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현대미술8 한국 60년대 전위미술: 퍼포먼스 1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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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773회 작성일 15-12-01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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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8 1960년대 한국 전위 미술
벽동안회 '60년 전' 덕수궁 담벼락 전시회 1960
일본이 60년대에 안보투쟁을 하는 동안 한국은 박정희 정권의 제 3 공화국이 시작된다. 한국 화가들은 일본의 단색화와 모노화에 영향을 받으며, 67-70년대 초반에는 일본처럼 해프닝을 벌이는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등장한다. 1960년 서울미대 출신이 만든 벽동인회는 국전에 반대하는 의미로 덕수궁 담에 그림을 거는 제스처를 한다. 서울대와 홍대가 합하여 60년대미술가협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형식을 제거하고 개성을 중시한다는 선언문을 낸다. 해프닝 작가들은 주도권을 놓고 알력이 생기기도 한다. 두 계파로 나뉘었던 작가들이 통합해서 악뛰엘(박서보, 장성순, 정상화 등)을 형성한다. 62년과 64년에 캔버스에 돌을 부착하는 등 오브제 미술로 넘어간다. 하지만 계엄령 선포로 악뛰엘 전시장에는 군인만 있었고 호응을 받지 못한 채 끝난다.
60년 대 중반 한국 미술계는 '엥포르멜은 죽었다' 라고 외치며 돌을 붙이는 오브제가 흐름이다 라고 주장한다. 박서보는 이 시기에 오브제 미술에 동참 하지만 동경화랑에서 단색화5인전을 한 후로는 다시 페인팅으로 돌아가는 환원이 60년대 중 후반에 나온다. 평론가 이일은 60년대 한국 미술계를 페인팅으로의 환원과 미술의 외연을 넓히는 해프닝으로의 확산으로 표현한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0년대는 문학에는 허무주의가 깔린다. 추운 겨울날 포장마차에서 만난 남자들이 한 여관에 투숙한다. 그 중 한 명은 자살하고 다른 사람은 서둘러 각기 길을 간다. 기승전결이 없는 구성으로 허무한 결말을 제시한다. 또한 이 시기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서 실험적 영화가 등장한다. (우현목, 오발탄 1961 김약국의 딸들 1963) 용산 해방촌 일대의 양공주, 상이군인 등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인다. 반면에 소시민의 행복한 삶을 그린 영화들도 만들어진다.
안동숙 무제 63, 1963
그림이 아닌 오브제가 악뛰엘 전 이후에 나온다. 악뛰엘전에서 안상철은 돌을 붙이는 <영>을 발표한다. 단색화 하종현은 67년에 꼴랴쥬 <탄생>을 선 보인다. 서양의 optical art의 흐름에 맞추기도 한다.
논꼴동인 1965 (강국진 정찬성 김인환) 논꼴 창립전, 논꼴아트
퍼포먼스, 해프닝을 주로 하는 홍대 중심의 논꼴동인이라는 파격적 예술가들이 나타난다. 기존 양식인 페인팅이라는 타블로(틀)를 던지며 그림을 안 그린다고 선언한다. 일제를 벗어나 새 시대의 자유로운 조형을 추구하며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을 추구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낸다.
청년작가 연립전, 가두시위 1967
홍대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무동인, 오리진동인, 신전동인(신진작가협회)등 3개의 동인이 생긴다. 이들이 연합하여 청년작가연합회를 만들고 67년 연립전을 기회로 최초로 가두시위를 한다. 행동하는 화가, 추상 이후의 작품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와 기성 미술인에게 도전장을 낸다. 현대 미술관이 없는 한국 문화의 인프라의 취약을 꼬집는다. 앉아서 구상파를 그리는 국전 심사 위원을 좌상파 국전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신문은 청년 작가들의 행동을 가쉽화하여 보도한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청년작가 연립전의 무동인, 신전동인 1967
한국 최초의 해프닝이다. 김영자가 우산을 피고 앉아 있고 동인 작가들이 우산 위에 촛농을 뭍히고 새야 새야 파랑새 노래를 하고 우산을 찢고 끝낸다.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Absurd gesture이다. 냉전체제에서 우산은 핵, 노래는 동학 혁명을 상징한다고 해석되지만 작가들은 그냥 했다고 대답한다. 일차 대전 중 1917년 유럽의 스위스 취리히의 볼테르 카페의 다다 운동을 해프닝의 기원으로 본다.
강국진, 색물을 뽑는 비닐 주머니, 퍼포먼스 1967
한국 최초의 퍼포먼스가 선을 보이자 이후로 봇물 터지듯 나온다. 물감을 탄 물이 들어있는 비닐을 터뜨리자 바닥에 물감이 튀며 형상이 그려진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그림이 나온다.
