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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미술 (1050-120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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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8,001회 작성일 11-02-0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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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르네상스 미술 4th hour: Romanesque 로마네스크 미술 (1050-1200)




Carolingian Art

카롤링거 제국 Carolingian Empire 768-887



 4세기에 로마제국이 멸망을 하자 게르만족에 속하는 Franks 족의 왕 샤를마뉴 Charlemagne가 강력한 카롤링거 제국 Carolingian Empire을 세운다. Carolingian Empire는 샤를마뉴 대제의 재위기간과 그 이후 짧은 기간을 말하고 Frankish Kingdom은 게르만족의 이동 후부터 카롤링거 제국까지 존속했다. 카롤링거 제국이 나중에 세 개로 나누어 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Frankish Kingdom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France가 된다.  카롤링거 제국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많이 확보하며, 800년에 교황이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의 이름을 수여한다.

샤를마뉴 대제 Statue of Charlemagne (742 – 814), Early 9C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에 프랑스, 독일, 이태리의 세 나라로 분리되며  Carolingian Empire 가 쇠퇴하자 독일 쪽은 작센 왕가의 Otto 1, 11,  lll 세가 Ottonian Empire 919-1024 를 세우고 신성 로마제국을 물려 받는다. 오토 왕조는 정치적 중요성은 없지만 오토제국의 미술을 Ottonian Art 라고 하며 문화적으로는 의미가 있다. Otto 2세는 비잔틴 제국의 공주 Galla Placidia 와 결혼을 하며 어머니의 혈통을 이어받은 오토 3세는 100년 동안 비잔틴 제국과 꾸준히 안정적인 교류를 하여 비잔틴 미술이 쏟아져 들어온다. 

Palace Chapel of Charlemagne (Aix-la-Chapelle), Aachen, Germany 792-805 




              
샤를마뉴 대제는 바티칸 성당을 위시한 로마제국의 찬란한 문화를 체험하며  로마의 훈련된 아티스트를 데리고 와서 독일의 수도 아아헨에 샤를마뉴 대제의 개인 예배당인 Aix-la-Chapelle을 짓는다. 로마 원정을 마치고 돌아간 샤를마뉴 대제는 아주 잠깐이지만 로마제국의 문화를 몇십년 동안 부흥시킨다. 로마식의 둥근 아치, 로마 초기의 성당에서 쓴 색깔있는 대리석이 보이며 팔각형의 중앙집중식 기본구도이다. 당시의 미술을 Carolingian Art 라고 한다. 

Gero Crufix, Cologne Catheral, Germany 970


 

Page with Otto III Enthroned, Liuthar Gospels (Aachen Gospels), Aachen Germany, 996


 

Otto I presenting Magdeburg Cathedral to Christ, 962-68 


 
로마의 legacy 를 받은 Carolingian Art 와 Ottonian Art는 게르만 유목민의 미술과 확연하게 틀리다. 쾔른성당의 금십자가, 아아헨의 화려한 금장식의 책표지, ivory 조각품등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으로 오토니안 제국 때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네스크 Romanesque Europe 1050-1200

로마네스크 시기는 수도원과 순례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  바이킹의 침략이 끝나고 안정된 분위기에서 경제적인 성장이 있었다. 수도원의 전성시대로서 수도원은 바이킹의 침입시기 동안 지역사회의 치안, 복지, 교육, 종교, 경제의 중심센터가 된다. 한편 수도원의 재산과 영향력이 점점 커져서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 등은 교황을 여러 명 배출한 권력의 핵심기관이 된다. 

