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 어머니의 과거에 대한 집착 5/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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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929회 작성일 10-06-0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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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17th hour : Song Dong, Mother’s Obsession with Her Past
송동 (1966- )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중국 작가이며, 2009년에 모마 2층의 전시실에 어머니가 일평생 모은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Waste Not 으로 유명하다. 송동은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Waste Not 의 설치 작업을 한다.
Waste Not 2009
모마에서 관광객들이 잡동사니를 구경하고 있다. 뼈대만 앙상히 남은 어머니의 집을 가져다 놓았다. 박물관에 왜 이런 고물상을 가져 왔을까? 이 콜렉숀은 송동의 어머니 것이다. 어머니는 박물관을 꽉 채울 만큼의 어마어마한 잡동사니를 집안에 이고 살았다. 작품 title에 어머니 이름도 같이 써 넣고, 어머니를 예술가로 만들었다. 어머니가 어쩌다가 다 쓴 치약, 못쓰는 병, 수건으로도 못쓰는 조각천들을 광적으로 모으게 됐을까? 신발도 닳아서 구멍이 나고 쓰레기통에나 있을 법한 것들이다. 어머니께서 집안의 역사와 당신의 이야기를 홀로 이고 지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할아버지는 국민당 당원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첩자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7년을 감옥살이 한다. 하루 아침에 집이 풍지박산이 난다. 같이 정치 운동 하던 친구들은 모르는 사람처럼 등 돌리고 법정에서 증언해 줄 사람조차 없다. 생계를 꾸리던 가장이 갑자기 없어지자 외할머니가 온갖 고생하시다가, 할아버지가 출옥하자 할머니는 그만 돌아 가시고, 온 집안이 공산당의 감시하에 놓인다. 어머니는 강박관념을 가진 채 자라게 된다. 할아버지가 출소해도 예전의 멀쩡한 집안으로 못 돌아가고, 단추공장의 공원으로 일을 하시게 된다.
국민당의 첩자 노릇하던 집안이라고 온동네 사람이 쑤근대고, 어머니에게는 중매도 안 들어오고 아무도 신랑감을 소개 안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어머니와 연애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많은 위로를 받으며, 66년 문화혁명 직전에 송동이 태어난다. 근검절약(Waste Not) 은 그 당시에 공산당 선전문구 였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을 사느라 모든 것을 아껴야 했고, 근검 절약을 충실히 따랐다. 2002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또 큰 충격에 휩싸인다. 연로하신 90세 할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못하고 숨겨야 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근검절약을 넘어서서 광적인 집착의 수준으로 모든 것을 모으기 시작한다. 송동과 여동생은 그들의 상처도 컸지만 어머니의 행동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정리를 도와주면 어머니는 ‘왜 이걸 버려?’ 하시면서 도로 가지고 들어가고 매번 싸움만 된다. 고물상도 안 가져갈 법한 물건들이 온 집안을 차지하고 사람이 앉을 자리도 없다.
송동이 어렸을 때 버렸던 신발도 줏어서 가져다 논다. 어머니의 보존코자 하는 마음을 자식이 이해 못하니 상처가 된다. 그래서 송동이 ‘안 버리겠다. 이것을 박물관에 갖다 놓겠다’ 하니까 어머니는 그러라고 하시면서 ‘다 모아 두니까 결국엔 쓸모가 있지 않느냐’ 고 하셨다. 2009 년에 모마에 전시 결정이 난 후에, 어머니는 나무에 갇혀있는 새를 구하기 위해 사다리를 올라가시다가 떨어져서 돌아가신다.
Waste Not 은 2006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타게 된다. 어머니와 같이 가서 어머니가 감독 지시하는 대로 여기저기에다 놓았다. 어머니가 졸지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중국의 50 -90년대 까지를 보여주는 콜렉션으로 중국인에게는 우리집에 없는 물건이며, 외국인에게는 신기하다.
