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창 밖에는 바람이 있었다. : [독일/김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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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115회 작성일 10-04-3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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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김순실] 창 밖에는 바람이 있었다.
“급한 승객이 있어 좌석 몇 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꼭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는 손님이 계시면 자리를 양보해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시는 분에게는.....”
또다시 방송이 흘러나왔다. 벌써 세 번째였다. 수옥은 손짐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석을 양보하는 승객에게는 5백 마르크를 보상해 드리며 오늘 저녁의 숙식은 물론, 내일은 런던관광을 시켜드린 다음 서울까지 책임지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기내는 빈틈없이 차 있었고, 수옥은 승객들의 발과 무릎을 살피며 중간통로를 빠져나왔다.
자리를 양보하고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그녀까지 모두 일곱사람이었다. 그녀를 포함해서 아이 둘을 앞세우고 내린 여자와 007가방을 든 노신사와 나머지 두 사람은 배낭족으로 보이는 일본인 학생들이었다. 수옥은 여자의 존재에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프랑크푸르트의 공항은 적당히 한산했다. 문득 북적대던 김포공항의 정겨이 떠올랐다.
‘그리로 가야 하는데....’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발걸음은 이미 서울행 비행기를 빠져나온 뒤였다. 수옥은 잠시 당혹감을 느꼈다.
저만치 베를린 방향으로 가는 방향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 길로 나가 비행기에 오르면 한 시간이 못되어 동독 쇤펠트 비행장에 가 닿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 ‘조선민항’이 기다리고 있었지.’
그녀는 기억을 털어 내듯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만 하루, 귀국시간을 늦춘다고 해서 그 사이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문득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얼까 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었다. 그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하 것에 등을 떠밀린 채 그녀는 비행기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밖엔 항공사에서 준비한 봉고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옥이 일해오가 함께 식당을 거쳐 호텔에 당도했을 때에는 도심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호텔은 생각보다 고급스러웠다. 방에 들어서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손짐을 내려놓고 입은 채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새하얀 천정이 다른 세계와 관계를 차단하듯 시야를 막아왔다. 치대도 벽지도 천정까지도 티끌 하나 없는 하얀 방이었다. 그 차가운, 완벽할 정도로 정결한 느낌이 펑 뚫린 허공처럼 상실감을 몰고 왔다.
‘3년 전 남편과 함께 일주일을 지냈던 평양의 그 호텔방도 이런 하얀 방이었지. 고려호텔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기억이 가물거렸다. 침실이나, 거기 딸린 거실의 꾸밈새에 수옥은 잠시 얼떨떨했던가 보았다. 모든 점에서 낙후외어 있을 줄만 알고 있던 그녀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웃으면서 말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왜, 북한엔 호텔도 없을 줄 알았던가?”
수옥은 얼른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세형은 거기에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범민족 남북통일 음악제’의 계획이 발표되던 그 날, 남편 한세형은 밤이 늦도록 잠들 줄을 몰라 했다. 해외교포가 참석할 경우 영사관에 신고만 하면 된다고 남한 정부는 전에 없이 관대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옥에겐 통일이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몸을 뒤척이던 세형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보게 되는구만. 여보, 우리도 갑시다. 가서 그 화해의 무대에 서서 내 마지막 노래를 불러보고 싶소.”
순간 그녀는 꽝 하고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 마지막 노래라고?’
남편인 이미 암을 선고받은 몸이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멀쩡한 그의 입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국내의 정치 현실에서는 되도록 떠나 살자고 마음먹고 있는 그녀였다. 더구나 남북간의 문제엔 한사코 말려들지 않겠다던 그녀의 마음이 그 순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옥은 음악도 한 세형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장성해 가는 지금까지도 간호보조원의 직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무게의 거의 두 곱이나 되는 독일 노인들을 돌봐주고 있는 그녀의 직업은 생각보다도 더 힘이 들었다.
