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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 양피지 위에 쓰기 5/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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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베이질 댓글 0건 조회 6,465회 작성일 10-05-24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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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시아 예술 16th hour : Chang Kyoung Park, Writing on Palimpsest





박찬경 (1965- )
박찬경은 서울대 회화학과를 나왔으며, 사진작업과 단펀영화를 제작한다. 형은 영화 Old Boy 와 친절한 금자씨로 유명한 영화감독 박찬욱이다.



Bongwonsa, 2009, digital pigment print 
사진·회화·영상·드로잉 작품을 함께 내보인 광명천지라는 전시제목에 소개된 사진작품이며, 심봉사가 눈을 뜨듯 세상이 다 눈을 뜬다는 의미이다. 광명천지는 판소리 심청가 마지막 대목 모두가 눈을 뜨는 장면에서 따온 제목이다. “밤은 전기 조명에 밝아지고, 눈과 머릿속도 방송·영화· 모니터에 의해 밝아졌다. 그러나 ‘계몽된(en-lightened)’ 사회는 빛· 비전· 공동체나 유토피아의 기억·상상 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기독교가 들어온 후 미신 취급을 받고 있는 우리의 토속종교와 민간신앙을 재조명하는 작업으로 전통을 무조건 미신 취급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점, 오히려 무속에서 민중의 유토피아에 대한 깊은 염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신도안, 45분, 단편영화 2009
신도안은 계룡산 아래 지역으로 원래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1910~20년대 신종교와 전통종교의 집산지였는데 현재는 3군 통합사령부가 들어서 있는 조금 특이한 지역이다. ‘신도안’은 이 지역 무속인과 전설 등의 자료를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불교를 포함한 한국 전통의 신앙과 민간종교에 관한 작업이다.
대전 계룡산 끝자락에 위치한 분지 이름이 신도안이며, 조선 건립시 서울과 신도안이 수도 후보에 올랐다. 풍수지리, 음향오행에 의한 상서로운 기운의 영터이다. 1029년 조선총독부의 기록부를 샅샅이 찾았더니 80개 종교가 계룡산 일대에 있었다. 아직도 계룡산의 기를 받고 삼신당,귀신을 모시며 사는 사람이 있다. 위의 사진에 나온 사람도 그런 사람이며 주술을 하면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신도안, 45분, 단편영화 2009
박찬경은 신촌 봉원사의 팔상도, 옥천암 백불, 적조사의 석상 등 기복신앙을 밑에 깐 한국의 불교·무속의 장소를 촬영했다. 평소 익숙한 장소는 야밤에 맞닥뜨리면서 기괴한 기분이 감도는 공간으로 변한다. “낮에 절이나 암자를 보면 재미 없어요. 밤에 봐야 두렵고 낯선 느낌을 가질 수 있죠.” 광명천지의 주 주제는 modernity (근대화) 과정을 상고하는 작업이며, 그는 초창기에는 남북관계를 다루었고 근래에는 60-70년대를 관통하면서 산업화라는 이름하에 무속 종교, 굿등을 미신이라고 터부시하고 근절하는 잘못된 잣대를 파헤친다.



어떤 산, A Mountain 
박찬경 작가의 ‘어떤 산 /a mountain'이라는 제목의 전시는 2008년에 열렸던 ’신도안‘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이다. 근대화의 표상인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 사이로 불상이 삐죽히 보인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지만, 엄연히 새로운 것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다음은 작가의 전시 글의 내용이다. “흔히 ‘계룡산’ 에는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가 겹쳐있다. 하나는 미신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 신비주의’에 대한 동경이다. 내게 그것은 우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나는, 우연한 기회에 마주친 계룡산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충격에 휘말린 적이 있다. 백두산이나 히말라야에 가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구화와 세계화를 거치면서, 민간신앙 이나 전통종교는 기껏해야 관광자원이나 신비주의 상품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의 민간신앙, 신종교, 산악숭배 등에 대해 교리의 세련성을 잣대로 삼아 비판하는데 익숙하다. 그러한 잣대 자체가 왜곡되었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산
아무리 근대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산에 가서 무속 신앙의 상징인 돌산을 저도 모르게 쌓는다.



