를 닦아주고 있는 찡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구둣발로 찡의 뒷머리를 힘껏 찼다. 무방비이던 찡은 바닥에 얼굴을 찧고 피투성이가 됐다. 찡은 일어서며 장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때, 오 선생이 물기어린 눈으로 찡에게 돌을 버리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찡은, 왜 나는 오  선생님 앞에선 작아지는지 몰라하며 돌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날 저녁 오선생이 찡 집을 찾았다. 조 장로의 위로금이 든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찡은 돈을 죽어도 받기 싫었지만 오 선생에게 불리할 것 같아 한발 후퇴했다. “정 그분이 돈으로  사과하고 싶다면 몇 달 밀린 제 학교 월사금을 처리해 달라고 해 주세요.” 찡은 흥부가 형수한테 밥주걱으로 뺨을 맞은 뒤 몇 개 붙은 낟알을 뜯어먹는 궁상이 떠올라 괴로웠다.

   찡이 최고명문 겨레고교에 합격한 것은 남산중학교 창립이래 최초였다. 거리가 멀어 걱정했지만, 학교 근처 화동에 사는 부자들이 숙식을 하면서 애들을 가르쳐 달라고 줄을 섰다. 자신의 힘으로 월사금을 해결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길순이도 돌볼 수 있다는 것이 흐뭇했다. 찡은 지도 학생이 나가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오 선생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다.

   찡은 고3이 되면서 대학 입시 공부가 딸렸지만,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가정교사를 중단할 수 없었다. 거리에 놓인 전파사 스피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성급하게 들려지던 늦가을이었다. 학교 정문 앞엔 여러 곳에서 휘날려 온 낙엽이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찡은 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시인들은 좋겠어. 시상(詩想)을 위해  애인과 정겹게 가을 길을 걸을 수 있으니까.”

   “너도 애인과 걸으면 될 것 아냐, 응.” 곧 구별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오혜련-. 찡은 꿈속에선 오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은지 벌써 오래 됐다.

   전화 통화는 있었지만, 거의 2년만에 만난 혜련은 학생들이 휘파람을 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찡과 팔짱을 꼈다. 근처는 시끄럽다며 좀 먼  빵집으로 가려던 혜련은 찡이 자꾸 시계를 보자, 덕성여고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앞서 들어갔다.

   “가르칠랴. 입시 공부할랴, 힘들지?”

   “견딜만 해요. 누님이 뒤에서 지켜봐 주시니 용기가  나요.” 그녀는 찡이 선생님에서 누님으로 호칭을 바꾼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했으나 곧 다른 고민들로 덮어졌다. 대학은 학비 문제로 1년전 휴학했고, 아빠가 모친이 사망하자마자 곧 새엄마를 들여놓는 바람에 집을 뛰쳐나온 상태였다. 학벌이 최우선이던 사회 구조여서, 그녀의 ‘초급대 휴학’ 이력서로는 정상적인 취직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낮엔 경양식 식당, 저녁엔 생맥주와 통닭을 파는 술집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찡은 누님이 안 하던 화장을 하고 좀더  세련되는 등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으나 물어 볼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찡은 대학에 입한한 뒤 누나에게 애인이 없다면 자신이 빈자리를 채워 주겠다는 생각을 하다 씩 웃고 말았다.

   찡이 또 시계를 봤다. 애들 가르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혜련이가 핸드백에서 시험지 뭉치를 꺼냈다. 받아보니 서울시내 유명 대학 작년도 입시 문제지였다. 몇년 전 것은 출판돼 나온 것이 있지만 작년도 것은 구할 수 없었다. 혜련은 찡의 손을 한번 잡은 뒤 얼른 오뎅 값을 치르고 가을 속으로 사라져 갔다. 뒤 한번 안 돌아보고…

   어느 참고서보다도 누나가 구해준 문제지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찡은 서울 법대에 거뜬히 합격했다. 그룹 미팅을 하랴, 학교 근처에 또 다른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랴, 정신이 없었다. 찡은 대학 입학 후 남들처럼 놀고 싶었으나 빨리 좋은 곳에 취직해 엄마를 생선 냄새에서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남아 있었다.

