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한 마리 새, 케이트 쇼팽의 <각성>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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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340회 작성일 15-08-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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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한 마리 새
케이트 쇼팽(Kate Chopin)의 각성(The Awakening)을 읽고
김미연
김미연
현대를 사는 여성들은 자신이 남성보다 결코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여 년 전 미국 작가 케이트 쇼팽(1850-1904)이 살았던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되어, 법적인 권리도 없었고, 자유로운 이혼도 불가능하며, 피임은 불법이었다. 따라서 남편을 주인으로 받들고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최고 미덕이었다. 여성은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집에만 있고 밖으로 다닐만한 공적인 공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마음대로 여행하고, 크럽, 호텔 등 집 밖에서 즐기고, 사업한다며 집을 자주 비웠다. 그러다 보니 부부들 사이는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이었다.
19세기 말에서야 신여성(New Women)이 나타난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대학 입학이 허락되고, 드물지만 전문직 여성이 생긴다. 하지만 당시의 통념을 거스르는 신여성들은 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거의 없었다. 작가 쇼팽은 스무 살에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출산하고 서른 살에 과부가 된다. 쇼팽은 힘들게 가계를 꾸리면서 담배도 피우고 유부남과도 사귄다. 정신적으로 불안해지자 의사의 권유로 40대에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름이 알려진다. 쇼팽은 상류층 여자들의 내적 갈등을 여성의 관점에서 쓴 최초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입센의 <인형이 집>(1879년)이 이미 츨간되어 화제가 되었고, 동시대 작가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등 여성의 정체성을 다룬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시대였다.
1899년 <각성>이 발표되자 이 책은 수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쇼팽의 작가적 수명은 거의 끝이 난다. <각성>은 '제멋대로 산 무책임한 남부 여자'의 이야기라는 혹평을 듣는다. 작가는 여성의 자율성 및 예술에 대한 욕구, 결혼에 대한 회의 등 시대를 앞선 고민을 한다. 1970년대에 <각성>은 페미니스트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여성 문학의 정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인간의 실존을 그렸다는 점에서 미국문학의 리얼리즘의 선구로도 꼽힌다. 소설의 주인공 에드나 퐁틸리에(Edna Pontellier)의 삶을 살펴보자.
시대에 갇혀서
에드나는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자랐고, 어머니 또한 아버지에게 눌려 살다가 일찍 죽었다. 아버지는 여자란 강압적으로 대해야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말을 잘 듣는다고 믿었다. 에드나는 레옹쎄 퐁틸리에(Leonce Pontellier)와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그녀의 남편은 아내와 하인을 컨트롤하여 가정의 위계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한다. 집안의 값진 컬렉션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그는 아내도 그가 가진 소유물의 한 가지로 취급한다. 남에게는 완벽하게 보이는 남편이지만 에드나는 그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어느 여름, 뉴올리언즈에서 사는 에드나 가족은 상류층 크레올(초기 유럽 이민자의 후손)들의 휴양지인 그랜드 섬으로 휴가를 간다. 에드나는 같은 펜션에 머무는 래티놀 부인과 친구가 된다. 래티놀 부인은 가족에 대한 역할을 자신의 숭고한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간다. 레티놀 씨는 매주 음악회를 열어 아내의 취미 생활을 지지하며 그녀와 되도록 시간을 같이 보낸다. 모성애의 극치를 보이는 그녀는 아이들이 넘어지면 어미새처럼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달려가 일으킨다. 하지만 에드나는 아이들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다.
펜션 주인의 아들 로버트는 도시에서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여름에는 섬으로 돌아와 젊은 부인들을 시중든다. 부인들은 로버트와 희롱을 주고받지만, 주말에 남편들이 오면 로버트를 무시해 버린다. 멕시코만의 춤추는 파도, 은은한 달빛, 스치는 바람 등,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해 에드나는 거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지경이다. 자신을 실내 장식의 부분처럼 대하는 남편만 보다가 로맨틱하고 자상한 로버트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긴다. 로버트 역시 다른 부인들과는 달리 자신을 진실하게 대하는 에드나를 사모하게 된다.
휴양지 호텔에서 놀다가 한밤중에 펜션으로 돌아온 레옹쎄는 잠에 취한 에드나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는 에드나가 아이들에게 무심하다고 트집을 잡고는 곧바로 잠들어 버린다. 잠이 다 깨버린 에드나는 알 수 없는 압박과 분노로 인해 울음을 터뜨린다. 무언가에 대한 불만족으로 그녀의 자아가 흔들린 시점이다. 하지만 아침에 남편이 전날 게임에서 딴 돈을 후하게 건네주자, 대부분 여자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지난밤의 일을 그냥 흘려 보낸다.
펜션에는 피아니스트 라이스도 머물고 있다. 전문직 신여성으로 고립되어 사는 그녀는 제도 안에 있기를 오래 전에 포기했다. 고집이 세고 퉁명스럽다는 이유로 따돌림 받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에드나는 그녀의 연주를 듣고 난생 처음으로 어떤 열정을 느낀다.
자아가 깨어나고
에드나는 멕시코 만에서 로버트에게 수영을 배운다. 어느 날 에드나는 혼자서 헤엄쳐 나가는데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계속 멀리 나가면서 점차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짐을 알게 된다. 무한한 바다에서 유일무이한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자신이 우주 속으로 합일되는 듯한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은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해변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남편은 그녀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고, 그리 멀리 나간 것도 아니라고 일축한다.