최소한 제 몸을 추스릴 수만 있으면 들어 가길 한사코 꺼려하는 양노원, 독일 노인들은 그곳으로의 길이 이 생에서의 마지막 행보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젊었을 때 부어놓은 연금으로 그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지만 실제로 요구되는 양노원의 한달치 입원비는 그것의 곱절도 넘는 돈이었다. 부족한 나머지 액수는 시나 국가에서 지원해 주고, 시에서는 다시 자녀들의 수입액을 면밀히 조사해서 비용을 부가시켰다.
수옥은 짐짝처럼 축 축 늘어져 있는 그들의 커다란 몸뚱이를 요리조리 굴려가며 씻겨주는 일이나, 옷을 갈아 입혀주는 일, 중환자의 대소변을 치우는 일 따위엔 이미 이력이 나 있었다. 끼니때를 챙겨서 일일이 떠먹여주는 일은 그 중에서도 약과라고나 할까. 하지만 시트를 갈아주는 일에 가서는 아직도 진땀을 빼는 그녀였다. 무거운 환자들의 몸뚱이를 들이 내리고 들어올리고 하면서 그녀의 육체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
“국내의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오.”
수옥은 아직도 간간히 그때의 일을 기억에서 버리지 못했다. 그 무렵, 저녁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세형의 얼굴은 술 기운이 없는데도 벌겋게 달아 있었다.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어요.”
국내에서 돌아가는 민주화의 열기는 이미 그 정점에 와 있는 듯 했다. 독일방송은 연일 한국 사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교민들의 태도에는 여전 변함이 없었다.
수옥은 한탄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노동인력으로 나온 세대. 6,70년대의 반공논리를 진리처럼 다져안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녀는 이해하고 싶었다. 게다가 낯선 남의 나라에 와서 등 기댈 곳이라곤 그나마 자국의 공관이라고 믿고 있는 그들이었다. 공관의 움직임에 눈치껏 돌아가는 그들의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정의를 위해 몸으로 부딪쳐 온 민중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그렇고,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도 그 반공이라는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게토화 되어 가고 있는 듯한 교민들의 실상을 향한 그의 한탄도 모두 정확한 지적이긴 했다.
그러나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것을 듣고 있으려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박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피장파장이 아닌가요? 소위 진보를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들에게서도 문제는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수옥이 말을 끊고 나서 잠시 남편의 반응을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일운동을 한다면서 정작 일은 뒷전이고 자신의 이름이나 내세우려고 하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게다가 남의 이야기는 아예 들으려고도 않고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 아니냐구요. 어떻게 보면 그들은 누가 더 극단적인 말을 하느냐를 두고 마치 목소리 높이기 경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잖아요. 게다가 거리낌 없이 남을 모함하고 배척을 해서까지 자신의 터를 굳혀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냐구요. 물론 다가 그렇다는 건 이니에요. 개중에는 대의를 위해서 사심없이 일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세형은 아내의 말이 전혀 근거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엇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그런 모함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툭 하면 대사관의 앞잡이라느니, 반동이라느니 하는 말로 잘 되어가는 단체를 갈라놓는 일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마치 자기만이 유일하게 통일운동을 하고 있다는 듯이 행세하려 들었다.
“하지만, 여보”
세형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문을 닫았다. 수옥은 그런 남편의 낌새에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가 내친 김에 듯 참아두었던 말문을 마저 터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런 사람을 보고 뭐라는지 아세요? 통일을 빙자한 장사꾼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통일 안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라고도 한답니다.”
결국 반공 일색으로 굳어 있는 교민들의 분위기나 그, 잘못된 통일인사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고 싸잡아 통박하는 아내의 말에 세형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까 마치 통일운동 그 자체가 나쁘다는 말로 들리는구만.”