박찬경과 송동의 작품의 주제는 modernity 이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선전문구 ‘옛 것은 다 버리자’ 에 맞추어 불교, 유교의 사원과 절을 다 때려 부신다. 송동의 어머니가 살던 집은 베이찡에 있었는데 근대화를 위한 낙후건물 재개발로 인해 사람들은 동네를 떠났지만 송동의 어머니는 ‘이 많은 짐을 들고 이사 못 간다’ 하고 우기셨다. 송동은 어머니를 달래서 일단 아파트로 이사 가시게 하고, 옛날 집 건물의 일부를 떼어 보존하려 했지만 좁은 아파트에 도저히 그 많은 짐과 함께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송동은 ‘박물관에 갖다 놓자’ 는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어머니에게 모은다는 개념은 문서 기록 보관소(archive) 와 동일하다. 나라는 외교문서, 공식 역사기록, 회담, 사진 등 모든 것을 보관하며 학자가 기록을 살펴보기도 한다. 어머니의 archive 는 남들이 별로 보고싶어 하지 않는 기록이다. 어머니의 동년배는 세월이 쌓아올린 물건들을 이미 다 버렸다. History 의 대문자 H 는 중요한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어머니는 집안의 변화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잊지 않도록 혼자서 모든 것을 모아 두셨다.
어머니에게 중요한 그릇과 냄비가 내게는 짜증이 날 뿐이다. 부모님의 중요 가치가 내게 설득력이 없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반문하면 어머니는 대화단절,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느낀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친정 어머니가 해주신 쓰지 않는 그릇, 박스 안에서 먼지만 쌓이고, 이사할 때는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는 물건들. 어머니도 쓸데없는 것이라고 인정은 하시지만 당신의 history, memory 이므로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의 학교 교육은 대문자 H 인데 어머니의 물건들은 나에게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다. 만약 그 법랑냄비를 유관순 언니의 데모에 참가해 쓰셨다면 나도 간직하고 싶어진다.
커다란 History 는 개인의 작은 history 가 모아진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이야기는 대문자 H 에게 먹혀서 없어진다. 어머니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사회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역사의 굵직한 사건이 터지고, 어머니의 인생이 역사에게 먹힌다. 자식에게 조차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핀잔을 받는다.
역사가 앞서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채 뺏어가고, 나의 인생 설계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중국 국가가 어머니의 삶의 커다란 방향을 확 틀어 쥐었고 어머니는 휘둘리는 느낌이다. 가정이 풍지박산 되고,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정부의 motto 인 근검절약에 쫒아가다 보니 쓰레기도 이렇게 모으게 되었다. 자식은 고물이라고 욕하고 내 인생이 한번도 존중된 적이 없다. 국가와 자식이 나의 personal story 를 지우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광적으로 수집을 한다.
역사의 굵직한 사건에 내가 개입이 안 되었으면 역사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없었으므로 동시에 책임감도 없어진다. 개인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책임감을 구태여 가질 필요가 없어져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나는 그때 서울에 있었는데요.’ 하면 그만이다.
국가와 사회가 내 얘기를 들어 주지 않아서 약간 분노스럽기는 해도, 책임감은 전혀 안 느낀다. 그런데 ‘만약 국가가 당신의 개인 얘기를 들어주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건가요?’ 하는 물음에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송동의 Waste Not 작품이 좋으면서도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 점이다.
우리는 인사동의 옛 물건을 보면서 ‘침발라 쓰곤 했는데’ 하면서 웃는다. 재미있게 추억을 하는 반면, 그 세월 내내 일어난 역사적 비극을 일부러 remind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살았던 대학생 새대가 지금 50대가 되었다. ‘당신은 이때 껏 어떻게 책임지고 살았습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죠? 나는 먹고 살기에도 바빴는데’-- 송동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responsibility 와 ethic 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에 대하여 답을 못한다. 동시대 역사적 비극이, 점심 굶는 아이들 얘기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를 모른다. 책임지는 방법으로는 system 을 바꾸기 위한 유권자 투표, 특정 브랜드 불구매, dry machine 안쓰기 등등— 방법을 찾으면 많이 있다. ‘내가 뭘해?’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과 나비의 조그마한 날개 짓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역사가 누르는 무게가 커져온다.
중국국가를 형성하는 수억의 인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길래 마오쪄뚱이 권력을 쥐도록 했을까? 10대 부터 정치에 대한 당신의 무관심이 오늘날의 히틀러, 마오를 만들었다. 당신의 힘없고 약해 보이는 태도가 큰 History 에 끌려 다니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개개인이 굵직한 역사를 만든 것이다.
