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대지예술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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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8,828회 작성일 10-12-1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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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미술로의 초대 17th Hour : Post-Minimalism and Earth Art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대지예술
60년대는 image culture 가 만연하는 가운데 영화 보는 것과 그림을 보는 것이 차이가 없는 세상이 되었고 비판적 사고 없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대중을 보고 예술가들은 이런 세상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1차 2차 대전 후에도 예술가들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틀을 제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Revolution 68 과 더불어 60년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흔들어 놓았고 예술의 정의를 바꾸어 생활의 면면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예술을 지적으로 난해하게 해석하는 Minimalism 이 나타나고, 예술의 틀을 깨부수는 Performance Art 와 Fluxus Movement 가 출현해 60,70년대 초반은 들썩들썩 해진다. 백남준, John Cage 를 중심으로 하는 Fluxus 운동은 전세계적인 운동으로 라틴어로 ‘flow(흐름)’ 라는 뜻이다.
Fluxus Movement
작곡가이며 행위예술가인 George Maciunas 는 Fluxus운동을 창시하고 1963년에 선언문을 발표하여 종합 예술운동으로 발전하며 음악가들이 많이 참여한다. 10-20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자신의 studio 혹은 극장을 빌려 Fluxus Festival 을 개최한다. 1910년대의 Dada운동은 연극적인 행위예술로 관객이 수동적으로 구경만 했지만, Neo Dada 로 부르는 Fluxus운동은 관객이 참여를 하는 happening 이 주가 된다. 백남준이 도끼로 피아노를 부순다든지, 토마토쥬스와 먹물을 묻힌 머리로 화선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Robert Rauschenberg 와 Jasper Johns 를 Neo Dada 라고 하는데 뒤샹의 readymade를 염두에 두고
object 를 예술의 도구로 쓴다.
Fluxus Movement 는 Anti-Art 를 표방한다. 예술에 있어 브르조아 taste 를 없애고 일상으로 파고 들어가 revolution 을 일으킨다. John Cage 를 통해 우연 chance 의 요소를 들고 온다. 관객이 happening 에 참여하되, 관객 스스로 ‘이게 참여인가?’ 할 정도로 잘 모르는 참여를 하게 한다.
John Cage, 4’33” 1952
죤 케이지는 2차 대전 후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이 건너와 교수진을 이룬 Black Mountain College 를 졸업했다. 그가 작곡한 4’33”는 피아니스트가 악보 앞에 앉아서 4분 33초 동안 가만히 얹았다가 들어간다. 관객은 이제나 저제나 조용히 연주를 기다리다가 4분 33초 동안 웅성웅성 하다가 돌아간다. 공연 때 마다 관객이 내는 소음 소리가 틀리므로 original 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음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4’33’ 이라는 즉흥곡을 연주하는데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왜 연주 안해?’ 하고 웅성거림으로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음악 연주에 기여를 한 것이다. 실제 우리의 생이 ‘참여’ 라는 인식조차 못 하지만, 나는 sign 한 적이 없는데 암묵의 침묵을 통해 나도 모르는 새 인생의 굵직한 비극, 전쟁들에 내가 끼어들어가 있다. 나는 한번도 개입 engagement 을 적극적으로 안 했기 때문에 반대로 다른 곳에 적극적으로 참가가 되었다.
예술향유계급 dilettante 들은 Fluxus Festival 도 가고 카네기홀의 4’33” 연주에도 간다. 예술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도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내가 삶을 사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내가 특정 커피를 마심은 아프리카 아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행위인데 우리는 거의 그런 생각없이 무심코 사 마신다. 이런 점이 후기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사회에서 내가 하는 행동의 뒤에는 수 많은 step 이 숨겨져 있고 나는 모르고 사먹고 사인하고 가입한다.
