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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바퀴벌레와 낙서 : [캐나다/박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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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190회 작성일 10-04-3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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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박성민] 바퀴벌레와 낙서


캐내디언 남자와 한국 여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들은 영화처럼 우연히 만나 소설처럼 필연적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 우연하고 필연적이고 그리고 숙명적인 만남이란 어떤 것일까?


여자가 이곳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온 많은 한국 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캐시어로 일을 하다가 손님으로 온 남자를 만났다. 가령 남자가 매일 같이 담배를 사러왔다가 사라의 불이 불어 타오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담배연기처럼 허망하게 사라진다면 그것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너무 상투적이었다. 좀 더 소설적이기 위하여 만남은 극적이어야 했다.


 여자가 대학교에 다니다가 같은 클라스에서 공부를 하면서 남자가 강의 노트를 빌려 달라는 것으로 접근을 하면 그것은 필연적이 아니었다. 어느 학교, 어느 강의실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는 남녀 공학인 이곳의 고등학교에서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나 카페테리아에서 만난다는 것은 70년대 초반 영화에서 흔히 써먹던 스토리였다. ‘러브스토리’가 도서관에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던가? 아무튼 만남의 장소로 학교를 설정하는 것은 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미혼 남녀들이 주로 모이는 소위 말하는 ‘싱글 바’에서 만난다면 그것은 필연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자나 여자나 벌써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런 장소를 찾아간 것이기 때문에 만남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갔다고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만났고 만약 만나지 못하고 나온다면 그것은 차라리 코미디였다. 어찌 보면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가기만 하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하룻밤의 만남일지라도 참 쉽게들 만났다. 그렇게 만나서 서로 이름도 모르는 채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날 약속도 없이 제각기 갈 길을 간다는 것은 현대인의 고독한 단면을 보여줄지 몰라도 의미가 없는 만남이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그냥 옷깃을 스쳤을 뿐이었다.


 ‘길!’


 길에서 만나기로 한다.


 길은 눈에 보이는 길, 보이지 않는 길, 내면의 길 나아가서 철학이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로 통하는 길이란 뜻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인생 자체가 길을 찾아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 어디서 서 있던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산길이라든지 숲속의 길이라면 호젓하고 왠지 정감이 간다. 그런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웃음을 건네고 헤어질 것 같지만 그가 쓰려는 글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쓰려는 소설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북미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으로 무언가에 항상 쫓기는, 그리하여 이유를 잃어버린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북미에서 비좁은 골목길에서 만난다는 것도 어색했다. 그렇다면 골목길이 없는 이 곳에서 차라리 고속도로에서 만난다고 하면 어떨까?


 고속도로보다 기왕이면 하이웨이란 단어가 좀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


 모두가 차 속에 갇힌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이웃도 쳐다보지 않고, 같은 길을 가더라도 인사도 나누지 않고 오히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만 알고 앞만 보며 달리는 길 한 복판에서 만난다.


 하이웨이 한 복판에서 만났다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도 처음에 그렇게 시작함으로 독자들의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만들며 동시에 독자들이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그들은 하이웨이 한 복판에서 만났다. 앞에도 차, 뒤에도 차, 옆에도 차, 차들은 유리창을, 굳게 다문 운전자의 입처럼, 꼭 닫은 채 한 줄기 아스팔트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가는 목적지만을 보고 있었다.’


 시작이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조잡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사실은 차들이 달리는 하이웨이 한 복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차를 몰고 가다 차가 고장이 난다. 여자는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차에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하지만 모두들 자기 갈 길이 바쁘다는 듯 더욱 속력을 내며 지나간다. 비정한 현대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 공교롭게도 여자에게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시간 약속이 있다고 양념을 치면 어떨까? 사업상의 약속? 누구를 만나 큰 사업체를 사거나 팔기 위하여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그러나 그러기에는 여자가 너무 젊지 않을까? 한국계 여자니까 맞선을 보러 가는 중이라고 하자. 우연한 사고 때문에 한 남자를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설정이 그럴 듯했다. 만약에 차가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맞선을 보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날은 저물어 가고 어둠이 공포처럼 다가올 때 자신을 삼키려는 어둠을 쫓아내려는 듯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허공에 대고 팔을 흔든다. 하얀 손수건처럼 나부끼는 가냘프고 연약한 팔, 요즘 젊은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험하고 거친 세상 한 가운데에 홀로 보려진 것 같이 느끼며 불안과 공포 속에 사는 그들은 너무나 고독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뜻하지 않는 순간에 고장이 나는 자동차로 상정되는 기계 문명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도움의 손길은 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절망의 순가에 갑자기 백마, 아니 하얀 차가 그녀 앞에 멈추어 선다. 여자 또래의 건강한 남자가 금발을 바람에 날리며 차에서 내렸다.


