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유교사상과 10세기 회화 9/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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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7,610회 작성일 10-10-0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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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화사 8th hour : The 10th Century and its Heritage 10세기 회화
1. Northern Song, Song Dynasty 960-1279, 송의 수도 카이펑 Kaifeng
후주에서 송으로 통일된다. 후주의 마지막 황제는 정치를 잘 했으나 후계자인 아들이 7살로 어렸다. 후주의 장군 조광윤은 강력한 군벌 세력의 수장인데 본인은 어린 황제를 보필하겠다 해도 지지기반이 조광윤을 부추킨다.
2. Emperor of Taizu of Song, 조광윤 Zhoo Kuangyin From Wang Yun’s Catalog of Painting and Calligraphy
술을 좋아하고 기개가 당대한 무신 조광윤은 주변이 부추켜서 새나라 송을 세운다. 지지세력이 조광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황제 옷을 입혀서 왕으로 옹립을 한다. 송의 태조 조광윤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죽고, 동생 태종 조광위가 왕위를 물려 받는다. 음모를 통해 태조의 아들들을 죽이고 동생이 왕위를 찬탈하지만 영토를 확장하고 능력이 있는 왕이었으므로 안 좋은 얘기는 다 묻힌다.
송나라 시대는 주로 유교이야기이다. 조광윤은 송을 세운 후 당나라와 5 대십국시대가 왜 망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당나라 때 변방을 지키는 절도사 세력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환관을 등용했는데 그 세력으로 인해 당이 멸먕했다. 조광윤 생각에는 개인 사병을 가지고 있고 쿠데타도 일으킬 수 있는 무인을 가장 조심하고 막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황제축하연회에서 지지무인 장군에게 말술을 엄청먹이도, 절도사의 권력을 내놓게 하여 절도사 체제를 없앤다. 송나라는 머리있고 학식 있는 학자를 등용해 문인정치가 열리지만, 대신에 변방을 지키는 무인의 힘이 약해져 나중에 그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
문민 정치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송의 국력이 쇠퇴하고, 조선의 당파싸움의 뿌리도 송나라에서 근거한다. 송나라 때 주자학, 성리학이 확립된다. 과거제도가 수당시기에도 있었으나 귀족 세력의 득세로 과거는 유명무실 했는데, 송나라 때에 그 폐단을 뿌리 뽑고 3년에 한 번씩 300-400명을 뽑는 과거제를 확고히 한다. 과거 시험에는 공자의 유학 (유교, 유가) 이 출제가 된다.
3.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중국의 커다란 땅덩어리에서 보면 중원이 그리 큰 몫이 아니며, 주요 왕조는 양쯔강과 황화강 사이의 중원에서만 왔다 갔다 한다. 당나라 수도는 시안이며 송나라 수도는 후베이성이 있는 카이펑이다. 북송의 수도가 카이펑인데 1127년에 금나라가 침입을 해서 금나라 수도로 바뀌고 남쪽으로 내려가 항저우 중심의 남송으로 된다.
4. 청명상하도 Qingming Scroll
송나라 때 그림인데 청나라 때 다시 그려진다. 당시의 수도 카이펑의 그림이다. 당나라는 밤에 외출이 금지된 사회였다. 그러나 송나라에 와서 밤에 불이 훤히 켜지고 술을 마시고 여기저기 놀러 다닌다. 당나라 시절 안사의 난으로 인구의 80%가 죽어 국력이 쇠했으나 송나라에 와서는 상업이 발달되고 세계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사용한다. 금전 거래가 활성화되고 대상인과 지주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철강, 제지, 인쇄업 발달과 더불어 문화, 경제가 나아지고 베트남에서 새로운 쌀을 들여와 쌀과 보리의 이모작을 하니 사람이 살기가 나아지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북송시대의 카이펑에 있는 궁궐이다. 황화강 길목에 있어 호수가 많아서 왕궁 안에 호수가 있었다. 송나라 복장을 하고 관광객을 끌고 있다.