그는 잠시 후 타이르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오. 그런 잘못된 것들로 해서 통일운동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서는 안 되지 않겠소? 문제는 나만이 옳다는 그 생각 때문인 것 같소. 나의 욕심을 내세우기 위해 상대방의 생각이나 상황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요. 남북이 진정한 통일을 원한다면 그 당사자들부터가 좀더 관대해져야 한다고 나는 봐요. 나의 욕심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와 다른 입장, 즉 상애방의 입장에 대해서 귀를 기우링는 관용이랄까 그런 여유 말이오. 일찍이 남북의 만남이 번번히 결실을 보지 못하고 여기에 까지 오고 만 것은 남과 북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잖겠소? 그런 점, 우리는 독일사람들로부터 배워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일사람에게서 배운다고요?”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귀담아 들으려는 그 관용을 두고 하는 말이오.”
그 무렵, 해외 동포사회에서는 이미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독교 남북 및 홰외동포들의 만남.’ 그것은 독일에 그 근거를 둔 ‘기독교 통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이룬 최초의 업적이었다.
1981년 11월 오스트리아 빈 대학 슈바이처 하우스는 아침부터 술렁대고 있었다. 3일부터 6일까지, 남북한을 비롯해서 미국, 캐나다, 스웨덴, 독일 등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 12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특히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부 간에서 계획된 것이 아닌 순수한 민간인 의 차원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최초의 만남이라들 했다. 북쪽에서는 북한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 몇 사람과 문예인을 포함한 70여 명이 민간인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북한에도 민간인의 입장이 따로 있는 거냐고 수옥이 귓속말로 남편에게 물었을 때 그런 의문들은 처음부터 접어두기로 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는 타이르듯이 일러주었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개회식이 기독교의 예배로 대체된 것이었다. 수옥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살며시 남편을 돌아보았다.
“여러분은 저희를 만나기 위해, 저희는 여러분을 만나 보고자 오늘 이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사회자의 그 환영사가 장내를 누비고 흘렀을 때 회의장 안은 흡사 불이 당겨진 듯이 달아올랐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것은 남도 북도 따로 없는, 한 민족 한 형제가 만나는 바로 감격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열띤 감동은 전혀 그들만의 것이었다. 같은 시간, 회의장을 둘러싼 하더스도르프의 거리는 살벌하게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과 프래카드를 준비해 두었는지 손에손에 격문이 내리갈긴 깃발을 든 또 다른 한국사람들이 온종일 그곳을 에워싸고 서서 ‘남북회담 반대’ 와 판에 박힌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독일의 교민사회에서는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이 소문처럼 하나 둘 나돌기 시작했다. 부모 형제를 만나고 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전쟁 중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그래서 의용군으로 끌려 갔다거나, 월북해 갔을 거라는 뜬소문과 함께 남한에서는 오래 전에 이미 죽은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까지도 하나 둘,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리곤 했다.
‘오빠의 소식도....?’
수옥이 드디어 그 일을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르는, 케케묵은 그 일을 이제 와서 새삼 들쑤셔낸다는 것이 그녀에겐 내키지가 않았다. 수옥은 생각을 털어 버리듯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 어머니의 영상이 되살아 왔다. 해질녘이면 아득히 들판 너머로 눈길을 모으시곤 하던.... 그 어머니의 환영은 삽시간에 그녀를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과도 통하는 부채의 감정이었다.
‘생각만 있다면 하다못해 생사 여부라도 알 수가 있으련만.’
그 어머니의 눈길이 문득 자신을 향해 박혀온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생각을 굳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북한땅은 언뜻 보기에 남한과 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보시오. 저기. 평양의 불빛이 보이는구만.”
세형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도 수옥은 별다른 느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때 자신만의 생각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내가 만일 이대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면 내 자식들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순안비행장엔 수옥이 내외를 위한 아내원이 운전기사와 함께 나와 있었다. 한산하게 비어 잇는 공항은 마치 희미한 어느 기억 속의 간이역을 연상케 해주는 적요마저 깃들어 있었다. 공항에 내린 손님은 그들 내외뿐이었다.
바쁜 일정이 흘러갔다. 그들은 매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이곳저곳으로 안내되었고, 예정대로 음악제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면서 꽉 짜인 나날을 보냈다. 세형은 간간히 한숨을 짓기도 하고, 때론 탄성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옥은 피곤 때문인지 별다른 감회가 일지 않았고, 오빠에겐 연락이 닿았을까, 언제나 상봉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들곤 했다.
