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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술 압셍트 한잔을 마시는 피카소, 큐비즘 9/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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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766회 작성일 10-09-17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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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6th hour: Cubism, Picasso with a glass of Absinthe  큐비즘, 압셍트 한잔을 마시는 피카소


1. Pablo Picasso (1881-1973)                                                              Georges Braque (1882-1963)

                                                        
 
청기사파나 다리파는 일련의 작가들이 모여서 선언문을 쓰고 자발적으로 한 예술운동이고 포비즘은 화려한 색채 사용으로 인해 비평가가 이름이 붙였는데 브라크와 피카소가 창시한 큐비즘은 모여서 하거나 선언문 같은 것을 발표한 적이 없는 독자적인 예술운동이다. 마티스가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장방형의 큐브로 가득 차 있다고 조롱하는 투로 말한데서 큐비즘 cubism 이라는 말이 생겼다.



     

위의 그림들을 큐비즘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 그림들은 마티스나 청기사파, 다리파와 굉장히 다르다. 첫째, 원색에 관심이 없고 색채 사용이 무척 다르다. 19세기 말에 들어와 색이 비로소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 감정 표현을 하게 되었고 후기인상파, 마티스, 독일표현주의 작가들의 그림은 표현적 expressionistic 이며 세상의 인지 perception 에 관심이 있었는데 Cubist 는 이들과 무척 대조적으로 정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회화의 개념 concept 만을 지적 intellectual 으로 탐구한다. 


2. 브라크와 피카소는 거의 황토색, 갈색, 회색의 어두운 tone 을 사용했고 감정 표현에는 관심이 없었다. 형식을 실험하는 그림으로 풍경, 정물, 초상의 세 장르만 그렸으며 세기말적 증후군이나 유토피아, 세상에 대한 자괴감을 나타내는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Pablo Picasso, House on the Hill (Horta de Ebro) 1909
 
집들이 뒤에서 앞으로 튀어나오는 인상을 준다. 황색으로 음영을 주었는데 3차원 공간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공간을 혼동에 빠뜨린다. 3차원인 것 같은데 정확지 않다. 실제적으로 저런 곳은 없다.

Georges Braque, Houses at L’Estaque 1908


어두운 색을 사용하며 집의 형태가 맞지 않다. 음영을 거꾸로 쓴다.
 
Georges Braque, Viadact at L’Estaque 1907
 
야수파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브라크의 초기 그림이며 화려한 색을 사용했다. 마티스가 이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브라크를 좋아했지만 1년 후에 Houses at L’Estaque 를 내니까 실망을 한다. 마티스도 처음에는 아방가르드였지만 또 다른 아방가르드를 못 받아 들인다.


3. Pablo Picasso, Girl with Bare Feet 1895
 
피카소가 14세에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는 20세기 모든 예술운동에 끼어있다. 일년 안에 자신이 자신을 넘어선다. 다른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아직도 놀라워하고 있을 때 그는 벌써 다른 작품을 내 놓는다. 그 기간이 일년을 넘지 않는다. 피카소의 대작은 거의가 30살 이전에 나왔으며 그는 30세에 세계 순회전을 가진다. 아버지가 미술 선생이었으며 형제 9명과 같이 자란다. 이미 10대에 사실을 재현하는 그림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15살에 스페인 전국에서 대상을 타며 16살에 개인전을 연다. 19살 20살 무렵에 Girl with Bare Feet 같은 재현의 그림을 포기하고 26-27세에 큐비즘의 시작인 Horta de Ebro 를 그린다. 피카소만 시기별로 나누어 공부해도 20세기 전반의 예술사조를 다 보게 된다.


4. Pablo Picasso, Le Moulin de la Gallette 1900             
Pierre-Auguste Renoire, Le Moulin de la Gallette 1876                       

          

르느와르가 물렝드라 갈레뜨 라는 제목으로  19세기 중 후반에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한 브르조아의 행복한 모습을 그렸는데 20세기에 피카소가 파리로 오자 마자 똑같은 제목으로 브르조아의 모습을 그린다. 르느와르가 보는 세상은 평화롭고 따스한데  피카소가 보는 세상은 어둡고 사람들이 탐욕에 차 있고 지쳐 보인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에서도 minority 로 취급되는 Catalonia 지방의 출신이며 파리에서도 이방인인 스페니쉬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 시민인 브라크는 1914년 1차 대전에 참여를 하지만 피카소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전쟁 중에도 그림만 그린다.       