5. 송나라와 소수민족
북송시대는 금나라 요나라의 침입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송나라는 위태위태한 위기가 많았다. 중국은 한족의 문화이지만 한족은 소수였고 다수는 위구르, 주르첸, 티벳 등 소수민족의 나라이며 거란족, 흉노족, 돌궐등의 소수 민족이 주변을 쭉 싸고 있었다.
Liao 요나라 (916-1125) 거란족 Khitan 은 소수민족으로 역사 속에서 한족으로 흡수 합병 되거나 소수 민족임을 숨기고 존재 자체가 유야무야 해졌다. Jin 금나라 (1115-1234) 여진족 Jurchen 은 17세기에 만주족이란 이름으로 청나라를 세운다. 청나라가 역사에서 번영을 하였으면 역사는 한족 중심이 아닌 여진족 중심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Uyghur 위구르족은 신장 위구르 지역으로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서역지방에서 살았으며 Gokturks 돌궐족으로 터키족의 일종이다. Xionguu 는 흉노족이며 Tangut 은 탕구트족으로 이들은 위치적으로 이슬람 지역과 가까웠고 중원을 제외한 중국의 대다수 땅을 휩쓸던 민족이지만 한족에 밀려서 이슬람, 터키, 이란, 이라크로 넘어갔다. 역사는 강자 위주로 풀어가며 유야무야해진 여진족, 거란족이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힘이 약한 송나라는 처음부터 요나라, 금나라와 경쟁의 관계가 아니었고 신하의 나라로 조공을 바치는 상황이었고, 급기야는 과다한 조공에 시달려 나라가 망하게 된다. 조광윤은 무인 세력을 죽였기에 변방을 옹호할 국방력이 없었다. 그전에는 직업군인제였는데 이제는 모병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 국가에서 부르면 간다. 이런 상태이니 전쟁은 꿈꿀 수도 없고 기마민족의 잔인한 성품을 가진 요나라 여진족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과거에 안녹산의 사사명의 난을 막기 위해 거란의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기에 거란의 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일찌감치 화평관계를 맺기위해 비단 백만필을 요나라와 금나라에 바친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고(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세 나라가 삼각구도를 이루어 권력의 구도가 잡혀 있었는데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니 금나라와 일대 일 구조에서 송나라는 더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았는데, 그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휘종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 북송은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후에 몽골족인 징기스칸이라는 시대의 영웅이 나타나 원나라를 세우니, 금나라도 망하고 당연히 송나라도 망한다.
6. Silk Road
송나라는 산업발달과 문민정치의 발달까지는 좋았는데 큰 땅덩어리의 변방 관리를 잘못했기에 망했다. 금나라는 위구르 지역으로 서역의 slik road 가 지나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원에서 봤을 때는 완전히 딴 나라 같았다.
천불동, Bazeklik Thousand Buddha Caves 5-11th C 천동불의 벽화, 위그르의 왕자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투르판과 선선 (누란)의 중간에 있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위치한다. 화염산 근처 절벽에 위치한, 5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불교 벽화가 있는 석굴 유적이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77개의 바위를 깎아 만든 석굴이 있으며 이 동굴들에는 전체 천장에 수천 점 불화가 그려진 벽면도 있고, 어떤 천장은 인도인, 페르시아안, 유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규모의 부처를 채색한 불화도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약탈을 당해 많은 부분이 도굴되고 파손되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띁어서 가져가 연구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미처 못 가져 간 일부가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남아 있다. 일본은 청나라 중국 땅을 삼킬 야욕으로 문화공부부터 먼저 한다. 문화를 비교 검토해 백제는 옛날부터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식민사관을 쓴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으로 손오공과 삼강법사들이 서역으로 가다가 들른 곳이다. 천불동의 화염산은 섭시 70도가 넘는 아무 것도 없는 모래산으로 새가 날라가다가 타 죽을 정도이다.
7. 중국의 소수민족 분포도
중국에는 60 여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가운데 하늘색만 한족이며, 나머지는 티벳족, 몽골민족이다. 현재 중국은 역사 다시쓰기 작업을 한다. 중국 정부는 ‘우리가 하나이다’ 라는 catch phrase 아래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뭉침을 주장하지만 자치구는 독립을 원한다.
