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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아방가르드 9/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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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8,294회 작성일 10-10-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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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7th hour:  Russian Avant-garde 러시아 아방가르드




1차 세계 대전의 배경 (1914-1918년)

 

큰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 제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영입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슬라브 민족의 형제들이 세르비아를 방문한 오-헝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했다. 독립을 주장하는 세르비아의 청년에 의해 오형제국 황태자가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1914년에 일어나고 오-헝제국은 세르비아에게 무리한 사과와 양보의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에 세르비아는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오-헝제국은 세르비아를 침략하는 전쟁의 길을 택했다.

오래 전부터 슬라브 국가들의 발칸반도를 교두보로 갖기를 원했던 러시아는 오-헝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오-헝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했으며, 오-헝제국의 동맹국인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해 군사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이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에 뛰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차 대전 당시, 위의 지도에서 분홍색인 독일, 오헝제국이 central power 였으며, 노랑색인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태리가 연합군이었고 파랑색은 스페인,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중립국이었다.

러시아는 1914년에 일차 대전에 참여하지만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918-20년에는 내전이 일어난다. 유럽에 일차 대전이 터지자 예술가들이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의 볼테르 카페에 모여서 1915년에 Dada 운동을 시작하고 맞은 편의 Inn 에서 살던 레닌이 기차를 타고 러시아에 가서 혁명을 한다.

1914-1918년 일차 대전 중에는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시기였다. 1905년에 일본은 조선땅을 누가 가지나를 놓고 러일 전쟁을 일으켰고 러시아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조그만 섬나라에게 패배를 하니 온 유럽이 충격에 빠지고 러시아에서는 황제 Czar 의 권위가 손상이 되고 왕권의 약화를 초래한다. 일차 대전이 종전이 되고 나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National Self Determination 을 외치고 이 여파로 1919년에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터진다.

이태리에서는 Futurist와 Nationalist 들이 일차 대전 참여를 지지하는 가운데, 이태리는 London Pact 에서 땅의 약속을 받고 1915년에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가입하여 참전을 한다. 이태리는 1870년의 보불전쟁에는 독일과 오헝제국과 연맹을 맺고 프랑스를 쳐들어 갔으나, 이제는 그들과 등돌려 적이 되는 땅따먹기 싸움의 양상이었다.

인류사적으로 일차 대전은 사상사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며 유럽의 지성인들은 충격에 빠진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오고 혁명에 가슴이 부푼다. 독일은 패전을 하고 엄청난 inflation 에 시달려 빵 하나에 몇 마르크가 나간다. 반면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수익을 누리게 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배경

18세기 유럽 국가의 땅 따먹기 욕심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가운데 프랑스는 유라시아 반도의 러시아를 점령하고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1812년에 나폴레온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공격한다. 러시아는 땅은 컸지만 국민의 수는 작고 농노가  인구의 1/3을 차지했으며, 산업혁명 같은 것은 일어날 기미도 없었다.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러시아가 나폴레온에게 처참하게 짓밟히다가 마침내 겨울이 오자 냉혹한 시베리아의 추위에 불란서군은 대부분 얼어 죽는다. 도망가는 나폴레온을 뒤에서 공격해 러시아군은 파리까지 진입한다.

나폴레온을 공격해 파리까지 들어간 러시아군은 서유럽에 가서 전혀 다른 이상한 세상을 본다. 도시문명과 에펠탑이 있는 파리등을 보고 산업화에 눈이 떠진 군인층과 유학을 다녀온 elite 층이 자각을 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짜르 체제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1861년에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그 땅을 가져라’하는 농노 신분 해방령이 떨어졌으나 예상과는 달리 장미빛 미래는 펼쳐지지 않았다. 척박한 땅을 나누어 받고 나아진 것 하나도 없는데 토지세 등 세금 내라는 고지서는 자꾸 날라온다. 땅도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 경작의 마을 땅인데 세금을 내가 내야 한다. 농노만 아니라는 것 뿐이지 전보다 더 살기 힘들어졌다.

