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으로 가는 길목:사실주의/ 인상주의 8/24/10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511회 작성일 10-08-29 13:44
본문
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2nd hour: Going for Abstraction (Realism/ Impressionism)
추상으로 가는 길목 (사실주의/ 인상주의)
사실주의Realism
1. 19세기 중 후반에 10년 단위로 많은 운동이 일어난다. Realism 은 1850년대에 시작되며 20년동안 계속되고 1870-1880년대에
Impressionism 이 진행되었으며 75- 80년 사이에는 야수파 운동이 일어난다. 급박하게 변하는 미술사와 발 맞추어 세계사에도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정점에 달한 갈등의 표출이 1914년의 1차 대전으로 나타났다. 미술사에서는 크루베가 1850년에 사실주의 선언서를 쓴다. 그런데 그전의 르네상스, 바로코 시대의 그림은 낭만주의라고 부르면서, 왜 갑자기 그림에다 사실주의 이름을 붙이는가? 그전의 그림은 사실적으로 안 그렸을까?
에밀졸라, 플루에르, 발작은 현실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 않고 삶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소설을 내놓았기에 사실주의
Realism 라고 불린다. 한 여자의 비참한 일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마네의 올림피아보다 더한 sensation을 일으켰으며 법정까지 간 소설이다. 그전의 낭만주의 소설들은 인간의 행복한 삶을 그리고 happy ending 으로 끝을 맺었는데 에밀졸라의 목로주점 역시 시골에서 상경한 여자가 이용만 당하다가 객사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
2. Gustave Courbet 1819-1877, The Stone Breakers 1849-50 (destroyed)
문학운동에서 먼저 출발한 사실주의는 미술 쪽에는 크루베가 대표화가이다. 크루베는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천사를 안 그린다. 내 눈에는 허구 헌날 힘들게 일하는 사람만 보이니까 그들을 그린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하층민으로서 그림문화를 누릴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크루베는 그림 향유계층을 정확히 조준하고 그렸는데 그림을 살만한 브르조아 계층은 이런 그림을 불편해 하고 사지 않는다. 귀족을 타파하고 새 세상이 열렸는데 귀족 흉내를 내는 신귀족이 도로 생겼고 아래에 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세상으로 넘어가려는 브르조아들을 쿠루베가 붙들었다. 크루베의 The Stone Breaker 는 아무리 일해도 희망이 없는 하층민의 현실을 real 하게 그렸다.
3. Emile Fran Zola 1840-1902
목로주점 L'Assommoir 1877
목로주점은 프로방스 지방의 가난하고 불운한 여자가 파리로 와서 세탁소를 차리지만 난봉군, 알콜중독자 등 3명의 남자를 만나서 끝까지 이용, 배신 당하다가 거리에 쓰러져 비참하게 죽는다. 무척 sensational 한 ending 이었고 대중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사실 reality 을 담아낸다. 진짜로 고생 끝에 낙이 오는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이런 소설을 싫어했다.
4.Gustave Flaubert 1821-1880
보바리부인 Madame Bovary
플로베르의 보바리부인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썼다. 나이가 30살이나 차이가 나는 의사하고 결혼한 젊은 여자가 시간이 남아도는 무료한 생활을 하던 중 어떤 남자와 바람이 나서 함께 야반도주를 계획하는데, 약속장소에 그 남자는 안 나타나고 그 남자 때문에 생긴 빛 독촉을 받다가 자살을 한다. 이 소설은 외관상으로는 풍족해 보이는 브르조아이지만 실제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5. Gustave Courbet, A Burial at Ornans 1849-50
크루베는 현실에서 쉽게 접하는 시골 무지랭이의 장례식을 어마어마 하게 크게 그렸다. 그림에도 hierarchy 가 있는데 이런 그림에는 나폴레온이나 백작이 등장하는 역사화가 어울리는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온 오르낭의 시골 사람들이 이렇게 큰 scale 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베는 가로 7 meter, 세로 3 meter 로 엄청나게 큰 작품으로 그렸다. 1850년, 19세기 중반에 더 이상 낭만주의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현실 그대로 그린다.