어떤 산, 폭포
유치하고 저속한 kitsch 라고 불리는 가짜 그림들, 그러나 아직도 지방의 곳곳의 목욕탕, 이발소, 가게에 가면 상서로운 기운을 불러오는 이런 그림을 붙인다.



어떤 산, 백호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저런 걸 걸다니 유치해’ 라고 하지만 가게 주인은 호랑이 기운을 받기위한 염원으로 벽에 걸었다.



무당, 이해경
언제부터 우리가 굿을 싫어하고 불편해 했는가? 시점이 언제부터? 어머니께 여쭈어 보면 벌로 불편해 하지 않는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네의 여러 집에서 굿을 했다.이제는 동네에서 굿하는 것 보기 힘들다. 대다수가 종교가 있어서 굿한다 하면 이상하게 본다.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굿을 했고, 묘자리 보러 다니고, 길을 떠날때나 먼곳을 다녀오면 조상의 선산묘에 가서 절을 하는 것은 아직도 계속된다. 공부 아무리 많이 하고 Freud 운운해 봤자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조상에 대한 생각, 꿈자리 해석, 팔자, 운명 등에 대한 관념이 들어와 있다.

 



박수무당
 

사이에서, Between, Documentary 영화
한남동의 이해경 무당은 황해도 진오기 굿으로 유명하다. 영화 사이에서 는 28살의 나이에 신병이 온 여자에 대한 토큐멘타리이다. 죽을 것 같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병명이 없다. 종착역이 이해경 무당에게 갔더니 ‘신병’ 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무당의 운명이지만 결혼을 했고  딸이 내림굿을 안하면 죽는다고 하여 힘들어 하면서 무당이 된다. 박찬경의 신도안, 광명천지도 그런 이야기이다. 언제부터 기독교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가진 무속신앙을 불편해 했는가?

 

대무(大巫) 이해경에게 평범한 스물 여덟 해를 살아온 '인희'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요즘 들어 자꾸만 몸이 아프고, 집안에도 안 좋은 일들이 생긴다고 말하는 그녀. "맑고 순수한 영이 들었네......" 찬찬히 인희의 눈을 바라보다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이해경은 말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른 사람의 앞날이 보이게 되면서 힘들어하지만, 신이 자신을 찾아 왔다는 것을 거부하는 인희. 대무 이해경은 이러한 인희를 측은하게 여기고 옆에 두며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
 
30년간 암을 비롯한 갖은 무병을 앓고 50살이 되어서야 신내림을 받게 되면서 고통에서 벗어난 손영희, 원인도 없이 왼쪽 눈을 실명하고 신이 보인다는 8살 동빈이,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은 아들을 달래기 위한 굿을 하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서 인희는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신의 그려 놓은 숙명을 따르도록 다른 이들을 이끄는 '소임'에 눈물 흘리는 대무 이해경. 그리고 가슴 속 묻어두었던 '신의 딸'로서의 숙명을 따르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이야기가 밝혀지는데......
 
신과 인간 사이에서 불가해한 소통을 업으로 삼는 무당의 존재를 통해 둘 사이의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선을 이어주는 무당의 삶을 감동적으로 포착 한다. 스물여덟살 인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신내림의 운명과 그녀를 바라보며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소임을 느끼는 무당 이해경의 삶이 안타깝게 드러난다. 박기복의 <영매 :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2002)와 더불어 전통 무속을 다루고 있지만, 자신들의 힘겨운 운명을 버텨내는 무속인들의 삶과 굿을 통한 카타르시스에 보다 밀착하며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완성하였다.



민학 바위맨, 2010, Digital pigment print,
1970~1973년 잘 알려지지 않은 민속자료 발굴에 나선 민학회원들의 활동 모습을 담은 책 '민학' 속사진을 가져온 작업 중 바위를 오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담은 '민학 바위맨'은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을 대변하는 사진이다. 사진 속 남자는 힘든 자세로 오늘날 문화적 전통을 찾는 것은 절박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빨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공허한 일임을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듯 하다.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많은 것이 억압되어 왔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appeal 되었던 계층은 사대부 집안이 아닌 낮은 사회 계층이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 하다는 기독교의 교리가 그들에게 먹혀 들었다. 기독교가 처음에는 무속이고 미신으로 억압받다가 지금은 완전히 뒤집혀 elite 종교가 되었다. 나라가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정의를 만들었다. 무속이 미신 대접을 받은 역사는  아주 짧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었고, 작가 박찬경은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인 그 시점을 건드린다. 고대시대에는 정치가가 주술하는 shaman 으로 신적 위치에 있었는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시점이 근대화와 맛물린다. 대한민국은 근대화를 이용하여 추를 확 바꾼다. 근대국가라는 illusion 을 가지고 산업화, 이성주의, 계몽주의 등의 catch phrase 하에 대접 못 받았던 것을 국가가 뛰우면서 재정의를 만들었고, 박찬경이 이를 지적하고, 숨겨진 것들을 찾으러 뛰어 다닌다. 이제는 무속을 신앙으로 보지 않고 행위예술, 공연, performance 로 본다.  