나흘째 되는 날은 마침내 세형이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 첫 번째 곡이 무사히 끝나고 그가 택한 두 번째의 가곡 ‘금강산’의 전주가 피아노의 고음을 타고 장내를 누비고 흘러 나왔을 때였다.
수옥은 찰라적으로 엄습해 오는 어떤 고립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온 우주에 덩그러니 버려진 듯한 이상한 소외감이었다.
‘저러다가 쓰러지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불거지는 남편의 목 울대를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가 꽃다발을 안은 채 천천히 무대를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그 모든 광경을 마치 망막 속에 담아가듯이 멀찌기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수옥이 오빠를 만난 것은 평양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속으로는 거의 체념하고 잇던 중이라 그런지 프론트에서 걸려온 안내원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안내원은 수철이 지금 호텔에 당도해 있다고 했다.
순간 그녀는 쿵 하고 가슴이 내려 앉았다. 속으로는 어쩌면 만나지 않게 되길 바라고 있었던지도 몰랐다.
세형의 팔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수옥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프론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것이었다.
‘저 사람이 바로.....?’
순간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저 사람은 아닐 거야. 어떤 이물질이 가시처럼 껄끄럽게 목에 걸려왔다. 나름대로 상상을 안해 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눈 앞에 그 실체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육친이란 어차피 의미가 없는 거라구. 그건 내가 태어나가도 전에 있었던, 곰팡내 나는 인연에 불과한 거란 말이야.’
수옥이 마치 떼를 쓰듯이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데 세형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늦추지 않고 떠밀 듯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듬직한 손을 뻗어 사내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수철의 체구는 더욱 왜소했다.
문득 그녀는 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듯이 말했다.
“저,저..... 수옥이에요. 오빠의 누이 수옥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수옥이.....? 수옥이라구? 기럼, 기럼 수님이가 아니란 말이가?”
“그래요, 오빠........ 전, 수님이언니의 바로 밑의 동생이에요. 제가 대신 오빠를 만나러 왔어요.”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오빠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그녀는 뜻하지 않게도 울먹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날 만나레 와서? 기럼, 수님인...... 갸두 왔갔구만........”
그의 시선이 얼른 수옥의 등 뒤를 더듬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수철의 얼굴이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수옥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오빠가 살아 있다는 걸 아시면 어머닌 아마도....”
“오마니? 네레 방금 오마니라구 기랬네? 기런 니야기 다신 꺼내지두 말라우. 기런 말. 내레 닞은 지 오래 되서야.”
그리고 나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옥은 그 돌변해 버린 사태에 아연했다. 자신이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버렷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의 표정은 조각을 빚어 놓은 듯 여전 굳어 있었다.
그런데 언뜻 그의 눈 언저리에서 번들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순간 그녀는 어느 뻐근한 것이 목 안 가득히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꾸만 치밀어오는 그 뜨거운 것을 삼키며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그러자 거기, 그를 이루고 있는 세월의 테가 켜켜이 흔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나온 세월의 굽이굽이 아니, 어쩌면 그것은 억년(憶年)의 세월을 두고도 결코 삭혀질 수 없었을 그의 항변이었을 것이다.
“처남, 이제 그만 방으로 올라가십시다.”
세형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수옥은 침대를 오빠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소파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러나 잠은 쉽게 와줄 것 같지 않았다.
수철이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철이 말했다.
“수님이 갼 어캐 사네?”
“언닌,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지요.”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낮으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갸를 업고 다니멘 잠자리를 잡아주기도 하고 산딸기를 따 멕이멘선 들판을 헤짚고 나녔었디.”
수옥은 오빠의 턱이 가늘게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므레 좁혀진 그의 눈은 지금 수님이의 그 아깃적 모습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는 누이를 업고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던 일곱 살박이 한 소년의 티없이 맑던 눈망울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철이 말했다.
