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 다리 밑의 청기사들 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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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292회 작성일 10-09-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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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a Modersohn-Becker (1876 – 1907), Self- Portrait 1906
여자 아티스트가 옷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누드로 그렸다. 비너스, 창녀도 아니고 마티스, 피카소도 자기가 벗고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자 누드화의 다른 면을 들고 왔다. 모더슨은 파리에 가서 고갱, 마티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색깔의 자유를 누려 뒷풍경의 나뭇잎을 파란색 톤으로 칠했다.
Naked Woman Breast Feeding Her Child 1907
Mary Cassatt, The Child’s Bath 1893
인상주의 화가 Mary Cassatt 은 엄마와 아이의 따뜻한 관계의 도상으로 표현했고 혹은 슬픔에 잠긴 피에타상이 전통적인 모자의 도상이었다. 그런데 모더슨의 모자 그림에서 원시 우림의 부족에서 젓을 먹이는 투박한 몸을 한 엄마의 시커먼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모더슨은 전통에서 보여지는 여자의 모습과 다른 해석을 내 놓는다.
2. Rainer Maria Rilke 1875-1926
릴케는 말테의 수기 The Notebooks of Malte Laurids Brigge 로 유명하다. 덴마크 귀족인 주인공 말테가 파리에서 겪는 생활을 썼는데 병자와 거지가 난무하고 사람의 탐욕이 들끌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파리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 문인이 느끼는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며 이렇게 살다가는 곧 종말이 올 것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었다. 독일에서는 이런 고민이 집중적이었고 다리파, 청기사파의 독일 표현주의가 출현했다. 다리파 Die Brucke (the Bridge)는 1905 년에 Dresden 드레스덴에서 형성되었다. 1905년은 프랑스의 야수파가 끝나는 시기이고, 1907-1909년 사이에 아비뇽의 여인으로 피카소의 큐비즘이 유럽 예술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이태리에서는 미래파 Futurism 이 막 출현했고, 마티스, 세잔, 고갱, 반고호가 유럽을 돌면서 순회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작가들은 타락한 세상을 등지고 과거로의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Jugendstill 은 Young Style 이라는 뜻의 독일 단어인데 독일식 version의 아르누보 운동이다. 순수예술이 아니라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판화예술이 유겐스틸을 통해 유행되었고 다리파가 이에 영향을 받는다.
3.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Girl under Japanese Umbrella 1906
Ernst Ludwig Kirchner, Self-Portrait with model 1907
다리파는 처음에는 모여서 건축 공부를 하다가 그림 쪽으로 전환이 되었고 1905년에 다리파 선언문 manifesto 를 쓴다. 다리파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Zarathustra Said) 에서 나온 철학적 운동이다. 인간과 utopia 를 연결하는 bridge 역활이 Art 와 Artist 의 몫이라는 개념이다. 초인 Superman 의 개념이 소개되는데, 인간과 초인 간의 다리에서 The Bridge 파가 나온다. 키쉬너는 우리의 세상은 타락한 지옥이며 종말이 임박했다고 본다. 그의 그림 역시 색채가 감정을 표현하며 양식적으로 이제는 낯설지 않다.
Ernst Ludwig Kirchner, The Street, Dresden, 1908
Ernst Ludwig Kirchner, The Street, Berlin, 1913
몸파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소비하는 층의 남자가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치장을 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드레스덴, 베르린 거리의 모습이다. 환락, 타락의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색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데 색을 자유롭게 써서 무슨 얘기를 할까? ‘이 세상은 이제 끝났다. 여기서 살 수가 없다’ㅡ 19세기 말 당시 그날 그날 먹고 살기 바쁜 보통 사람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얘기이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 거의 안 하고 산다. 이런 위기감은 지성인, 예술가, 글쓰는 작가들만 느꼈다. The Street 은 1차 대전이 터지기 일년 전인 1913 년의 작품인데 예견한 대로 1914년에 1차 대전이라는 세상의 종말이 정말로 왔다.
4. Karl Schmit – Rottluff, Self-Portrait with Monocle 1910
Kirchner , Self-Portrait with Cat 1919-1920
화가들도 전쟁에 참여를 해서 죽고 다치고 키쉬너는 전쟁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전후 긴 요양생활에 들어가고 정신병자같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1차 대전 전에 무수하게 경고했는데 그림으로 다리역활을 하고 싶었는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5. Emile Nolde, The Last Supper 1909
Emile Nolde, Dance around the Golden Calf 1910
일차 대전 전 부터 큐비즘, 야수파, 독일표현주의는 원시주의 Primitivism 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피카소는 Non European World 를 보고 싶은 열망에 여행을 간다. 문명화, 산업화, 유럽화 된 허망한 세계를 떠나고 싶고 비유럽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알제리아, 아프리카, 타이티, 아시아, 중국을 가서 보고 꿈을 꾼다.ㅡ저기는 때묻지 않았다. 때묻지 않은 사람은 가면을 쓰고 나무조각 figure 를 가지고 있고 세상을 이렇게 보는구나.
문명화가 되지 않음을 pure innocence 로 해석하고 time machine 을 타고 몇 십년 전으로 돌아간다. 이 깨끗한 세상이 문명화 될까봐 두렵다. 비유럽 세계에 대한 fantasy 를 가짐은 ‘진보하지 못한 문명’ 이라는 시각이 잠정적으로 깔려있다. 유럽인들은 다른 문명을 보기 전에는 하느님만 신으로 생각했다. 종교가 없는 저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할까 말까? 하느님을 모르면 human 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교육 대상이다.ㅡ 이것이 식민지주의 colonialism 의 기본 생각이다.