Fluxus 입장은 그렇게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일단 박물관을 벗어나자. 미니멀리즘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경험하도록 특정 공간과 시간을 극대화시켰지만 여전히 박물관 안에 들어있고, 그 작품은 종국에는 경매장으로 가는 숙명에 봉착한다. Post-Minimalism, Fluxus, Earth Art 는 작품이 상품화 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야외로 나간다. 박물관 자체가 권력인데 예술이 그 안에 있음은 특정 권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초 최초로 독일의 Wiesbaden 에서 백남준, John Cage, Joseph Beuys 는 Fluxus 운동을 시작했다. 플럭서스 작가들은 예술이 국가라는 권력의 틀안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Abstract Expressionism 이 미국의 틀 안에 매여서 자유롭지 않았다. 보이스가 다른 Fluxus작가들과 일치되지 않은 첫째 이유는 플럭서스 운동을 독일 국가의 틀안에 넣으려고 했다는 점이며, 둘째 이유는 인간을 치유하는 무당 shaman 으로서의 예술의 역활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보이스는 자신을 많이 포장한다. 2차 대전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구조 받고 눈썰매, 펠트천, 지방덩어리를 통해 살아난 경험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지만 나중에 거짓임이 들어난다. 예술가의 신적 위치를 강등시킨 뒤샹의 아이디어와 정 반대로 보이스는 항상 작품의 중심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이런 이유로 결국 보이스는 Fluxus 작가들과 사이가 나빠진다.
Baik Nam June, TV Garden
존 케이지의 chance 요소가 들어가고 백남준은 실험적 예술로서 모든 예술의 장르를 다 건드린다. 그는 비데오 아트의 효시이며 TV 를 예술 안으로 끌고 온다. 60년대 초에 TV box 를 가지고 한 작업은 sensational 했다. 백남준의 의도는TV 매체를 낯설게 만들어 TV 에 대하여 생각 좀 해보세요 하는 것이었다. TV가 대중문화를 휩쓸던 당시에 오랫만에 TV 좀 그만보고 박물관에 갔더니 고장난 TV, 지지직거리는 TV set 이 놓여있다.
Baik Nam June,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TV Bra를 입은 첼리스트 Charlette Moorman 살롯 무어맨과 백남준이 행위예술을 한다. 둘이서 소극장에서 행위예술을 한다면서 옷을 홀라당 벗어서 경찰에게 체포된 적도 있다. 대중 예술과 고급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TV 를 오브제로 들고 들어와 뒤샹피엔 Duchampian 하다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또 다른 의도는 TV 가 대중에게 예술을 전파하기 위한 ideal 한 매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백남준은 과거에는 붓을 사용했지만 미래의 예술은 반도체, portable camera, TV 가 주도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Baik Nam June, Good Morning, Mr. Orwell 1984 Joseph Beuys carrying out his ‘action' in the Centre Pompidou, Paris,
Merce Cunningham in Nam June Paik's "satellite art"
John Cage in New York is producing music from simple natural object in Good Morning Mr.Orwell.
한 곳에서 전 세계로 방영되는 위성 TV 를 이용하여 1984년 New Year’s Day 에 Good Morning, Mr. Orwell 라는 프로그램이 백남준의 coordination 으로 방영된다. 위성 TV system 으로 연결하면 Fluxus 가 표방하는 international 운동이 된다. 대중 누구나가 안방에서 어렵고 난해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TV 를 통해 차등없이 쉽게 접하게 된다. 파리, 독일, 뉴욕에서 생중계된 이 프로그램은 죠셉보이스의 행위예술, 머스커닝햄의 안무 무용, 케이지 style 의 음악이 graphic design 의 화면을 통하여 동시에 방영되었다.
Performance Art
Vito Acconi 1944-, Seedbed 1972
판대기 위에 관객이 걸어 들어가면 밑에 모포를 덮은 작가가 자위행위를 하면서 흥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갤러리와 박물관은 public space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며, private 과 public 의 2분법적인 사고를 뒤집어서 극단으로 밀어부친다. 68 혁명을 통한 feminism 운동이 일어나고 family 의 폭력성이 부각된다. ‘Private matter’ 라는 말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폭력적인 가족관계가 다 묻힌다. 가족의 권력구조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는 일방적으로 듣거나, 혼나거나, 칭찬을 받는다. 아이 입장은 power 를 가진 부모 앞에서 복종하고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하는 방식을 배운다. 사회에 나와서 거대 권력과 encounter 할 때 어렸을 때 가정에서 배운대로hierarchy 에 복종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뷔토아코니는 public 과 private 을 나누는 경계가 어디인가를 질문한다.