“넌, 오마닐 빼닮았구나.”
그것은 감정을 잠재운 듯한 목소리였다.
수옥은 문득 그의 눈에 잠겨있는 그리움을 읽었다. 수님이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아니, 그 모두를 앗아가 버린 잃어버린 세월을 향한 그의 아픔을.
“어머닌 지금도 오빠의 생일상을 차리고 계시지요.”
수옥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동태찜을 만들 때면 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넉두리도 이젠 기억에 새로웠다.
‘이건 너희 오빠가 좋아하는 거이디. 그거면 밥 한 그릇을 개눈 감추듯이 해치우곤 했으니낀.’
그때 어머니의 얼굴엔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길을 가다가도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면 문득 넋 잃은 듯이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시던 어머니.
수옥이 밑으로 난, 수한이는 컴퓨터를 만지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고 안성에서 지금 처자식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누이의 이야기에 그는 한숨을 토해냈다.
어느덧 창문이 희부여니 밝아오고 있었다.
“오빠의 사정은 어떤가요?”
수철의 눈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그녀는 말머리를 돌렸다.
“나?”
그는 갑자기 딴청을 부리듯이 되물었다.
“........”
“난 , 기래도 운이 좋았던 게야.“
그는 이내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 동니에서 내 사정을 아는 니들이 나서서 증언을 해주었으니끼니. 다른 니들에 비하면 그래두 행결 사정이 편했던 거디. 기럼 편했구 말구.”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는 이야길까. 수철의 표정이 어느새 편안해지고 있었다. 증언해 주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이 월남해 간 것이 아니라는 그의 사정을 주변에서 말해 주었다는 이야기인가 보았다.
지금도 골골하는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속병을 앓았고, 그 속병이 좋다는 약초를 캐러 산골을 헤집고 다녔는데 그것이 생계에도 적지 않게 보탬이 되곤 하던 무렵이었다. 길을 떠나면 보통 보름에서 한달이면 돌아오던 그의 산길이 그해 봄엔 떠난 지 두 달이 넘도록 소식이 감감했다. 초여름으로 접어든 얼마 뒤에야 전해온 소식이 그가 산길에서 미끄러져 옆구리를 다친 뒤, 아직도 자리를 못 뜨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길로 입곱 살박이 수철이를 친정에 맡겨 놓고 젖먹이 수님이만을 등에 업은 채 부랴부랴 남편 찾아 집을 떠났는데 전쟁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그런 생이별의 사정을 이웃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던 것이다.
오빠는 다행이라는 말외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려 하지 않았다. 어린애가 혼자 남았는데도 그런 증언이 있어야만 했느냐고, 만일 오빠가 월남가족으로 판정이 내려졌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였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무얼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도 그는 넉넉해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수옥은 안타까웠다. 그에 대해선 안개 속을 더듬듯 여전 아리송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다가선 듯한 기분을 그녀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삶의 빛깔 속으로 한 걸음 깊숙이 다가서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수옥이 호텔 식당에서 오빠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났을 때 그들을 비행장으로 안내 줄 안내원이 그곳에 와 있었다.
차가 발동을 거는데 수철이 차창 곁으로 다가왔다.
“네레, 부탁 하나 들어주간?”
깡마른 수철의 얼굴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눈이 폭 젖어 있었다.
“오마니레, 아바지레 오래오래 사시라고 기렇게 말씀 좀......”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차를 따라 수철이 따라오며 외쳤다. 목소리가 바람에 끊어지며 이어졌다. 차는 이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성큼 뒤로 밀려 나가자 수옥은 몸을 돌려 얼른 뒷창에 매달렸다.
“잘들 가라우.....”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손짓을 하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작아져 갔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느새 그는 한점, 점이 되고 그리고 그곳엔 안개만이 자욱하게 소요했다.
잠에서 깨어난 수옥은 얼른 시계를 보았다. 잠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샤워를 하고 다시 자리에 들까 하다가 그녀는 호텔 방을 나섰다.