 이때 남자의 어깨 위에는 마지막 불타는 석양 빛 몇 줄기가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고 할까?


 그들의 짧게 불타오를 사랑을 예고하는 상징이었다. 여자의 앞에 다가선 남자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난다고 할까? 남자 행수에도 번호가 있던가?


 하이웨이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속도위반으로 빨리 달리는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해질녘에 만났기에 이내 어둠에 직면하게 된다. 어둠을 뚫고 새벽이 오기까지 달리는냐, 막다른 길처럼 차를 돌리느냐, 그도 아니면 어둠에 삼키느냐가 문제였다.


 인물, 장소, 시간적인 모든 배경이 운명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사랑과 행복의 순간은 짧았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이고 그리고 한국적인 여자의 부모, 특히 아버지의 반대로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했다. 끝날 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 깨어지는 마당에 둘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는데 기왕이면 한국여자보다 백인 남자를 죽이자.


 그가 러시아에서 온 남자라면 권총 자살이 그럴 듯하지만, 일본계라면 할복자살, 그러나 그는 백인 중의 백인이라는 영국계이고 여기는 북미계이기에 교통사고로 하자. 더구나 그들은 차를 타고 가다 하이 웨이에서 만나지 않았는가?


 여자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 심각한 말다툼 끝에 더 이상 여자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비 내리는 거리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아니,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던 하이웨이의 그 장소가 어떨까? 꼬 같은 지점, 꼭 같은 시간. 그렇다면 상당히 운명적일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독자에게 던질 수 있었다.


 남자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냐 아니면 고의적인 자살이냐?


 여자가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보고 남자의 죽음을 알았다면 이야기가 느슨해지고 박진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 땅에 그 흔한 교통사고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이 신문에 눈에 뜨일 만큼 날리도 없었다.


 그날 한 밤중에 전화를 받고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안다. 여자는 수화기를 무의식중에 떨어트리며 외친다.


 “Oh! No!"또는,


 “No Way!"


 절박한 상황에서 하는 말일수록 짧고 간결해야 했다. 아무튼 이 극적인 순간에 여자가 멋있는 시적인 말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그가 쓴 소설의 여운이 오랫동안 독자의 가슴속에 살아남을 텐데,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드라마도 아닌데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대사를 집어넣는다면 자칫 소설은 신파조가 되고 작품에 결정적인 흠을 내기가 쉬웠다.


 “진정한 사랑은 피부 빛의 차이를 보지 않아요 아니 보이지가 않아요.”


 “죽음 앞에 국경이 없듯이 사라 앞에도 국경은 없어요.”


 아니 이게 아니다!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대사를 생략하고 무언가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어떨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때로는 가장 많은 말을 했다.


 현대문학은 말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온 몸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유치하고……. 그렇다! 눈! 눈으로 보여주자. 초점을 여자의 눈에 맞춘다. 눈은 마음의 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여자의 눈은 또 다른 상징적 의미를 숨기고 있다.


 그녀의 눈은 사랑 때문에 남자와의 피부 빛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와의 피부 빛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친절하고 진실한 마음을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표지만 보고 판단하듯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데 그녀는 속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는 남자를 잃어버린 마당에 그녀의 눈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본다. 그것은 남자가 없는 내일을 말해 주었다. 그녀가 헤쳐 나갈 길은 멀고 험했다. 아니 길은 없어졌다.


 ‘길은 없다.’


 소설의 처음에 상징적으로 등장했던 길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다.


 이렇게 길로 시작해서 길로 끝난다면 소설의 처음을 길로 시작한 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구조적 배치로 보일 것도 같았다. 어차피 인생은 돌고 돌아서 소설, 연극, 영화, 고전음악 중에서 시작과 끝이 같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예 제목조차 ‘길’로 해버릴까?


 그러나 잠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남자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어 그가 전화를 걸었다거나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됐고, 그렇다고 간호사가 보호자도 아닌 그녀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으며 또 걸까?


 소설의 생명은 사실성에 있었다.