박찬경_비행_비디오 설치_2005
2000년 6월, 분단 50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에 따라, 전후 처음으로 남북 직항로가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남한 대표단은 두 대의 비행기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직항로로 약 한시간 동안 비행하였다. 비행은 김대중과 김정일의 2000년 정상회담을 조명한 13분짜리 비디오 작업이다. 당시 남한 대표단을 태우고 평양까지 직항로로 날아간 비행기에서 항공 촬영한 TV자료를 얻어다 재편집한 작품으로, 배경음악으로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더블 콘체르토’(1977)를 사용함으로써 윤이상에 대한 헌사를 겸해 냉전과 분단, 전쟁과 평화,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있다. 박찬경은 방송국의 협찬을 받아, 당시 방영되지 않은 촬영분 (footage) 를 모아서 편집했다. 


 
박찬경_비행_비디오 설치_2005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약 500만 여명이 사망하였다. 이는 베트남 전쟁 희생자의 네 배가 넘는 숫자이다. 북한은 미국의 폭격에 의해 전국이 초토화 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고집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전쟁의 기억 때문이다.

 

비행에서 꽃을 들고 환영하는 북한 시민들 모습. 


 
박찬경_비행_비디오 설치_2005
'창조적 모호성'이란, 2005년 북핵문제에 관한 6자회담에서 남측 수석 대표가 거론한 말로,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협정에 대한 외교적 관용어이다. (The term "creative ambiguity" is diplomatic jargon referring to diplomatic arrangements that are obscure enough to be interpreted in whatever way any party would like.)  북한 인민에게 비행기는 창조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북한 인민에게 비행기는 아직도 즉각적으로 폭격을 연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한 시민 대다수에게 비행기는 이제 B-29가 아니라, 여행을 의미한다. ( ...means travel, not anymore B-29 bomber.)
 
정상회담 당시에 media 는 두 정상의 악수 장면만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남한 사람은 비행기 뜨는 장면에 익숙하지만 북한 주민은 처음 본다. 그들에게 공중에 뜬 비행기의 기억은 비행기가 뜨면 죽는다는trauma 로서 남아있다. 남한인은 그 기억을 많이 잊어 버렸지만 북한사람들에게는 폭격기로서 정지된 기억이다. 한국인의 category 에 들어가는 collective memory 를 다루고 있다.

 

박찬경_비행_비디오 설치_2005
비디오에 사용된 음악은 1977년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더블 콘체르토』의 앞부분이다.  이 곡은, 견우와 직녀 설화에 바탕을 두었다. 설화에 따르면, 왕의 벌을 받아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는, 이를 불쌍히 여긴 새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1년에 한번 만날 수 있다. 윤이상은 이 설화를 남북관계에 비유했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은 통일을 상징한다. 그러나 남북 사이의 거리 또한 은하처럼 멀다. 윤이상은 아마도 다리를 놓은 무한수 의 새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윤이상은 분단된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통일된 독일에 묻혔다.

 
2002년, 동시대 같은 공간, 같은 역사적 사건이 벌어져도 전혀 다르게 기억되지만, 역사에 남는 기록은 ‘정상의 훌륭한 만남’ 일뿐이다. 역사는 elite 에 대한 기억을 위주로서 써내려간다. 근대화 과정에 있어 경부고속도로는 훌륭한 업적으로 역사 기록에 잘 나와있지만, 공사현장에서 죽은 노동자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듀바이 공사현장에서 12시간 일하는 노동자와 8성급 호텔에 묵는 사람과는 듀바이에 대해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듀바이의 빠른 선진화에 초점이 맞추고, 공사 현장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못 참고 자살한 노동자의 기록은 전혀 없다. 박찬경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 남북냉전, 산업화를 관통하는 역사적 이야기에 숨어있는 다른 결, 다른 층을 건드려 본다.