Brice Nauman, Self-Portrait as a Fountain 1961-70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가 샘이라고 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술가가 스스로 샘이 되었다. 모든 project 의 조절, 감독 및 철학자 역활을 하는 작가의 elite 적인 사고방식을 무너뜨리고 싶다. 자위행위를 하고 샘이 되어 작가가 우스워진다. 사람의 몸을 도구로 쓰는 body art 를 통해 작가가 우스꽝스런 역활을 한다.
Chris Burden, Doorway to Heaven Nov. 15, 1973
"At 6 p.m. I stood in the doorway of my studio facing the Venice boardwalk. A few spectators watched as I pushed two live electric wires into my chest. The wires crossed and exploded, burning me but saving me from electrocution."
크리스버든이 자신을 태우다 감전되어 죽기 전에 살아나거나 조교가 작가의 손에 총을 쏘는 performance art 를 gallery 에서 한다. 관람객들은 집에 갈 때 기분이 엉망이 된다. ‘왜 나를 이런 현장에 몰아 넣어?’ 버든은 body 이야기를 한다. 나의 총으로 나를 쏜 것이 그렇게 잔인했니? 그러면 TV 의 전쟁 장면이나 실제 죽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몸으로 하는 게 잔인해? 수많은 여자가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버든은 몸의 정치학 Body Politics 를 말한다. 내 몸도 내가 보는 몸의 이미지에 맞춰서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성과 이성을 갖추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지성 이성 다 내려 놓으면 인간의 조건은 ‘몸’ 하나, 살덩이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과 딱 몸으로 맞딱뜨리면, 모든 지성과 이성이 소용 없으며 body 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이 형이상학적 존재같지만 생활의 99%가 body politics 와 관련이 있다.
Gilbert and George, The Singing Sculpture 1969
나오만과 크리스버든과 같은 계열의 행위예술이고 body art 이다. 길버트와 죠지가 얼굴에 금박을 칠하고 구식 양복을 입고 2차 대전 전의 옛날 노래를 하고 있다. 마치 뚜껑을 열면 노래하는 인형 같다. 1960-70 년대가 되어도 역사의 페이지는 넘어가지 못하고 똑같은 행위가 반복이 된다. 그 시간과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재 삶이 전쟁 무렵과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를 묻고 있다. 세상을 회의적 pessimistic 으로 본다.
Jannis Kounellis 1936- , Exhibition of 12 Horses in the Galleria 1969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에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태리로 옮겨진 Arte Povera (Poor Art) 운동은 길거리에 버린 것을 gallery 안으로 가져와 작업을 한다. 1960년대 미국 서부의 Junk Art 와 비슷한 개념이다. 갤러리 안에 말을 가져다 놓으니 말똥 냄새로 괴롭다. 마굿간인지 갤러리인지 알 수가 없다. 갤러리를 벗어나고 싶은 Fluxus 작가들, 뷔토 아코니는 갤러리를 private 한 침실로, 야니스 코운넬리스는 마굿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말은 서양의 도상으로 영웅의 말탄 모습이 공공 장소에 조각으로 서 있는 이미지인데, 밥 먹고 배설하는 말 자체를 갤러리에 가져와 공간을 전복시킨다. 70년대에 뮤지엄과 갤러리를 비판하는 institution critique 이 나타나는데, 시조격인 작품이다.
Mario Merz, Giap Igloo 1968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베트남전을 가르킨다. 눈, 흙, 지푸라기로 만드는 Igloo 는 유목생활 nomadic life 의 떠돌이를 나타낸다. 후기 자본주의 생활의 특징은 nomadic life 이다. Journalist, professor, 부자들은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며 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전쟁, 돈 때문에 싫어도 국경을 넘어야 되는 부류가 있다. ‘Globalism’ 이라는 용어와 함께 nomadic life 를 romanticize 시키는 경향이 생겨나는데 지구촌 global village 개념을 환영하는 계층이 있는 반면 나라를 떠돌이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Globalism 에서 국경을 제일 잘 넘나드는 것이 돈이다. 다국적 기업의 global elite 계층은 Globalism 을 catch phrase 로 내세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계층, 집이 없어서 떠 돌어야 하는 homeless 계층,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리오 머즈는 포장된 nomadic life 의 모습을 뒤집는다.