정강자, 투명풍선과 누드 1968 세시봉, 신전 동인
세시봉 음악 다방에서 반누드로 선 작가에게 신전 동인 강국진, 정찬승 등과 관객들이 풍선을 불어 몸에 붙이고 터뜨린다. 관객들은 거의 넋이 나가고 경찰에 연행된다. 정강자는 퍼포먼스의 대모로 자리매김을 하며, 추상화나 인상주의 그림을 답습하는 선배들을 비난한다. 기성세대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예술은 예술성이 없다고 말한다. 전강자의 개인전 전시에 갔더니 작품은 하나도 없고 '여러분이 작품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기막혀 하며 작가는 체포를 당한다. 비슷한 시기에 오노요코는 관객이 자신의 옷을 찟는 cut piece 퍼포먼스를 한다. 관객이 참여해야 작품이 완성이 되는 participatory art 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여성의 몸은 항상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한강변의 타살, 청년작가연합회 1968
제이 한강교 아래에서 화가 정찬승, 정강자, 강국진 등이 목만 땅에 묻힌다. 한강 물을 길어서 몸에도 물을 붓는다. 비닐 옷을 입고 비닐 위에 문화 사기꾼, 사이비 대가, 문화 부정 축재자 라고 쓴다. 나중에 비닐을 불 태운다.
드디어 신문에서도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미술이라는 제목으로 긍정적 기사를 실어준다. 젊은 작가들은 서양의 문화 식민지가 됨을 비방하며 대중과 같이 호흡하는 환경 미술을 추구한다. 60년대에 선배 작가들이 변하는 현실을 무시하고 외국 작품을 모방하거나 추상화만 그리니 한국의 미술은 해적판이나 다름 없다고 말한다. 기성 작가들에게 한국 화단을 빈사 상태에 이루게 한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
무동인/제로그룹 현대미술 실험전, 최봉헌 인간 5 1967
67-68년에 무동인 작가들은 제로그룹을 만들어 실험전을 한다. 해골 마스크 방독면 등을 걸어둔다. 단색화가 대세이던 시기에 버린 물건(오브제)을 모아서 Junk Art를 한다. 동시대 일본 네오다다 및 유럽의 아르 누보 및 아르테포보라(Poor Art)와 발맞추어 간다.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Tate Modern Exhibition 2012-13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1960-70년대 회화를 정리하는 전시를 가졌다. 잭슨 폴락, 윌리엄 드쿠닝과 함께 한국 작가 김구림도 포함된다. 백남준 이후로 두 번째로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를 열어준 작가이다.
김구림 바디페인팅 1969 퍼포먼스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로 뽑히는 김구림은 여자들의 바디에 그림을 그린다. 미대를 중퇴한 그는 아방가르드 에이지 그룹 및 제4집단 등 동인을 만들며 선언문을 내며 다양한 활동을 한다. 전혀 다른 작품을 항상 내놓는 김구림의 전시는 그림, 영화, 오브제, 퍼포먼스를 다 하는 그룹 젠의 전시 같기도 하다. 대구의 부잣집 아들이지만 체포되어 그룹을 해체하라는 압력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지만 나중에 풀려난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김구림, 정강자, 무제, 1969 퍼포먼스
하얀 색 타이즈를 입은 몸 위에 영화 <1/24초의 의미>를 상영한다. 김구림은 당시 미술계의 부패를 지적하는 퍼포먼스를 한다.
제 4 그룹은 광복 25 주년에 기성 문화 예술인의 장례를 지내는 의식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관을 메고 덕수궁, 광화문 일대를 돌아 다닌다. 경찰이 뭐하는 짓이냐는 질문에 해프닝이라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답하자 정찬승은 경찰에 체포가 된다. 배고파서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고 간장에 물을 타서 마시는 가난한 작가들은 체포를 당하면서도 거리로 나와 행위예술을 할만큼 열정이 넘쳐났었다.
김구림, 정찬승 콘돔과 카바마인 1970
김구림은 Mail Art 도 한다. 1970년 서울대 교문에서 콘돔과 신경안정제 카바마인, 편지를 넣은 봉투를 100개 나누어준다. 몇날 몇시에 1번 봉투를 열고 가루를 타서 마시고, 2번 봉투를 열고 무엇을 하라는 말이 적혀있다. 마지막 봉투를 열면 작가의 이름(김구림), 작품 이름(신주) 등이 적혀있다. 관객 참여형 예술이다.
SeMA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3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3톤짜리 얼음을 싸서 놓으니 다 녹아서 보자기만 남는다. 1970년에 전시장에서 허락이 나지 않아 못하고 2013년에 SeMA 김구림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에서 전시가 실현된다. 한강에서 밭을 태우는 대지미술Earth Art를 위시하여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지만 학연과 지연이 없는 그는 미술계에서 소외당한다. 미국에 와서 오랫동안 산다. 60년대 후반에 퍼포먼스 작가들의 재밌는 해프닝이 있었고 1970년대는 전태일의 활복, 제4집단 해체 등 사회적으로는 검열을 당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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