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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정근: 수필] 거리와 거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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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15회 작성일 10-06-0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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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동물은 갇혀 있어 불행한 존재일까 아니면 포획자로부터 안전하게 먹이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할까하는 평소 의문은 <파이이야기>란 소설을 읽으며 답을 얻었다. 동물원 주인의 아들이며 동물학자인 주인공의 말을 통해 동물원 속의 동물은 동물원을 자신의 안식처로 받아들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위협할지 모르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동물마다 이른바 안전 거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야생 홍학은 상대가 3백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면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 이상 넘어오면 긴장하고 덮치기도 한다. 기린은 자동차에 탄 사람을 30미터까지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걸어서 다가갈 경우는 150미터까지 허용한다.

동물마다 거리를 재는 방식도 다르다. 고양이류는 보고, 사슴류는 듣고, 곰류는 냄새 맡으며 거리를 잰다. 그러니 동물들이 낯선 사람 앞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동물원 운영의 기술이자 과학이라고 한다. 훈련을 통해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진다. 사람들과 사귈수록 심리적 거리가 사라지면서 물리적 거리도 좁혀지는 현상과 비슷하다.

캐나다에 만난 인도인 중년부인이 이야기다. 며느리가 될 서양아가씨가 집으로 인사차 찾아왔기에 반가운 마음에서 가까이 다가섰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 서더란다. 친밀감을 표시하려고 다시 천천히 다가서니 어느새 또 그만큼 거리가 생겼다며 그 부인은 서양인이 공간에 대한 확보심리가 강하단 인상을 받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캐나다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자유란 개념을 이렇게 가르친다. ‘팔을 뻗어 몸통을 중심으로 회전시켰을 때 그 공간이 자기에게 허용된 자유라고 한다. ‘만일 주먹을 쥐고 휘둘러 상대를 치면 거기서 자유가 끝이 난다고 가르친다. 상대의 자유를 빼앗을 때 내 자유도 빼앗긴다고 한다. 내 공간이 소중하듯 상대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히지도 않았고 그저 방향이 서로 어긋나려 했을 뿐인데도 서양인들은 미리 준비된 말처럼 실례했다며 입가에 웃음을 보이며 양보의 눈짓을 보낸다. 타인의 공간을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공간에 대한 배려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나타난다. 운전중인 자동차가 사람을 위협하는 법이 거의 없다. 거리상 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음에도 사람이 있으면 우선 멈추어 서서 사람이 건너가도록 양보하는 것을 자주 겪는다.

좁은 데서 살아온 우리는 어깨를 부딪히는 일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서구인은 민감하다. 넓은 공간에서 살아온 환경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농경문화에서는 서로 잘 아는 사람끼리 만남이 이루어지는 반면, 유목과 수렵 그리고 개척시대를 겪은 서구인은 낯선 사람들과 조우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모처럼 만난 사람과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악수나 허깅으로 풀고, 계속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피차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들은 낯선 사람과의 거리감을 어떻게 줄이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엘리베이터 안이나 로비 등 공간에서 서양인을 만나면 밝은 미소와 함께 충분히 알아들을 소리로 인사를 먼저 전해온다. 나도 따라 웃으며 인사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적대감이 없다는 걸 금방 알아차리게 한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갑자기 외향적인 나로 변하고 만다. 이처럼 그들은 금방 내게 안정감과 친밀감을 전해준다. 그들은 동물원 운영의 기술을 지닌 듯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다.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 관습상 1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것은 내 공간이 소중하듯이 상대 공간도 존중하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지혜를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다. 거리감 없이 더불어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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