Post Minimalism
Robert Morris, Untitled, felt 1968
로버트 모리스는 동시에 Minimalist 와 Post Minimalist 이기도 하다. Post Minimalism 은 실, 천, 고무 등을 쓰는데 Minimalism 의 알루미늄, 벽돌 재질과 반대가 된다. Minimalism 은 특정 시간과 공간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공업용 재질을 사용하여 아무리 관객이 보고 가도 변하지 않는 영구불변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부드러운 재료를 사용하는 Post Minimalism 은 작가가 모양이나 틀을 만들지 않고 벽에 걸면 천과 실이 움직이고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서 모양이 변한다.
Robert Morris, Four Steam Outlet 1967-73
모리스도 박물관 밖으로 나온다. 연기가 올라가고 작업이 없어져서 끝이 난다. 박물관을 떠나고 사고 팔 수 없게 하여 commodity 의 덫을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Body Art 역시 institution critique 에 동참하여 예술이 자본과 닿는 끈을 끊는다. 밖으로 나와 시공에 잠깐 머물고 없어져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Eva Hesse (1936-1970) Vinculum II 1969
미니멀리즘은 차디찬 공업적인 생산을 통해 작가와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Post Minimalism 에 여성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작가의 biography 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작품이 가능한가를 반문한다. 작품 안에 elite 의 모습을 담지 않고 인생의 힘든 점이 작가의 숨결을 통해 반영되는 것이 왜 부정적인가를 질문한다. 여성 이야기가 자연스레 작품에 들어가 Feminism 과 Post Minimalism 이 함께 맞물린다.
Eva Hesse, Untitled or Not Yet 1966
Eva Hesse, Contingent 1969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작업의 모양이 바뀐다.
Jackie Winsor, Bound Grid, 1971-72
Grid 는 미니멀리즘에 중요하며 아그네스 마틴이 모눈종이 그림을 그렸는데 재키윈저는 자연적 재료인 나무가지, 노끈을 가지고 grid 설치 작업을 한다.
Earth Art
Ana Mendieta, Silueta Works in Mexico 1973-78
쿠바 출신의 아나 멘디에타는 13살에 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하고 부모는 쿠바에서 총살을 당한다. 어쩔 수 없이 도망가야 하는 사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고향에 돌아가도 자신이 존재했던 흔적도 없다. 바닷가에서 누워 흔적 남기기를 하지만 다음 순간에 사라진다. 흔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데 고향에 가도 아나 멘디에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멘디에타의 작품은 nomadic life 의 다른 일면을 말하며, 동시에 야외에서 행한 대지예술이다. 작품의 흔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남아있고 고가의 copy right 이 있다.
Walter de Maria, Lightening Field 1970-1977
대지예술의 규모가 커지고 chance 의 범위가 넓어진다. 작가는 pole 만 심었을 뿐 작가의 손을 떠나 작품이 자신의 인생을 산다. 직접 가서 봐도 천둥이 안 치면 옥수수가 자란 허허벌판 사이로 pole 만 보일 뿐이다.
Robert Smithson, Spiral Jetty 1969-1970
2009년에 정유회사의 시추 작업에 Spiral Jetty 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졌다. 사람들이 서명 운동을 하였지만 기름회사의 작업은 계속 되었다. 작가가 아이디어를 내서 만든 대지예술이지만 작품의 life 는 작가의 손을 떠난다.
Michael Heizer, Double Negative 1969-70
Dennis Oppenheim, Cancelled Crop 1969
대지를 빌려서 옥수수를 심고 트랙터를 끌고 나가서 cancel 한다. Earth Art 는 박물관 밖으로 나가므로 사고 팔 수가 없고 책임지는 권리는 Dia Beacon 박물관이 가지고 있다. 디아 비콘은 미니멀리즘, 포스트 미니멀리즘, 대지예술을 하는 거의 모든 작가들을 스폰서 한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대규모 project 이므로 다국적 기업이 후원하기도 한다. Technology 에 관심이 있는 video artist 에게 Sony 가 새로 나온 TV 100대를 아낌없이 후원하고 Whitney Museum 이나 Guggenheim Museum 에서 전시 할 때 타이틀 밑에 Sony, Samsung 의 이름이 들어간다. 대지예술의 시작할 때의 의도는 돈을 벗어나려 했지만 항상 반대 급부의 무언가가 있다. 예술작품은 자본에 의해 catch 가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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