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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과 반고흐, 후기인상주의와 아르누보 8/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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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814회 작성일 10-09-0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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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3rd hour : Cezanne and Van Gogh, Post Impressionism and Art Noveau




세잔과 반고흐, 후기인상주의


1. Paul Cezanne (1839-1906)                                                                Emile Zola (1840-1902)

               

절친한 친구 사이인 폴세잔과 에밀졸라는 파리코뮨에 동조했으며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역사는 소련 이전의 프랑스의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aul Cezanne, A Modern Olympia, Early 1870’s
 


Edourd Manet, Olympia 1863
 
MoMA 는 후기인상파의 세잔을 Modern Art 의 시작으로 본다. Abstract Art 추상화의 시발점도 세잔부터 이다.


Paul Cezanne, Mont Saint-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1902-6
 


Paul Cezanne, Battle of Love, 1880
 
마네도 못 그렸다고 욕을 실컷 먹었는데, 세잔은 정말로 못 그렸다. 저런 장면은 세잔의 그림 안에서만 본다.


Paul Cezanne, Pastoral 1870
 


Edouard Manet, Luncheon on Grass 1870
 
그래도 마네의 그림은 여자도 뽀얗고 예쁜데 같은 주제로 그린 세잔의 여자는 거무튀튀하고 몸균형도 맞지 않고 뒤의 풍경도 만화같다. 세잔은 인상주의보다 훨씬 더 극단으로 밀어 부친다. 세잔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구, 원기둥, 원뿔로 환원될 수 있다고 했으며 기하학적인 추상 abstract geometric 이 그의 그림에 나타난다.


2.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 1895
 


Paul Cezanne, Card Players 1898-92
 
구도, 색깔, 빛이 들어오는 근원ㅡ 다 알 수 없다. 이제 재현은 내려 놓았다. 새로운 version 으로 그려서 그림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겠다.

세잔의 ‘재현 안한다’ 는 미술사적으로 추상화로의 도전이라는 큰 사건이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전반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로자 본헤르의 마시장 그림을 보고 마시장과 똑같다 라고 본다. 여태것 그림은 재현 representation 과 현실 reality 이 이콜 관계인 것 처럼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당연시했다. 사람들은 세상 경험의 많은 부분을 TV 뉴스, 신문, 책 등의 재현을 통해 접하는데, 마치 직접 경험한 것 처럼 착각하고 진실이라고 받아 들인다. 그런데 이제 후기인상파는 실제와 재현이 다른 그림을 자꾸 보여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결코 사실과 재현이 동일시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Paul Cezanne, The Large Bather 1906
 
너무 못 그렸다. 그리다 말았어. 얼굴이 얼룩덜룩, 신체 비례 하나도 안 맞고, 쯫쯫… 그래도 크루베 그림까지는 받아들이겠는데 이건 좀 심하다.ㅡ 당시대 사람들의 평이다.


3. Vincent van Gogh 1853-1890
       

Post Impressionism 이라는 용어는 나중에 미술평론가가 붙인 것이다.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점은 후기인상파가 후대의 인상주의인가 하는 점이다. 후기 인상파는 오히려 Anti- Impressionism 이다. Post Modernism 역시 Modernism 에 대한 질문, 반항에서 나온 것이다.

Vincent van Gogh, Night Café 1888


붓터치가 살아있고 물감, 캔버스가 자유롭다. 고호가 그리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카페가 나에게 준 인상을 그린다. 구도와 색이 실제 카페와 닮아있을 이유가 없다. 재현은 이제 안하므로 이제부터는 그림이 무엇을 해야할까?  후기 인상파는 색깔에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빨강색은 열정, 파란색은 우울, 그래서 얼굴이 파랗기도 하고 나무가 분홍이기도 하다.


4. George Seurat,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86
 


George Seurat 1859-1891, The Seine at  Le Grande Jatte, 1886
 
Post Impressionism 의 지류인 신인상주의 Neo Impressionism 이다. Impressionism 이 즐겨 그리는 야외 풍경에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을 했다. 점묘법 Pointillism 을 사용해 점을 막 찍어서 끊겨 보이는 붓질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 부쳤다.  
 

