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 마티스와 로댕 근대 조각 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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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7,065회 작성일 10-09-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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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4th hour: Fauvism and Modern Sculpture (거칠게 야수적으로)
Fauvism 1898-1905
1. 유럽의 역사를 모르면 그림을 그냥 눈으로 보는 느낌만으로 그친다. 포비즘과 후기인상파가 문예사와 상관없이 어느날 갑자기 땅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림, 음악, 글을 하는 사람들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하여 상처를 잘 받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10-20배로 크게 느낀다. 오히려 공장에 가서 매일 일하는 노동자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근현대 문예 사조에는 부자작가는 별로 없다. 집에 빵을 못 가져가 식구들에게 죄인이었고 거의 다 사회의 하층민 생활을 했고 그래서 더욱 세상이 바뀌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이다. 글을 씀이 공장에서 가방 10개 만드는 것보다 못한 일인가? 왕정복고사회에서는 궁정화가들은 공무원급에 맞추어서 더 잘 살았는데 이제는 무직이 되었다. 나의 생활수준과 내가 쓰는 글의 gap 이 크다. 발작은 빚장이에게 도망다니고 서점직원이었던 에밀졸라는 결코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씌여지지 않는다. 19세기 예술가들은 이렇게 dilemma 에 빠져 있었는데 여러가지 ideology 가 막 쏟아져 나오니까 고맙기 그지 없었다. 특히 socialism 과 communism 은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appeal 을 하였다. 이상한 종교 Theosophy 가 나타나고 작가들은 다 그쪽 성향으로 돌았다.
또한 제국주의 imperialism 와 식민주의 colonialism 가 대두한 시기 역시 19세기 말이었다. 보불전쟁에서 나라를 하나로 묶어 독일국가를 형성시킨 nationalism 의 개념도 이때 시작된다. People 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체제가 1차 대전으로 봇물이 터진다.
2. 유태인 사건 The Dreyfus Affair 역시 19세기 말에 일어났다. 유럽에서 반유대감정의 역사는16-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8년에 에밀졸라가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나는 고발한다 (J’Accuse!) 라는 글을 프랑스 국가와 국방부에게 남겼다.
Dreyfus 는 유대인 군인인데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은 후 악마섬에 유배가 된다. 4년 후 진범이 나타났고 드레이퍼스는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인들은 ‘드레이퍼스, 꺼져라, 유대인, 죽어라’ 하고 적대 감정을 극심하게 드러냈다. 유대인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반유대주의가 이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다. ‘고리대금업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싫어하는 것 아닌가?’ 결국 드레이퍼스 사건은 유대인들이 뭉치는 계기가 되어 시온이즘 Zionism 과 연결이 되고 급기야는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해야 한다’ 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영국도 프랑스도 별 반대없이 ‘그래 너네 국가 차려라’ 하였고, 20세기 중반을 가로 지르는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되어 1948년에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된다. 19세기 말은 근대국가의 출현, 식민주의, 예술하는 사람의 dilemma 까지 합쳐져 정치적, 역사적, 인종적으로 복잡다단한 시기였다.
3. Henri Matisse, Dinner Table 1896-7
드레이퍼스 사건 당시 마티스는 브르조아의 식탁에 걸림직한 Dinner Table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실내에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인상주의 그림이다.
Henri Matisse, Male Model 1900
하지만 마티스는 20세기에 딱 들어오자 마자 Male Model 같은 그림으로 바꾼다. 고갱과 나비파 덕택으로 색채로 느낌을 표현하고 2차원적인 묘사를 한다 .
4. The Portrait of Matisse 1869-1954 by Andre Derain
Maurice de Vlaminck 1876-1958 by Nancy Rourke
Andre Derain by Matisse 1905
야수파 화가 마티스, 블라밍크, 드레인의 초상에서 나타난 색채와 2차원적인 표현은 그림이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말해준다.
5. Paul Signac , Portrait of Felix Feneon in Front of an Enamel of a Rhythmic Background of Measure and Angel 1890
시냑은 신인상주의 Neo Impressionism 의 대표화가이다.
Henri Matisse, Luxe calme et volupté (Luxury, Calm and Pleasure) 1904
강변에서 여자 남자가 벗고 노는 듯한 그림이다. 스승인 폴시냑에게 배운대로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으로 그렸다. 시냑은 흐뭇해하며 마티스의 이 그림을 사 주었다.