7세기 확립된 신흥종교 이슬람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이슬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고 스페인까지 진출하여 9-12세기까지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서유럽은 바이킹의 침략에서 벗어나 안정된 정치력, 교황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지중해권 비잔틴 제국 및 팔레스타인 (Holy Land)에 관심을 뻗쳐나가며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다. 12세기는 십자군 원정과 수도원을 도는 순례문화가 형성된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은 대규모 순례교회pilgrimage church 가 등장하며 로만 아치, 배럴 볼트가 재등장한다. 로마미술을 이어받은 기념비적 대규모 조각미술이 출현하며 신학적 해석이 가미된 정교한 도상이 발전한다. 주요 유적으로는  생 세르냉 (툴루즈), 므와삭 수도원, 콩크 성당, 오텡 성당 (기즐베르투스 조각가), 클뤼니 수도원, 베즐레 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이 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정치적 상황 1050-1200

1000년대는 암울했다. 바이킹의 침략으로 수도원은 약탈을 당하고 사람들은 깊은 산속으로 도망가고,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 apocalypse 사고가 팽배했다. 바이킹으로 인해 위축당한 독일 사람들은 숲속으로 피해 들어가 경작지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경작 기술과 방법을 고안, 개선하여 경작지를 늘리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유럽 전체가 먹고 살만해졌다. 정치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눈을 밖으로 돌려보니 서유럽이 바이킹에 시달리는 동안 남쪽은 이슬람 세력이 휩쓸고 있었다.

Islam World  900



이슬람은 7세기 경에 무하메드라는 예언자가 출현하여 만든 신훙종교인데 무하메드를 메시야라고 믿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인들의 낙타는 타고 다니기 어려운 동물이었는데, 중앙아시아와 아라비아의 낙타를 접붙이는 technology 를 이용해 신종 낙타를 개발해 타고 다니면서 약탈을 일삼는 호전적인 민족이다. 지나가는 상인을 등치고 이웃 간에 서로 빼앗는 사나운 민족인데 모하메드가 신흥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모은다. 우리는 형제니까 합치고 타종족을 공격하자는 그의 말이 먹혀 들어간다. 이슬람 제국이 확장을 거듭하면서 비잔틴 제국, 북아프리카, 포루투갈, 스페인을 침범해 영토를 늘린다. Christianity 의 Holy Land 인 예루살렘을 모슬림이 장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기독교가 멸종 위기에 놓일 지경이 된다.

서유럽인들은 스페인과 비잔틴에 있는 아랍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십자군 Crusade (1090-1250) 를 결성한다. 나름대로 정치가 안정이 된 서유럽은 기독교의 Holy Land 를 복구하려는 취지에서 150년 동안의 긴 군사 원정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찾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비잔틴 제국의 휘황찬란한 문물에 놀라서 같은 십자군 동지인 비잔틴 제국을 나중에는 약탈한다.

유럽의 팽창주의 Expansionism 은 역사 속에서 3번 나타난다. 11세기의 십자군 운동과 15세기에 포루투갈인 콜럼버스가 배를 타고 아메리카를 발견하여 식민지를 만들고, 19세기 유럽은 제국주의 Imperialism 를 내세워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넓힌다.

십자군 운동 다음에 수도원 운동 monasticism 이 나타난다. 바이킹의 침략으로 country side 로 숨어든 사람들에게 기댈 곳이 필요한데 수도원이 안식처가 된다. 프랑스의 버건디 Burgundy 지방의 산속에 베네딕틴 Benedictine 수도원이 하나, 둘 생기고 monks 들은 기도하면서 공동체를 꾸리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돕는다. 적이 침입해 오면 튼튼한 석조 건물인 수도원에 마을 주민이 다 숨는다. 중세의 수도원은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정신적 부흥 spiritual need을 꿈꾸며 원정 가는 대신 수도승이 되고자 하는 장군도 있었다.

Romanesque 로마네스크 교회 (1050-1200)

로마네스크 미술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십자군 원정과 수도원을 바탕으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은 순례 pilgrimage 를 동경하게 되었다. 무슬림 Muslim 도 Mecca 에 가보고 죽는다는데 우리 기독교인들도 살아 생전에 Holy Land 에 가봐야 한다.  팔레스타인은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고, 성인들의 유해가 있는 로마는 너무 멀어서 가기가 위험하다. 그런데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이 크리스챤의 영토가 되자 프랑스 남부에서 새로 개통된 길을 따라 야고보 사도가 묻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의 야고보 성당 Cathedral of Saint James까지 순례를 가려는 열망이 넘쳐난다.