5. Paul Gaugain 1848-1903
 



Paul Gauguin, 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 1889
 


Paul Gauguin, Self-Portrait with Halo 1889
 
이런 초상화를 어디가서 볼 수 있을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고, 경계 boundary 가 없어졌다. 색, 구도 사용에 제약이 없고 자유롭다. 고갱은 후기 인상파이기도 하지만 상징주의 Symbolism 로 분류되기도 한다. 색이 그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하다. 자화상을 보니 마치 고갱은 전쟁, 파리코뮨,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유혹을 받는 그의 일상이 괴로워 타이티섬으로 떠난다. 더 이상 재현 representation 안 하고 감정의 표현 expressionism 으로 넘어간다. 반고호와 고갱은 재현이니, 인상이니 다 그만두고 오직 표현의 영역만을 열어 놓았다. 그림이 재현의 도구라는 플라톤적 고정관념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림 앞에 가서 ‘이게 무슨 뜻이니? 설명 좀 해봐’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후기 인상주의부터 그림은 재현과 인상에서 손을 떼고 자유로운 표현의 장을 연다.

모마의 4-5층의 permanent collection 은 후기인상파의 세잔, 고갱, 반고호에서부터 Modernism 을 시작하고 마티스의 포비즘과 피카소의 큐비즘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인상파와 후기인상파는 뭐가 다른가?  인상파는 당시대의 시간과 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며, 눈으로 목격한 풍경의 인상을 그린데 반해, 후기인상파는 인상과 풍경에서 멀어지고 표현의 영역으로 넘어와 고갱은 상징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

Paul Gaugain 1848-1903, The Vision after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브리타니카 지방의 교유 복장을 한 여자들이 제이콥이 천사와 싸우는 설교의  내용을 환영으로 보고 있다.  현실 속의 기도하는 아낙네와 현실을 넘어서는 환영의 이미지가 그림에 같이 존재한다. 중간에 화면을 분리하는 기둥과 빨간색의 배경이 있는데 이것은 불타는 장면이 아니고 색깔을 재현이 아닌 표현의 도구로 썼다. 고갱이 발판을 놓고 야수파 화가는 색의 자유를 무진장 누린다. 후기인상파는 paradigm 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20세기를 관통하는 사조가 된다.


6. Camille Pissarro, 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Winter Morning 1897
 

Paul Gaugain, Washerwomen at Pont-Aven 1886
 
고갱은 원래 stock broker 였는데 1880년대 말에 주식시장이 붕괴되자 직장을 잃게 되고, 인상파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아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고갱은 피사로의 겨울 아침의 몽마르뜨 길에 표현된 안개가 낀듯한 뿌옇고 끊어진 붓터치를 배우며 초기 고갱의 그림은 퐁트아뱅의 빨래하는 여인들과 같은 풍경화 landscape 로서 피사로의 그림을 닮아있다.  그러나 2년 후 고갱이 그린 설교후의 환영을 보고 피사로는 무척 실망을 했고 ‘말도 안되는 빨강색?’ 하면서 고갱을 비난했다. 하지만 고갱은 자유를 얻어 인상파의 틀에서 벗어나며 피사로는 향후 20-30년을 이끌 결정적인 그림을 알아보는 선견지명이 없었다.


7. Paul Serusier, The Talisman 1888   Nabis (prophet, 예언자) 나비파
 
아카데미에 가도 배울 수 없는 고갱의 그림 스타일을 보고 어린 화가들은 흠뻑 반한다. 고갱은 어린 화가들을 데리고 그림을 가르친다. 새루지에가 숲에 있는 풍경을 보고 The Talisman (부적) 를 그렸는데 숲, 나무가 보이지 않고 부적같은 영적인 느낌을 준다.  고갱은 후배들에게 이런 식으로 abstract art 를 가르쳤는데 당대에 플라톤적 사고를 하던 사람이나 피사로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그림이다.