Cezanne, The Large Bathers 1899-1906
Nicolas Poussin, Mars and Venus 1630
17세기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으로 전원 목가적인 Arcadia 를 그린 전통적인 주제로 신 비너스와 마스가 벗고 놀고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세잔과 마티스의 그림에는 신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신처럼 벗고 있었기에 충격적 이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도 창녀의 누드가 등장해 엄청난 욕을 얻어 먹었다. 마티스, 세잔은 푸생과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현세에는 없는 그림을 그렸다. 서양의 중요 도상을 가져다가 전혀 다른 그림을 내놓은 의미는 ‘나는 도전한다’ 이다.
6. Henri Matisse, Open Window 1905
마티스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 pointillism 을 거친 후 자기만의 스타일이 나온다. 1896-7 년에 그린 Dinner Table 과 10년 사이에 실내풍경이 아주 달라졌다. 빛이 전혀 없고 색깔도 칠하고 싶은 대로 썼다. 서양 미술에서 창문은 중요한 motive 이다. 미술=재현 paradigm 에서 그림의 역활은 마치 창문과 같아서 집에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때 보이는 것과 똑같게 그려야 한다. 그런데 마티스의 창은 아무리 내다보아도 3차원의 공간과 원근감이 하나도 없이 다 막혀 있다.
7. Henri Matisse, Woman with the Hat 1905
Henri Matisse, Portrait of Mme Matisse 1905
엄청난 scandal 을 가져온 작품이다. ‘사람의 얼굴 가운데 line 이 있다니? 배경의 벽이 왜 저래?’ Fauvism 은 1898 년 부터 1905년까지 시기가 짧은 예술운동이다. 마티스와 드레인은 가을 살롱전 Salon d’Automne 에 작품을 전시하는데 바로 옆방에서는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르네상스적 작품이 전시가 되고 있었다. 우연히 마티스와 드레인의 방에 가서 작품을 본 한 비평가가 작품의 색깔이 너무 대조가 되므로 야수적 les fauves (wild beast )이라고 평한데서 fauvism 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Andre Derain, London Bridge 1906
Monet, Waterloo Bridge 1903
점진적인 표현 granulation 이 잘 된 인상파 모네의 그림과 비교하니까 드레인의 그림은 색깔이 너무 야수적이다.
8. Henri Matisse, The Joy of Life 1905-6
전원에서 노는 목가풍의 그림인데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으로 그렸던 Luxe calme et volupté 와는 불과 1-2년 사이에 너무 달라져서 스승인 시냑이 노발대발한 그림이다. 엄청난 화폭에 사람들이 노는 utopia 를 그린 생의 기쁨이 흉칙한 그림이라는 평을 받은데는 너무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 나무가 왜 저래? 나무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둘째, 인물의 크기 비례가 맞지 않고 강강수월래 사람의 크기와 원근법이 안 맞다. 셋째, 가장 큰 이유는 특히 중앙에 있는 두 여자의 몸에 두른 초록 빨강의 테두리 contour line 때문이다. 17세기 푸생의 Mars and Venus 처럼 다 그린 후에는 윤곽선이 없어져야 하는데 마티스는 거꾸러 윤곽선을 또렷히 그려 넣었다. 당대의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그려? 중간 과정인가 봐’ 라고 했을 정도로 파리에서 sensation 을 일으켰다.
마티스의 야수파의 엄청난 공적은 선을 버렸음에 있다. 선은 sketch 를 하는 도구였는데 선이 그림의 주인공처럼 나중까지 남아서는 안되고, 나무와 인물의 재현을 위해 숨어 주어야지 완성작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마티스는 Media 로서의 tool 에 지나지 않았던 선을 또렷히 그림의 주인공으로 살렸다. 이제 재현을 안 할거니까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개념은 버렸다. 마티스로 인하여 몬드리안의 선만 남은 완전 추상이 가능해진다.
Giovanni Bellini and Titan, Feast of Gods 1514/1529
16세기에 벨리니는 신들이 옷을 벗고 노는 목가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마티스는 이제부터는 벨리니처럼 안 그릴 것을 선언한다. ‘나는 생의 기쁨을 재현을 하지 않고 선과 색을 주인공으로 하여 표현을 한다.
9. Jean-Auguste Dominique Ingres, Odalisque and Slave 1839
서양미술에서 전통적으로 누드는 두 부류만 가능했다. 신과 남의 나라 여자는 옷을 벗어도 개의치 않았다. 잉게르는 이방인 터키여자 오달리스크를 그렸다. 그런데 마네는 1863년에 비너스도 아니고 외국여자도 아닌 프랑스 창녀 올림피아를 대문짝만 하게 그려서 브르조아들을 불편하게 하였다.