   고3 못지 않게 책을 팠다. 찡은 사법고시에 취미가 없었다.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검사란 직업이 추해 보였다. 졸업 예정자에게도 시험 자격이 주어지는 5성(星)물산에 응시했다. 몇 백대 일의 힘든 경쟁이었지만, 찡은 수석합격 했다. 짱구와 찌그리가 마련한 축하연에서 “시험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자신 있어.” 찡은 기고만장했다.

   무역 업무를 익혀 갈 무렵이었다. 인사과장이 찡을 불렀다.  정부에서 병역 기피자를 근절한다며 재벌기업부터 병역을 필하지 않은 남자는 절대 뽑아선 안 된다는 지침이 내려 왔다고 설명했다. 단, 병역을 마치고 계속 입사를 원한다면 현재의 무역부로 복직되고, 군복무 동안 본봉에 절반 정도는 지급된다고 덧붙였다. 찡은 논산훈련소를 택했다.

   황산벌 진흙바람 속에서 가장 힘든 PRI(소총 사격훈련)를 마치고  돌아 온 훈병 주길만에게 중대 서무계가 엽서를 던지고 갔다. ‘사나이의 땀을 국가에 받치고 있는 그대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혜련.’ 무엇보다 자신을 그대라고 불러준 것이 신기했다.  기쁠 때와 입시 등 힘들 때마다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돌봐 주던 혜련씨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녀가 찡의 대학입학, 졸업, 취직 때마다 보내 주었던 편지처럼 이번 것도 발신지는 없었다.  

   이등병 계급장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다. 논산 배출대에서 원주에 있는 모 부대로 전출되는 트럭 안에서 길만 이병은 38선을 혼자서라도 지킬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학물을 먹었다고 찡은 대대 공급계 조수로 보직을 받았다. 연대에서 군화, 군복, 화랑담배, 세탁비누 등을 수령해다가 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혜련씨와 연락이 끊긴 것 외에는 군생활도 할만했다.

   영내에도 교회가 있다는 걸 찡은 몰랐다. 주일 아침 식사 후 밀린 빨래를 하고 있는데 “교회 갈 사람 집합!”이란 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주 이병이 군복을 차려 입고 모이라는 곳으로 가려는데 동기생이 허리를 잡는다. “야, 고참만 가는거야.” 주 이병은 “다른거야 고참 우선이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야 만인 평등이잖아”라며 고집을 부렸다. 모인 장병들의 모자를 보니 병장들뿐이었다. 주 이병은 교회에서 돌아 온 뒤 사역(눈치우기 등)을 피하기 위해 갔다는 누명을 쓰고 원산폭격, 팬츠 바람에 철모 쓰고 연병장 돌기 등 심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주 이병은 계속 주일마다 교회에 갔다. 4번째 주일날, 어떤 기압을 줄 것인가 고민하던 주임하사가 주길만이란 명찰을 유심히 보더니 “야 이놈아는 ‘주의 길만’을 따르겠다고 태어 날 때부터 맹세한 모양”이라며 훈방(?)을 시킨 뒤 교회가는 길이 편해졌다.  

   주 이병은 공급계 일을 금방 익히며 사수 고용수 병장에게 신임을 받아 한달에 두세번 서울로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엔 짱구, 찌그리와 어울렸지만, 차츰 혜련씨를 찾는데 혈안이 됐다.  

   일병으로 진급할 즈음 주길만은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진부령에  대형 군인트럭이 다니는 길을 트기 위한 공병대를 지원키 위해 파견된다.  2개 중대 병력은 작은 도시 원통에 임시막사를 지었다. 군부대가 이동하면 새로운 술집, 여관, 잡화상 등이 필수적으로 생긴다. 이곳에서 주 일병은 주중에도 마음만 내키면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서울은 엉망으로 변했다.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빙자한 장사속이요, 놀자판이었다. 찡은 혜련씨와 만났던 빵집 등을 다시 찾아가 보며 추억을 되살렸다. 거리가 연인들로 요란할수록 찡은 외로움으로 멍든 가슴을 안고 귀대 버스에 오르곤했다.