비유럽 세상에 대한 fantasy 인 Primitivism 은 Colonialism 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유럽인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그들의 원시적인 primitive 세계를 잠시 빌려왔다. 일차 대전 후에 지성인들은 기독교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칸딘스키를 위시해 유명 예술인, 지성인들은 기독교를 버리며 기독교가 지탱하는 세상을 버린다. 유럽을 지탱해 왔던 중요 사상 ideology 을 폐기하고 나니 대체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유럽 밖의 신선하고 새로운 세상에 희망을 걸었다.
6. Wassily Kandinsky, Cover of Der Blaue Reiter Almanach, c.1912
Der Blaue Reiter (the Blue Rider) 청기사파는 오직 Kandinsky 와 Franz Marc 두 명이며 1911-1914 년 까지 존재했고 1차 대전이 터지자 종료되었다. 청기사파는 utopia 의 꿈을 꾸었는데 지금의 유럽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이 청색기사이다. 칸딘스키의 그림에는 파란색 말과 기수가 많이 나타난다. 위의 청기사파 연감 almanac 에는 비유럽적 세상에 있는 이미지와 아프리칸 마스크를 싣고 새 예술이 가야 할 vision 을 제시하며 칸딘스키의 글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 가 실려있다. 재현을 전혀 하지 않는 음악이 예술의 최고 장르이며, 미술도 음악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
Wassily Kandinsky, The Blue Mountain No 84 1908/09
말타는 사람 warrior 는 혁명전사의 도상이다. 청기사파 이전의 그림이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다. 색채의 표현력이 극대화 되었고 마티스와 비슷한 분위기이다.
Franz Marc, The Large Blue Horses, 1911
Marc 는 인간은 타락했고 희망이 없다고 보고 동물에서 순수성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본다. 색깔 사용의 표현력과 평면성은 고갱, 반고호의 방식 그대로 이다.
Franz Marc, The Fate of the Animals, 1913
화면이 유리를 내려칠 때 깨지는 파편같다. 큐비즘과 미래파 Futurism 과 비슷한 양식이며 오피즘 Orphism 과도 비슷하다. 전 유럽적인 Pan European 예술이 호흡을 맞춘다.
Franz Marc, Stable 1913
Wassily Kandinsky, Sketch for Composition ll, 1909–10
정신없는 세상이 대홍수 deluge 같은 재앙을 겪고 나면 정화가 된다는 묵시록적 apocalyptic 믿음이 보이는 칸딘스키의 그림이다. 청기사파를 같이 만든 Franz Marc 는 일차 대전 중에 전사를 하는데, 이태리의 미래파 Futurism 는 폭탄이 터지는 것을 아름답게 그리며 전쟁 후에 오는 좋은 세상을 믿는 칸딘스키의 생각과 같았다. 로댕이 발작상을 만들 때 카리스마와 지성을 표현한 것 같이 칸딘스키도 그림을 통해 영적인 영역을 보여주려 했다. 그림 안에서 재현이 완전히 없어지고 색깔과 구성만 남으면 spirituality 를 느낄 수 있다.
Vasily Kandinsky 1866-1944
Arnold Schoenberg, 1879-1951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 아놀드 숀버그이다. 음악이 예술의 최고 장르이며 멜로디는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칸딘스키는 제목을 Composition, Improvisation 등의 음악 용어에서 차용했는데 바깥 세상의 reality 와 차단시키려는 의도이다. 그림의 제목이 ‘winter’ 이면 관객은 그림에서 겨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Vasily Kandinsky Composition VII 1913
그림을 보고 사람이 와글와글 모여있는 것 같다고 느끼지 말고 영적인 spiritual 을 찾아 보라. 칸딘스키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교회나 절에 가서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을 갖기를 원했다. 그림으로 사람을 바꾸어 놓으려는 엄청난 야심이다. 프랑스의 문인 스탕달은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인간이 실제 자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꿈꾸는 허영심 때문이라고 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기존 종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다. 칸딘스키의 의도는 ‘그러면 내 그림을 와서 보라’ 이다.
칸딘스키는 다리파, 청기사파, 칸딘스키는 뮤지엄이나 갤러리들이 물질 문명에 휩싸여 그림을 팔 생각만 하고 역활을 제대로 못 했기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다 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뮤지엄의 역활이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술이 세느강변, 초상화나 그리는 한심한 짓을 해 왔는데 이제부터 그림은 아무 것도 그리지 말고 색, 선, 구조만 남겨 놓아야 한다. 일단 와서 키쉬너의 The Street 를 보고 충격을 받고, 그 다음 칸딘스키를 보고 영적인 구원을 얻어라. 그래서 그는 일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새 세상이 오는구나 라고 받아 들였다.
그러나 역사는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전후에 독일은 더 심하게 물질문명이 일어나고 히틀러가 나타나고 2차 대전이 일어난다. 1914년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를 보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1차 대전 후 독일표현주의 화가들의 추상화는 비아냥의 주인공이 된다. 너네는 뭐했냐?’ 새로운 세상이 온다더니 이게 뭐야? 칸딘스키, 키쉬너, 다리파, 청기사파들은 그림을 내놓을 당시에는 냉대를 받았고 전후에는 지탄만 받는 화가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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