그녀는 그 말을 듣자 결코 남편을 벗어날 수 없음을 예감한다. 에드나가 밤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남편은 집 밖에 있는 것을 허락할 수 없으니 당장 들어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의 말을 거역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며, 자신이 이제껏 남편에게 마냥 복종하면서 별 생각 없이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에드나의 자아가 깨어나자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는다. 정박되었던 배가 닻을 풀고 항구를 떠나는데 로버트는 그 동기를 제공한다. 에드나는 로버트를 대동하고 한적한 섬에 간다. 자신의 몸을 옥죄는 옷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죽음같이 편안한 긴 낮잠을 잔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 태어난다. 남편에게서 독립하여 자유를 가지리라! 하지만 함께 섬을 다녀 온 후 로버트는 뚜렷한 설명도 없이 멕시코로 떠나 버린다.
자아를 추구하며
여름이 끝나고 모두들 뉴올리언스의 집으로 돌아온다. 에드나는 자신 속에 새롭게 발견한 자아와 로버트에 대한 그리움이 맞물려 힘들어한다. 살림은 제치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에게 남편은 '하잘것 없는 그림'이라고 혹평한다. 그러자 에드나는 우리에 갇힌 듯 서성이며 화병과 결혼반지를 던진다. 이제 그녀는 남편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같이 맞선다. 레옹쎄는 눌러도 수그러들지 않는 아내를 정신 이상으로 의심하며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부인이 요즘 유행하는 소위 지성인 그룹의 여자(pseudo intellectual women)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냐며 한심해한다.
'삶에는 아름다움(beauty)과 잔혹함(brutality)이 뒤엉켜 있다.' 에드나는 지고지순한 모성애 뒤에 숨어서 여성의 몸을 찢으며 태어나는 새 생명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다. 생명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에조차 반발심이 생긴다. 에드나는 자신의 삶(life)이 비록 망가지더라도 인간의 자아(self)가 느낄 수 있는 고뇌와 희열의 끝까지 맛보고 싶어 한다. 눈먼 만족(blind contentment)에 안주하는 친구 래티놀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자신(self)을 희생하지 않고자 한다. 아이들의 자아실현은 그들 자신의 몫이므로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남편이 뉴욕으로 장기 출장을 가고 아이들도 할머니 집에 가자 에드나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할 기회가 생긴다. 경마클럽에서 바람둥이 아로벵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내재된 본능도 알게 된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면 처음에는 누구나 혼동스럽기 마련이다.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필요한 에드나는 세상일에 휘둘리지 않는 피아니스트 라이스를 찾아간다. 라이스는 화가가 되겠다고 말하는 에드나에게 인습과 편견 위로 날아오르려면 바람에 저항할 용기와 튼튼한 날개가 필요하다고 층고한다. 또한 인간 자체를 추구하지 말고 위대한 정신(great spirit)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라이스는 먹고 살기 위해 피아노 레슨을 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피아노 연주로 승화시킨다. 그녀의 연주는 현실의 긍정 위에 자유를 쫓는 이상의 조화가 있기에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은 에드나는 자신의 조촐한 거처인 비둘기 집(pigeon house)을 마련한다. 이사 나가기 전날 에드나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연다. 음식, 옷, 가쉽(gossip)에만 집착하는 그들의 유일한 오락은 파티다. 하지만 에드나는 그 파티가 권태스러운 나머지 무력감이 밀려온다.
뉴욕에서 아내의 이사를 알게 된 레옹쎄는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한다. 단지 별거 소문으로 인해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재빨리 대응책을 마련한다. 그는 자신의 저택을 개보수하기 위해 작은 집으로 옮겼다는 신문 기사를 냄으로써 소문을 무마시킨다. 사실 그녀가 기껏 용기를 내서 나온 곳이 남편 집에서 겨우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이다. 또한 자신의 행보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던지 에드나는 남편의 일처리가 오히려 다행스럽다.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날아가지만 흔들리며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한다.
에드나의 비둘기 집은 또 다른 새장일 뿐이다. 규범과 미덕의 새장 밖을 나왔지만 다시 시대의 그물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한다. 아로벵을 만나기도 하고, 파리에 가서 그림 공부할 생각도 해본다. 남자와의 열정적 관계도 결국 순간이며, 자아실현도 혼자서는 너무 외롭다.
자아에 갇히고
에드나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로버트가 뉴올리언즈로 돌아온다. 그녀는 삶에 물감을 들인 듯 다시 생생해진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자신은 예전의 에드나가 아니며 더 이상 남편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로버트에게 있어 유뷰녀와의 사랑은 사회적 추락일 뿐이다. 그 역시 레옹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남성이다. 로버트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할 것이라는 것은 그녀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영혼과 몸을 다 소유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로버트에게 집착하지만 그것 역시 지나갈 것이다. 라이스처럼 용기있는 영혼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자신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에드나는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 그랜드 섬으로 회귀한다. 아이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복병처럼 떠오르지만 에드나는 수평선을 향해 멀리 멀리 헤엄쳐 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자아(self)와 삶(life)은 에드나에게 모순적으로 작용한다. 그녀는 자아는 회복했을지 모르지만 삶을 사는 것은 실패한다.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내던지니 삶의 조화는 깨어진다. 그녀의 외면을 세워준 남편, 그녀의 내면을 끌어낸 로버트, 아로벵을 통해 본능도 인정한 에드나.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키며 살 수 없음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욕구(appetite) 충족을 위한 1단계 삶을 사는 레옹쎄, 정신적 욕구를 위한 2단계로 올라간 에드나. 하지만 둘 다 타인을 생각하는 공공의 선(goodness)의 단계로 성장하지는 못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좇는다는 점에서 이기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순간에 각성을 이루었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로 향하는 원심력을 밖으로 돌리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파괴로 간다. 선을 공유하라는 하느님의 뜻대로 타인과 더불어 살 때 우리는 궁극적 기쁨을 느낀다. 결국 자아 실현의 목적은 피조물로서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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