   주 일병은 주둔한 곳의 이름이 원통인 것이 점점 마음에 안 들었다. 몇 차례 왔었던, 밥과 술을 함께 파는 여염집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였지만, 겨울 해는 벌써 떨어진지 오래다. 북괴 무장공비가 강원도 산기슭에서 발견된 뒤 군인 주둔 인근 지역은 등화관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주인 아줌마는 부엌에 있고 처음 보는 아가씨가 쟁반에 멸치볶음 등의 기본 안주와 촛불을 조심스레 받쳐들고 드럼통을 뒤엎어 놓은 상(?)에다 갖다 놓는다.  

   단숨에 한잔을 비운 주 일병이 그녀를 유심히 본다.  휴지처럼 구겨진 인생이었지만, 지성미만큼은 뚜렷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왔다.  주 일병은 머리를 흔든다. 혜련씨의 망령 탓이야.

   소주 2병째를 시켰을 무렵 서먹함이 덜해진 탓일까,  주 일병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그녀가 그의 명찰까지 확인하곤 감전된 듯이 놀라 부엌쪽으로 숨어들었다. 주모가 아우성쳤다. “손님이 요상한 곳이라도 만지든?” 그날은 두말없이 일어서야  했다.

   술집 아가씨를 전에 어디서 봤을까 고민하는 것이 주 일병의 일과가 돼버렸다. 얼굴은 세파를 헤쳐 오느라 거칠었지만, 맑으면서도 슬픔이 아련히 배어 있는 눈동자! 누구였더라? 주 일병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사흘만에 다시 술집을 찾았다. 촛불을 켜놓곤 자세히 볼 수 없기에 이번엔 오후 3시쯤 해가 훤히 있을 때, 창문으로 그녀가  상을 치우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달려들어가 손목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거부 반응은 잠시였다.

   “...혜련씨군요…” 찡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계속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 찡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눈 속은 이미 통곡하고 있었다. 오혜련이었다. 둘은 얼마동안을 얼싸 안고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엔 눈물도 안 나왔다. 만나 기쁘고, 만나서 슬픈 그런 재회였다.  

   혜련이는 우느라 말문이 막히곤 했다. 폭력배에 속아 팔려 갔다가 간신히 도망 나왔다 등이 찡의 귀에 들어 왔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고개 숙인 그녀가 지휘봉을 든 오 선생으로, 수학공식을 일러주던 과외선생으로, 입시 문제지를 입수해 주던 은인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원통의 밤거리는 어둠이 깊어 갔고, 주 일병의 마음속 어둠은 더더욱 깊어 갔다.

   밖으로 나오니 싸락눈이 얼굴을 때렸다. 주 일병은 주님의 눈물이 얼어붙어 흩날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길만의 마음은 전날 밤과는 정반대로 밝아만 갔다. 그의 손에 그녀가 찡에게 주었던 성경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녀에게 갈 차례였다. 찡은 전날밤 혜련의 친필 밑에 이렇게 썼다. ‘당신이 준 성경을 통해 사랑을 배웠습니다. 이젠 당신을 사랑할 차례입니다. 길만’

   불도조(Bulldozer)의 부속을 팔아먹던 공병 하사가 헌병대에 걸리면서 모든 부대원의 외출이 중지됐다. 2주 만에야 술집을 찾을 수 있었다. 혜련은 머리와 얼굴을 매만진 탓인지 예전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우리 오랜만에 눈길을 걸어요.” 찡의 웃음은 한참만이었다.  

   “눈들이 너무 많아요.” 혜련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계속 존댓말을 썼다. 문을 나서던 혜련이 강한 햇볕에 잠깐  비틀하자, 찡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개미처럼 가늘었다. 살도 좀 찌게 만들어야지.