5. Pablo Picasso, La Vie (The Life), 1903

21살 때 그린 Blue Period 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세상이 파래서 파란색으로 칠한 것이 아니다. 큐비즘 전의 그림이며 자신이 보는 세상의 모습을 피카소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현했다.


6. Paul Gaugain,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98
 
고갱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타락한 모습이 싫어서 멀리 타히티로 가서 자연 속의 원주민들을 그린다

Pablo Picasso,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그러나 피카소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주변 인물들을 그림 속에 등장시킨다. Pink Period 의 작품 살팀방끄 가족은 집시 유랑민으로 서커스하는 가족이다. 돈있고 여유있는 브르조아 생활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고 거지, 창녀, homeless 를 통해 세상을 보고 그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7. Pablo Picasso, Gertrude Stein, 1906                                                  Gertrude Stein Bronze
            

피카소가 파리로 와서 보는 세상은 어두웠지만 그에게는 독일 딜러, 프랑스 딜러 등 일치감치 dealer 들이 접근해 왔으며 러시안 콜렉터 쉬킨도 피카소의 작품을 사 모았다. 거투르드 스타인 역시 자신의 salon 에 예술가들을 초대해 토론 및 후원을 하고 마티스와 피카소의 초기 후견인 역활을 하였다. 스타인의 집에서 피카소는 마티스를 만나며 그의 The Joy of Life 를 보고 놀란다.

피카소는 거투르드 초상을 그리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는 창녀와 연인들을 주로 그렸는데 거투르드는 그들과 달랐다. 그녀는 고정 관념적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거투르드는 영미 문학 레즈비언 문학사에 꼭 언급이 되는 작가이며 피카소의 그림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의 그림을 사는 오히려 피카소를 control 하는 입장의 여자였다. 남자를 향한 성적인 appeal 에는 관심도 없고 얼굴도 투박하고 거무튀튀한 소박한 옷을 입는다. 피카소의 여자들은 창녀, 연인으로 그가 control 하는 여자이거나 어머니 같이 그에게 끊임없이 주는 두 부류였는데 피카소는 이 모델 앞에서는 압도 당하고 주눅이 들어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투르드가 없을 때 혼자서 그림을 완성시켰다.


8. Paul Gauguin, Oviri, Musee d’Orsay, Paris                                                 African Masks
              

폴고갱이 아프리카에서 보고 와서 전시를 한다. 이 아프리칸 마스크를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만난다. 


9.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of  D’Avignon   1907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1907년에 그리지만 대중에게는 10년이 지난 후에 알려진다. 피카소의 스튜디어에서 잊혀져 있었는데 한 dealer 가 이 작품을 사고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했으나 루브르는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모마로 넘어갔고 현재 모마에서 제일 중요한 그림 중의 하나이다. 아비뇽의 여자들은 담론이 많다. 서양 미술사에서 여자의 누드는 역사적으로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Titian, Venus of Urbino 1538                                                  Manet, Olympia 1865      
            
      
              
Paul Cezanne, A Modern Olympia 1873-74                            Ingres, The Turkish Bath 1862
                        
Toulouse Lautrec, Brothel 1894



누드화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비너스만 가능했는데 1862년에 잉그르가 터키에서 노예로 사와서 첩으로 데리고 사는 외국여자를 그린다. 1865년에 마네가 창녀 올림피아를 발표함으로서 300여년 전의 티티아노의 비너스 여신의 reclining nude 를 parody 한다. 대문짝만한 마네의 올림피아는 그래도 예쁜 여자의 몸매를 하고 있으며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은 없다. 세잔이 모던 올림피아를 표현주의적으로 다시 그리며 뚤루즈 로트렉은 사창굴을 소재로 그린다.