Pilgrim’s Journey 


          
수도원 순례 문화는 12세기에 새로 나타난 사회현상으로 로마네스크 미술과 연관이 된다. 프랑스 왕의 아우인 버건디 지방의 영주 Duke of Burgundy 는 결혼을 잘해서 부인의 재산인 네덜란드, 벨기에 땅을 자신의 영토로 만든다. 프랑스 버건디 지방에서 남쪽으로3가지 route 를 따라서 종착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를 Pilgrim’s Road 라고 한다. 이 길을 따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50년 사이에 많이 생긴다.

1. 생 세르냉 교회 Saint Sernin Basilica, 툴루즈Toulouse, France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Pyrenees을 넘기 전에 순례자들이 만나는 장소에 초기 로마 순교자의 유골이 있는 생 세르냉 교회가 있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시대의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서 같이 몰려 다녔으며 수도원은 대규모의 순례자들을 끌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당시의 물물교환 경제 system 에서 수도원에서 숙박을 제공받고 신성한 성인의 유골에 키스까지 한 순례자는 감사의 표시로 값 나가는 금은보화를 선물로 내 놓는다. 툴루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고  생 세르냉 교회는 병자와 소경에 영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2. 콩크 성당 Saint Foy Abbey Church, Conques, France Late 9-10th C




        
콩크에 있는 Saint Foy Abbey Church 는 로마시대에 죽은 여자아이 푸어 Foy 의 유골이 있으며 감옥에 있는 죄수의 평안함을 기원하거나 십자군 포로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해 순례한다.

Reliquary Statue of Sainte Foy (Saint Faith), Abbey Church of Conques


 
콩크 성당은 푸어의 유골을 구해와서 유골함 reliquaries을 만들고 찾아오는 순례객들은 돈을 모아서 유골함에 장식할 보석을 가져간다. 대접을 잘 받으면 감사해서 가지고 다니던 금 십자가를 남기고 가는 gift economy 가 성행했다. 영, 독, 프랑스 북부의 농부 및 각종 사람들이 주고 간 물건으로 수도원은 재정을 확보했다. 이런 이유로 버건디의 작은 수도원들은 필그림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며 자신들의 수도원의 유골이 영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3. Cathedral of Chartres, Chartres France, 1205 




              
아픈 아이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성모님의 옷자락 tunic 이 있는 샤르뜨르 수도원에 간다. 파리 남쪽 샤르뜨르 지방에 있으며 사람들은 수도원의 specialty 를 쫒아 여러 수도원을 들리면서 무리를 지어 종착역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까지 간다. 금십자가를 선물로 받은 수도원은 hospitality 와 souvenir 를 pilgrim 들에게 제공한다. 수도원에서 선물로 받은 나무, 조개 십자가를 성인의 유물함에 갖다대니 이제 성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돌아와서 가족에게 신비한 힘이 있는 십자가를 선물로 준다.

4. Cathedral of Saint James, Santiago de Compostela, Galicia, Spain 1077-1122



집에 있는 부인은 십자군 원정을 떠난 남편의 안녕을 빌기 위해 지역의 성소를 찾아 다녔으며, 십자군과 순례의 두가지 현상은 12세기에 나타난 parallel image 이다.

로마네스크 Romanesque 교회 양식

교회의 구조가 대규모 순례객을 받기 위해 변해야 했는데 이를 로마네스크 양식의 pilgrimage church 라고 한다.

Great Nave, Monastery Church of SS Peter & Paul (Cluny II), Cluny, France 800


          

Transept


Narthex, Monastery Church of SS Peter & Paul (Cluny III), Cluny, France 1089-1132


 
복도 nave 를 길게 하고 돌아갈 수 있게 둥글게 만든 transept, 사제 예배 공간인 choir 가 이전에는 한개였지만 라틴어 미사를 못 알아듣는 여행객들에게 미사는 별 의미가 없어지고 대신에 반원형 성소 주위에 6-8개 side chapel 을 만들어 성인의 유골을 안치한다. 툴루즈의 셍세르냉 성당은 성인의 유골 6개를 보조 채플에 한개씩 비치해 놓고 필그림은 2-3명씩 짝을 지어 들어가서 영험을 받기 위해 유골에 kiss, touch 를 하고 나온다.