Henri Matisse, Blue Nude Memory of Biskra 1907
마티스는 Africa 의 Biskra 지역을 여행하고 온 후 이 그림을 그렸다. 신체 비례도 맞지 않고 팔이 너무 길고 몸은 육감적인데 열굴은 유럽여자가 아니다. 공간감 없고 가슴 옆에는 현실에서 쓰지 않는 파란색으로 선을 그어놓았다. 그 유명한 마네의 올림피아(1863년)의 reclining nude 를 가져다가 야수파로서의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19세기 말 20세기초의 유럽나라들은 Colonialism, Imperialism 과 연관이 되고 Primitivism 의 영향을 받는다. Primitivism 은 침략과 약탈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조각과 마스크를 가져다가 루부르 박물관에 대거 전시를 한다. 이때 유럽은 Africa 문화에 노출이 되는데 마티스, 피카소는 원시 부족인들의 인물 표현 방법에 충격을 받는다. 아프리카인들의 mask 는 양면의 칼이다. 그들에게는 삶의 방식이며 주술인데 유럽에 와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재현과 표현의 분기점에 서서 고민하던 마티스와 피카소는 가면이 주술의 목적임을 놓치고 사람 얼굴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철학 사상면에서 윤리 도덕이 고통 받기 시작하는 시기가 19세기 말이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어려움에 봉착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는 시기가 이때 였다. 1차 2차 대전으로 큰 댓가를 치르고, 피카소는 미쳐서 돌아가는 세상을 가슴 아프게 고민하고 있었다.
10. Henri Matisse, Dance ll 1909-10
표현을 하자는 사고방식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Kandinsky 는 1910년에 ‘Concerning the Spirituality in Art’ 라는 책자에서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음악은 높은 경지에 있는 예술이다. 미술이 음악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 라고 했다. 글과 그림은 기존에 있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역활을 하는데 음악은 애시당초부터 표현하는 역활을 해 왔다. 전원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전원의 이미지는 매번 틀려진다. 그림도 표현의 영역으로 올라가려면 색, 선, 면이 전면으로 나와야 한다. 마티스의 Dance ll 는 3차원의 구분이 명확지 않고 발이 붕 떠 있다. 현실에 없는 춤의 세계를 표현했다.
Music 1910
야수파 시기가 지난 후의 작품으로 정적이며 차분한 색깔을 썼다. 춤추는 역동적 이미지 Dance ll 와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는 Music 의 두 그림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마티스는 하나의 운동과 사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을 스스로 넘어서서 5년 단위로 스타일을 바꾼다. 그렇지 않은 작가는 자기 세계에 빠져 시대가 바뀌면 잊혀지고 인상주의 모네, 드가, 르느와르와 같이 그 사조가 강했던 시기에만 언급이 된다. 그러나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는 1900년 부터 5년, 10년 단위로 최전선의 아방가르드의 역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며 역사를 이끈다.
파리는 언제나 미술의 중심이었다. 17,18 세기뿐만 아니라 중심이 독일과 러시아로 옮겨갈 때 조차도 유럽작가들은 자비를 내어 파리의 예술을 보러왔고 피카소, 마티스는 베를린, 뮌헨 등지로 순회전시를 계속 한다.
11.마티스는 1905년 The Joy of Life 를 내놓은 이후 생계의 걱정을 덜게 되고 후원자가 생긴다. Russian Collector 인 Sergei Shchukin 은 유럽의 예술을 러시아에 소개한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그의 맨션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여 작품을 보게한다. 슈킨은 마티스에게 우리집에 걸만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commission 을 준다.
Sergei Shchukin (1850-1936)
Henri Matisse, Harmony in Red 1908
Henri Matisse, The Red Studio, 1911, MoMA
Harmony in Red 는 슈킨이 마티스에게 commission 을 준 작품이다. 색채가 재현이나 사실을 모방하지 않고 표현의 역활을 한다. 창밖의 풍경도 사실적이 아니다. 테이블이나 벽지의 선이 숨지를 않고 그대로 드러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이르누보 운동은 천박하고 폄하한 대접을 받던 craft 와 design 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마티스는 decoration 을 캔버스 안으로 들여와서 그림에 flatness 를 한층 더 강조한다. The Red Studio 는 모든 가구가 입체감이 전혀 없고 선을 사용해 평면적으로 그렸다. Line은 스켓치의 단계에서 사용하고 완성의 단계에는 없어져야 하는데 또렷히 밖으로 나와있다. 색과 line 이 수단의 역활을 넘어서 회화의 영역을 지배한다.