“주무시지 않으셨군요.”
로비엔 여자가 혼자서 앉아 있다가 그녀를 보고 반가운 듯이 말을 걸어 왔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봐요.”
희뿌연 낮의 여명(餘明)을 깔고 아직도 밝음이 남아 있는 창 밖으로 잠시 눈길을 주며 수옥이 말했다.
“내일은 런던 구경을 간다지요?”
“그러게요. 난데없이 관광객이 된 기분이군요.”
여자와 함께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수옥의 마음은 어느새 푸근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 고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얼굴이 마치 연쇄반응이라도 일으키듯 머리를 쳐들어왔다.
‘독일에서 태어나 부모의 나라를 모르고 살아가는 내 자식들. 남의 나라의 교육을 받고 그들의 논리와 문화 속에서 뼈대가 굵어가는 그들의 문제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세월이었다. 아이들도 이제는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는 평생을 이땅에서 살아낸다 하더라도 결코 좁혀질 것 같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과의 사이를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독일에서 흘려버린 세월의 길이가 갑자기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덮쳐왔다. 세형이 살아 잇을 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여기들 나와 계시는군요.”
수옥이 잠시 생각에 잠겨드는데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함께 내린 007가방의 노신사였다. 그는 밤거리를 구경하고 오는 길이라며 프랑크푸르트는 이제 손색이 없는 국제도시가 되어 있다고 감탄조로 말했다.
‘이 노신사는 무얼 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나와 마주 앉은 이 여자는?’
수옥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서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언어가 통하고 느낌이 통하는 사람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이미 그득해져 있었던 것이다.
문득 신기루를 본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가늘게 눈길을 모았다. 들국화가 너불어져 있는 신작로 길이었다. 계집애가 타박타박 혼자서 걸어가고 있다. 땀에 젖은 아이의 손바닥엔 몇 송이의 들국화가 쥐어져 있고 아이는 생각난 듯이 코끝으로 그것을 가져가곤 한다. 아무도 없는 그 신작로 길로 빈 짐차가 덜커덩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는 그것이 남겨놓은 희뿌연 흙먼지 속으로 코를 박는다. 휘발유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으로 감겨드는 것이 감미롭게 그녀를 유혹해 오는 것만 같다. 휑 뚫린 그 길의 끝간 곳은 아득히 안개의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수옥의 눈 가에 고운 주름이 밀려들었다. 고행을 떠올릴 때면 으레 들국화 너울거리는 그 신작로 길을 생각하는 그녀였다. 몸져눕기 전에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염원은 날이 갈수록 열망으로 부풀어 갔다. 가슴 위쪽이 후벼파듯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는 더욱 그랬다.
방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윤 영사의 말이 되살아 왔다. 가슴의 조짐도 심상치가 않았다. 로비에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땐 말짱하던 그녀였다.
‘부친상을 당해 귀국했다가 모처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는 박씨의 일이 되살아 왔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건 벌써 10년이나 전의 일인데...’
수옥은 불안을 다독이다 말고 이번에는 반 년 전에 한국을 다녀왔다는 이선생의 이야기를 되살려냈다.
‘글쎄요. 국내에서 돌아가는 일은 하두 변동이 심해서 종잡을 수가 없군요. 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게 아닐까요?’
모른다고 하는 그의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결국 영사관에 찾아가 다짐을 받고 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귀국하시면 곧바로 신고를 하십시오.”
수옥은 잠시 윤 영사를 바라보았다.
“신고라니요?”
“북한을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되묻는 그녀를 빤히 쳐다 보았다.
“설사 그곳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온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윤연사는 못을 박듯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안기부에선 지금 아주머니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공책 한 권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나 계십니까?”
말의 효과를 살피려는 듯 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눈길을 던졌다.
수옥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목소리가 전에 없이 떨려나왔다. 그 순간 마치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북한에만 다녀오면 모조리 빨갱이가 되어서 돌아온다고, 영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수옥은 자꾸만 되살아오는 오빠의 환영을 훔쳐내야만 했다.