6. Honore de Balzac 1799-1850
19세기 중반에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사실주의가 만연했는데, 무엇이 이 작가들을 그토록 절박하게 글을 쓰게 하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
발작은 생계를 위해 출판업을 했지만 빚만 엄청 지고 낮에는 찾아오는 빛쟁이들로 인해 글을 쓸 수가 없어서 밤 12시부터 16시간씩 하루에 40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글을 썼다. 새벽과 밤에 글쓰고 힘들게 사는 사람에게는 힘들게 사는 사람만 보인다. 결국 커피로 인한 신경병으로 죽는다. 크루베 역시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가 아니었고 뱍물관에 가서 그림을 독학으로 배웠다. 신분적으로 미천하여 어디가서 그림을 그린다고 명함을 내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의 그림이 현실을 떠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고 내놓는 작품이 다 그랬다.
7. Rosa Bonheur 1822-1899, The Horse Fair 1853-1855
로자 본헤르는 화가집안의 여성 화가로 유럽 내에서는 유명했으며 영국에 초청이 되어 빅토리아여왕의 commission 을 받기도 했다. 귀족의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시장이나 전원의 농부가 밭가는 장면등을 큰 규모로 그려냈다.
8.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세상이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에 귀족, 농노 신분의 타파, 자유 평화를 주된 정신으로 하는 7월 혁명이 일어났고 민중은 잘 살게 되리라는 꿈에 부풀었지만 자본축척을 한 브르조아 계급이 형성됨에 따라 파리의 도시 문화, 밤문화가 형성되었다. 세상의 paradigm 이 바뀌었는 줄 알았는데 브르조아가 신흥 귀족흉내를 내고 민중의 생활은 더 피폐해졌다.
민중이 앞장을 서서 혁명을 했는데 혁명 후에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19세기 중반에 회의론이 대두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Avant-garde는 최선봉에 서서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도전하는 아티스트를 의미한다. 프랑스화가들은 아방가르드적인 입장에서 진보적인 사고를 했고 새로운 양식이 나와야 한다고 고민하였다. 기존의 것을 버리고 무엇 what 을 어떻게 how 를 동시에 고민했다. 에밀졸라같은 작가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happy ending 의 소설을 쓸 수 있는데도 일부러 목로주점 같은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쓴 아방가르드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건너가는 다리는 마네가, 인상주의에서 후기 인상주의로 가는 다리는 세잔이 놓았다. 마네와 세잔 같이 중간에 있는 작가들은 전세대에게 욕을 실껏 얻어 먹으며, 후세대와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한다.
Edouard Manet 1832-1883 , Dejeuner sur l’herbe, 1863
2 meter 의 큰 작품 풀밭 위의 런천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림 안에 있는 풀밭 위의 남자들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주인공들이 엄청 화를 냈다. 깔끔한 정장에 최신 유행 모자까지 쓴 이 신사들은 홀랑 벗은 아가씨들만 없으면 business meeting 이라도 하는 것 같다. 낮에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몸파는 여성들을 사서 마차에 태우고 공원에 와서 부인 몰래 앉아있다. 저 그림을 누가 사겠는가? 마네의 올림피아와 마찬가지로 브르조아들은 굉장히 불쾌해 했다. 마네는 브르조아의 허영을 지적했는데 마네 외의 그 당시 다른 그림은 그들의 허영을 오히려 조장하고 도와준다.
그렇다면 크루베나 본헤르가 마네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크루베와 본헤르는 굉장히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묘사를 했다. 말이 마치 뛰어 나오기라도 할 것 같다. 그러나 마네는 사실주의 관점에서는 약간 미완성인 덜 그린 그림이다. 그림자의 구도도 애매하고 빛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졸작으로 주제도 엉망이며 테크닉도 전혀 없다. 마네의 그림은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가는 중간에 놓여있다.