Latin Cross, Cathedral of Saint James, Santiago de Compostela, 1077-1122


Barrel Vault, Church of Saint-Savin-sur-Gartempe, Poitou, France, 1095-1115 

                  
                   

Latin Cross 모양과 긴 복도가 강조되고 보조채플이 여러개 있는 것이 순례자 교회의 특징이다. 동네 교회는 미사가 위주이지만 순례 교회는 보여주기 위한 전시 display 위주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로만 스타일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부흥을 한다. 둥근 반원형 아치와 배럴볼트형의 지붕, 기념비적 조각 monumental sculpture 이 재출현한다.

Roman Arch                                                   


                  
고대후기 4세기 이후 끊겼던 로마시대 조각이 부흥을 하여 수도원 교회의 기둥에 대규모 조각 장식이 등장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내려가는 길목인 버건디 시골에 로마교회의 유적인  베즐레Vezelay성당, 오텡Autun성당, 므와삭Moissac 성당 등 대부분의 로마네스크 교회가 있다. 굽이굽이 걸어서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새로운 신심을 얻어서 돌아간다.   

1. 므와삭 수도원 Saint Pierre Abbey in Moissac, France 1115     
 

      

South Portal and Porch, Priory Church of Saint-Pierre, Moissac, France 1115     



조각이 다시 부흥되면서 수도승들이 디자인을 한다. 성서의 일화를 가져온 므와삭 수도원의 조각은 주제가 뚜렷하다. 일반인이 보고 교화를 받을 수 있는 주제를 따온다. 도상의 정리는 12세기 로마네스크 시대에 이루어지며 순례를 떠날 정도의 기독교인은 조각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린다. 수도승의 거주 공간인 클로이스터 cloister 안에는 자신들의 묵상에 도움을 주는 설립자 founder, 성인, 수도원장의 초상을 조각으로 세워둔다.

2. 베즐레 성당 Basilica Saint-Marie-Madeleine, Vezelay, 12C

    



막달라 마리아 Mary Magdalene 의 유해가 있는 곳이다. 

3. 클뤼니 수도원 Cluny Abbey 10-12 C, Burgundy, France



그 많은 로마네스크 교회가 언제 파괴 되었을까? 16세기 영국의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프랑스 대혁명 (1789) 때 구세력 Ancien Regime (앙시앙 레짐) 의 표본이라고 하여 상당 부분이 파괴된다. 버건디의 클뤼니 수도원은 원래 서유럽 최고로 부흥되었던 수도원인데 지금은 종탑만 남아있다. 베네딕틴 Benedictine 수도원 재단 계통으로 교황을 2번이나 배출할 정도로 지식인 계층의 집단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권력과 밀접된 기관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때 성난 민중이 의해 부셔졌다. 12-13세기에 도시가 발달하면서 프랑스 수도회의 원장의 집이 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세워졌는데 현재는 클뤼니미술관 Musee de Cluny 으로 되었다.

Reconstruction Drawing of the Abbey at Cluny III, Burgundy, France 1088-1130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수도원을 짓는 돈은 어디서 마련을 하는가? Cluny Abbey 는 원래 버건디 지방의 작은 교회였는데 2번이나 허물고 새로 짓는다. 당시에는 교회의 세력이 세속 군주보다 세었으므로 세속 군주 스페인 왕 Alfonso VI세의 사후에 anniversary mass 를 드려준다는 조건으로 10,000 pieces of gold 를 약속받는다. 엄청난 양의 금화를 몇번에 나누어 준다는 pledge 를 받지만 알폰소왕이 죽자 아들이 모르겠다고 하자 수도원 소속의 지성인, 변호사를 동원하여 빚을 청구하여 결국 다 받아낸다.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청과 연결된 권력의 핵심 세력이었고 교황이 내리는 가장 무서운 벌은 파문 excommunication 이었다. 파문을 받으면 왕의 권위도 없어지고, 죽어서 영혼이 갈 곳이 없어진다.