독일로 간 사람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관한 기록), 박찬경, 클라우스 펠링
독일 탄광촌의 광부들로서 70이 넘은 할아버지들 이다.
오늘날 루르 지방(서독 탄전, 공업지대)을 벗어나면 독일에 왔던 한국인들이 그렇게나 많으며 또 그들이 아직도 그렇게 많이 독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일인들은 드물다. 이 책은 지난 1960년대에 독일로 이주해 온 한국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민자들이 독일로 이주하기 위해 여권에 사용했던 흑백사진들과 작가가 그들과의 만남에서 담아낸 컬러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40여 년의 세월, 그 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1968년에 파독된 간호사 이춘화 씨가 파독 당시 지니고 있었던 주민등록증을 보이고 있다. 독일에 간호사로 가게 된 여인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보며 저자는 말한다. 아무도 그녀의 손금이나 지문으로부터 그녀가 서울 영등포를 떠나 에센에 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오히려 암호처럼 휘말려 있는 지문이 아니라 주민등록증 배경그림인 곧게 뻗어 있는 고속도로 그림에서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파독광부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주도한 인력 수출로 1963년 부터 1979년 까지 독일로 간 한국의 젊은이는 2만여 명에 달한다. 한국인 광부의 파독은 계속되었으며, 1980년까지 7,936명의 광부와 10,032명의 간호원이 한국으로 송금한 독일 마르크화는 본격적인 차관경제가 시작되기 전에  중요한 외화벌이의 수단이었다. 45년 전 청년 파독 광부들이 흘린 땀방울은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위해 달려온 한국 현대사에서 파독광부의 역할이 이렇듯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은 왜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1970년대초 보쿰 대학에서 성명서를 읽고 있는 이영준씨, 왼쪽부터 강동구, 이영준, 윤이상 선생, 귄터 프로이덴베르그 교수. 이영준씨는 보쿰 대학에서 저개발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1960년대말부터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파독 광부에 관한 자료를 전혀 찾을 수도 없고, 역사 시간에 들어본 적도 없다.  박찬경은 직접 독일에 가서 그들을 찾아 기막힌 얘기를 듣는다. ‘너희는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를 위해 국가를 살린 장본인’ 이라고 하면서 ‘돈 못 주겠다’ 국가가 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연금을 쎴다는 것이다.  60년대 당시에 서독에서는 아무도 광부를 하려 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너무 못 사니까 국민을 광부로 보내는 조건으로 독일에서 차관을 받았다. 국가가 애국 근대화의 포장지 속에 국민을 싸서 팔아먹은 셈이다. 당시에 Dollar 는 원으로 환산하면 큰 돈이었고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월급도 US dollar 로 대한민국으로 송금되었는데 국가가 40%를 가지고 60% 만 지불이 되었다. 물론 계약서에 한문으로 깨알같이 쓴 법문이 있었지만 해독의 차이가 있고 정부 상대의 긴 소송 과정에서 결판이 안나고 패해자 측은 지쳐 떨어진다. 돈과 힘이 없는 그들을 도와주는 인권 변호사도 공격을 받는다. 