 소설이란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거짓말이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는가? 사실성을 따지자면 전화를 누가 걸었느냐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작품의 배경인 ‘시대’와 ‘사회’ 또한 문제 였는데, 시대가 어느 때고 장소 또한 어디인가? 20세기말 캐나다 토론토였다. 요즘 어느 여자가 부모님 말 한 마디에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와 맺었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단 칼에 끊어 버릴까? 차라리 집을 뛰쳐나간다면 모를까? 나이 어린 중고등생도 부모님의 말이 듣기 싫으면, 부모님이 자신의 사생활에 지나친 간섭을 하면 집을 나가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여자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더라고 오랫동안 살았고 그리고 여기서 서양식으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모자이크 사회라는 단어가 말해 주듯이 여자는 온갖 인종들과 부닥치며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이든 사람조차 이민 초창기와는 달리 자식의 결혼 문제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말했다. ‘기왕이면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같은 한국사람이 좋지만’, ‘본인들만 좋다면’, ‘자식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피부 빛의 차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은 ‘본인들의 의사’에 맡긴다는 것이 요즘 추세였다.


 그는 지금 어느시대, 어느 곳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그는 소설을 쓰다 말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까지 그가 애를 쓰며 닦아왔던 길이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길은 사라졌다.


 



 아침에 아내가 일을 나가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남들은 이민온 지 몇 년 안 됐는데도 열심히 일해서 가게도 하고 집도 사는데 우린 언제 이런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싸구려 정부 아파트에서 이사 나가요?”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바퀴벌레는 정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 가든지 지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돈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중류층, 하류층, 그리고 빈민층이 사는 곳으로 구별되는데, 다민족이 모여 사는 토론토에서는 주로 백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상류층 지역이었고, 유색인종들이 모여 살면 하류층이나 빈민층 지역이었다. 정부 아파트라면 주로 유색인종이 모여 사는 하류층이나 빈민층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개척이 끝났기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싸워야 하고, 이미 남의 땅이 되어 버린 땅에서 자기 땅을 찾기 위하여 또 다른 개척을 해야 하는 이민자가 대부분이었다.


 밤마다 지린내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노라면 그리고 더러운 낙서가 잔뜩 써 갈겨져 있는 복도를 걷노라면 깨어진 맥주병이 발에 밟혔고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린 얼굴을 만나거나 심지어는 콜라깡통을 찌그러뜨려서 크랙이라는 싸구려 마약을 피워대는 녀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빨갛고 그리고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분명치 않은 또는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점들이 그가 처음 이민 와서 얹혀살던 누님이 사는 동네와는 달랐다. 이미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 이민온 그였지만 차를 타고 불과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인데도 누님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처음 느낀 점은 또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여러 가지로 다른 생활환경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아내를 당황하게 만든 것을 방벽을 심지어 식탁까지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였다.


 아내는 바퀴벌레를 싫어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아파트를 싫어했다.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을 바퀴벌레만큼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야 했다.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쉽게 꿈을 버리지 못하고 남들 열심히 돈을 버는 시간에 문학을 공부했다.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으나 언어의 장벽에 부닥쳐 간신히 낙제를 면하면서 쫓기다가 결구 중도에서 내일이 보이지 않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의 목소리가 또 한 번 그의 귀에 울렸다.


 “여보! 내가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모국을 떠나 온 지 너무 왜 돼서 한국말로 소설을 쓸 수가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한국어가 일상어가 아니었잖아요? 문학이란 결국 언어의 예술이에요. 그런 까닭에 언어가 받쳐 주지 못하는 문학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이야기의 초점을 흔한 남녀간의 사랑에 맞추지 말고 문화적인 갈등과 충돌에 맞추자. 그것이 더 깊이 있고 무게가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동양문화 또는 가치관과 서양문화와의 만남, 화합과 충돌은 막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을 1세와 2세의 갈등으로 그리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많은 보이고 보잊 않는 장벽을 뚫고 부리를 내리는 1세의 희생만 아름답게 미화시키지 말고 새로운 접근으로 2세의 관점에서 보기로 하자. 남자보다 바뀐 새 환경에 빨리 그리고 쉽게 적응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것도 반항기가 있는 무서운 십대를 그려보자.


 그녀는 모범생이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얼굴도 예뻤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다. 운동도 잘 하였는데 농구는 아무래도 신장의 열세 때문에 어울리지 않고 신장의 열세를 기술과 투지로 극복할 수 있는 배구선수였다.