9. Jean-Francois Millet 1814-1875, The Gleaners, 1857 Barbizon School
정적이고 조용한 전원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농부처럼 이삭을 줍는 사람들로 보인다. ‘사는 것이 힘들지만 누구 탓도 아니다’ 열심히 일해서 일상을 유지하고 주말에는 교회에 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추수가 끝난 후 밭에 떨어진 것을 줍는 소작농보다 못한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경건, 조용함을 느끼기보다는 ‘왜 저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을 그려?’ 하면서 불편해했다.
Barbizon School 바르비종 학파의 그림으로서 프랑스 시골에 가서 전원을 그리는 학파인데 이들은 1850년대 후반의 사실주의와 마네와 더불어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주의는 브르조아와 평민, 하층민의 현실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는데 1870년대의 인상주의가 여기에 영향을 받아 일상의 삶을 주제로 그린다. 또한 양식적인 면에서는 마네의 덜 정교하고 그리다가 만듯한 스타일을 인상주의는 따른다. 바르비종 학파는 Academy 를 벗어나 야외에 나가 전원풍경을 그리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도 밖에 나가서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Impressionism 은 바르비종파, 사실주의, 마네의 영향을 받는다.
인상주의 Impressionism
10. Claude Monet 1840-1926, Impressionism, Sunrise (인상, 일출) 1873
모네 그림의 제목 Impressionism을 보고 한 비평가가 비아냥거리는 의미에서 그리다 만 것 같은 화풍을 인상주의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알아볼 수도 없고 의도도 분명치 않고 붓질도 엉망인 그림, 참 못 그린다. 인상파 화가들아’ 오늘날 미술사적으로 대가들은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가 등 거의 다 인상주의 화가들이지만 1870년대 당시에는 냉대를 받는 외로운 아빙가르드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선배 바르비종파처럼 전원에 나가서 그렸는데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남겨진 인상을 그렸다. 이젤을 밖에 세우고 사람들은 쭉 둘러서서 쳐다보고 있는데 ‘해가 뜨는 모습’을 일분 안에 자세히 그릴 수가 없다. 그리다 보면 어느새 해는 이미 떠 버렸고 일출의 장면을 놓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진의 출현이었다. 사진은 화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던 ‘순간의 포착’을 완벽히 보여준다. 추상화도 모델을 앉혀놓고 단숨에 그릴 수 없으니까 똑같은 포즈를 매일 취한다 해도 모델의 모습이 한결같을 수는 없다. 사진이 다 해버리는데, 결코 사진을 따라 잡을 수 없는데 그림은 방향 전환을 해야했다. 화가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만 그릴 뿐 사진을 어떻게 따라 가겠는가? ‘사진은 기록을 하고 우리는 남겨진 인상을 그린다.’
인상주의는 당시의 과학발전과 학문적 연관이 깊다. 광학, 색채론이 대두되고, 사진이 나타나 르네상스화가들처럼 그릴 필요가 전혀 없게 됐다. 그림은 무엇 인가? 화가의 역활은 무엇인가? 그림의 절대절명의 위기가 왔다. 이때까지의 그림은 평면인 캔버스에 3차원을 가져오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2차원으로 내려놓는 시도를 하게 된다. 화폭, 색채, 구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는데, 기존에는 그림을 잘 그리기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화폭, 색채, 구도가 이제는 주인공 노릇을 한다. 일출을 어떻게 하면 잘 그리나 하는 플라톤적 사고에서 멀어진 모네의 그림은 욕을 엄청 얻어 먹지만, 그림은 추상화로 가는 길목에 놓이게 된다.
11. Claude Monet, La Grenouillere 1869
노동을 끝낸 후 쉬고 싶어하는 여가생활 leisureㅡ리조트 그르네웨르에서 뱃놀이 하고 음악듣고 술마신다. 허구헌날 노는 귀족과는 달리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여가는 참으로 귀중하다. 사무직, 관리직의 브르조아도 시간 여유가 생기면 미술관람, 피크닉, 산책을 다니고 leisure 가 중요해졌다. 많은 인상파 화가가 Working class 의 여가를 즐기는 새로운 세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다. 르네상스화가에게는 덜 그린 그림이지만 인상파의 그림을 통해 어디서도 못 보는 것을 보게된다. 그림에 story 가 없어지고. 인상파 화가가 선봉에 서서 그림이 그림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Piere-Auguste Renoir 1841-1919, La Grenouillere 1969
르느와르도 리조트 그르네웨르에 모네를 쫓아와 같은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 말의 근육의 표현을 위해 붓터치를 숨겼던 사실주의 그림과는 달리 이제는 Impressionist 들이 매체에 불과했던 선, 색, 붓터치를 주인공으로 막 살린다.