1990년평양 양강호텔에서 상봉한 류은진씨와 그녀의 아버지. 보쿰 마리엔병원(Marien Krankenhaus, Bochum)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류은진씨는1986년에 평양을 방문한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실종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에서 방북은 곧 귀국의 실질적인 포기이며, 이는 곧 남한에 있던 가족들과의 또 다른 이산을 의미하게 된다. 그녀는 현재까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 시대를 평가하는 박찬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67년의 동백림 사건 (동 Berlin )은 독일에 있는 한국인이spy 라는 죄를 쓰고 체포를 당한 사건이라 한다. 독일 광부, 간호사는 북한과 연락이 쉬웠고 가족 생사를 찾으려고 갔다온 것 뿐인데 그로 인해 동백림 사건에 연류가 되었으며 2006년 법원에서 무고하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고문 휴유증으로 평생을 반신불수로 살고있다는 소식이다. 한국 정부는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지성인을 탄압하는데 반공사상 ( red complex)을 적용했으며 교수, 문학가, 예술가들에게 ‘빨갱이 죄’를 뒤집어 씌우기가 제일 용이했다고한다. 윤이상씨가 젊었을때 독일에서 유신정권 반대 시위와 독일의 자본이 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반대 시위를 했으며, 그 이유로 한국에서 2년간 복역을 한 기록이 있다. 천상병 시인 역시 가족생사를 찾으려고 북한에 갔다 온 것 뿐인데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유로 동백림 사건에 연류가 됐다한다. 송두율 교수 역시 빨갱이로 몰렸었다. 북한 땅 한번 밟고, 북한사람 한번 보면 빨갱이가 되는 시절이었다. 국가의 외화벌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독일광부로 보내고, 동백림 사건으로 잡아 들이고, 급기야는 ‘너 외국으로 나가서 살아’ 하며, 국가가 국민을 몰라라하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시절이었다. 동백림 사건은 학교에서도 배운 바도 없고, 부모님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기에 요즈음 세대에게는 묻혀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젊은 미술평론가는 천상병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동백림 사건을 처음으로 듣게 되고  한사람의 인생을 국가가 이토록 유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게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필요악으로 여기지만 직접 연류된 많은 가정은 생사의 기로의 놓인 문제였음이 가슴아픈 현실이다. 아들이 스파이짓 했다고 동네 주민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1967년 에서 2006년 사이40년의 긴 세월을 빨갱이라는 이름아래 살아온 그 세월을 누가 보상해 줄 수 있나? 하고 평론가는 반문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박찬경이 독일로간 사람들을 쓰게된 배경이다.



63-77년 동안의 파독광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박찬경은 동시대 사람들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 역사를 직접 독일로 가서 그들에게 듣고서 책을 만들었다. 60-70년대의 싸움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80-90년대에 임금을 돌려달라고 국가에 appeal 했지만 어떤 언론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박찬경은 사람의 기억은 media 가 주는 것만 인지하며, 파독광부들의 소송 이야기는 신문과 방송에서 입도 뻥끗 안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른다. 개인적인 모든 기억이 media 에 의해 거의 형성이 된다.  피키스탄 전쟁 이야기도 미디어가 주는 정보만 기억하며, 대한민국 국민의 90% 이상은 미디어에 의해 똑같은 것만 기억하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정체성은 2차대전 이후에는 경험이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미디어가 주는 기억을 기본으로 해서 형성이 된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직접 경험했다기 보다 읽었던 책, 만화 영화에 의한 기억이 대부분 으로 친구와 같이 무엇을 했던 기억이 아니고 같이 봤던 기억이 더욱 많다. Identity 가 경험,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통해 형성됨이 아니라 mask 를 쓰는 것과 같이 identity 를 쓰고 다닌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마치 경험한 것 처럼 동일시한다. ‘신문에서 이렇게 얘기했어, 너 왜 딴 소리 하니?’ 사람의 입장이 자신의 경험에 의함이 아니라, 자기가 본 신문, 정보, 알고 있는 정도에 제한된다. 매체를 투명하게 보지말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서 보면 ‘비딱하다’ 는 비난을 받는다. ‘왜요?’ 하고 질문 안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며, 누가 얘기하면 ‘아하 그렇구나’ 라고 받아 들인다. 현상, 미술, 문학 얘기할때 100% 받아들이지 말라. Fantasy 를 가지지 말라.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보다 지식이나 힘을 가진자에게 ‘왜요’ 라고 질문 안하며, 의심 자체가 피곤한 일 이므로 그냥 믿어 버린다.
 
사는데 어느정도는 critical attitude 를 가져보면 어떨까? 할 수 있는 노력을 절대로 내려놓지 말라. 박찬경은 사람들이 60,70년대의 무속, 남북관계, 파독광부 들에 대해 ‘100% 진실’ 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들을 파헤치고, 들어 났을때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양피지 위에 기록된 역사, 덧쓰고 또 쓰고 하여도 양피지는 그 밑에 깔린 것을 지워내지 않고 훤히 내보인다. 과거와 전통을 아무리 끊어 내고 지워버리려 해도, 밑에 깔려있는 흔적은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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