 실제로 그가 대학에 다닐 때 무협지 속의 주인공처럼 붕붕 떠서 장신의 숲을 헤치고 강 스파이크를 때리는 중국계 여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 여학생의 시합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땐 한국 여학생인줄 알았는데 선수 명단을 보니 성이 ‘잉’씨였다. 그래도 그는 한동안 배구 팬이 된 적이 있었다. 비 인기 종목이어서 썰렁한 체육관의 나무 걸상에 앉아 열렬히 응원을 했다. 물론 몇 명 안 되는 관중석에서 그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가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무언가 관계도 이루어질 뻔했지만 소극적인 성격탓에 말 한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었다.


 음악에도 뛰어난 재질이 있다고 하면 피아노로 할까? 아니면 바이올린으로 할까? 아니 좀 특이하게 하기 위해 첼로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또는 남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차라리 뭇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받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집을 뛰쳐나가야만 했다. 과연 무엇이 모범생인, 착하고 아름다운 그녀로 하여금 집을 나가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빠와의 갈등이었다.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라는 단순한 갈등이어서는 안 됐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아버지와 딸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부닥쳐야만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가 백인 남자 친구와 음악회를 간다. 그녀가 첼로를 하니까 요요마의 연주회를 갔다고 할까? 왠지 가벼워 보인다. 그렇다면 베토벤의 ‘심포니5’를 들으러 갔다 하자. 왜 ‘심포니 5번’이냐고? 그것은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카라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였기에(잠깐, 카라얀이 아직도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 해도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을 까?).


 연주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아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사라들은 브라보를 계속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분위기 상 옆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한다는 것은 무식한 소치이면 그리고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주차장에서도 차가 밀려 30분가량 늦게 나온다. 백인 친구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헤어지면서 가볍게 키스를 했는데, 그 때 귀가시간이 늦은 딸이 걱정돼서 잠을 못자고 응접실에서 창 밖을 내다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가 늦은 이유를 설명하려는데 아버지는 딸의 말을 가로막곤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닌다고 꾸중을 한다. 아버지의 음성이 높아지고 이유를 설명하려는 딸의 목소리도 높아지다가 끝내 아버지는 딸의 뺨을 때리고 만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울면서 집을 뛰쳐나간다.


 이것이 순간적인 충돌에 의한 단순한 가출이어서는 안 된다. 무언가 진지한 사회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문제가 이 사건을 통하여 부각되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요즘 세대를 특히 이민사회를 이야기할 때 아버지가 없는 세대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실질적이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위로 대표되는 유교적 전통에서 내려온 낡은 질서의 몰락을 이야기했다.


 이민사회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권위는 무너진 지 오래며 경제적으로도 더 이상 주도권이 없었다. 집안에서도 그의 위치는 중심이 아니라 밀려나서 변두리에 서 있어 으며 때로는 불필요한 존재였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서양화되는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아버지는 점점 목소리와 모습을 잃어갔다.


 왜 그렇게 한국남자들은 새로운 땅에서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할까?


 그 자신의 경우도 그랬다. 한참 뒤늦게 이민을 온 아내였지만 아내는 나날이 키가 커지고 목소리도 커지는데 상대적으로 그는 오히려 키가 작아지고 목소리도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요즘 와서는 아예 실어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도 유일한 취미가 골프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쌓이는 스트레스를 위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어머니와 그녀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다. 내일 당장 학교에서 시험이 있다 해도 때로는 하루 종일 가게를 보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녀가 밤늦게까지 가게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보면 아버지는 문닫을 시간에 돈내기 골프에 지곤 화가 나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시험공부야 평소 실력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빠져서는 안 될 배구시합 연습, 그리고 첼로 레슨까지 빠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가슴속엔 그런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싹터 자라고 있었다.


 위에 말한 모든 적대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해야 했다. 그녀는 주인공이었고 착한 마음씨를 소유한 한국계 여자였으므로…….


 언제쯤 그녀를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할까?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 늦었다고 돌아오면 코미디가 되고, 아빠가 밤거리를 차를 몰고 해마다 새벽녘에  또는 해가 뜰 때 만난다. 왜냐하면 새벽은 새날의 시작이니까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면서…….


 아빠가 차를 몰고 딸을 차아 밤거리를 헤맬 때, 안개가 자욱히 낄 수 도 있고 차라리 비가와도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 나중에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핥으며 흘러내렸다. 와이퍼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두 팔을 움직였지만 빗방울을 밀어내기가 힘에 겨웠다. 어둠까지 함께 쌓여 아버지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 같아 꽤 그럴 듯한 상징적인 장면 같았다. 하지만 집을 나간 지 몇 시간 만에 다시 돌아온다면 가출이 아니라 외출이 되어버리면 가출이라는 단어가 주는 극적인 효과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서너 달 후에 돌아온다는 것이 적당했다. 물론 여기에는 서너 달 동안 딸이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먹고 어디서 잤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했다.