Eating the City 2006
송동이 크랙커와 쿠키로 도시를 만들었다. 관람객이 먹으면 도시가 슬슬 부서진다. 왜 작가가 과자로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을까? 작가가 도시를 만들었는데 관객의 참여로 인해 도시가 부서진다.
위의 사진은 베이찡 도시인데 아파트와 재래식이 공존하며, 예전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흔적을 없애려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2008년 올림픽에 대비하여 중국은 베이찡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호텔의 뒤에는 쓰러져가는 흙집, 웃통을 벗은 남자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파자마를 입고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TV 에서는 에티켓 광고가 반복되고, 경찰이 주민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게 하는 에피소드가 벌어졌다. 손님에게 깨끗하게 화장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중국 국가의 입장과 국가가 남의 옷입고 말고를 왜 간섭하는가 하는 입장에 대한 기사가 당시에 Time 지에 실렸다. 내부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는데, 외국인이 싫어하니까 서양의 매너를 지켜야 한다는 후진국의 irony 이다. 선진국의 매너와 에티켓이 절대적 윤리인가? 아니다. 하나의 가치일 뿐이다.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기도 하지만, 개인 역시 국가의 그런 면을 두손 들고 support 한다. 옛것을 때려 부수는 재개발에 송동의 어머니 처럼 ‘이사 못한다’ 하는 마음과 집값 땅값과 연결되어 옛집을 부수려는 주민의 마음이 같이 공존한다. 반대하는 2가구가 찬성하는 8가구에 밀려 왕따 당한다.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에게 똑같은 생각을 강요한다고 비난하지만, 사실 개개인은 조그만 모임에서 조차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억누르려 한다. 사람의 이런 기본 욕망을 국가가 잘 이용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해놓고, 희생자이며 국가 탓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동은 ‘그건 당신이 한 일이야, 당신의 탓이기도 해’ 라고 말한다.
Eating the City 2006
개인은 identity 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다수에 속하기를 원한다. 소수의 minority 로서 코너에 몰려 있으면 힘들고 용기가 필요하다. 소속감이 있어야지 자신의 identity 가 secure 해진다. 두 친구가 다른 한 친구를 흉보면서 소속감을 느낀다. 나의 얘기를 남이 동조 안하면 (아주 약한 level 의) 속격효과 (alienation) 가 나타난다. 엄마의 얘기에 동조 안 하면 ‘그 집 딸이야? 그 집 가서 살어’ 엄마는 딸이 마치 남처럼 느껴진다.
송동의 어머니는 사람의 오늘과 내일의 모습이 180도 바뀜을 경험했다. 친구였던 사람들이 남편의 체포 후에는 얼씬도 않고, 단 한명도 내편이 없음을 눈으로 목격했다. ‘나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 나도 오늘부터 뱃지 달고 공산당원이 될 수 있다’ 어머니는 그 이후 당의 모토인 근검절약을 맹신적으로 추종하셨다.
Writing Diary with Water, 1995
돌에 물로 글씨를 쓴다. 10초 안에 날라간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한자 공부를 위해 돌위에 물로 쓰라고 말씀하셨다. 송동은 어른이 되어 이번에는 글자가 아니고 일기를 쓰는 퍼포먼스를 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길 때 남이 읽을 것을 의식해서 머리 속에서 censor 를 하면서 쓴다. 송동의 일기는 비밀을 물로 쓰지만 다 증발한다. 누구에게도 나의 마음을 얘기하지 못 하고, 나의 마음을 보인 이야기가 흔적이 남을까봐 전전긍긍 한다. 마음 속에 있는 말, 상처를 언어로 남기지 못하고, 감정의 진폭이 커서 언어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Writing Time with Water, 2002
시드니, 런던, 광주, 뉴욕, 베이찡의 길거리에서 물로 시간을 썼더니 쓰자 마자 증발했다. 시간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퍼포먼스를 사진과 video still 로 남겼다. 사람은 trace 를 남기려는 욕망과 동시에 타인의 trace 를 지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송동의 어머니는 말 그대로 많은 흔적을 남기고 돌아가셨고 특이한 case 이다. 대부분의 경우 다 소각하고 유품만 보관한다. 송동은 보통 사람의 흔적은 역사에서 금방 사라지지만, 대문자 H 로 될법한 사건과 인물은 흔적이 남음을 말하고 있다. 중요 인물 위주로 쓰여지고 보관 되는역사-- 한 개인은 역사 속에서 중요하지도 않고 책임도 없어진다.
