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돌담 우물 - 임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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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791회 작성일 10-04-0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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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석(湖水石)에 가득 물을 채워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헝클어진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정관(靜觀)의 자세가 되며, 이후부터는 활발한 연상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호수석 앞쪽의 언덕배기에는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기에 좋고, 뒤편의 봉우리 기슭에는 세월을 잊은 어느 강태공이 어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 전경을 그리며 심심 파적삼아 수면에 입술을 대고 ‘후-’하고 바람을 일으키노라면 잔잔한 파문이 연이어 퍼져 나가 저쪽까지 미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게 그렇게 아련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런 호수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는 어느덧 덩두렷하게 구름장이 떠가고 산그늘이 내려와 호수에 잠기는 모습이 어린다. 한데, 이때쯤에서 어김없이 떠올리는 모습이 하나 있다. 고향집의 돌담우물인데, 실로 애석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그리움의 원형질로 자리 잡은 대상이다.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둘레석에 기대어 깊은 심연 속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속엔 어김없이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수면 아래로 잠겨서 환상적인 전경을 보여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두레박 끈을 내릴 때면 첨벙첨벙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깊이만큼에서 길어 올려지는 맑은 샘물의 정결함이 생각나곤 한다.
고향 마을 앞 들녘에는 아담한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물맛이 좋고 풍부해 많은 사람이 널리 이용했다. 빨래 같은 허드렛일은 내에 나가 하고, 집에서 먹을 물을 긷거나 쌀을 씻고 푸성귀를 다듬었던 공동우물은 주로 이른 아침과 해 질 녘에 많이 붐볐다.
이때 보면 부녀자들이 하나같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똬리의 끄나풀을 입에 살짝 사려 물고, 물동이에 맺히는 물을 손으로 번 갈라 흩뿌리며 걷는 모습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한 대열에는 어머니도 빠지지 않았다. 당신이 물동이를 이고 오실 때 보면 반드시 그 위에는 바가지가 뒤집어 얹혀놓고 있었다. 물을 퍼 담을 때 쓴 바가지로써 일종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걸을 때 물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하려는 방지책이었다.
한데 어떨 때는 그런 물동이 위의 바가지가 반대로 띄워서 오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장사하는 형님이 기차나 버스, 배를 타고 원지로 떠난 때로 속설에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사고가 난다.’라는 속설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행동이었다.
그러던 공동샘물 긷기도 우리 집에 우물이 생기면서 중단되었다. 어머니를 위해 우리 형제들이 힘을 모아 장독대 옆에 우물을 팠던 것이다. 그러나 땅을 파고 냇가에 나가 돌을 모으는 것까지는 우리 몫이었으나, 그다음 내부에 담을 쌓는 일은 솜씨가 뛰어난 전문가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안전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웃마을에는 강씨 성을 가져 ‘강담’이라는 별칭이 붙은 돌담 전문가가 살고 있었다. 돌 일은 그에게 맡겼다. 도(道)에서 실시한 경진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의뢰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눈썰미 좋게도 폭 1.5미터에 깊이만도 3미터가 넘는 우물을 한나절 만에 거뜬히 완성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고도 나중에 보니 쌓아놓은 돌이 마치 알이 고른 석류처럼 도드라진 게 하나도 없이 가지런하였다.
우물을 파놓고 보니 편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은 어머니가 번거로이 물동이를 이고 먼 길을 나서지 아니해도 되고, 들에 나가 땀을 흘리고 돌아오면 즉시로 등목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낫을 갈거나 연장을 씻어 간수하기도 좋아졌다.
나는 늘 물 긷기를 좋아하여 집에 빈 그릇이 보이면 그릇마다 가득가득 물을 채워놓았다. 물 긷는 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무작정 두레박을 떨어뜨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어부가 마치 그물의 벼리를 잡고 조정을 하듯이 끈을 두세 발 사려놓은 다음 곧바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두레박이 물에 닿는다 싶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조금 옆으로 밀쳐놓은 다음, 순간적으로 앞으로 당기어 길어 올려야 한다. 그래야 담뿍 물이 담기지 그렇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두레박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거나 절반 밖에 긷지를 못한다. 이를 터득하자 재미가 붙어 자주 했던 것이다.
그런 우물을 나는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꼭 물을 퍼내고 그에 들어가 청소를 하였다. 이때는 두 다리를 벌려서 담에 걸치고 한 손으로는 뻗대어 균형을 잡는 다음, 짚수세미를 가지고 바위에 붙은 이끼를 씻어내는데, 그 속에서 흥얼거리노라면 소리가 어찌나 맑게 공명(共鳴)이 되던지 스스로 들어도 듣기가 좋았다. 또 하나, 색다른 체험은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의 모습이었다. 하늘은 그야말로 좁다랗게 보여서 ‘아하 우물 안 개구리란 속담이 이래서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집에 우물이 생기고 나서 예전에 비해 번거로움이 훨씬 해소되었다. 하기는 그것도 한때 도움을 주었을 뿐 지금은 빈집이나 다름없이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지만. 전에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우물을 나는 수석에 물을 채워놓고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물이 보여주는 미덕은 무엇일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순리의 가르침일까, 아니면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청결함의 가르침일까. 그것도 아니면 수평으로 자세를 맞추는 놀라운 균형 감각일까.