 딸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암에 걸려 누워 있었다. 딸이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있었다기보다 아버지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딸이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좋았다.


 모든 소설의 사건과 행동에는 필연성을 위하여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했다.


 느닷없이 불치의 병으로 아픈 것보다 딸을 나가게 한 죄책감과 후회감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 것이 더 소설적이지 않을까? 딸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시다 쓰러졌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무리하게 벌려 놓은 사업도 망했다 할까?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절망하여 누워 있을 때 딸은 돌아온다.


 “아빠! 미안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모든 건 제 잘못이에요.”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고 병색이 짙은 아버지 얼굴에 고랑처럼 깊게 패인 주름살 사이로 눈물이 냇물처럼 흘러내린다.


 “사랑하는 딸아! 아니다. 나를 용서해다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둘은 서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부둥켜안고 운다. 옆에 서 있던 어머니도 운다. 만약에 동생이 있다면 동생도 따라 운다. 그리고 강아지도 그녀의 발목을 핥으며 낑낑거리며 운다.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 이야기로 동서문화의 갈등과 충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한 집안의 아버지와 딸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갈등이었다. 한국이건 캐나다건 발단, 전개, 결말마저 공식적으로 뻔한 가출소녀의 이야기였다.


 만약에 영화로 만든다면 온몸으로 부닥치며 또는 땀과 피를 흘리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 표정과 눈물만이 강조돼서 입과 두 눈 그리고 안약만으로 연기해도 충분했다.


 그는 꼭 그만이 쓸 수 있는 독창성과 창조성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자꾸 뻔하고 뻔한 이야기만 떠오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이유는 아마 그가 절실한 체험도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 퇴화된 머리로만 쓰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인지도 몰랐다. 어쩜 그는 시야가 너무 좁아 근시안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내가 뭘 안다고 주제넘게 한 말이 떠올랐다.


 “소설이란 체험이에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 부닥치고 싸우며 피를 흘려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집구석에 처박혀서 머리를 짜고 굴린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겠어요?”


 아내의 말이 맞는 걸까?


 아니다!


 소설이란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다는 것을 아내는 모르고 있었다. 대중소설이지만 ‘타잔’을 쓴 작가는 한 번도 아프리카에 가 본 적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는 또 어떠한가? 몇 백 년 또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당시의 상황과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역사책보다 생생하게 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지 않는가?


 



 그가 갑자기 시장기를 느끼는 것이 사냥을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무엇을 쫓고, 잡고, 죽이는 일은 몸 속 어느 구석엔가 강하게 꿈틀거리는 동물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하여 꼭 필요한 운동이었다.


 사냥은 축 늘어진 고무줄마냥 늘어져 버린 그의 일상생활을, 그 생활의 한쪽 끝을 팽팽히 당겨 주는 힘이 됐다. 그는 방바닥에 널려진 작품을 쓰다 폐지가 된 종이를 집어 들고 사냥에 나섰다.


 먼저 바퀴벌레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부엌을 기습 공격했고, 그 전과로 서너 명의 적을 사살할 수 있었다. 그리곤 변소, 응접실, 침실 순서로 습격해 들어갔다.


 한바탕 전투가 끝나 후 늘 그러하듯 그는 더욱 시장기를 느꼈다. 일이란 더욱 사냥이라는 육체와 정신이 함께 긴장되는 운동에는 항상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신 김치 밖에 없는 반찬에 오래 돼서 성능이 나쁜 보온밥통에서 누렇게 말라버린 밥이라도 그는 꿀맛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현상모집에 당선되면 제일 먼저 성능 좋은 보온밥통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떳떳할 수 있었다. 원래 살생을 싫어하는 그가 사냥을 시작한 것은 오로지 아내 때문이었다.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아내를 위하여 그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글을 쓰는 시간을 할애하여 바퀴벌레 사냥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요즘은 습관이 되어 아내를 위하여 사냥을 하는 것인지, 그를 위한 것인지, 사냥 그 자체를 위한 것인지 종종 혼동이 될 때가 많았다.