8. 공자 BC 6세기 사서오경
Feng Dao 풍도( 882-954) 는 북송때 사람으로 동양의 구텐베르크라 불리며 활자 인쇄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공자의 9개 유교 경전을 9 개의 고전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에는 한자 번역 사업을 주로 했고, 송나라 때 처음으로 활자본을 찍어서 책을 만든다.
구경 Nine Classics (932-952) 은 사서오경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을 의미한다. 사서는 논어 Analects of Confucius, 맹자 Mencius, 대학 Great Learning, 중용 Doctrine of the Mean 를 말하며, 오경은 시경 Classics of Poetry, 서경 Classics of History, 역경 I Ching, 춘추 Spring and Autumn Annals, 예가 Classics of Rites 를 말한다. 역경은 우주 만물의 balance를 다루며 서경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어쩌다가 왕실이 망했나 생각해보라는 의도이다.
이 사서오경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송나라 이후 향후 모든 정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서오경을 알아야 가능하다. 과거시험에서 사서오경의 구문을 응용해서 출제 문제의 답을 써야 한다. 과거에 등용되어 진사가 되려면 사서 오경을 줄줄 꿰고 있어야 했다.
9. 성리학, 주자학 Neo-Confucianism, 주희 Zhuxi 1130-1200
유교의 사서오경을 새로운 유교인 주자학(성리학)으로 정리한 사람이 주자이다. 성리학은 사서오경의 공자 이론을 정치의 이념으로 삼으며 실질적으로 응용을 했기에 기존의 유교와 다르며 Neo-Confucianism이라 부른다. 주희는 위기지학, 학문은 나를 위한 것이다 라고 했다. 도교 불교는 나를 수련하고 참선을 하는 것이며 유교도 나를 닦는다는 의미에서 비슷하다. 기원전 사람인 공자의 사서 오경 이론이 그전에는 뜬 구름 잡는 얘기로 들렸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이용이 된다.
사서에 있는 중용은 균형의 이야기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데 학자에게 맞아 떨어지는 이념이다. 수신제국평천하는 '나를 다스린다' 는 뜻인데 그전의 단계로 경물치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물을 관찰하여 공부를 하고 지성의 극치에 도달하고 나면 수신의 단계에 들어가고 그 다음 단계인 제가, 치국, 평천하로 차례로 올라간다. 책 읽고 공부하는 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론이었다. 사서오경에서는 군자는 어질어야 한다는 인이 가장 큰 덕목이다. 전에는 왕의 강한 카리스마와 전쟁을 잘하는 덕목이 최고로 여겨졌으므로, 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덕목이었다. 그러나 무인이 아닌 문인 위주의 체제에서 어질게 정치를 한다는 아이디어가 송나라 태조 조광윤에게 크게 appeal 했다. 무인과 문인을 구분해 무인을 깔보는 사고방식이 송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주자는 사서를 읽을 때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서로 읽으라고 한다. 공부하고 깨우친 것을 과시하지 말고 어진 성품으로 나타나게 할 것이며 자신을 삼가하면서 엄격하게 다스리고 나서 남을 다스린다. 이런 생각들이 정치적 개념으로 자리잡았는데 그렇다면 당파는 왜 생겨났을까?
한자 하나 놓고 해석을 달리하며. 하나의 해설에 목숨을 거는 당파싸움이 생긴다. 유교의 병페가 시작된 시기 역시 송나라이다. 공자는 BC 6세기에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한 시대를 살았으며 아버지가 별 볼 일 없어서 고위 관료에 등용되지 못했다. 이나라 저나라를 방랑하면서 불우하게 살았으나 똑똑한 제자도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의 사상이 1600년이 지나서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너무 이상적이어서 당파싸움으로 발전한다. 제자가 스승을 집고 넘어갈 수가 없어 의견이 맞지 않으면 다른 파의 스승에게 간다. 같은 학파에서 스승의 얘기를 반론 할 수 없다. 상하가 잡힌 좋은 지배체제이나 오늘날은 다소 변질되어 나타난다. 교수님께 감히 질문하면 괘씸하다고 본다. 선생과 제자가 주종의 관계가 된 현실인데, 이것을 에티켓, 예의범절이라고 부른다. 정작 공자는 자신의 말에 사사건건 아니라고 한 제자 관희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반문을 하면 기쁜 일이다' 라고 했다. 조화를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중용을 중요시했으며 사서오경을 읽고 똑똑해 지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되라는 도덕을 강조했는데 현실에서는 서서오경을 읽음이 하나의 권력집단이 되었다.