   양지바른 곳에 앉자 찡이 청혼을 했다.  제대하면 5성물산 무역부로 재입사하는데 미국지사 뉴욕에 가서 살수 있을 것이라고 장래의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혜련이는 희롱하지 말라고 펄펄 뛰었다. “인간이 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에 발사된 빛을 보는 것뿐이듯, 당신도 과거의 제 환상을 단지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술집 작부이고 나이가 더 많다는 현실을 왜 외면하세요. 당신의 배우자는 따로 있어요.”그녀는 완강했다.

   찡도 지지 않았다. “오늘 제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다 당신 덕이예요. 아마 그대가 없었다면 지금쯤 폭행범으로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을 겁니다. 내겐 당신이 곁에 있어 주어야 해요. 우리가 결혼할 수 없다면 주님의 교훈도 ‘사랑 타령’이 되고 말거예요.” 찡은 다음주 약혼반지를 끼워주겠다고 굳세게 약속했다.

   “야, 보거래이. 니 애인이 기다리다 눈사람돼 버리겠다. 얼릉 가봐라. 잉” 다시 난로에 몸 녹이러 온 윤중사가 주 상병을 재촉했다. 혜련씨 손에 끼어 줄 약혼반지를 따뜻하게 덥히며 옛 생각에 빠졌던 주 상병이 현실로 돌아왔다. 주 상병은 그녀의 술집까지 뛰었다. 나와 있던 주모가 주 상병을 보자 뒤뚱거리며 맞으러 왔다.

   “그 애 떠났어요. 뭐가 급한지 입던 옷에 성경책만 가지고 어제 저녁…” 찡은 주모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 방으로 뛰어 갔다. 없었다. 주모가 작은 쪽지를 넘겨주었다.

   ‘눈길에서 제 허리를 받쳐 주던 손길, 저는 부활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어요. 제가 혹시 당신을 도와 준 것이 있었다면 그날로 다 보상받았어요. 기차 철로는 서로 만나지 않아야 둘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행복하다는 것, 아시죠? 제발 찾지 마세요. 잠시지만 행복했어요. P.S. 주신 성경 덕분에 아빠를 용서했어요. 혜련’

   메모지는 얼룩이 심했다. 그녀의 눈물이 만져졌다. 버스 정류장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베드로의 “도미네!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절규가 찡에겐 “혜련씨 어디로 갔어요”로 바뀌었다. 눈길에 무릎을 꿇었다. 말은 죽을 때 비로써 무릎을 땅에 댄다는 말이 생각났다. 찡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민들을 올려다보고 잠시 놀랐다.  그들이 받쳐 든 우산이 박쥐의 날개처럼 보였다.

   주길만은 제대 후 5성물산에 재입사해서도 주말만 되면 혜련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겨울은 속절없이 또 찾아왔다. 길만은 이번 주말은  그 동안 소홀했던 충청도 지방으로 가봐야겠다며 지도책을 펴들고 있었다. 그때 동료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참 오랜만이야. 나 성국이야.” 낯선 이름이었다. 찡의 당황을 눈치챈 듯 말을 이었다. “조 장로 아들, 성국이…”

   다방 안은 ‘안개 낀 밤의 데이트’란 경음악으로 가득했다.  안개가 끼면 혜련씨는 남의 눈을 의식 안 해도 될텐데라고 찡은 어딜 가나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했다. 성국은 포목상을 한다고 했다. “아직도 오 선생을 찾고 있냐?” 그의 첫마디가 찡을 긴장시켰다. 얼굴을 성국의 코밑으로 바짝 디밀었다. “같이 장사를 하는 친구의 동생을 오 선생이 가르치다가 갑자기 그만 둔 적이 있데. 얼마 뒤 자기가 내려와 있는 친오빠 집으로 밀린 사례비를 보내 달라고 했다는군.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혹시나 해서 주소를 알아 왔지.”

   혜련이 오빠는 전북 부안에 살고 있었다.  길만은 호남고속도로 태인에서 내려 영업 택시를 대절했다. 운전기사는 백산을 지나자 “이곳이 갑오농민 전쟁의 농민군 집결지였고 고부쪽으로 싸게 내려가면 녹두장군(전봉준)의 생가를 만난다”고 인간문화재(?) 자랑에 열을 올렸다.