 그는 다시 작업을 시작하기 전 마음을 가라앉힐 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두어 모금 빨았을 때 창 옆의 벽을 가로질러서 유독 크게 보이는 바퀴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낮은 포복으로 조심스럽게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마치 행진하듯 보무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바퀴벌레의 크기로서 계급을 매겼는데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별짜리 바퀴벌레였다. 좁쌀만한 새끼 바퀴벌레는 이등병, 쌀알만 하면 병장, 콩알만 하면 소위, 더 큰 것이면 소령, 그리고 준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몸이 크다는 것은 힘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고 물리적인 힘이 강한 자는 으레 높은 신분을 갖고 그 신분에 맞는 권력을 행세한다고 믿고 있었다.


 만물의 영장이며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인간 사이에서도 항상 이기며 존경받는 자는 힘이 센 자였다. 거기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었다. 굳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벌레가 다른 점을 찾는다면 인간에 있어서 힘이란 동물이나 벌레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피상적인 힘이란 점만 달랐지 강한 자가 또는 많이 가진 자가 약한 자나 없는 자 위에 올라서서 군림한다는 근본적인 점에서는 바퀴벌레의 다리만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에 누군가 그 에게 계급을 붙인다면, 그의 계급은 무엇일까? 아내 앞에서 그의 계급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내려 이제 아내는 그를 바퀴벌레 이등병으로 보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별짜리 바퀴벌레마저 그를 이등병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을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지나가며 오히려 왜 경례를  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지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는 서둘러서 무기를 찾는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대로 소설을 쓰려고  펼쳐 논 종이를 접어들고 덮쳤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그의 숙달되고 재빠른 손에는 분노까지 더해져 바퀴벌레는 벗어나지 못했다. 유달리 큰 바퀴벌레를 잡고 어떤 승리감 그리고 우월감에 도취된 그는 마치 전투기의 조종사가 적함을 격침시키고 자신의 전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라앉는 배위를 선회하듯 하얀 종이를 펴보았다.


 어떤 싸움에서도 이긴 자는 항상 패한 자의 피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만들려 노력하였다.


 짐작대로 벌레의 머리는 형체도 없어져 버렸고 박살난 몸통에서는 고름 같은 누리끼리한 액체가 흘러나와 글자 한자 써 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승리감에 취해 스스로 만족해 보려고 노력하는 그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몸통이 박살나고 머리가 짜부라진 상황 속에서 그래도 움직이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짧은 몇 개의 발이었다. 옅은 고등색에 가까운 그 다리는 하얀 백지 위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조절해 줄 두뇌신경이 파괴되었는데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생명이었다. 그리고 어느 생명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의 팔과다리도 가늘게 떨렸다. 하마터면 죽은 아니 아직도 살아있는 바퀴벌레를 방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문득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글을 쓰는 것과 살아가는 것을 너무 쉽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글이란 것이 마음만 가지고 써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담을 그릇도 중요하듯이, 뜻도 중요하지만 뜻을 전달하는 문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가 비록 한국에서 고등하교 다닐 때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니만 떠나 온 십여 년 동안 한국말로 글을 쓸 기회는 고사하고 한국말로 된 소설책을 특히 최근에 나온 소설을 제대로 읽을 기회마저 없던 그러서는 이민 수기라면 모를까 소설은 벅찬 것이었다.


 그보다 훨씬 늦게 캐나다로 온 아내는 말했다.


 “여보! 당신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신이 쓰는 글은 70년대 말 고등학생 스타일이에요. 당신은 이민올 때 가지고 온  정신연령이 조금도 자리지 않은 거예요. 얼굴이 하얀 여고생이 폐병에 걸려 죽지는 않지만 내용이 뻔한 게 ‘폐병소설’이나 다름없어요. 단순 유치하다고 할까요?”


 그의 아내는 한국에서 대학을 국문과를 나오고 여자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그와의 결혼으로 캐나다에 왔다. 그런 까닭에 그녀와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을 하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철저히 어긋났다.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누구보다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결혼하기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책 한 권 읽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한국신문을 보더라도 구인난이나 사업체 매매를 제일 먼저 봤다.


 그는 벌레의 다리 때문에 순간 절망감에 사로 잡혔지만 이내 마음이 가라앉자 오히려 그 가늘게 떠는 다리 때문에 새로운 용기가 솟아올랐다.