Cezanne, The Large Bathers  1906                                               Henri Matisse, The Joy of Life 1905-6                          

                              

그런데 마티스와 세잔이 20세기에 들어와 전원에서 노는 신 대신 현대의 사람들을 끌고 왔다. 목가적인 utopia 에서 신들이 님프들과 노는 것을 사람들이 벗고 노는 것으로 그렸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진 누드화의 선배들 앞에 아비뇽의 여인들이 서있다.  

Picasso, Les Demoiselles of  D’Avignon   1907   




Sketch

아비뇽이라는 누가 들어도 다 아는 홍등가 red district 의 창녀가 더 이상 누워 있지 않고 우뚝 서있다. 당당하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자신만만하게 팔을 뒤로 젖히고 있다. 피카소의 최초의 엑소시즘 exorcism 그림이다. 여체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귀신을 쫓는다. 스타인은 1907년에 그린 아비뇽의 여자들을 최초의 큐비즘 그림이라고 했다. 면이 분활되고 헝겊인 커튼이 깨진 유리조각의 파편같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 자체는 뒷모습인데 얼굴은 앞모습을 하고있다. 한 사람의 앞 뒤 모습이 한 화면에 다 나타난다. 색채는 음영을 주지 않았고 어디서 빛이 오는지 알 수 없는 뒤죽박죽의 그림이다. 원래의 스켓치에는 남자 두 명이 포함되어 있다. 1907년에 많은 사람들이 이 해괴망칙한 그림을 이해하지 못 했다. 피카소는 2차원 화폭의 공간 안에 2차원도 아니고 3차원도 아닌 있을 수도 없는 공간을 창조했다.


10. 브라크는 아비뇽의 여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고 다음 해에 Large Nude 를 그린다.

Georges Braque, Large Nude 1908                                             Picasso, Three Women 1907-8

                  



11. Picasso, Bread & Fruit Dish on a Table 1909                           Cézanne, 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s 1895
       
                  

세잔은 색을 마음대로 쓰고 공간도 맘대로 실험을 하고 음영도 여러 곳에 준다. 1895년에 그린 세잔의 사과바구니 정물화를 피카소도 보고 브라크도 본다. 이것을 본 브라크와 피카소는 3차원 공간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던 선, 공간 구성, 음영을 반대로 자꾸자꾸 쓴다. 면이 조각이 난  피카소의 정물화가 1909년에 나온다.


12. Picasso, Head of a Woman (Fernande) 1909                                Fernande Olivier 1881-1966

           

피카소의 첫번째 여자인 올리비에의 두상 조각이다. 조각은 양각, 음각 positive, negative 가 조화있게 들어가고 나와야 3차원의 공간감이 생긴다. 피카소는 동그란 덩어리의 얼굴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두상 조각에 공간도 함께 포착하고 싶었다. 당시대의 이태리 퓨쳐리즘, 프랑스, 러시아 화가들은 브라크의 Houses at L’Estaque,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자들두상 조각ㅡㅡ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작품을 내 놓는다. 당시의 유럽 화가들의 작품은 겉으로 보면 큐비즘과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생각은 다 다르다.


13. Georges Braque, Violin and Palette 1909                           Picasso, Girl with Mandolin Fanny Tellier 1910

               

브라크의 바이얼린과 팔레뜨는 그래도 형체를 조금 알아볼 수 있다. 위의 두 그림은 grid 가 두드러지는데 그리드는 서양회화사에 있어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격자가 있는 틀을 놓고 자연의 모습을 사실과 똑같게 하기 위해 네모에 맞추어 부분 부분 완성해 가는 과학적인 도구 이다. 그림이 완성된 다음에는 화가들의 비밀 도구인 격자는 숨어야 되는데 피카소와 브라크는 격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림의 전통을 거꾸러 뒤집어 버린 것이다.

피카소는 완전 추상을 옹호한 적이 결코 없다. 피카소에게 있어 그림이란 재현적은 아니고 추상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태는 항상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후대에 오는 몬드리안, 잭슨 폴락의 완전 추상이 피카소가 있기에 가능했으며 피카소의 grid 가 현대미술에 있어 몬드리안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가져오게 한다.