Cluny Abbey II, Burgundy, France, 10-12 C


 
Cluny 베네딕틴 수도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에 대한 이해 및 신 Plato 철학 해석 작업 등 학문 연구와 배움의 전당으로서 중세의 문화를 반영하며 13세기 철학의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타날 토대를 마련해준 다.

4. 오텡성당, Last Judgment, St. Lazare in Autun, Burgundy, France 1120-30  
 



     
오텡성당은 조각으로 유명하다. 중세의 화가나 작가는 보통 무명으로 남아있는데 기즐베루투스 Gislebertus 가 오텡성당의 조각 Last Judgment 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5. 모데나 성당, Creation and Fall, Modena Cathedral, Modena, Italy 1099


 
조각가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을 남기는 시도가 로마네스크 미술에서 나타나는데 모데나 성당의 경우도 조각가 Wiligelmus가 자신의 이름의 inscription 을  남겼다. 고딕시대로 넘어가면 조각가들이 모여서 workshop 을 만들어 대규모 작업을 한다.

구약의 십계명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조항으로 인해 유대인의 시나고그에는 조각이 전혀 없다. 이것을 성상부정주의 aniconism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중세에는 왜 그렇게 교회를 장식하고 하느님을 여기 저기에 그렸을까? 교황 그레고리 1세가 picture for the ignorant (What scripture is to the educated, images are to the ignorant ) 라고 했듯이 대중에게 하느님의 발자취를 보이기 위한 교화의 차원으로 image 화 한 것이지 신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초대 기독교 시기에 로마의 핍박을 받느라고 교리 공부한 적도 없고, 게르만족은 글자도 모르고 이단 종교 Aryanism 이 유행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기독교의 전파와 부흥을 위해 성서 일화와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 의미로 재현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씨로 남아있는 issue 이다

Saint Hildegard 1098 –1179

여자들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어린 딸을 수녀원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주의 신심이 높고 vision 을 한 두개 보았다 하면 나중에 saint 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중세에는 마흔을 넘기기가 힘들었고 특히 여자는 특히 child birth 에 죽는 경우가 허다했으므로 왕비는 왕녀가 몸이 약하면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다. 남편이라고 십자군 원정에 나가서 10년씩 집에 안 돌아오거나 혹은 포악한 게르만을 만나면 결혼이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다. 왕비로서는 왕녀에게 재산 endowment 를 주어 수녀원에 보내고 간혹 영리해서 수녀원장이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으며 여자의 영광스런career 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Bigen 지방의 귀족의 10번째 딸로 태어난 힐데가르드 성녀는 어렸을 때 부터 병약했으며 환영을 경험했다. 힐데가르드는Bigen 근처에 베네딕틴 수녀원을 세우고 수녀원장이 되어 성경의 필사본도 쓰고 글, 시를 쓴 철학가 이다. 로마네스크 수도원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당시의 많은 지식인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Hildegard and Volmar, Liber Scivias 1165-75


 
힐데가르드 수녀가 볼마 Volmar수사와 함께 자신이 본 환영을 기록하는 책의 첫 페이지이다.

Cistercian Reform

Abbey of  Notre-Dame, Fontenay, Burgundy, France 1139-47



Plan of Abbey of Notre-Dame, Fontenay, Burgundy, France 1139-47



Benedictine 수도원은 겸손과 청빈의 초기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수도원의 유물함 reliquary 에 보석이 넘치고 대규모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materialism 으로 흐르게 된다. 1098년에 클레르보의 버나드  Bernard of Clairvuax 수도원장은Cistercian Reform 운동을 시작하면서 사치 허세를 끊어내고 더욱 청렴결백하게 살 것을 주장하고 Cistercian 수도원을 프랑스 버건디 지방에서 시작한다. 수도원에 장식도 전혀 없이 건물만 덩그라니 있는 극단적인 모습이며, 수도원의 plan 도 단순하다. 하지만 12세기 말에 Cistercian은 유럽에서 제일 부유한 수도원이 된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시기는 유럽에 있어 도약의 시기이며 지식인층이 모여있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각종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농업 기술 개발을 위한  실험적인 시도, 치즈의 가공법도 유래하며 지역 사회 농민에게 기술을 전파하며, 유럽 경제 발전에 수도원이 큰 기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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