‘인민의 나라. 그 어디쯤에서 지금 그는 살고 있는 것일까?’
“세상이 그런 걸 전들 어떻게 합니까. 그야 뭐 알아서 하십시오. 우린 절차를 일러드리는 것뿐이니까요.”
윤 영사는 바늘로 찔러주듯이 그렇게 결론을 지어 주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경우엔 거주지 공관에 신고만 하면 된다고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그녀는 입 속으로만 굴리면서 영사관을 나왔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 3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엔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벌써 절반이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녀 일행이 차에 오르자 버스는 곧바로 예정된 관광 코스를 밟아 출발했다. 몇 번인가 그녀는 일행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고 다시 또 달리고, 그리고 어디에선가 점심을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편두통을 앓았다.
그런데 이번엔 가슴까지 울렁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증상이 심해진 것은 관광 코스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어쩌면 그녀가 한국 방문을 마음먹던 바로 그때 이미 불안은 그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동생의 편지가 되살아 왔다. 수옥이 내외가 북한을 다녀온 일로해서 동생은 형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는 사실도 그녀는 뒤늦게서야 알앗던 것이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상이 어쩌면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깨달음처럼 가슴에 지펴왔다. 그러고 보니 전엔 없던 증상이었다.
출발까지는 앞으로 반 시간, 가족들의 모습이 이제 확실한 모습으로 각인되듯이 한 사람 한 사람 되살아왔다.
‘이번 고향 길에선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어머니를 만나보기도 전, 그 신작로 길을 밟아보기도 전에 엉뚱한 사람들의 마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박씨처럼, 이선생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설마 그럴라구. 그런 황당한 일이 아직도 있을라구.’
그녀는 반복되는 그런 생각에 점점 자신을 걷잡지 못했다. 그러자 광 속에 있는 미닫이 같은 낡은 나무상자 가득히 재여 있다는 통나무 토막의 이야기가 또 다시 되살아왔다. 오빠가 살아 잇다는 소식에도 아무 말이 없으셨다는 어머니는 요즘 통나무 토막을 모으고 계시다는 동생의 귀뜸이었다. 어려서 손재주가 뛰어났던 오빠는 통나무 토막을 주어다가는 제법 쓸만한 생활용품으로 만들어내곤 했다는 이야기에 생각이 미치자 수옥은 왠지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머니의 가슴 속엔 아직도 일곱 살박이 수철이의 모습만이 살아있는 것일까?’
그녀는 좌석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뉘었다. 그러자 만 하루 동안에 쌍인 피곤이 갑자기 그녀의 온 몸을 덮치듯이 밀려왔다. 문득 그녀는 낯익은 눈길에 부딛친 듯한 느낌에 숨을 죽였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시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오.’
그녀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남편의 그 말에 왠지 전에 없이 다소곳해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반세기의 분단 사실을 인정한다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개개인의 아픔이나 부작용은 어차피 스스로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겠소?’
‘언젠가의 그의 말이 어쩌면 어머니나 오빠에게 아니. 어쩌면 나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결국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래서 나의 생각만을 주장하려는 서로의 고집과 욕심 때문에 그토록 분단이 깊었던 게 아니냐고도 그는 말했었지.’
그 말이 꼬집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은 분명치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에 틔여 오는 것만 같았다.
“네레, 부탁하나 들어 주간?”
이번엔 깡마른 오빠의 얼굴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눈이 폭 젖어있다.
“오마니레, 아바지레 오래오래 사시라고 안부 말씀 드레주럼. 이자 곧 내레 찾아 가가서. 내레 가서 큰절 한번 올리가서. 그때까지만, 드때까지만 살아들 계시라고 말이디. 기렇게 부탁을 드레 주러마. 부디 그때까지만.....”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렸다.
“오빠!”
수옥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안전벨트를 메라는 승무원의 방송이 그녀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수옥은 자신도 모르게 얼른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문득 거기 오빠가, 세형이 따라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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