 ‘살려고 하는 행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바퀴벌레이든 또 인간이든…….’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에 가서 성공과 실패는 언제 포기했느냐에 따라 결정지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대부분의 실패한 사람들은 너무나 일찍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기보다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행위자체가 중요했다. 마치 하얀 종이 위의 바퀴벌레 다리처럼…….


 그가 아내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사람과 사회는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했다. 한국과 한국사회를 이야기할 때 물론 안에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때로는 밖에서 보는 것도 중요했다. 한때는 세계화란 말도 있었지만 세계화란 세계가 한국으로 온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이 세계로 나간다는 뜻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중요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과 한국 사회 밖에서도 사는 한국 사람들을 진정으로 껴안을 때가 됐다.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나무가 더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 나무의 뿌리요 몸통이라면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뻗어나가는 가지여야 했다. 이민자는 부러져 나간 가지이거나 바람에 날려 흩어진 나뭇잎이 되어서는 안 됐다.


 다시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펜을 들었다. 그는 맞춤법이 틀린 것을 자동으로 지적해 준다는 컴퓨터가 생각났다. 떠나온 지 오래 되니 그로서는 종종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혼동이 되곤 했다. 컴퓨터만 있다면 훨씬 쉽게 글을 쓸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아내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언젠가 글을 써서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사리라고 생각만 했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멀리서 소재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의 실제 경험담이 많이 들어간 일인칭 고백체로 말하는 성장의 자전적인 소설을 쓰면 어떨까? 그 자신이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서 국적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생활환경이 바뀌고 그리고 문화가 바뀌었기에 소설의 좋은 소재였다. 한국작가들이 쓴 이민자 이야기보다 훨씬 사실감이 넘칠 것 같았다.


 그가 읽은 몇몇 한국작가들이 쓴 이민자를 소재로 한 작품에는 주인공들이 대부분 마약중독자거나 사업에 성공하여 헐리우드의 영화배우처럼 살고 있어서 그로서는 전혀 실감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묘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남자 주인공인 그는 십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어느 초기 이민자처럼 꿈만 한 보따리 짊어지고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로 이민 온다.


 ‘처음으로 메어본 넥타이를 바람에 휘날리며 그는 토론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넥타이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지만 가슴속에는 성공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굳게 세우고 있었다. 성고하리라. 반드시 성공하리라.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앞에 누운 대륙을 쳐다보았다.’


 소설을 이렇게 성공으로 시작하여 성공으로 끝나야 한다.


 처음에는 당연히 고생을 해야 하기에 땀을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도 흘리고, 그리하여 언어의 장벽, 인종 차별, 문화의 차이 모든 역경을 극복하여 성공하는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아무래도 처음 이민 와서 아침에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접시를 닦던 일을 써나갔다. 그것은 실화였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못하며 설움을 받고 일자리에선 접시를 자주 깨먹어 욕을 먹는다.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공부는 하기 싫었고 대학은 가고 싶었다. 일은 하기 싫었지만 돈은 필요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쓰면 소설이 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하여 고생한 이야기를 그리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동정의 눈물이 저절로 흐르게 할 이유가 있어야 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터로 가서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공불할 시간이 없었고 일을 하면서 조그만 메모지에다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을 적어 놓고 외웠기에 접시를 자주 깨뜨렸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백인 녀석 중의 한 명이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고의로 그를 괴롭힌다. 인종차별도 집어넣을까? 아니면 같이 웨이트레스로 일하는 또래의 여학생도 등장시켜 인종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야기도 집어넣을까? 세 명의 관계를 삼각관계로 만들면 어떨까? 아니다. 곁가지는 잘라버리고 모든 이야기를 그의 성공에 집중시키자.


 그는 고생한 부분을 쓴다든가 처음에 서러웠던 시절을 쓰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작 문제는 어떻게 성공했다고 쓰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그가 영어로 소설을 써서 요즘 한국 문단에서 애타게 갈망하는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됐고, 그렇다고 우연히 처음 산 복권이 아니면 매일 직장에 다니면서 차를 타는 대신 걸어서 다니면서 산 복권이 당첨됐다는 것도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그는 글을 쓰다 말고 생각해 봤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백만장자가 된다거나 복권에 당첨되어서 떼돈이 굴러들어 온다면 아내의 입이 그냥 찢어지리라.


 그녀는 한 삶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를 오직 돈이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였다.