1905년 만주와 한국을 놓고 러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이기자 전 유럽은 충격에 빠진다. 러시아 국민도 황당해진다. ‘어떻게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쬐그만 섬나라에게 질 수가 있지?’ 농노 해방 이후 황제 Czar 에 대한 불만에 이어 약소국 일본에게 패배로 인하여 지배 계층에 대한 신뢰가 반감하고 Czar 의 무능이 들어나는 가운데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니콜라이 2세는 입장이 말이 아닌 꼴인데 일차 대전이 일어나고 1914년에 독일은 '전쟁을 할테니 답하시오' 하는 최후통첩을 보내온다. 니콜라이 2세는 혁명을 못하게 하려면 많은 사람을 1차 대전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내 정치가 위기에 처할 때 극단적 마지막 카드는 전쟁이다. 러시아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전쟁을 할 만큼 무기, 탱크가 전혀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1914년에 그래 전쟁하자 하고 출전을 한다. 당시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브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누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브르조아 계급에 들어서려는 상인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귀족체제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모든 것이 막혀 있으므로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농민도 체제가 바뀌어지기를 원했다.

레닌이 1917년에 러시아에 돌아와서 ‘제네 전쟁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다’ 하면서 확 브레이크를 건다.  Irony 하게도 척박하고 먹고 살기 힘든 농민의 땅,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고 성공을 했다. 1922년에 Soviet Union 국가가 생기며 일반 사람이 참여하는 평의회가 생긴다. 일반 농민, 노동자, 평민이 모여서 소비에트 유니온의 정치 이상을 논의한다.

이론상으로는 자본주의가 팽창하면 자연히 공산주의로 넘어간다 였지만 자본주의가 아직 생기지 않고 농민 계층이 대다수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을 하고 레닌은 농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득권 귀족 세력의 백군 White Army 대 볼세비키, 멘세비키 혁명지지 세력의 적군 Red Army 의 내전이 1918-20년 까지 벌어진다. 또한 프랑스의 귀족층이 White Army 를 막 support 한다.

그러나 역사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혁명의 성공 후에 엄청난 새 세상을 바랬지만 레닌이 1921년에 죽으면서 권력의 공백기가 온다. 혁명 동지였던 스탈린과 트롯츠키 사이에 정권의 쟁탈이 벌어진다. 스탈린은 강력한 커뮤니즘을 옹호했고 트롯츠키는 온건파 였는데 1924년에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트롯츠키는 20년의 기나긴 망명길에 오르며 멕시코에 가서 프리다 칼로를 만나고 1940년에 스탈린이 보낸 KGB 에 의해 암살을 당한다. 트롯츠기는 오랜 망명으로 인해서 외국에서 유럽의 좌파에게 영향을 끼친다.

일차, 이차 대전 후 까지도 많은 유럽 국가는 러시아를 혁명이 성공한 동경의 나라로 본다. 일차 대전 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들이 나온다. 오헝제국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나뉘며 1923년에 오스만 제국이었던 터키가 생긴다.

프랑스는 18세기에 이미 왕정은 깨졌어도 여전히 똑같았다. 부르조아 사장님이 왕으로 군림하는 계급사회 class society 가 되었다. 전에는 타고난 팔자 탓을 했지만 1789년의 혁명 후에는 capitalism 안에서 공장주와 manual laborer 의 class 가 생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1. Sergei Diaghilev 1872-1929                                         Ballets Russes (Russina Ballet) 1909-1929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에게 nostalgia 를 주었다. 여전히 왕조가 있었고 winter palace 가 있었고 왕립 발레단이 있었다. 러시아발레는 유럽인들에게는 폭팔적인 인기가 있어서 유럽 순회공연을 하였다. 러시아발레는 정통적인 발레가 아니고 performance 에 가까운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의 의상, 무대 디자인이 합쳐진 종합예술이었다. 피카소도 의상 무대 디자인을 하였고 스트라빈스키도 커미션을 받아 작곡을 하였고 장꼭도도 시나리오를 썼다.

러시아 발레단을 만든 단장 Diaghilev 디아길예프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후원자 며 러시아 예술가의 작품을 서유럽에 노출시켰다. 러시아의 대부호 쉬킨이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을 구매하여 러시아 본토에서도 유럽의 아방가르드를 보고 있었다.

2. Natalia Goncharova, St Andrew Costume Sketch from Liturgie, 1915


 

Mikhail Larionov 1881-1964                                                Natalia Goncharova 1881-1962

                                                 

유명한 여성 예술가인 콘체르노바의 무대디자인 세트가 파리에서 sensation을 일으키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콘체르노바는 러시아에서 스캔달의 중심에 있었다. 라리노프와 콘체르노바, 두 예술가는 오랫동안 동거 생활을 하다가 노년의 나이에 결혼을 한다.