14. Picasso, Portrait of Daniel Henry Kahnweiler 1910


1910-11년 사이에 grid 가 훨씬 많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양복, 넥타이, 머리 등의 형태를 대강 알아볼 수 있다. 화려한 색채와는 거리가 멀고 음영을 넣었는데 3차원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이 안 되는 음영이다. 면이 grid 처럼 파편이 난 것을 분석적 큐비즘 analytical cubism 이라고 부르는데 피카소는 이것을 2-3년 동안 실험을 하다가 1912년 이후 부터는 통합적 큐비즘 synthetic cubism 으로 넘어간다. 

Daniel Henry Kahnweiler (1880-1979)
 
다니엘 헨리 칸와일로는 독일인이며 피카소의 초기 dealer 인데 20세기 초, 중반에 피카소의 그림의 독점 판매권을 갖고 그에게 연간 수입을 제공한다. 피카소는 그에게 Portrait of Daniel Henry Kahnweiler 라는 분석적 큐비즘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15. 피카소의 그림을 전 세계가 본다. 1905-6년에 마티스의 생의 기쁨을 보고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보다 12살 어린 새파란 피카소가 큐비즘의 그림을 내 놓는다. ‘나는 아직 꽃그림, 마누라 초상을 그리고 있는데 피카소의 전시회에 갔더니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다.’  ‘나는 사실과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그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릴 수는 없었다. 동시대 화가들은 피카소를 보고 나서 자신의 해석을 내어 놓아야 했다.


16. Picasso, Accordionist 1911                                             Georges Braque, The Portuguese The Emigrant 1911

            

큐비즘의 혁신을 처음 가져온 사람은 브라크이다. 브라크가 먼저 통합적 큐비즘 synthetic cubism을 시작한다. 브라크의 The Portuguese 안에 BAL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그림 안의 글자는 20세기 미술에 있어 엄청난 사건이었다. 작가의 사인 말고는 어떤 글자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글자는 책에 들어가 있어야 하고 캔버스 위에는 그림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브라크는 그림 안에 글자를 찍어 넣었다. 그런데 아무도 브라크의 글자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걸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은 피카소 혼자 였다. 천재를 알아보려면 천재 쯤은 되어야 한다. 피카소가 이 엄청난 사건을 혼자서 감지했고 1911년에 브라크의 The Portuguese 를 보고 나서 1912년 부터는 통합적 큐비즘 synthetic cubism 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7. Picasso, Green Still Life 1914                                          Still Life with Chair-Caning 1912

          
         
분석적 큐비즘 analytical cubism 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진 피카소는  통합적 큐비즘 synthetic cubism을 시작한다. 둥그런 캔버스에 밧줄을 감아서 붙이고 나무 등살무늬의 싸구려 테이블보를 사다가 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써 넣었다. 이것을 파삐에 꼴레 papier colle (pasted paper) 라고 하며 종이를 붙인다는 뜻이다. 캔버스는 붓으로 그리는 공간이었지 무엇을 가져다 붙이는 공간이 아니었는데 피카소의 Still Life with Chair-Caning 은 굉장한 혁명이었다. Oil cloth 를 붙여서 테이블을 만들고 그 위에 레몬, 유리컵을 분석적 큐비즘의 분해 모양으로 그렸으며 브라크의 글씨처럼 JOU 라고 써 넣었다.

Jou 는 신문 journal 의 앞자이기도 하고 jouer (play) 라는 동사의 앞글자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관객하고 play 하자고 장난을 친다. ‘이것을 그림이라고 볼까요? 조각이라고 볼까요?’ 피카소는 꼴라쥬 collage 테크닉을 통해 캔버스의 사물성 object 이 다시 살아나게 한다. 여기서 오브제라는 단어가 나온다.