Nabis 나비스파는 고갱 중심의 소그룹 아티스트를 가르키며 그림에서 영적인 부분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집중하였다. 색을 통해 절망, 기쁨, 따스함의 감정의 영역을 표현했고 색과 선이 매개자가 아니고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부적 그림은  소설이나 시로 풀어낼 수가 없다. 이제 그림이 글이 할 수 없는 독자적인 기능을 갖는다. 그림 안에 들어있는 성경, 그리스로마 신화, 불가 도가 사상, 고사성어의 story 를 모르면 관객은 그림이 이해가 안되고 오히려 주눅이 들린다. 몇백년 동안의 확고한 전통으로 내려왔던 그림 안의 narrative 가 이제 없어지고, 그림 그리는 자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자가 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제는 그림이 표현만을 하므로 관객이 보기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Art Noveau 아르누보, 신예술
19세기 말 유럽은 세기말 증후군과 함께 paradigm 에 변화가 온다. 프랑스 혁명 후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새 세상이 왔지만 민중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지성인들은 기독교에 회의가 오고  이교도 종교가 나온다. 더 이상 성경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세상에 appeal 하지 않으며 브르조아는 자신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서점직원으로 일하는 에밀졸라의 눈에는 세상이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반고호는 죽기 직전 까지 집세를 못내서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았다. 테오는 자신의 형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고갱의 그림을 사 주었고 고갱에게 자기 형과 같이 작업할 것을 제의한다. 결국 두 화가는 뜻이 맞지 않아 절연한다.

1. 아르누보는 19세기 말 증후군의 하나이다. 기존의 세상은 그림과 조각만을 예술로 보았고 건축이나 장식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천한 손기술로 예술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르누보는 디자인과 장식의 applied art 를 순수예술과 접목을 시켜 예술이 실생활과 연결되게 하였다. 예술은 거주공간에서 시작해야 하며 그리는 스타일에서 장식하는 스타일로 바꿔야 한다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민이다. 당시에는 신고전주의 neo classicism 의 고전적인 도식에 따라 건물을 지었는데  아르누보는 기존 사고체제를 던져 버린다.

Victor Horta, Stairwell of interior, Tassel House, Brussels 1892-3
 

Antoni Gaudi, Casa Mila 1905-7
 
건물의 장식에 자연 형태인 풀, 꽃에서 모양을 따온 유기체적 organic 장식이 나타나고 건물의 외형이 물결치는 것 같다. 아무도 생각 못 했던 혁신적인 디자인이다. 아르누보는 디자인, 건축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미술계에도 충격이었다. 당시에는 그림이 decorative 하다는 평은 화가에게 수치와 분노를 주었다. 아카데미같은 훌륭한 학교의 스승에게서 배운 그림은 혼과 지적인 수준이 배어 있어야 했고 decoration 은 장식용의 소품에 지나지 않는 혐오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아르누보 덕택에 혁명적인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똑똑하고 가진 자만이 예술을 향유한다는 사고방식이 무너지면서 저속하고 장식스러운 것이 elite 적 예술을 무너뜨린다. 

2. Vienna Secessian, Gustave Klimt, Detail of Dining Room Mural
 

Gustave Klimt, The Kiss 1907-8
 
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같은 평면감을 준다. 1886년의 고갱의 초기 그림 퐁트아뱅의 빨래하는 여인들은 입체감이 있었는데 클림트의 그림은 벽에 붙은 것 같다. 옷도 완전 평면적으로  3차원을 표현하는 노력을 집어 던졌다. 아르누보와 후기인상파를 통해 추상의 개념인flatness 가 들어온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Vienna Secessionist 로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는 분리주의, 절단주의를 의미한다. 19세기 말에는 아르누보의 가지 안에 여러가지의 다른 용어가 나타났는데 이런 움직임에는 다 공통점이 있었다. 재현과 elite 적 사고를 집어 던지고,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평면적인 추상으로 가고 있었고,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의 ideology 가 맛물려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을 성취하고 파리코뮨 정부가 나타난 프랑스의 민중은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3. Tiffany, Table Lamp 1900
 
램프는 집에서 귀족들이 쓰는 물건이었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램프가 예술이 되어 미술관에 전시가 된다.

Antoni Gaudi, Cuell Park 1900-14
 
가우디는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로 자연의 요소를 디자인에 가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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