유교정치 이념이 송나라 때 자리를 잡고 당송 8 대가의 유명 문인 중 6명이 송나라에서 나온다. 당나라 시대의 한유 Han Yu 768-824, 유종원 Liu Zongyuan 773-819 가 있으며 송나라 때의 구양수 Ouyang Xiu 1007-1072 와 소순 Su Xun 1009-1066, 소철 Su Zhe 1039-1112, 중공, 왕안석 Wang Anshi 1021-1086, 소식 등이다.
10. 소식 (소동파) Su Shi 1037-1101
북송 때의 명문가 집안 시인으로 아버지는 소순이며 동생은 소철이다. 소동파는 일본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 시인이었다.
소동파 동상, Ci 사
사 Ci 는 당말기에 생긴 새로운 문학장르로서 노래에 붙이는 글귀인 가사를 뜻한다. 소동파는 노랫말을 잘 지었다. 사는 천박한 문학 장르로 여겨졌지만, 대중에게 어려운 시에 비해 노래는 부르기가 쉬워서 소동파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통문학이 아닌 사문학은 음담패설이 많다.
소동파의 동파육
소동파는 당쟁의 희생자로서 끊임없는 유배생활을 한다. 말기에는 카이펑의 남쪽 끝, 생면부지의 도시 황주로 유배를 가서 가난하고 궁핍하게 산다. 돼지고기는 값이 쌌는데 부자들은 돼지고기를 안먹고 가난한 자들은 먹을 줄 모른다. 미식가인 소동파는 돼지고기를 잘 요리해서 먹었는데 이를 동파육이라 하고 널리 유행되었다. 소동파에게 시와 음식은 모두 오랫동안 숙성하여 터져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는 시에 대하여 ‘만 섬이나 되는 많은 샘물이 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솟아’ 나오는 것이라고 썼고,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이 나누나’ 라고 황저우의 동파육을 노래한 적 있다. 지금도 남송의 수도 황저우에 가면 동파요리가 눈에 많이 뛴다.
소동파는 3 가지 이유로 입이 힘들었다고 한다. 첫째는 학식이 높았으므로 말을 격식있게 해야 했고 둘째는 요것 저것 맛보느라고 힘들었고 세째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양귀비가 좋아했던 과일 리치가 많이 나는 곳인 해남성으로 귀양을 갔을 때는 소동파는 리치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소동파는 어떤 일이 생겨도 찌들거나 암울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세상에 없는 낙천주의였고 흔들림이 없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여산(루산)의 안개비, 강서성
진면목이란 말이 있다. 소동파가 여산의 빼어난 산세를 노래한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산세가 너무 빼어나서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고 했다. 그러자 동료 문객들이 여기 저기 함께 다니며 꼭 한 수를 부탁하니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단지 이 몸이 산 속에 있을 뿐이네” 라고 썼다.
West Lake Xi Xu 서호, 항저우
송대 원우 4년, 즉 1089년에 소동파는 후베이성의 벽촌 황저우에 유배를 살고 있었다. 이 황저우에 서호가 있어 중국 역대 시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소동파도 서호를 산보하며 많은 시를 썼는데, 시 ‘비 개인 호수에서 술을 마시다’에서는 ‘경국지색’의 서시에 비유한 적 있다. 중국의 4대 미인인 서시가 화장을 했을 때나 안 했을 때나 천하일색 미인이듯이, 서호 또한 ‘은빛 물결 출렁일 때나 운해에 가려 천지가 몽롱할 때나’ 천하의 절경이라고 읊었다. 이 시절에 그는 황저우를 소요하면서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를 지었다.