Still Life with Chair-Caning 은 피카소가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재료를 사다가 뚝닥거리고 붙인 것이므로 일종의 ready made 이다. 1914년에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가 샘 fountain 이라는 제목으로 ready-made 개념을 가져온 것보다 피카소가 2년 먼저 시작한 셈이다. 그림은 화가가 창조하는 것이지 말도 안되는 재료를 사다가 저렇게 쉽게 해서 내어놓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artist 는 천재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피카소는 고결한 예술가의 위치를 강등 시켰다. 다리파, 청기사파도 elite 적인 사고를 했다. ‘나의 훌륭한 그림을 통해 민중을 깨치겠다. 나를 따르라’ 하는 우월적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이제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당신도 재료를 사다가 하십시오. 다 같이 합시다’ 라고 말한다. 예술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 


18. George Braque, Fruit Dish Glass 1912                                 Picasso, Guitar Sheet Music and Wine Glass 1912

               

피카소와 브라크는 친구였으며 피카소는 다른 누구와도 작업을 같이 하지 않았으나 브라크는 예외였다. 그는 자주 브라크의 스튜디오에 가서 그가 뭘 하는지 본다. 브라크가 Fruit Dish Glass 에서 종이 위에 나무결 벽지를 붙인 것을 보고 피카소는 놀라고 브라크 보다 더 굉장하게 붙여 Guitar Sheet Music and Wine Glass 를 같은 해 1912년에 낸다. 피카소는 꽃무늬 벽지 위에 악보 붙이고 파란 색 종이 붙이고 글래스를 스켓치해서 오려 붙이고 신문지 까지 붙인다.

피카소의 Guitar Sheet Music and Wine Glass 를 보고 가운데가 동그란 울퉁 불퉁한 기타 모양임을 대강 읽어 낸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파란색 네모, 흰색 원, 반원을 따로 떼어 놓으면 아무도 기타라고 읽지 않는다. 단지 피카소가 이렇게 조합을 해 놓으니까 기타라고 읽힌다. 같은 모형을 가지고 어떻게 조합을 하느냐에 따라 기타도 되고 벽도 되고 나무도 된다. 이것은 형태의 작위성을 의미한다. 형태란 절대적이 아니고 맥락에 따라서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인류의 불행이 시작된다. 기자와 카메라맨이 선택하고 조합해서 보여주는 신문, TV 를 absolute truth 라고 믿는다. 벽지가 벽지로 보이기도 하고 기타의 몸통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자기가 알고 있던 기타에 맞춘다. 아무도 이것을 보고 ‘말도 안돼’ 하지 않는다.

Guitar Sheet Music and Wine Glass 에서 LE JOU 는 신문의 headline 을 오려서 붙인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라고 써 있다. 1912년의 발칸 전쟁을 의미한다. 발칸은 유럽의 화약고로서 이 지역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교두보처럼 여기 저기로 넘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 Balkan Peninsula, Europe Balkan Countries 
 
Italy Ottoman Empire War (1911-12) 는 이태리와 터키 사이에 북아프리카 땅을 놓고 벌인 전쟁으로 예상을 뒤엎고 이태리가 이기며 리비아가 이태리영이 된다. 발칸 반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제국은 터키를 무서워 했는데 이태리에 졌으니 별 것 아니라고 여기고 ‘우리도 움직여보자’ 하고 러시아와 손을 잡고 요동을 친다. 독일과 프랑스는 추운 나라 러시아가 쳐들어 올까봐  미치도록 경계를 한다. 1911년, 1912년의 1차, 2차 발칸 전쟁이 터지고 각 나라들의 이권 다툼으로 인해 1914년 1차 대전으로 일파만파로 펴진다.
 
이렇게 세상이 급변하는 시기에 피카소는 예술작품을 하면서 자기 주변에서 보이는 것만을 보는 사람들이 답답했으며 너무 naïve 해 보였다. Guitar Sheet Music and Wine Glass 는 café motive 이기도 하다. 당시의 피카소는 무정부주의 였는데 카페 안의 사람들은 위기의식이 없이 천하태평으로 보였다. 그러나 피카소가 아무리 이런 작품을 하여도 2년 후에 1차 대전이 터지고 브라크는 전쟁에 참여하고 헨리 칸와일로는 피카소와 모든 관계를 끊고 독일로 돌아간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1차 대전을 정점으로 해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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