 특히 자기 집이 있고 없음으로 판단하였다. 그래봤자 아내의 소망이란 것이 이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다운타운의 정부 아파트를 벗어나 변두리에 집장사들이 새로 지은, 깨끗하고 그림 같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촌스럽게끔 손바닥만한 뒤뜰에 깻잎이나 파, 상추를 직접 심어 거두어 먹는 것이었다. 요즘 한창 돈이었다. 이러니 그는 아내를 날개 없는 여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주인공이 그가 성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공이 뒤따라주지 않는 고생 자체로 끝나는 고생은 소설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성공! 그것이 문제였다.


 사업에 성공한다면 어떨까?


 돈이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첨단 산업인 컴퓨터 사업에 뛰어들어 새로 운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무슨 프로그램?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소위 말하는 컴맹인 그가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것은, 또 그 과정을 소설로 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그는 프로그램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고 다만 연극이나 음악회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무역은 어떨까? 특히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이나 소련과의 무역, 그 중에서도 중국과의 무역이 더 그럴 듯하게 들렸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의 목표를 인민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는 데 두어왔다. 그러니까 기계로 무진장 생산되는 캐나다의 프레리 지방의 밀을 중국에 수출하여 만두와 국수를 만들어 먹게 하고 돌아오는 배를 빈 배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많은 인구와 노동 집약적으로 만든 수공예품을 수입한다. 중국처럼 노동력이 싼 나라가 어디 있는가?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이 무역이야말로 꽤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어마어마하고 엄청난 국가적 자원의 교류를 성사시킬 수 있을까? 역시 성공은 쉽지 않았다.


 펜만으로 종이 위에 쓰는 성공도 이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는 막힌 담 앞에서 그 동안 그가 써온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 자주 눈에 뜨이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렸다. 그 두 글자는 이민자에게 너무 무거운 단어였다. 그 단어를 밤에 잘 때는 물론이고 항상 등에 지거나 가슴에 품고 다니기에 이민자들은 더욱 피곤하게 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도 성공이라는 단어에 막혀 이민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완성시킬 수 없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성공’은 무엇이고 ‘출세’는 무엇인가?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사회적 지위의 상승만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자리를 찾아 주어진 자리에서 땀을 흘리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중국과 무역을 하건 못하건,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건 못하건, 사회적 지위가 있건 없건, 제각기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변명 같은 이야기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아니 쓰고 싶지가 않았다. 성공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남발하는 것은 오늘도 하루하루 열심히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이민자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민이 나무를 옮겨 심는 일이라면 미처 30년도 안 되는 짧은 이민 역사 속에서 꽃을 피우기를 바라기보다 씨앗을 뿌리를 이야기해야 했다.


 시합이 끝난 텅 빈 운동장 같은 종이 위에서 갑자기 성공이라고 써놓은 단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어진 줄 사이를 여유 만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그 순간 바퀴벌레를 사냥할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노트 모서리를 찢는 다면 녀석은 진동에 놀라 재빠르게 도망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손에 들고 있는 볼펜으로 창처럼 찌를 수도 없었고 문화인이 아무도 보는 이 없다고 손바닥으로 내려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 가늘게 떠는 생명을 보고 다시는 눈 먼 살생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는 원래 불교 신자였다. 무엇을 알거나 깨달아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서양적이라면 불교는 동양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녀석이 성역을 침범한 사실이었다. 작가에게 자신의 감정과 사상, 그리고 꿈을 표현해내는 공간보다 더 성스러운 영역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퀴벌레는 그의 눈앞에서, 코 밑에서 태연스럽게 마치 보이지 않는 공이라도 차고 또 쫓아가는 야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는 볼펜을 치켜세워 찍었지만 발 많은, 그리고 발 빠른 생명은 창끝을 벗어나 재빨리 피했다.  생명의 위협을 뒤늦게 느낀 벌레는 불이 나게 발을 움직여 순식간에 거의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내리쳤다. 뭔가 감촉이 왔다. 그러나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이 사냥감을 확인하지 못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아내가 손바닥으로 등을 내리치듯 한 마디했다.


 “여보! 낙서 그만하고 돈 벌어 올 생가이나 해요. 벌써 몇 달째에요?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그 말을 던져 놓고 한동안 그의 등과 그가 쓰다가 실패한 성공 이야기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 말은 그 동안 아내가 했던 어떤 불평, 불만, 짜증, 욕보다 더 큰 충격으로 그의 머리를 때렸는데 머리가 박살이 나는 것 같았다.


 “나, 이제 홀몸이 아니라구요…….”


 소설이 안 써지던 그 어느 때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몸 전체가 떨려왔고 특히 팔 다리는 눈에 보이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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