Reclamation 1997 (강가에서 돌위에 연도를 쓴다.)
박찬경의 주제는 현재 위주로 바라본 과거를 다시 한번 고찰해 보자는 것이다. 무당, 무속을 원시적, 미신적, 무식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과연 언제 부터 인가? 우리의 무속이 현재에서 부정적이라고 해서 과거에도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부정적인 과거는 다 지워야 한다는 Presentism (현재주의) 에 질문을 던진다. 박찬경은 무속에 대한 역사 기록이 조선 총독부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60-70년대 단 한명의 학자도 무속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 시점에서 무속은 쓸데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파독 광부에 대한 기록 역시 없어서 작가가 직접 독일에 가서 발로 뛰면서 힘들게 작업을 하였다. 국가는 현재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만 기록을 남기려 한다.
Stamping the Water 1996, Lhasa River, Tibet
큰 도장을 들고 물에 도장을 찍는다. 물에 찍으면 찍히는가? 하나도 안 찍힌다. 공안들이 탕 찍어야지 국가의 허락이 떨어진다. 개인의 이동에, 집을 사고 팔 때에 허락이 필요하며, official 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도장이다. 강은 흔적도 없이 흐르는데 송동이 뭔데 도장을 찍는가? 도장을 찍을 위치에 있지 않다. 공무원이나 계급을 가진 자에게 온 동네 사람이 잘 보이려고 애쓴다.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위치의 사람과 나 사이에 hierarchy 가 생긴다. 공무원, 정치인은 내 위에 있는 자로 내가 굽신 거려야 한다. 정치인들이 당선 후에는 상전이 된다.
Breathing, 1996
12월 31일 천안문 광장이다. 추운 겨울에 땅에 엎드려 ‘후’ 하고 입김을 부니 금방 얼어붙는다. 다시 불고 또 얼어 붙고 하는 과정이 밤새도록 계속된다. 흔적을 남기지만 금방 없어진다. 송동은 미대를 나오고 원래 중국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던 작가였는데 1989년 천안문 사태에 탱크가 들이닥쳐 시민을 발포한 이후 몇년간 미술에서 손을 떼었고,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물, 돌, 도장등의 퍼포먼스, 사진, 비데오 작품들을 하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개인이 하기에는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고, 흔적도 남지 않는 작업이다. 천안문 사태가 났을때 중국 정부는 ‘너희 어린 대학생들이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세상이 안 바꾸어져’ 라고 했고, 대학생들은 탱크로 죽임을 당하였다.
방관주의가 강해지면 일본의 미시마 유키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고, 내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놀랍도록 정치에 무관심하다. 신문, 뉴스 보기에는 시간이 아깝고, 독도가 한국 땅이든 일본 땅이든 상관이 없으며,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일상에만 관심이 있다. 국가에 대한 꿈을 아예 접었다. 수많은 사람이 집단 자살을 하여도 그건 내 알바 아니다. 일본의 프리타족은 취직은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한다. 미래 계획도 없고 결혼에도 관심이 없다. 아무것도 꿈꾸고 싶지 않으며 나 혼자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면 그만이다. 개인이 뭘 할 수 있다는 생각,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생각은 접었다. 생각을 하면 책임감이 커지며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책임감을 져 봤자 세상이 안 변한다. 송동의 작업은 그것을 지적한다. ‘천안문 사태에 나감은 강에 도장 찍기야.’
Stamping the Water 1996, Lhasa River, Tibet
하지만 송동은 어머니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힘없고 약하게 살았는데 하나하나가 모아져 중국의 이런 모습이 되었다. 의미없고 하찮아 보여도 그래도 해야 한다. 비록 다음 순간에 흔적이 없어져도 의미가 남아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뭐가 달라져?’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차학경의 오빠도 나가지 말라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그런 사람이 여러명 있으면 국가가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송동은 천안문 사태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예술을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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