전통에 도전, 반항하고 기존 예술가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민중의 생활을 예술 안에 끌고 들어오겠다는 의도로 러시아의 17세기 민화인 목판화 Lubki 를 끌고 들어온다. 두 사람이 만든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Jack of Diamond Donkey’s Tail 이 있다.

왜 이름이 당나귀 꼬리일까? 당시에 유럽에서 큐비즘, 오피즘, 퓨처리즘등의 추상양식의 그림이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파리에서 한 작가가 당나귀 꼬리에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 위에서 꼬리를 흔들게 한 happening 을 보고 이름을 붙였으며 Jack of Diamond 는 카드놀이를 의미하는데, 카드는 평면적이며 민중의 놀이수단이라는 점에서 이름을 따왔다. 

3. Luboki, Lubki

                 

루복은 러시아 민속판화인데 러시아 아방가르드인 라리노프와 콘체르노바는 루복에 관심이 많았다. Caricature 같기도 하고 평면적이고 우스광스런 애들의 그림 같기도 하다. 루복은 옛날 이야기를 보는 그림책처럼 사람들이 쉽게 즐기는 놀이 문화인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디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루복은 16-17세기의 wood graving 으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피터 대제 Peter the Great 가 러시아를 호령할 당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때 propaganda 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판화를 무제한 찍고 민중의 놀이였으므로 퍼져 나가는 속도가 빨랐다. 신문이라는 매체가 없었으므로 정치관이나 계몽의 도구로 루빅을 이용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니콜라이 2세가 루빅의 사용을 금지했다. 유럽에 유학 같다 온 elite 들과 1812년 나폴레온 전쟁 때 파리까지 쳐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보고 온 군인들에 의해 유럽의 소식이 금방 금방 들어온다. 산업 혁명을 거치고 민주주의를 실행한다는 둥, 프랑스 혁명을 이끈 민중의 정부라는 둥 소식이 퍼지고 민중들이 러시아의 못 사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자 황제는 언론통제를 위해 루빅을 금지시킨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로 짜르 체제 반대와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요구하면서 러시아 민중들은 광장에 모였는데 국왕의 근위병은 그대로 총을 발사했다. 당시의 러시아는 곪아 터진 상처가 터질듯 말듯 왕권은 위협을 받고 사회는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1905년 러일전쟁에 패하고 czar 의 권위는 송두리채 흔들린다.

짜르에 대한 불만이 루복을 통해 퍼져 나가니까 니콜라이 2세는 루복을 사회적으로 금지시키고 러시아는 통제사회 Police State 가 시작된다. 그런데 못하게 하니까 더 갈망하게 된다. ‘진짜로 루복이 power 가 있나 봐’ 동시대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문인과 예술가는 루복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루복은 정치선전을 가능하게 하고, 일반 민중과 노동자는 칸딘스키 그림은 보러 가지 못해도 루빅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 예배시 글을 못 읽는 사람들도 루빅을 보고 읽을 수 있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귀족 왕족이 사랑하는 예술과 전혀 다른 예술을 하고자 했으며 관심이 노동자에게 돌아간다.

4. Mikhail Larionov, Blue Rayonism 1912    
  


 Natalia Goncharova, Linen 
                          
Blue Rayonism 에서 빛과 광선이 부서지는 듯하다. Rayonism 은 sunray 라는 뜻이며 라리노프와 콘체르노바가 시작한 운동이다. 스타일적으로는 큐비즘, 퓨처리즘, 오피즘과 비슷하다. 기득권 세력이 옹호하는 예술과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싶어서 새로운 양식Rayonism 을 내 놓았다.

왕, 귀족의 체계에서 세상은 천지개벽을 해서 나의 노력으로 신분의 획득이 가능한 세계로 넘어간다. 세상은 혁명을 향해 달려 가는데 박물관에서 비너스나 신의 잔치를 보고 있을 수 없다.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예술이 필요하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혁명이 성공한 것 같은 유럽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는데 산업개발을 이룬 부자나라 프랑스, 영국을 보니 잘먹고 잘사는 자유로움의 바탕에는 큐비즘, 포비즘 등의 예술이 힘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해 Rayonism을 창시한다.