   오빠는 30대 후반으로 양계를 제법 크게 하고 있었다. 이름을 오만석이라고 알려 주는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동생을 잡으러 온 술집의 끄나풀인줄 알고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길만이가 중학시절부터 군대시절의 만남까지 소상히 설명을 하자 조금씩 곁을 내주었다.

   만석씨는 옆집에서 가서 닭 한마리를 구해 와 삶아 내왔다. 자신도 수천마리의 닭이 있지만 정이 들어 못 잡는다고 했다. 하찮은 동물과도 정이 들면 이럴진데, 길만은 자신이 혜련씨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다. 만석씨는 동생 있는 곳을 계속  숨겼다. 큰 기대를 했었기에 그만큼 실망이 컸다. 그때 놀다 오는지 초등학교 1학년쯤의 만석씨 아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찡이 혹시나 하고 사온 학용품과 해태제과 등을 주었다. 만석씨가 기뻐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이 났다는 듯, “실은, 혜련이가 조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편지를 얼마 전 보내 왔는데, 보낸 주소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며 아들더러 봉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찡은 기도를 올렸다. 자신만을 믿고 설친 걸 진심으로 회개했다.

   있었다. ‘갈보리 갱생원 교사 오혜련.’ 주소는 강원도 양양시 논화면으로 되어 있었다. 찡의 마음이 양양해졌다.

   양양에 도착하자 회사 당직자에게 전화를 넣어 며칠간 출근 못한다고 통보했다. 11월말인데도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산길을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목이 긴 장화와 등산복을 그녀 것도 함께 샀다. 육포, 건빵 등 비상 식량도 배낭에 넣었다. .  

   눈밭에서 늦은 점심을 건빵으로 때우고 1시간 가량 더 가서야 철조망이 보였다. 처음엔 목장이려니 했는데 가까이 가니 갱생원 간판이 보였다. 정문 수위가 면회가 안 된다고 했으나, 명함을 본 뒤에는 흔쾌히 원장 방까지 안내를 했다. 다행히 이곳은 5성재벌 동병철 회장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세운 것이었다.

   원장은 처음엔 혜련이가 있다는 것조차 확인해 주지 않았다. 길만이가 직장의 이사급 상사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혜련씨 가족의 허락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곳을 알았겠냐고 다그치자 특별 케이스라며 하산을 허락했다. 단 오 선생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조건을 달았다.

   원생은 물론 선생도 조잡한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마다 난로 연통이 있었으나 연기가 나오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일요일이어서 원생들은 큰방에 모여 뜨개질을 하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다. 혜련은 길만이가 준 성경을 보고 있다가 놀람을 눈물로 표시했다. 말도 꺼내기 전에 안 된다며 머리를 저었다.  

   길만은 무릎을 꿇은 뒤,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힘들게 임자의 손가락에 끼어 주었다. “혜련씨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동정도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제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중3때 도너츠를 먹여 줄 때처럼…” 해가 서산에 뉘엿한 걸 보면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혜련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걸 안 듯 일어섰다. 짐이래야 조그만 가방이 다였다. 원장은 원생들의 동요를 걱정한 듯 오 선생이 가장 가련히 여기는 영자만을 불러냈다. 포주에게 맞아 절름발이가 된 영자는 정문까지 쫓아오며 소리 죽여 울었다. 그들이 정문을 20미터 이상이나 벗어났는데도 영자는 석고처럼 서있었다. 혜련이 가방에서 ‘그 성경책’을 꺼내 찡에게 눈으로 승낙을 받은 뒤, 되뛰어가 영자의 손에 쥐어 주며 귀엣말을 했다.  영자가 눈물을 닦았다.

   양양 숙소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자꾸 혜련이가 눈길에서 쳐졌다. 찡이 반 강제로 혜련을 등에 업었다. 눈송이처럼 가벼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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