마티스는 ‘Note of the Painter’ 라는 글에서 ‘그림이란 하루의 고단한 일을 끝내고 응접실에 앉아 편안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라고 그림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2-3년 전 유럽은 긴장이 팽팽했는데 마티스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그림에는 위기감이 전혀 없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림이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림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vision 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일 작가들의 그림에는 위기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스에게는 그림은 감상의 대상일 뿐 그림과 내가 사는 현실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20세기 초는 피카소의 큐비즘이 날리는 시기였으며 이 두 대가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모이는 파리의 Stein 형제 아파트에서 만나며 서로의 그림을 보면서 rival 의식을 잠재적으로 가진다.
Rodin and Modern Sculpture
Henri Matisse, The Serf (농노) 1900-3
Auguste Rodin, The Walking Man, 1900
마티스의 로댕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작품 농노이다. 1898년에 30세의 마티스와 50세의 로댕은 만난다. 로댕은 그 당시에 modern sculpture 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마티스는 로댕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자신의 스켓치를 보여준다. 로댕은 마티스의 스켓치를 보고 좋은 평을 하지 않는다. 마티스 역시 로댕의 매끈한 The Walking Man 조각이 별로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 울퉁불퉁한 근육이 튀어난 The Serf 를 내어 놓는다.
Auguste Rodin, Age of Bronze 청동시대 1876
로댕의 초창기 작품 청동시대는 별로 좋은 반응을 받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같은 성경, 신화의 motive 를 사용해 팔등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narrative 를 전달하는 조각에 익숙해 있던 시림들은 청동시대가 그 두 개를 다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째, 그냥 보는 일반 남자이다. 둘째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누구냐? 저 남자? 신화나 성경의 인물이 아니다. 마네가 올림피아를 발표했을 때와 똑 같은 반응이었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조각이며 너무 realistic 하다는 평을 받았다. 마네가 realism 의 효시가 되었듯이 로댕도 realism 조각의 효시가 된다. 또한 로댕이 직접 조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누워놓고 석고를 부어서 틀을 떠 cast 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 저렇게 사실적으로 만들어?' 청동시대로 인하여 로댕은 일약 스타가 되었고 수많은 커미션을 받는다.
로댕, 지옥의 문 1880-1917
그러나 커미션을 받아서 작품을 내 놓으면 다 취소되고 돈을 받지 못해서 그의 스튜디오에는 취소된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댕은 죽을 때 모든 판권을 프랑스 정부에 넘긴다. 조각이므로 그대로 부어서 틀을 만들면 자꾸 만들 수 있다.
Auguste Rodin, Monument to Balzac 1898
프랑스 문인협회에서 발작을 기리는 조각상을 만들기로 하고 알아보니 ‘로댕이 유명하다더라’ 해서 그에게 커미션을 주었다. 그런데 다 만들고 나니 ‘못 받겠다. 흉칙하다, 누가 이걸 보고 발작의 훌륭한 문학 정신을 읽어 내겠느냐? 하고 취소를 한다. 사람들은 로댕의 사실적인 Age of Bronze 를 보고 발작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논 사실적인 조각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나온 작품을 보니 몸은 망또로 가려져 있고 흐뜨러진 머리에 엉망진창이었다. 또한 조각이 받침대 pedestal 없이 바닥에 내려져 있는 것도 싫었다. 높이 올려놓은 영웅적인 모습을 기대했는데 대리석도 아닌 청동으로 만들어서 야외에서 비맞고 시간이 지나면 더 흉칙해진다.
로댕은 발작상의 commission 을 받은 후 고민을 무척 했다. 발작의 카리스마, 지성, 열정을 어떻게 담아낼까?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고 발작의 생애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빚쟁이에게 쫒겨 낮에 자고 40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오후4시부터 새벽까지 글을 쓰니까 늘상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에 망또를 두르고 세상의 피폐적인 글을 쓰던 모습이다. 로댕은 위의 모습이 문인 발작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 커미션은 취소 되었고 돈은 돈대로 못 받았다.
로댕은 초기의 realism 에 머무르지 않았고 그것을 넘어서서 10 여년 후 발작상을 만들 때에는 표현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미 조각의 대가가 되어 있던 로댕은 이 세상에 자신을 넘어갈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영적, 지적인 표현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선과 평면성의 형식에만 집착한 마티스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오직 그림 내에서만 고민한 마티스는 남의 초상화를 절대로 그리지 않았으며 가족과 지인 등 자신이 control 할 수 있는 사람만 그렸다.
Henri Matisse, The Back Series, MoMA
The Back 1 1909 The Back ll 1916 The Back lll 1916 The Back IV 1931
마티스의 The Back Series 는 20년 동안 여자의 등을 탐구한 것으로 시간이 갈수록 형태가 단순해져서 line 이 없어지며 평면이 된다. 형식에 대한 연구로 감정, 지성의 표현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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