5. Lyubov Popova  1889-1924      Objects from the Dyer's Shop 1914

                            
포포바는 Cubism 과 Futurism 에 영향을 받아서 Cubo –Futurism 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당시 유럽의 작가들이 하고 있었던 큐비스트, 꼴라쥬, 퓨처리즘, 색채 등의 형식이 낯설지 않다. 사물이 없는 그림 Non object painting 이 점점 생겨 난다. 피카소는 형식의 탐구를 통해 그림의 정의에 도전장을 내는 작업을 했지만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피카소의 관점이 아닌 사회적 체계의 변모에 힘이 될 수 있는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

Lyubov Popova, Stage Design for Vsevolod Meyerhold’s the  Magnanimous Cuckold 1922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연극, 공연, stage design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연극작가  Meyerhold 의 무대디자인을 포포바가 한다. 무대디자인과 set 을 하는 사람들은 elite 의식을 내려놓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공연이므로 공장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볼 수 있는 공장의 기계들을 무대 디자인으로 올렸다.

6. Kazimir Malevich, Morning in the Village after a Snowstorm 1912

                 

말레비치는 원래 Morning in the Village after Snowstorm 같은 Cubo –Futurism 의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다.  큐비즘의 화면 분활과 Futurism, 원색, 세잔의 원기둥도 보인다. 말레비치는 일차 대전 후에는 절대주의 Suprematism 을 창시한다.

Kazimir Malevich, Victory over the Sun, the First Futurist Opera 1913

   

추상을 옷으로 입고 나올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을 못 하던 때에 말레비치는 futurist 오페라를 위하여 무대 의상 디자인을 하였다. 옷 만드는 일은 천한 노동이라고 간주되던 시절에 러시아 아방가르드 말레비치는 옷을 디자인 한다.

Kazimir Malevich, installation photograph of his painting in 0.10 the Last futurist Exhibition in St. Petersburg
1915                                                                                                                   Kandinsky,Composition VII, 1913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Suprematism을 1915년에 시작한다. 이제까지 예술은 마티스처럼 화려한 색, 원색을 사용하고 추상의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현 expression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청기사파, 다리파도 화려한 색을 썼으며 반추상을 통해 utopia 의 꿈을 표현 했는데 말레비치는 거기서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Expression 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칸딘스키의 아이디어를 진일보시켜 순수상태 purity 로 넘어가 종교적 아이디어에 근접한다. 위의 사진에서 벽의 코너는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의 icon 이나 십자가가 걸리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무 의미 없는 하얀 네모, 까만 네모 그림을 걸었다. 기존의 기독교 종교가 새로운 세상과 맞지 않는다. 종교를 넘어서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다.

Kazimir Malevich, Suprematist Composition, White Square on White, 1918

 

까망, 흰색은 표현의 느낌이 전혀 없고 회화에서 제일 안 쓰는 색이다. 피카소의 큐비즘도 까망과 흰색은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말레비치는 까망과 흰색만 쓴다. 색깔의 symbol 도 부여하지 못하는 색, 가장 순수한 색이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보이는 붓의 움직임, 선의 사용이 없어진다. 작품 앞에 서면 교회당에 서 있는 느낌처럼 말레비치는 예술의 새로운 기능을 가져온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사회적 기능 플러스 새로운 종교의 기능을 융합하려 한다.

그러나 말레비치는 1910, 20년대에 러시아에서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는 무정부주의 anarchist 로서 communist 의 이념과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스탈린이 1924년에 권력을 잡으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이 설 곳을 잃는다. 스탈린이 봤을 때는 그들의 예술이 하나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예술이 아니었다. ‘너네 아방가르드 그림 어렵다. 하나도 모르겠다. 너무 부르조아적이다’ 아방가르드들은 스탈린에게 오히려 역공격을 받는다.

7. Alexander Rodchenko, Untitled Advertising Poster 1924       Gustav Klutsis, Let Us Fulfill the Plan of the Great Projects 1930

              

1920년대 스탈린이 사랑하는 그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ist Realism 그림이 나온다. 딱 보면 딱 이해되는 그림, 모자 쓰고 주먹 불끈 쥐고 ‘오늘도 한 시간 더 일해 더 잘 살아보자’ 하는 propaganda 의 역활을 완벽하게 하는 예술이 나온다. ‘말레비치, 너는 뜬 구름 잡는 그림이다’ 예술가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동네별로 Commune 을 만들고 같이 사상 공부도 하고 예술가 그룹은 그림을 가르치고 무대디자인도 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들, 칸딘스키, 말레비치, 샤갈은 Socialist Realism 같은 그림을 가르쳐야 했다.