나는 수석을 감상하면서 수석에서 고향의 돌담우물을 많이 생각하고, 물동이를 인 모습을 그려보는데, 그것은 잊힐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고향 그 막무가내의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호수석 앞쪽의 언덕배기에는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기에 좋고, 뒤편의 봉우리 기슭에는 세월을 잊은 어느 강태공이 어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 전경을 그리며 심심 파적삼아 수면에 입술을 대고 ‘후-’하고 바람을 일으키노라면 잔잔한 파문이 연이어 퍼져 나가 저쪽까지 미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게 그렇게 아련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런 호수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는 어느덧 덩두렷하게 구름장이 떠가고 산그늘이 내려와 호수에 잠기는 모습이 어린다. 한데, 이때쯤에서 어김없이 떠올리는 모습이 하나 있다. 고향집의 돌담우물인데, 실로 애석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그리움의 원형질로 자리 잡은 대상이다.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둘레석에 기대어 깊은 심연 속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속엔 어김없이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수면 아래로 잠겨서 환상적인 전경을 보여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두레박 끈을 내릴 때면 첨벙첨벙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깊이만큼에서 길어 올려지는 맑은 샘물의 정결함이 생각나곤 한다.
고향 마을 앞 들녘에는 아담한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물맛이 좋고 풍부해 많은 사람이 널리 이용했다. 빨래 같은 허드렛일은 내에 나가 하고, 집에서 먹을 물을 긷거나 쌀을 씻고 푸성귀를 다듬었던 공동우물은 주로 이른 아침과 해 질 녘에 많이 붐볐다.
이때 보면 부녀자들이 하나같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똬리의 끄나풀을 입에 살짝 사려 물고, 물동이에 맺히는 물을 손으로 번 갈라 흩뿌리며 걷는 모습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한 대열에는 어머니도 빠지지 않았다. 당신이 물동이를 이고 오실 때 보면 반드시 그 위에는 바가지가 뒤집어 얹혀놓고 있었다. 물을 퍼 담을 때 쓴 바가지로써 일종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걸을 때 물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하려는 방지책이었다.
한데 어떨 때는 그런 물동이 위의 바가지가 반대로 띄워서 오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장사하는 형님이 기차나 버스, 배를 타고 원지로 떠난 때로 속설에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사고가 난다.’라는 속설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행동이었다.
그러던 공동샘물 긷기도 우리 집에 우물이 생기면서 중단되었다. 어머니를 위해 우리 형제들이 힘을 모아 장독대 옆에 우물을 팠던 것이다. 그러나 땅을 파고 냇가에 나가 돌을 모으는 것까지는 우리 몫이었으나, 그다음 내부에 담을 쌓는 일은 솜씨가 뛰어난 전문가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안전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웃마을에는 강씨 성을 가져 ‘강담’이라는 별칭이 붙은 돌담 전문가가 살고 있었다. 돌 일은 그에게 맡겼다. 도(道)에서 실시한 경진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의뢰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눈썰미 좋게도 폭 1.5미터에 깊이만도 3미터가 넘는 우물을 한나절 만에 거뜬히 완성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고도 나중에 보니 쌓아놓은 돌이 마치 알이 고른 석류처럼 도드라진 게 하나도 없이 가지런하였다.
우물을 파놓고 보니 편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은 어머니가 번거로이 물동이를 이고 먼 길을 나서지 아니해도 되고, 들에 나가 땀을 흘리고 돌아오면 즉시로 등목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낫을 갈거나 연장을 씻어 간수하기도 좋아졌다.
나는 늘 물 긷기를 좋아하여 집에 빈 그릇이 보이면 그릇마다 가득가득 물을 채워놓았다. 물 긷는 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무작정 두레박을 떨어뜨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어부가 마치 그물의 벼리를 잡고 조정을 하듯이 끈을 두세 발 사려놓은 다음 곧바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두레박이 물에 닿는다 싶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조금 옆으로 밀쳐놓은 다음, 순간적으로 앞으로 당기어 길어 올려야 한다. 그래야 담뿍 물이 담기지 그렇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두레박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거나 절반 밖에 긷지를 못한다. 이를 터득하자 재미가 붙어 자주 했던 것이다.
그런 우물을 나는 일 년이면 두어 차례씩 꼭 물을 퍼내고 그에 들어가 청소를 하였다. 이때는 두 다리를 벌려서 담에 걸치고 한 손으로는 뻗대어 균형을 잡는 다음, 짚수세미를 가지고 바위에 붙은 이끼를 씻어내는데, 그 속에서 흥얼거리노라면 소리가 어찌나 맑게 공명(共鳴)이 되던지 스스로 들어도 듣기가 좋았다. 또 하나, 색다른 체험은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의 모습이었다. 하늘은 그야말로 좁다랗게 보여서 ‘아하 우물 안 개구리란 속담이 이래서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집에 우물이 생기고 나서 예전에 비해 번거로움이 훨씬 해소되었다. 하기는 그것도 한때 도움을 주었을 뿐 지금은 빈집이나 다름없이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지만. 전에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우물을 나는 수석에 물을 채워놓고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물이 보여주는 미덕은 무엇일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순리의 가르침일까, 아니면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청결함의 가르침일까. 그것도 아니면 수평으로 자세를 맞추는 놀라운 균형 감각일까.
나는 수석을 감상하면서 수석에서 고향의 돌담우물을 많이 생각하고, 물동이를 인 모습을 그려보는데, 그것은 잊힐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고향 그 막무가내의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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