12. Berthe Morisot 1841-1895, Young Woman Poundering Her Face 1877
버스모리조는 프랑스의 여류 impressionist 인데 브르조아 여자의 집안 일상을 주로 그렸다. 인상파 주요화가로서 모리조의 그림은 우리집에 걸기 좋다는 이유로 반응이 좋다. 마네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리조는 기존의 초상화 양식에서 탈피해서 여자의 뒷모습을 그렸으며 붓질을 그대로 살려서 그림이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여류 화가들이 주로 이런 주제로 그렸는데 사회는 많이 바뀌었는데도 여자는 하염없이 집에 앉아있다.ㅡ 여자의 역활은 변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즘 관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13. Edouard Manet, Portrait of Emile Zola 1867-68
에밀졸라의 초상인데 배경으로 일본판화가 벽에 걸려있다. 당시 파리에는 Japonisme 일본풍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19세기 중후반에 사무라이 시절이었던 일본은 쇄국주의와 개국주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1850년을 기점으로 하여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미국인이 일본에 와서 불평등 조약을 맺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절대로 포교를 안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온 네덜란드의 영향은 일본에 지대했고 일본 역시 네델란드에 가서 유럽을 본다. 유럽은 일본의 판화에 푹 빠졌고 그 중에서도 2차원에 관심이 있었던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의 판화를 만나고 마네는 자포니즘의 지지자가 된다.
Edouard Manet, Café Guerbois
르느와르, 에밀졸라, 드가, 모네 ㅡ 급진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모여서 엄청난 토론을 벌이는 몽마르뜨 언덕의 카페 거르브와, 화가를 꿈꾸는 사람도 그곳에 간다.
14.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나타나고 있을 무렵에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간의 보불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1870-1871 년 사이에 벌어지는데 프랑스가 패전을 한다. 당시는 유럽국가들은 근대국가를 갖추어 가는 과정 에서 힘이 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먹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영, 러, 프는 서로 견제했고 ‘발칸반도는 누가 먹을까, 흑해는 누가 먹을까’ 하면서 늘 긴장 상태에 있었다. 또한 colonialism 이 팽배하여 유럽나라는 아프리카, 인도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아프리카인들의 종교의식에 쓰이는 mask 를 무작위로 가져오고, 고갱은 프랑스영인 타이티로 간다. 이 무렵 유럽의 미술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primitivism 이 유행을 한다.
보불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의 이자벨라 여왕이 죽은 후 프로이센 왕실은 인척 관계에 있는 레오폴트 대공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하자 프랑스를 이를 반대하여 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프로이센의 빌헬름왕을 만나 대공의 왕위포기 다짐을 했으나, 프로이센의 왕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프랑스대사와의 대화내용을 총리인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리는데 비스바르크는 대사와 왕 사이에 서로 모욕적인 말이 오간 것으로 왕의 전보 내용을 조작 발표하여 프랑스를 자극했고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다.
프랑스의 민중은 나가서 싸웠지만 베르사이유 궁전까지 독일 제국이 들어와 선포를 했고 프랑스는 치욕을 느낀다. 두나라 간의 역사적인 증오 감정이 이때 부터 싹튼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가 더 문제였다. 세계사적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파리코뮨 commune 이 보불전 직후에 생긴다. 왕정파, 공화파, 사회주의 계열이 공존하는 가운데 파리코뮨정부가 반짝한다.
그런데 세상이 사회주의 국가로 넘어갔는데 인상파의 그림에는 안 보인다. 인상주의가 당시에는 아방가르드였지만 그렇게 급진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뒤에 오는 Post Impressionism 그림에서는 파리 코뮨을 주제로 한 것이 보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