8. Bauhaus. Deaasu
 

큰 벽면에 민중과 함께 올라가서 정치선전그림을 나누어 칠을 하면서 아방가르드들은 자신의 예술과 정부에서 원하는 예술이 너무 다름을 느끼고 대다수의 화가들은 유럽으로 간다. 스탈린 체제를 벗어나 독일로 와서 바우하우스 학교(1919-1939)를 설립힌다.

추상미술 Abstract Art 의 운명을 참으로 굴곡진 인생이었다. 새 세상을 꿈꿔서 생겼는데 새 세상이 열린 곳에서 오히려 쫒겨난다. 뭐가 문제였던가? 공산주의 러시아 혁명이 성공을 했어도 인간의 욕망을 간과했다. 처음에는 다 못 살니까 너도 나도 빵을 사기 위해 줄 서던 시절에는 ‘다 함께 잘 살 수 있다’ 가 appeal 하다가 내가 잘 살 기회가 생기니까 너와 나누고 싶지 않다.

스탈린도 권력을 꿈꾸는 자이었기에 권력을 잡고 난 후에는 봉사의 입장이 아닌 군림의 입장이 된다.  혁명의 리더들이 급진적 사고로 새 세상을 펼쳤다 하더라도 기존의 사고와 욕심을 못 버린다. 일반 대중 역시 리더를 감시하는 mind 를 가지고 견제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를 추종부터 먼저 한다. Social system 이 급진적으로 변해도 기존의 사고에 젖어있는 대중들은 그렇게 빨리 쫒아가지 못 한다. 하긴 감시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인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24시간 국회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하는데 국민은 관심이 없고 장치인은 정치를 이용해 대중이 점점 무관심하도록 만든다.

9. Kazimir Malevich, Black Cross, Black Square and Black Circle  1915, 1923

 

사실적으로도 말레비치의 그림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난해했다. 스탈린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가 말레비치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열려서 들을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빨리 이해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먹고 사는 일이 아닌 한 노력하지 않는다. 나의 daily life 에 바로바로 피부로 와 닿지 않으면 금새 흥미를 잃고 외면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운명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인류 비극의 하나의 상징이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히틀러, ‘대중에게는 자극적이고 쉽고 그래야 해’  독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영화와 출판업을 엄청나게 민다. 출판과 인쇄는 정치선전으로 손쉽게 써 먹을 수 있다. 활자를 시각적인 이미지 typograph 로 인쇄하여 대중에게 보인다. 대중이 미처 냉정하게 생각하기 전에 또 다른 것을 얼른 제시한다. 빨리빨리 Speed 를 좋아하는 대중에게 20개의 전단지가 매일 날라오고 대중은 곰곰히 훝어 보거나 생각할 시간이 미처 없다.
           
독일의 출판업은 속도 speed 와 관련이 있다. 강력한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팍팍 제시한다. 듣고 이해하는 척 하기는 쉬워도 반문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중은 자기 스스로의 분석이 힘이 들고 지적 경제적으로 딸리므로 리더를 추종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이런 점들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을 실패로 가게 했다. 왜? 대중들은 따라 가기가 힘든다.

10. El Lissitzky, Proun room, 1923 




El Lissitzky, Construction 99 (Proun Room 99), 1924-25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건축과 graphic design 에 관심이 많았다. 프롤레타리아가  실용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려 했다. Painting 인지, 조각인지, interior 인지, 건축 디자인인지 장르 구분이 애매하다.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환경을 바꾸려는 의도에서 장르의 과감한 파괴를 시도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이런 아이디어가 2차 대전 후에야 이해가 된다. 세계 예술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아티스트는  러시아에 다 있었다. 1930-40 년에는 소련의 국가적 특성과 Cold War Politics 로 인하여 소련 예술이 미국과 유럽에서 터부시되었으나 1960년대에 소련의 예술이 서구사회에 노출이 되면서 미국의 미니멀리즘 Minimalism 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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