소동파 시, 적벽부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기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 노닐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 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더니,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더라.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더라.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게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적벽의 야경과 흥취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상앗대로 속이 훤히 들이비치는 물을 쳐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도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가에 바라보도다." 손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하는 듯,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이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릴레라.- 주흥이 일어남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 " 하니, 손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난다.' 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이 푸른데, 예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받은 데가 아니던가 ?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깨뜨리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갈 제,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감에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술을 걸러 강물을 굽어보며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이러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함에랴.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을 들어 서로 권하며,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부치니 아득한 넓은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알이로다.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날으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는 것은 갑자기 얻지 못할 줄 알새, 끼치는 소리를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손의 말
소자 말하되 "손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天地)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또, 천지 사이에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소자의 말(손의 말에 대한 반론)
손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두 사람의 화해
송나라 5년(1082) 가을 7월 16일의 달 밝은 밤에 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며 삼국의 영웅인 조조(曹操)와 주유(周瑜)의 풍류에 비겨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고, 결국은 다 무한한 생명 앞에서는 모두 덧없는 존재라는 것과, 무한한 본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이 다 같은 것임을 깨닫고 시름을 잊는다는 내용을 술회한 명문이다.
적벽강은 한(漢)나라 때 유비(劉備)와 조조(曹操)가 싸웠던 전쟁터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조정의 비리를 풍자한 혐의를 받아 황주(黃州)로 유배 갔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작가는 삼국 시대에 유비와 조조의 군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적벽에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옛날을 회고하고 인생과 대자연의 의미를 노래하고 있으며, 후편에서는 적벽의 겨울 풍경이 지닌 아름다움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자연의 장구(長久)한 시간성에 비하여 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짧음을 한탄함으로써 자연으로 귀의하고자 하는 노장사상이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11. 중국의 4대 미녀, 양귀비, 서시, 왕소근, 초선
춘주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 (浸魚)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서시는 기원 전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 (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모국을 구하기 위해 오왕 부차(夫差)의 애첩으로 된다.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푹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경국지색)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절세미인 서시를 기념하기 위해 후세인들은 서시전 (西施展)을 건축하기도 했다.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 (落雁)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춘래불사춘 즉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다(春來不似春)라는 시는 왕소군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왕소군은 기원전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로 절세의 미녀 였다고 하는데 원제는 후궁이 많이 일일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모연수라는 궁중화가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하여 후궁을 낙점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궁들은 모연수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만이 뇌물을 바치지 않아 모연수는 왕소군의 얼굴을 못난이로 그렸다. 당연히 황제는 왕소군을 곁에 두지 않았는데 그러던 중 흉노족의 왕이 한나라 미녀로 왕비를 삼기를 청하자, 황제는 추녀로 잘못 알고 있던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보낸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던 날 실제 얼굴을 본 원제는 분노하여 모연수를 단칼에 죽여 버린다. 말도 통하지 않는 흉노족에게 시집을 간 왕소군은 서글픈 마음을 가락에 담아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그 소리와 모습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재 짓하는 것을 잊고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기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폐월 (閉月)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초선은 기원 전의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수화 (羞花)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4대 미녀 중 유일한 기원 후의 사람이다. 당나라(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12. Su Dongpo in Straw Hat Wooden Shoes, Second Half of 15th C, Japan
소동파의 이야기를 담은 글귀이며 유배를 다니며 리치도 먹고 동파육도 만들어 먹었으나 힘들고 찌들은 소동파의 모습이며 일본에서 그려진 것이다. 소동파의 인생 안에 송나라의 질서체계와 위기가 보인다.
13. 양녕대군과 소동파
소동파의 명작 ‘후적부’를 초서체로 쓴 양녕대군의 구곡병풍. 자유분방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유교사상과 군자정치 이념이 그림에 담겨 있으며 송나라 때 산수화가 극도로 발달하고 그림, 시, 문학이 다 펼쳐진다. 더 이상 불교이야기는 없어지고 유교가 정치에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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